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면
그 방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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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시나무 / 김정란
‘난 은사시나무를 본 적이 없어’
어느 날 거실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난 은사시나무를 아는 것 같애’
나는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낮게 말했다
“은사시나무”
갑자기 거실 한복판이 쫙 갈라지고
은사시나무가 솟아나왔다
난 은사시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은사시나무가 은종을 마구 흔들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은사시나무가 내 몸뚱이를 들어올려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았다
은사시나무가 내 자궁에 손을 쑥 집어넣고 당신을 끄집어냈다
은사시나무가 당신을 맞은편 가지에 매달았다 난 당신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물이 내 영혼을 다 녹여낼 때까지
그리곤 보았지 당신과 나 눈길 만나는 곳에서
눈물의 길을 타고 나-당신, 당신-나가 하나씩 태어나는 것
은사시나무가 나를 동쪽으로 당신을 서쪽으로
나-당신을 부쪽으로 당신-나를 남쪽으로 집어던지는 것
우리 거실 네 귀퉁이에 그렇게 우리 네 사람 살고 있지
은사시나무 가운데 두고 거실은 매일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네
은종은 전생까지 후생까지 오며가며 울리네
‘난 은사시나무야’
난 살며 생각하네 고요한 말이 내 마음 가득히 가득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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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살 먹은 마녀와 나 / 김정란
무엇이든지 있는 없음에 대해서
지독히 시끄러운, 쿠당당대는 정적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
언제나 입을 쫑끗거리는 어떤
쭈그렁바가지 할망구에 대해서
나는 아주 뾰족한 오백살 먹은 마녀이다
그녀는 자기를 뜯어먹으며 다시 태어난다
나는 문턱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말한다:
나는 꽃이야, 나는 똥이야, 운운......
나는 그녀의 말없음표에 편승한다
(물론, 그 사이에 살살 살면서)
나는 그녀의 혓바닥을 물어뜯고
그리고 잡아늘린다 세월아 네월아
그것은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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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죽음
속살이 차올라요 피 철철 빠져나가고 상처 벌어졌던 자리에서 오
늘은 아침 내내 은종이 울었어요 은종이 창창창 울리면서 이상하지
요 그게 어떤 다른 살을 불러와 휘휘 뿌려댔어요 굉장히 차가운데
따뜻하고 그런 향내나는 이상한 없는 있는 바닷가 솔바람 냄새나는
눈 같은 몸 말예요 없는 몸도 있는 몸인 걸 어느새 난 알게 되었거
든요 내가 팔 벌려 그 몸 껴안아요
바다 멀리에선 죽은 사람들이 돌아와요 그들의 썩은 살이 너덜너
덜 깃발처럼 흔들려요 갈매기들도 고개를 돌려요 그럼요 그건 사람
의 일이잖아요
난 내 상처 구멍이 넓어지는 말 구멍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는 말
구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구멍을 확성기로 쓴답니
다 여어 여기예요 그래요 나도 많이 아팠어요 삶을 있는 대로 미련
하게 다 쓰느라구요 여어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있어요
난 썩은 살들을 껴안고 입맞추며 안녕 하고 인사한답니다 왜냐하
면 난 산 채로 썩는 게 어떤 건지 알거든요 난 죽은 사람들에게 말
해요 오늘은 은종소리가 들렸어요 라고요 우리 이젠 아프지 말아요
라고도요 우린 사랑하잖아요 라고도요 우린 죽음을 거쳐서 죽음을
건너서 죽음 바깥에서 얼마든지 오고 가잖아요 라고도요
나는 또 말했지요 나 하나의 생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다만 정
성으로 한 생 살 뿐이에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다시 오는 생을 위해
서 내 썩는 살까지 다 쓰는 거지요 그래서 내 생을 환한 신작로로
만드는 거지요 수천 명부의 귀신들 조금씩 진화하며 조금씩 미망을
걷어내며 자유로이 들락거리는 우주의 길목으로 말예요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데요 들어봐요! 귀신들이 고요고요 속살대며
내 방안에 가득 들어차는 소리 사이사이 은종 창창창 맑은 눈물 소
리내며 울리고, 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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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 김정란
아마
몇 생쯤 전이었다
내가 저 잎사귀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던 것이?
눈이 아파
가슴도
피부도
땀구멍도
내장 속의 돌기까지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가만히 몸 뒤챌 때
난 알아
(난 기억한다고 말하지 않아)
나도 언젠가
그렇게 당신을 만졌었어
바람 같은 당신
아직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후두둑 소금 떨어지네
내 몸 당신 몸에 닿았을 때
그때 세계의 바다 밑에서
죽은 모든 여자들 모여
소금 만들어내던 소리
지금 그 소리 듣고 있네
그 소금 살에 묻히고
살아야 할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가네
찬찬히 세계의 / 나의 시간 섞어 짜며
그래서 저 잎사귀 / 그 잎사귀 한데 붙여놓고
그리움의 거리를 몸의 체적으로 채우고
지금은 저기 있는
저 잎사귀 뒤에
당신 그림자 놓아두고
착하게 혼자 놀게 놓아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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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캠퍼스의 이쪽과 저쪽에
햇살이 떨어졌다 그들은
일어섰다 같이 있어야 해 낮이라도
밤이라도 저녁 어스름 어느 새벽에라도
밤은 언제나 느닷없이 우리의 어깨를 쳤다
진실로 어떻게 말해야 하나 꽃
오 영혼이여 어떻게 말해야 하나
눈밝은 정신이여 무엇을 말해야 하나
어느 곳을 다니다 온 봄,
갑자기 우리는 따뜻해졌었어 그해 4월
우리는 같이 있었어 밤이 와도 어느새
무섭지 않았다
누구는 쓰러졌다
스물두어 살 혹은 백 이십 살 짜리 삶
또는 꽃 또는 4월 또는 가슴의 가슴의 가슴
딴전을 피우다 이윽고 눈뜨는 뜰
네게 손이 두 개뿐이더리도 이천 개의 손을 다오
네게 가슴이 한 개 뿐이더라도 천 개의 가슴을 다오
그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싶어 그들이,
한번 가졌던 열쇠를 얻어가지고 싶어
천 개의 가슴을 단번에 열던 그 열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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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외출
바다
해가 졌다
저녁내 흔들리는 모랫벌
대낮은 편안한, 규정된 부피를 부정하는
칼처럼 달이 뜨고
바람이 잔잔히 불기 시작한다
살이 저며지고 있다
아니, 오해 마시기를
이건 부패가 아니다,
싱싱하고 생생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살의 이별
결 따라 완벽하게 저며져 뼈를 떠나는 삶
희디흰 뼈 눈부시게 드러나고
바람과 바람의 결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던
잊혀진, 강렬한 말들이
핏줄 위에서 널을 뛰기 시작한다
잔혹한 외출
최소한의 삶으로 버티던 여자 하나, 모랫벌을 달려가
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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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말-세기말, 적극적인 죽음 / 김정란
떡장수하는 엄마는 장에서 떡을 다 팔고 언덕 하나를 넘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그녀는 치마폭에서 팔다 남은 떡 하나를 꺼내어 주었다 호랑이가 떡을 꿀꺽 삼켰다 남은 떡은 열두 개 호랑이가 열두 번 나타나서 열두 개의 떡을 다 먹어 버렸으므로 열세 번 째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엄마는 남아 있는 떡이 없어서 팔 한 짝을 떼어 주었다 냠냠 떡장수 아줌마는 팔도 맛있네 호랑이가 맛있게 먹었다 호랑이는 자꾸만 나타나서 떡장수 아줌마의 척추까지 오드득오드득 씹어먹었다 그믐달이 기우뚱기우뚱하더니 어두움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세계여 나를 먹고 싶니 먹어라 뭐 까짓꺼 또 태어나면 되지 뭐
나는 머리 뚜껑을 열어준다 맛있을 거야 열심히 살았거든
나는 이제 쓸쓸해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서 천 개의 태양과 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걸 나는 단 하나 사랑의 끈만 잡고 놓지 않는다 세계여 난 너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 이 사랑에 지치지 말게 하라
나는 사랑 하나에 기대어 이 적막한 생을 건넌다 오 힘센 그대들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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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지진 이후
들끓던
바다의 용암이 손톱을 밀어넣고 있다
여자 하나 파도 위로 나르며
긴 장삼 끝으로 탁탁
아직도 으르렁대는 파도를 가볍게 때린다
이제 그만
그만 힘을 숨겨
지진이 지나갔다
이제 뭘 할 것인가
여자는 바닷가에 내려앉는다
餘塵이 남은 갯벌 위에서
물고기 몇 마리 뒤채고 있다
깊고 먼 바다 뒤집어지며
밀려온 장님 물고기들
여자는 큰 어항을 들고 다가간다
곧 세계의 어부들이 다가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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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네 망설임이 먼 강물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바람 불고 석양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가는 투명한 오렌지빛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슬프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서서 만져보는 네 쓸쓸한 뒷모습도
밤새
네 방 창가에 내 방 창가에
내리는, 내리는, 차갑고 투명한 비도
내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한번, 내 이름으로,
너는 늘 그렇게 내게 있다
세계의 끝에서 서성이는
아득히 미처 다 마치지 못한 말로
네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쓴다, 내 가슴 빈터에
세계가 기웃, 들여다보고 제 갈 길로 가는
작은, 후미진 구석
그곳에서 기다림을 완성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네 망설임을, 침묵을, 거기에 심는다,
한번 더, 네 이름으로,
언제든 온전히 말을 거두리라
너의 이름으로, 네가 된 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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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아담,
떨며 부르는 이름.
마음속 이렇게 태어나는
산, 강,
............ 그 건너 죽음까지도.
아담, 돌아눕는 당신의
흔들리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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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카.토. 내 영혼 - 연금술사의 화덕
너는 네 개의 벽 안에 있다
일단 너는 그 갇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기쁘게
(상승을 위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더욱더 어두운
동굴을 택한다)
나는 특히 네 눈을 본다
거기에 갇혀 있는 불이
사물의 핵에 이르기 위해
밤낮없이 타고 있다
네게는 모든것이 영혼이다
너는 영혼인 물질을 네 플라스코에 넣고
불을 붙인다, 천천히, 아무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태어나게 하기 위해선
아주 보드라운 게으른 불이 필요하다
이윽고 모든것이 벽을 부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할 때 너는 참을성있게
그것들이 질서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생성이 혼돈의 젖을 다 빨아먹을 때까지
불 앞의 불이여
화덕 앞의 화덕이여
나는 네가 네 개의 벽을 짚고 일어서는 것을 본다
아주 큰 금이 네 안에서
번쩍이고 있지 그것은
질료인 너의 영혼을
화덕인 너의 몸을
그리고 과정인 너의 시간을
한데 뭉뚱그려 가지고 있어
핵의 비밀에 이른 자는 금처럼 번쩍이지
그대가 스스로 불을 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알지 네 삶이
질료에 대한 확신인 것을 너 자신이
이미 소용돌이치는 생성의 자질이며 열쇠라는 걸
우주의 바람이 씽씽 자유를 구가하며
벽 안에 붙잡힌 우리 머리 위로 불어간다
내 자유를 봐라, 이 무력한 혼들아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벽 안에
얌전히 가두어둘 수 있을까?
이미 무한을 맛본 건방진 영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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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습격 / 김정란
오르페, 그대인가요?
이 목소리, 내 귀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몇 겁 시간들의 커튼을 흔들며, 말드을 넘어서
말들 밖의 말로 나를 부르는?
그러나 다장에 내 영혼 속으로 쳐들어와
모든 사물들의 뿌리를 뒤흔드는?
오 내 삶이 다름으로 겹쳐져요
아라베스크 무늬 몇개, 뼈가 비추어보이는
내 지워지는 살 위에 드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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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온 빗방울 / 김정란
비가 오네, 멀리 카밀고원, 몰라, 어디든, 네팔, 또는,
중세기의 어느 수도원, 아침잠에서 깨어난 눈휘둥그래한 테레사,
또는 낮은 언덕, 바람마다 가슴에 담고 팔랑이며
나물캐러 돌아다니던 순이,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 어디에든
있는, 있던, 있을, 있을지도 모르는……… 그렇게 조용히
내 등뒤에서 지워질 듯 웃고 있는, 돌아보면 벌써 안녕,
하고, 손짓하고 가버리는, 언제나 뒷모습만 보이는……
너무 늦었어, 빗방울 내 가슴에 하나 툭 떨어지네,
그 늦게 온 빗방울 언제까지나 한없이 느릿느릿 스며들어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내 숨결을
훔쳐내가네, 나는 안개처럼 흐릿하게,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다만 흔들리며 막막히………………… 있네
이 낯설고 어색한,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러나 어쨌든 내가
살고 있는, 견디어내는, 언제나 덧나는 상처같은, 이, 너무
늦은 삶을 무어라 불러야할지 알지도 못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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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은 사람 / 김정란
-영원한 유예. 나는 기다림에 처형되어 있다. 그러나 <기다리는 나>는 <나>보다 언제나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당신 생각을 해요
오지 않은 사람(아직은)
나는 흔들리고 열려요
왜냐하면
나는 아주 깊이 깨달았거든요
<내>가 감옥이라는 걸
기억나요, 그때, 어떤 천사가
라일락 향기로 내 몸을
정성스레 문대었던 걸
그후론 아무도 없어요 다만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텅빈
내 존재를 죽음의 신비 쪽으로
한없이 날아오르게 하는
오 모호한 전부의
부드러운 부드러운 입맞춤만이
(그리고...그것...사물들 지워진 자리에...가만히...남아있는...나...나라는 소질...존재의 분위기...존재에 대한 겸손한 열망...)
한때 나는 갈망으로
미칠 것 같았어요 지금
나는 세계 안에서 벌써 세계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요 당신(결국 나를 포함한)을
기다리는 내 고요한 열림이
내 갈망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향기로 바꾸어요
당신 생각을 해요
오지 않는 사람(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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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몇 편의 사랑노래
- 3. 저녁 식사 뒤의 담배 / 김정란
목이 긴 네가 담배를 피웠다.
막막하게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네가 말했다, 허공이, 윙윙 울렸다.
"내가 뭘 보고 있지, 응?"
눈속으로 구름이 흘러갔다.
네 목덜미에도 구름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죽음을 보고 있어."
모든 것이 갑자기 멀어진다.
죽음만이 만물 위에 내려앉는다.
자유로운 것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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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그대는 내 새벽 안개.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건 늘 당신입니다.
오래 방황했습니다. 육체는 피곤하고 혀로는 죄를 저지르고 그리고 일상의 수치는 끝나지 않습니다.
숲이 떠나가네요.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언제나 눈을 뜨고 날아갑니다. 그들을 위해서 세계의 끝에서 종이 울립니다. 내 사랑 당신도 사뭇 따뜻한 삶의 터를 버리고 날아갑니다. 그대, 언제나 단 한번만 있는 새벽 안개 속으로. 그 끝에 神이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홀로 떠오르는 자들에게 손을 주십니다. 결국,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결국, 홀로 완벽하게 있기 위해서 우린 사랑했던 것일까요. 결국, 순결한 이별을 위해서 우린 그토록 따뜻한 추억들을 만들었던 걸까요. 결국, 아름답게 잃어버리기 위해서만?
그 쓸쓸함 속에서 나는 그대의 어깨 너머 떠나가는 숲을 배웁니다. 그대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깊은 숲을 향해 떠나는 내가 됩니다. 당신은 새벽 안개에 씻긴 내 그림자, 내 맑은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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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말
-기도, <사이>에서 도약하거나 무너지거나
나는 피하지 않아요, 그것이 무엇이든,
고통이든, 갈비뼈까지 다 드러나는 시려움이든,
실핏줄 뿌리까지 잡아당겨지는 외로움이든,
때로는 살아 있다는 실감에 실려
목메게 달려드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가만히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미는 애닯음이든,
내게 천 개의 에어지는 가슴들이
있는 걸 알아요, 그걸로 내가 세상에
몸 부벼요
그래요, 천 번 무너질 각오를 하고요
다만, 지켜보아 주셔요,
언젠가 내가 기어이 이 고통스러운
감추임의 땅에서 절절하고 아름답게
내 기다림을 완성하는 것을
사물의 사이와 사이에서 넘어지며, 일어나며
이 긴장과 가슴앓이를 차마 다 살아내요
마련도 없이, 다만 당신을 향해 서서,
둥둥 세계를 등에 업고 잠재우면서......
다만, 당신이 거기 계시기만 하면,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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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하여
어느 날부터인지 몰라요 내가
이토록 희게 탈색되기 시작한 것이
삶의 모든 줄거리가 빠져나가고
내가 망연히 흔들려요
가만히 그 흔들림의 끝을
바라보면 저녁 노을처럼 문득 드리워지는
눈물 한 방울 보이네요 불안하게 흔들리며
망설이며 글썽이는 금색의 작은 방울
내가 그걸 정성스레 들여다보아요
거기 천사들의 희미한 날개
힘 없이 파드득대고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내가 고개를 숙여요 파르스름한
거의 없는 하지만 너무나 생생한
상처 한 줄기 천사들에게 동의하는
내 존재의 균열 내 가슴 정적 속에서
가만히 눈을 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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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깨 -시(詩)의 장소
당신의 어깨는 좁은 뜨락이다.
꽃이 피어 있다.
누구의 입깁으로 여기에 남은 흔적
이토록 현란하게 흔들리다가
붉은 백 겹의 혓바닥으로 꽃피어난 걸까.
꽃은 또한 발자국이다.
우리가 큰 소리로 아, '확인'이라 외치며
남기는 발자국,
우리는 떠나도 뒤에 남아 홀로 피어나듯.
춤추는 발자국의 길,
당신은 언제나 아프다.
언제나 두고 와 돌아보는 어제처럼
당신의 완결(完結)된 어깨의 길,
어쩌면 쓸쓸하게 하늘에 닿아 있을까.
당신의 어깨 너머엔
날아가는 커다란 눈, 참 여러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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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가을이 왔다
핏줄,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핏줄, 이라고, 가을이
내 핏줄 곁에 와서 가만히 눕는다고
그러면 내 존재가 다
다
흩어진다고, 맑은....... 하늘이.....
저...... 너머로.....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알아들었던 근원적인 떨림이
내 안에서, 가을에, 참을 수 없이, 회복한다고
핏줄, 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핏줄, 이라고, 가을이
내 핏줄 곁에 와서 가만히 눕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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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 / 김정란
우리는 모든 것의 등뒤로 돌아선다
시대가 우리에게 잘 맞지 않는
의복처럼 우리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안녕 누더기여 안녕
'건강하게'
정신이 외친다 '건강하게'
원칙이여 '건강하게'
깜깜하다 바람 소리
우리는 숨어서 키웠다 언젠가는
함께 있고 싶었다 어떤 날 미친 듯이
축제를 벌이고 싶었다 순진한 魂들,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귀여 문을 열어라 遍在하시는 귀여 문을 열어라
열려라 콩 참깨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요정처럼 자유로웠다
上限과 下限까지 하루에
골백번 드나드는 요정 우리는 모든 것들
뒤에서 또 새로이 또 하나의
등이 되었다 흐느끼며
우리는 효율을 건져내려고
많이 삐걱거렸다 저마다 혼자만큼씩
각각, 구체적으로, 삶의 사건과,
만났다, 할 수 없이, 지치며,
우리의 깜깜한 배경위로
파랗게 불꽃이 지나간다
손톱이 자라고 시대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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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씨의 수련 / 김정란
나는 언제나 물가에 있다
영혼은 친수성(親水性)이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우선 가늘게 눈을 뜨는 것부터
최초의 순수한 시선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
그 다음엔
투명한 베일처럼 펼쳐지는 신비와
영혼이라고 불리는 감미로운 안개
모든 연금술사들의 애무하는
탐미적인 쾌락의 붓같은 시선을
사물에 단 한번 멋지게 도달하기 위해
존재의 모든 골목길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그들의 사팔뜨기 영혼을 부를 것
그리하여 이윽고
청명한 대낮을 향해 일어서는
물의 無限으로 다가갈 것
모든 것이기도 하고 전혀 부재이기도 한 물
수련은
오랜 시선의 애무를 받은 물 속에서
어느 새벽 홀로 활짝 피어난다
난 수련이 벽이기라도 한듯
기대고 싶어 그 작은 꽃의 고적함과
미세함에 그 위태한 연약함에 기대고 싶어
언제든 이윽고 물밑으로
가라앉고 싶어
깜깜한, 아주 보드라운
회귀의 물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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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면
내 가슴 속엔
어떤 비규정성의
경사가 있어
그건 지독히 강력하게
자기 원칙을 주장하지
날이면 날마다 자기 논리 안에서 강화되기만 하는
어느 날 뒤돌아보니
이미 늦은 거야
돌아갈 길이 지워졌어
뿌윰한 천사들 하나, 둘, 셋……
하냥 부드럽게 그 위태위태한
물질과 비물질
이것과 저것 사이의
흔들리는 경계
비스듬한 모래 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혹, 불안한……
그 기대지지 않는 희박한 언덕을
나는 천년 전부터인 듯이 바라보지
우울……또는……
기이하고 막막한 슬픔
그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하염없이 오기만 오기만 해
나는 가만히 내 살을 들추어봐
거기 차곡차곡 쟁여진 기다림,
자기 원칙 안에서 완결된, 그것으로 충분한,
기다림, 화안한……
~~~~~~~~~~~~~~~~~~~~~~~~~~
비
요즈음 내리는 비는 심상치 않다
우리 일상의 껍질이 뻔뻔하고 질길수록
그대는 부드럽고 약하다
그 부드러운 설득력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대는 요즈음 심상치 않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망종인
이 시대를 던져놓고, 에라,
관습이 된 安逸에 머리를 박고
더욱더 막강한 망종이 될 때
그대는 아무래도 가라앉지 않는
걱정스러움으로 우리의 살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심상하지 않은 심상함의 딸인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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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 기다렸던 봄, 또 봄은 가고
개나리 꽃 혼자 피고
개나리 잎 혼자 피고
햇빛은 혼자 쏟아져내린다
난 쓸쓸한가?
별로
난 행복한가?
별로
아무렇지도 않지?
올해도 혼자 핀 개나리 꽃처럼
올해도 혼자 핀 개나리 잎처럼
아무렇지도 않지
난 손금을 개나리에게 다 주어 버린다
난 손금을 땅바닥에 다 내려놓는다
누군가 와서 그 손금 주워가겠지
민틋한 손바닥에 얼굴 감싸고
조금 운다
조금
내 손바닥에서 개나리 꽃 진다
내 손바닥에서 개나리 잎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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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위태로운 삶, 순수 또는 위기의 맛 / 김정란
부서진 몇 개의 빛의 파편 날아오른다
나비 은빛 날개가루 아주 얇은 금속판
파르르 떤다 ― 오 신성한 적의
챙! 세계가 깨어진다
어떤 순간들의 전격적인
도래가 명령하는 절대의
흔들림 ― 핏줄이, 살의 뿌리가 모두 드러난다
가슴속에 아주 시고 아주 차가운
얼음조각 몇 개 내 일상의 따스함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내가 너덜너덜 해어진 내 살의 처소를
들여다본다 거진 깨어진 유리그릇
― 벌써 '거기'가 된 장소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옛것인, 그림자
내가 가슴에서 쇳조각을 몇 개
끄집어낸다 날카로운 위기의 결,
종소리 댕댕 울리고
차고 희고 투명한 갈증, 낯선, 무서운,
윙윙 내 핏줄들이 햇빛에
공명하기 시작한다 도처의
매순간의 너무나 완벽한 죽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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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바다
난 내가 혼자 건너가야 할 이 생의 바다를 그렇게 불러요
슬픔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라고
이젠 알아요 왜 당신이 그토록 내 눈앞에
완강히 옆 모습으로만 나타났던지
그것이 운명이 내게 던진 도전의 기호라는 걸
한 때는 당신이랑 같이 그 바다를 건너가고 싶었어 정말로 간절히
이승에서 그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듯이 그렇게
이젠 알아요 내가 이 바다를 혼자 다 건너야 저 건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듯이 당신을 만나리라는 걸
내가 나의 당신을 여의어야 그의 당신을 얻는다는 걸
거기 그의 땅에 한 송이 꽃이 아니라 천만 송이로 피어있는 당신을
내가 나로 가지리라는 걸 이 생에서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린 뒤에
이 슬픔의 바다를 다 건넌 뒤에 그 때에 내가 진실로
사랑을 알게 되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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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의 산꼭대기 / 김정란
난 스물 네 살에
산꼭대기로 올라가기로 결정했어
웬만큼 살았으니까
이젠 뭘 좀 알아야 하잖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몸을 돌려보았어
내가 지나온 계곡 물이 환히 보였어
나는 깃발을 들었어
바람이 불어왔거든
신호가 필요했어
바람에게 내가 거기 왔다는 걸
알려야 하잖아
계곡에선 듣건대 대개 엇비슷한 얘기들뿐이었어
그런데 왜들 그렇게 갈팡질팡 법석인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난 요정처럼 팔랑팔랑 뛰었어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라왔어
바람에게 물어보면 가르쳐줄지도 모르잖아
밤새 그곳에 있었어 깃발을 들고
밤이 내리고
어둠이 숲 위에 긴 망토를 덮었어
달이 떠오르자 숲이 바르르 떨었어
그러자 숲속에서 만물이 천천히 걸어나왔어
귀신들이 哭을 하고 어디선지 음울한 방울소리도
들려왔어 윙윙 바람이 상형문자로 불었어
몸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었어
신성한 소름이 내 몸을 유선형으로 만들었어
밤속으로 내 날렵한 몸이 튕겨나갔어
하지만 그뿐, 난 다시 땅바닥에 던져졌어
바람 소리 귓가에 윙윙대고
지금은 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
무서워서 너무나 무서워서 내 몸은 떨고 있어
하지만 알고 싶어
바람의 말을 언젠가 배우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어
그럼 계곡에 가서 사람들이랑 살아야지
오래 오래
주름살마다 바람의 말 참하게 새겨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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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의 바다 / 김정란
너는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숨을 죽였다. 잠들어 바람의 나라에 이른 너.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너의 혼, 손 한번 내밀면 만져질 듯 흔들리고 있는. 네 얼굴에 바다가 차올랐다. 스물 네 살의 바다.
바다는 굉장히 힘이 세었다. 나는 사방에 대고 절을 하고 싶었었다.
비, 땅위로 내리는 비. 넋놓고 한데로 나앉았던 젊음.
스물네 살이야. 죽고 싶어.
이제 막 스물 넷이야. 죽고 싶어.
바다가 네 얼굴 위를 흘러갔다. 달빛. 별빛. 스물네 살.
바람이 불었다, 휘익, 그리고 한꺼번에 달겨들던 죽음. 아름다워라. 나는 자꾸만 절을 하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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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詩法 / 김정란
나는 구체성의 원수이다.
나는 구체성을 향하여 돌진한다.
죽어라.
나는 아무렇게나 말한다. 요컨대, 나는 자주 잘 말한다.
사실은 아주 말 잘하고 싶을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말한다.
나는 시니피앙을 들이대며 악악댄다.
(요컨대 나는 들키기 싫은 것이다.)
숨겨진 옷자락 가늘게 흔들리는…내가 숨죽여 이토록
사랑하는…보여줄 수 없는…세상은 거칠어…작은 아니마.
나의 예쁜 병균. 나는 그것과 더불어 꽁꽁
자폐의 형식을 음모한다. 모반.
알지…세상에선 딱딱한 형식만이 득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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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이따금 가로등불 밑에 그림자들 두엇 지나간다
작은 속삭임 나지막이
어떤 갑작스러운 몸짓이 허공에 솟아오른다
느닷없이, 단속적으로,
그 몸짓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관하다
그것은 홀로 우주를 소환한다
몸짓 사이, 금속성의 눈빛, 잠깐 번쩍인다
독립적인,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 통합되는,
다치게 하지 않는, 어떤 사나운 아름다움
그리곤 다시 고요
난 당신을 기다린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곤 기다린다
난 이제 距離가, 어긋남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낮은 낮은 비명소리도
내 생은 고비를 넘겼다
距離 위로 천사들이 옷자락을 쓸며 지나간다
내가 울었던가? 아마 천년쯤 전에
천사들이 내 눈물을 가져갔다
기다림 안에서 내가 한없이 자유로워지도록
난 가만히 있다 다만 가만히 있다
때로 시간의 힘줄이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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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으로서의 존재 / 김정란
-어두움의 기록 1
나는 어떤 어두움에 얻어맞은 것인가.
어떤 결핍에 의하여
내 실존은, 본질에 대해,
이토록 민감하게, 거의, 물리적으로
感을 잡으면서도,
어떤 형식의 不在에 의하여
이토록 그것으로부터 늘
이반되는가, 대체,
세계의 밝음, 세목의 즐거움에서
놓치지 않고 그림자, 결핍의 예감을
감지하는 이-존재의 뻐그러짐.
나는 머리를 쳐든다, 알 수 없다
이 절망의 뿌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이 지독한 갈증, 그것의
성실성이 얼마나 끝간 데를
모르는가를.
나는 세목의 확인에서 빛의 예감에까지
철저히 움직인다. 일단은,
그 수밖에 없다. 얻어맞은 자아여
치유 너의 아이덴티티를
꿈꾸며. 눈을 뜬 채. 세계의
세목으로부터 절대로
눈돌리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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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노래
딩동 날아올라요
딩동 돌아오지 말아요
인생은 꿈이라고 그들이 말했네
난 꿈은 인생이라고 뒤집어 말하네
당신에게 가는 세상의 길이 끊어져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네
어디로도 내 사랑 갈 곳이 없었네
깊이 또 깊이 내려갔네
아무 마련도 없었다네
다만 당신을 만나고 싶었네
세상의 먼지가 당신 얼굴을 가렸어
맨 얼굴의 당신이 보고 싶었어
그곳 내가 밤의 칼날 위를
아프게 걸어 깊이 내려간 그곳
당신은 없고 피 묻은 날개만 몇 개 만났네
내가 당신을 돌려달라고 울고 울었네
세상의 거리로 돌아와
하릴없이 헤매이네
가버린 당신의 피묻은 날개
이마에도 달고 무릎에도 달고
쓸쓸히 떠다니네
인생은 꿈이라고 그들이 말했네
난 꿈은 인생이라고 뒤집어 말하네
딩동 날아올라요
딩동 돌아오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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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눈물
<마디>에 대해 생각해요
늘 당신 돌려보내고 나는 휭휭 부는 바람을
당신 등뒤에서 손 뻗어 잡아요 아무리 삶이
이렇게 마냥 나를 스치고 지나갈 뿐
내게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아도
나는 허공 속에 집을 짓는 법을 배워요
어쨌든 이것도 방식이니까
깃들이지 않아도 <집>이니까
밤, 깊은 無의 지하실, 그토록 생생하게 나를
휘저어놓고 빛 속으로 멀쩡하게 증발해버려도
나는 새벽녘, 눈물 두어 방울을 건져요
그래요, 내가 내 존재를 다 저당잡힌 채
영혼의 깊은 계곡에서 지성으로 응시하여
얻어낸 결정체, 그것, 영역들의 어떤 <마디>,
불확실한, 다시 바람으로 흩어질, 당신의 뒷모습
내 사랑, 난 그걸 잊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이 내 집인걸요
잠깐, 내 헤매는 영혼을 잠깐 들여놓아 주는,
밤 지나고, 뜨거운, 시끄러운 낮이 오기 전에
잠깐, 침묵의 서늘한 커튼이 흔들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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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의 가벼움
그날 갑자기 불이 켜졌다.
반짝반짝
반짝
반짝
반짝
반짝
반짝
갑자기, 그리고, 예쁘게 예쁘게
내 앞에서 앞으로 나란히를 하는 사물들
이것봐요, 그들이 말했다. 알아요? 우리가 내부의 빛으로
얼마나 우리만큼 환하게 빛날 수 있는지?
그애들이 다가왔다 아줌마 엄마 언니 형
누나 선생님 얘 오빠 할아버지 여보 할멈하고
그애들이 내 옆에서 반짝이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때로 세상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순진한
웃음으로 가득차 있는지,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방울소리 또는 소리의 빛
웃음 또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폭발!
견딜 수 있어
나는 나지막하게 흔들리며
말했다 휘익 무턱대고
언제나처럼 쳐들어오는 절망의 예감에게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견딜 수 있어 정말이야
나는 가벼움에 실려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내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으로
승부를 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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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비행기 접기
밤새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내가 언어를, 행위의 꼬랑지도 아무것도 아닌 이 난감한
문화사의 세련된 망종을
삶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징그러웠다
아침의 소질도 보이지 않는 이런 밤에
우리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런 밤에
우리가 교묘하게 적에게 먹히운
밤에
나는 이를 북북 갈며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유선형의 발랄한 몸으로 날기 위해서
온갖 역사적인 억압을
부모 형제 내 유전인자 내 권속이라고 부르며
솟아오르기 위해
다른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이렇게 초월의 포즈 취하기로 우리가 늙어가도 좋은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하나
누구에게? 어느 벽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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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교외 / 김정란
ㅡ들떠 있는 말들
때로 막막함이
의미 있는 儀式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천천히 깨달아가지
나는, 그래, 도시의 거리에서
배척당하지, 나는 느릿느릿
도태중이라네, 그 멈칫거리는 에너지
불규칙하게, 내 영혼을
뒤집어놓지, 나는 도시의 거리에서
나지막이 날아오르지, 막막함
내 혀는 더듬거리지, 이곳에서
내 말들은 숨을 쉬지 못해
그래, 막막히 떠밀려, 교외의 어느 언덕에선가
윙윙거리는 귀신들, 금빛 마지막 햇살에
넋이 나간, 딱한, 흔들리는, 저,
제 정해진 자리에서, 한없이 성실하게
바람의 매혹에 대답하는, 들뜬, 막막한 말들,
나는 갈대들 곁으로 다가가지
나는 그것들에게 내 살점, 머리카락으로
몸 부빈다네, 살아 있는 동안에
병든 것들 사랑하는 일 말고는
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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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네 망설임이 먼 강물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바람 불고 석양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가는 투명한 오렌지빛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슬프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서서 만져보는 네 쓸쓸한 뒷모습도
밤새
네 방 창가에 내 방 창가에
내리는, 내리는, 차갑고 투명한 비도
내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한번, 내 이름으로,
너는 늘 그렇게 내게 있다
세계의 끝에서 서성이는
아득히 미처 다 마치지 못한 말로
네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쓴다, 내 가슴 빈터에
세계가 기웃, 들여다보고 제 갈 길로 가는
작은, 후미진 구석
그곳에서 기다림을 완성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네 망설임을, 침묵을, 거기에 심는다,
한번 더, 네 이름으로,
언제든 온전히 말을 거두리라
너의 이름으로, 네가 된 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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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빈 유리병
바닥에 떨어진 불수의(不隨意)의 공허
또는 갈망
감이 잡히지 않는
생명의 뒤에 숨어있는
기질 기질
성(聖) 기질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완전히 비어버리기를 바랬다
하느님, 떨면서 하느님,
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길 위에 서있는
작은 꽃잎사귀가 되고 싶었다
아주 조그만 깨어있는 꽃의 잎사귀 한개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마음속에 은가루처럼 떨어지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다
내 몸의 섬모를 다 흔들어 나를 비우고
그 말로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린
귀먹은 유리병 고통스러워하는 유리병인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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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기다리는 얼굴들에게
무엇을 줄까
작은 모래알의 사막
한 평
그리고 하늘 전부
하늘 끝에서는 언제나
우리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바람이
소리내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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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나무들
길, 지상의 길 위에서 나무들이 숨을 죽인다. 그들은 영혼의 마른 이야기로 버석대며 우리 영혼의 고향, 메마른 고향의 상형문자들을 얘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들 행복해라. 그들의 가난한 생존에 제 피를 뽑아주는 자들 당당해라.
프랑시스 잠의 저녁. 프랑시스 잠의 가로수길. 어디서든지 평안할 수 있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자들. 내가 우주가 되리라고 내가 너희를 맑게 하는 우주가 되리라고 깊이 고개숙이는 자들의 평안하고, 평안한 석양.
길 위의 나무, 나무, 서서 있는 자들. 서서 얼어붙은 손으로 팔을 벌리고 기도의 애원으로 잎을 피우며 가끔 참을 수 없는 몸짓으로 상형문자의 꿈을 말하는 자들, 샨티 샨티. 보석처럼 숨어있는 자들의 수줍은 기다림을 말하다가, 기다리다가, 나무는 얼어붙은 생존의 습관, 생존의 방향으로 기울기만 할 뿐, 나무가 피우는 잎사귀들, 그 반짝임이 나무의 것이 아닌 때가 되면, 그 공허한 생존의, 줄기...... 그 줄기에서 독립하는 나무의 푸름, 잎새, 생명......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당당하다. 거기에 하나의 화면을 만들고 모든 순간을 메마른 삽화로 오려낼 것. "여기와 저기에 있음"으로 너희 무한의 삽화는 계속되어 슬픈 이야기, 이야기의 실을 타고 팔락팔락 쓰러지리라.
나는 듣는다. 쓰러진 너희가 눈감는 소리, 아, 가슴저미는 順命, 예쁜 노예들. 슬픔이 이마에 별처럼 반짝인다. 나는 너희들 곁에 천천히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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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나는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 날개와 매이 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순간의 예민한 망성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
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 내장
깊은 곳까지 박힌 칼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
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
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
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오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가.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오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
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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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비, 하염없이
여자아이 하나가
하염없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바람은 연갈초록빛
깊이 넓게 흔들리는 별 냄새
간밤에 이슬비가 내렸다, 고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타박타박 우주까지 걸어가는
숨죽인 발자국소리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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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달빛
오, 달빛
뼛속 깊은 곳에
슬픔의 강물이 흐르네
천 년 전 나를 향해 떠난
네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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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향기, 내 몸은 갈갈이 찢어지고
밤. 사방이 희게 사위었어. 라일락 향기.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그 냄새가 너무나 천상적이었거든.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그 향기에게 대고 말했어. 단호하게. 그래, 죽고 싶어, 날 죽여. 향기의 칼날이 당장 내 내장을 후벼 팠어. 순식간에. 나는 가장 비참하게 그래서 가장 소름끼치게 아름답게 갈갈이 찢어져 날라갔어. 사방으로 내 피가 내 살점이 튀는 걸 봤니? 시원했어. 그래, 화아했어, 갑자기. 천 년의 이쪽과 저쪽에서 모든 숨겨진 말들이 쏟아져들어왔어. 됐다! 박수소리! 내 존재의 밤이 갑자기 미친듯이 시끄러워졌어. 하지만 죽음처럼 고요하기도 했어. 쉿, 가만! 들어 봐. 시간의 끄트머리가 들추어지네.
날개소리, 파다다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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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를테면,
미묘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이>에
그 일은 닥친다 가만히 내가
짐승처럼 긴장하고 존재라는
지독한 이물감 안에서
뾰족하게 매복하고 있을 때
이를테면,
강의를 하다가, 툭, 분필이 부러질 때
분필의 우연한 단면, 그 아무 필연성도 없는
단면의 우둘투둘함에 나는 갑자기 무섭게
민감해진다 그리곤 내면이 피를 뚝뚝 흘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다 아 미치겠어
왜 이럴 땐 모든것이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이는지
왜 이렇게 모든것이 천사의 날개를 퍼덕이는지
왜 이렇게 모든것이 제 자리에서 들떠 일어나
위험한 귀신의 혓바닥으로 속삭여대는지
나는 임박한 예감에 몸을 떤다
그럴 때, 강의실 문이 슬며시 열리고
지독히 차갑고 지독히 섬뜩한 그림자 하나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리곤 영락없이
분필이 또 한번, 툭, 부러진다
잠깐, 푸피피 날아오르는 분필가루 먼지
글자를 에워싸는 글자의 귀신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칠판에 쓰인 글자 앞에 서서 고즈넉히 발음해 보는 것이다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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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그녀는 창가에 서있다
읽던 책은 몇 페이지 남지 않았다
그녀는 본다
사물들 눈부셔하며
고요히 일어나
적요 속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그녀는 적요 속으로 되돌아간 사물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낮게 덧붙인다
'근원적인'이라고
그녀는 책을 가슴에 끌어 안는다
토끼 발자국 저 멀리 종종대며
흰 눈 위를 달려온다 이윽고
책장이 눈밭 끝에 이어진다 까만 토끼 발자국
재재거리며 폴싹거리는 까만 글자들
바람, 그녀의 몇 장 남지 않은 가슴을
조심스레 넘긴다 눈발을 날리며 까만 글자들
떨어진다 토끼 발자국 송송
그녀의 책-가슴으로 들어온다
지워진 글씨들 침묵의 혀로
말하기 시작한다
적요 문득 희디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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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술장식
<슬픔의 술장식>이라는 말이 오늘 아침에 문득 떠올랐다. 파르스름한, 하늘색이기도 하고, 물색이기도 한, 이, 모든 경계들을 지우는 영혼의 바탕, 고요, 무참하게 아름다운............ 자잘한 단정한 흔들림, 늘, 망설이며 그 단정한 핵을 문지르며, 배어나오는, 아주 작은 소리로, 할수 없잖아, 라고 말하는,
가장자리, 거기서 삶은 시작된다, 아니, 거기서 나는 나와 상관없이 이미 시작된 삶을 견디고 유지시킨다, 물론 조금씩 밀어 보기는 한다, 다만, 벌써 뻑뻑해지고, 규정된 것 특유의 질긴 자기 주장에 속아넘어가지 않으려고(개체는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조심조심, 그 고요한 하늘색/물색 바탕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나는 아주 조금만 산다, 그것만이 내가 알고 있는, 삶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방식이다
<슬픔의 술장식>, 나는 그걸 가끔, 흔들어 본다, 찰랑찰랑, 그리곤 가만히 배를 깔고 엎드린다, 내장 속으로, 서늘한 어떤 바람, 말들을 꽃씨처럼 흩뿌리는 말의 바람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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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향
당나귀 등 위에
내 썩은 혀
한 짐
딩동
문열어라
* 龍涎香: 몇 종류 안되는 동물성 향료의 하나. 밀향고래 창자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이 고여 썩은 뒤 만들어진 값비싼 향료. 향기 성분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그대로는 향기가 없으나 다른 향료와 작용하여 영속적인 향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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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천사
연일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 찜통 속에서도 내 사랑은 여전히 생생하며 새삼스럽고 보송보송하다. 주름살 하나 구겨지지 않고 고스란히 최초의 떨림에 머물러 있는 사랑. 나는 사뭇 놀란다. <사랑>이라는 직업. 이만하면 프로다. 보상도 없이,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열심히 내면의 천사를 바라본다. 현현하소서. 현현하소서.
그러니 더위쯤 무서울 게 없다. 내 영혼은 영하 50도의 서릿발처럼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다. 긴장. 파르스름한 인광. 언제나 매복하고 있는 복병. 오소서 오소서 하고 주문을 외는 내 혀끝을 단번에 욱 얼어붙게 만들며 닥치는 저 무시무시한 아름다움.
나는 본다, 푸르스름한 유령처럼 당신이 내 앞에 스치듯 부드럽게 와 앉는 것.
오 칼칼해라 그대, 육체 없는 현존, 없으면서도 이토록 칼칼하게 내 마음을 다 휘벼내는 없는 있음, 있는 없음, 언제부터인지 나는 결핍으로 울지 않는다, 내 그리움의 아름다움이 내 존재를 무지무지 승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세계의 벽이란 벽에 모두 뻥뻥 구멍이 뚫리고, 오 어느 다른 세계의 원형질이 슈슈숙 새어들어온다, 경계 허물어지고, 또는 왔다갔다 하고,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뒤엉키고, 나는 당신이 마구 세계의 이쪽저쪽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걸 바라본다. 아름다운 혼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살아낼 뿐이다.
나는 이제 나를 보듬지 않는다. 나는 기꺼이 나를 버린다. 세계 안에다가도 세계 바깥에다가도. 그렇게 나를 버리며 나는 사랑 안에 여전히 희박하게 가볍게 남아 있다. 세계와 다른 세계의 바람이 나를 관통하며 나를 가볍게 흔들고 지나간다.
최소한의 생존. 나는 위태롭다, 또는 자유롭다.
- 시집: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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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꿈
이따금 몸속에서 반딧불들이 날아다닌다. 몸이 깜빡빰빡 꺼진다. 요샌 낮잠을 많이 잔다. 몸 한구석이 텅 빈다. 몸이 물러난 빈 자리에서 눈길들이 느껴진다. 생의 울타리를 나지막하게 흔드는 멀리서 온 사람들. 라일락 향기가 난다. 그들이 고개를 기울이고 정성스럽게 묻는다. 아파? 아니, 안 아파. 하지만 마저 여의었으면 좋겠어. 뭘? 그리움. 그리움이 날 아프게 해. 곧 그렇게 돼. 걱정하지 마.
낮에 깜빡 잠들었다가, 꿈에 죽은 이연주를 보았다. 그녀 생전에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세계사 시집 표지에 난 사진 그대로였지만, 통통하고 밝아 보였다. 행복한 新婦 같았다. 머리에 커다란 진주 나비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녀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내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생님, 내 가슴 속에 철사로 된 빽빽한 말 다발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풀어내야 했어요. 그게 날 죽였어요.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가슴을 눌러보았다. 철사로 된 빽빽한 말 다발. 그 말이 내 몸 전체를 흔들고 지나갔다. 명치 끝이 찌르듯이 아파왔다. 언제까지...... 오, 언제까지? 눈물이 났다. 내 눈물이 조용히 저승까지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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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
-그대, 없는 언어
너는 없는 언어로 거기 있다
거기 아득히 단정한 망설임
내가 다만 바라봄으로 이 떨어져 있음을
거리를 지워 버릴 수 있을까
내 가슴에 미세한 바늘처럼 내리꽂히네
무수한, 도처의, 오지 않는, 올 수 없는 너를
향해 가만가만 흔들리며 열리는 균열들
너, 엷은, 다만, 기억일뿐인, 너,
그림자, 수천 개의, 예쁜 유령들,
스침, 사락거리는 옷자락,
-거기에 여전히 있는
내가 내 시선의 어디쯤에선가
방울방울 응결하기 시작하는 얼음들을
느끼네, 그리곤 너, 거기에 있는,
나의 낯선 자아, 너와의 거리 위에
희디흰 눈발, 침묵의 천사들
조용히 조용히 내려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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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
-어리석은 사랑
나를 내 사랑의 정당성 안에 내버려 두소서
내가 내면의 이 오만하고 무관한 영역에서
그대 오시거나 마시거나 상관없이 멋대로 목매다는
이 믿음의 황홀함에 넋놓고 있음을 허용하소서
내가 그곳에서 보나이다
아직은 내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
감추지 아니하므로 오시거나 마시거나 하는
그대 상관없이 내가 지금은 당당히 보나이다
살아서 그렇게 한없이 당신을
바라보던 죽은 자들의 눈알들
숨겨진 영혼의 갈망들 너무도 지독하여
저절로 유형의 형태로 남아 있는 꿈의 핵들
내가 그것들 사이에 내 곤한 육신을
기꺼이 눕히나이다 허용하소서
내가 당신을 부르는 대신, 그, 무참한,
이루어지지 않은, 살았던, 그들의,
생생한 사랑의 구체성에 기댐을
내가 도시의 거리를 뒤지고 돌아다니며
쓰레기통과 하수구 사이에서 넘어지며
문득 가슴에 펑펑 내리는 저 참혹히 아름다운
눈의 나라를 견디며 살아 있나이다 그런즉
아직은 마음놓고 어리석게 하소서 지금은
이 어리석은 사랑의 정당성에 실컷 취해 있게 하소서
지치지 말게 하소서 오시거나 마시거나 상관없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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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는 문득 죽음을 알아 버리지
바람,
난 문득 알아 버리지, 신비한 부서짐,
비스듬히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어딘가로, 나 알지 못하는,
곳.......... 있지만 없는......... 장소의
귀신들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가슴속엔 웬 수많은 목소리들,
속삭임, 말의 싹들, 작게 바시시
웃거나 한숨짓거나 조금 흐느끼거나
그리고, 산 너머, 오늘 유난히 짙은 석양
아래, 잔잔히 흔들리는 벌써 죽은 사람들,
투명한 귀신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두런거림
가만히 멀리 바라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마른 가랑잎처럼
바시락
부서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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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의 고독
그녀는 그 언덕에 천 년 전에 도착했다
오 까실한 언덕 늘 따가운 가시가
그 언덕의 등성이에 솟아올랐다
언덕이 울며 말했다:
엄마, 아파, 내 가시를 빼줘.
그녀는 천 년 동안 그 언덕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세계의 강들만큼 많은 흉터가 생겼다
딱지가 앉을 때쯤, 가시는 또 솟아났다
그녀는 말했다
흐르는, 머물지 않는, 언제나 출발하는 피의 순수성의 이름으로:
아니야, 난 아프지 않아, 널 안아줄테야
보이지 않는 깊고깊은 숨겨진 눈물이
늘 그녀의 눈 속에서 흔들렸다, 사랑,
어느 새 하늘을 닮은, 쓸쓸하고 무관한 사랑,
침묵의 끄트머리를 언제나 가만히 들어올리는,
우우....... 파랗게....... 저만큼....... 늘 흔들리는.......
그녀는 늘 까실한 언덕을 안고 잠든다 천 년 동안 묵묵히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아직도 천 년은 더 그렇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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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의하여 깨어나는 짐승
자작나무숲, 물안개, 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낮게, 낮게, 짐승처럼 웅크렸다
왈칵 눈물이 나고, 그 말의 쌉쌀한 맛이 혀끝에 느껴졌어
왜 그랬을까,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았어
천년과 또 다른 천년 사이에 흔들리며 끊기며 이어지는
어떤 脈, 한번도 정당한 적이 없었던 역사의 어느,
틈......... 은밀한......... 모반......... 사이로
눈부시게 빛나는 생명이라는 직접성!
그 속살에 가만히 내 아랫배가 닿은 것처럼
언제나 테두리 바깥을 혼자 새벽녘까지 배회하는
은빛 늑대, 웅웅대는 달빛의 소질
나는 이를 악문다 참아야 한다 쉽게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다시 한번 더 태어나 눈부시고 당당하게
이 위험한 내면을 감당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자작나무숲, 물안개, 라고 나는 그를 따라 말한다
조용히 나는 그 말의 아름다움을 끌어안고 무너진다
내 안의 창자들이 댕댕 울리며 난 알아, 난 알아 라고 울부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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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공허
난 <아주 오래 묵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천사인지 악마인지를 하나 알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추악하고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구질구질한. 너무나 늙고, 그리고 너무나 늙어서 동시에 너무나 젊은, 괴이쩍고 사랑스러운, 너무나 숭고하고 동시에 너무나 유치한.
그/그녀를 만난 일은 하도 꿈결같고, 그리고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그/그녀를 언제 언디서 만났는지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그녀의 등뒤로, 아주 멀리,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티베트의 성자들이 우렁우렁 노래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쉬익쉬익 끓고 있는 연금술사의 플라스코에서 기이한 향기가 퍼져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내 손끝에 전철의 손잡이가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갑자기 엄마가 끓여준 쑥국 맛이 입안에 가득 고이기도 하고, 그랬다. 다만, 분명히, 집 바깥에서였다.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난다. 나는, 단번에 그/그녀를 알아보았다. 나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100년 전이었어도, 100년 후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그녀는, 내 영혼이 망설이며, 내것이라고 인지하기를 머뭇거려 온, 어떤 억압되어 온 기질의 경사를 따라 무작정 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때, 내 영혼의 어느 지하 공장에서 가다말다 하던 톱니바퀴의 헐거운, 비실거리던 볼트가,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꽈악 맞물려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리곤, 내 영혼의 지하 공장은 맹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없다. <나>는 무참히, 그리고 무참한만큼 더욱 즐겁게 흔들리고 깨어졌다. 나는 뼛속까지 깨달았다. <나>는, 일종의 셋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임의적인 기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삶은 무시무시한 불투명성이라는 바다를 떠도는 한 줄기의 불안한 <있음>이라는 빛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공포에 가득찬, 동시에 무한히 감미로운 흔들림의 경험 안에서, 내 자아는, 존재의 권리의 이름으로, 자아라는 집을 걸어나왔다. 그렇게 나는 그/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우주가 나에게 알려준 바를 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자기인 채로 자기 밖으로 걸어나가 우주의 부름에 대답하기.
그/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그녀를 알아본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내 인식의 그릇이 텅 비어 있더라도, 나는 그것이 가득찬 텅빔임을 안다. 모르는 채 알기. 그것이 사랑이라는 인식의 방식이다.
그/그녀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그/그녀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아무나예요, 나는 누구나예요, 나는 당신이예요, 나는 당신이 아니예요,라고.
그리고 바람이, 세계의 끝과 끝을 불어가는 바람이 불 것이다. 쓸쓸한, 끔찍하게 쓸쓸한, 당신을 삶으로부터 잡아채는, 부드러운........ 그러나, 당신을 근원이라는 공허 속으로 내던지는.......... 불안에 가득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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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1992년, 서울
그 여자, 어떤 여자, 분명히 내 삶의 옷자락을 끌고,
모호하게, 뒷모습만 보이며, 걸어갔다
뻘밭, 전쟁터, 목매죽은 귀신들, 거기
푹푹 썩어, 호박빛나는 누르끼리한 점액 속에,
통곡―숨죽인, 거부당한 형태들―웅웅 흔들리고
그 여자, 뒷모습의, 철벅철벅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알 수 없는, 말릴 수 없는,
오만함, 혹은 무모함―사랑이라는 이름의
투기―그 여자 아주 낮게 몸을 숙이고
죽은 자들의 점액 속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그 여자, 천천히, 분명히 내 삶의 옷자락을 끌고,
돌아섰다, 너무나 어슴푸레한, 작고 빈약한 구슬 한 개,
그러나 분명히 구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작은 알갱이
한 개, 그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울렁이는 욕지기를 꾹꾹 참으며 그 여자를 마주 보았다
움푹 파인 두 개의 구멍 그리고 너덜너덜한 살
나는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고 불쾌한 끈적거림
나지막한 음산한 웃음 그리곤 들릴락말락 그 끝에서
방울소리, 아기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무엇인가 나를 힘차게 공중으로 튕겨 올렸다
맹렬히 부푸는 존재―내 안에서 나를 패대기치는
1992년 7월 서울의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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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또 한번의 죽음
가슴이 툭 떨어진다
가을, 존재가 빠져나갈 다음의,
아주 희미한, 물그림자같은,
흔적…내가 가만히 그 곁에
다가간다, 비수처럼 내 가슴에
와닿는, 부재의 결…차디찬…
삶이, 나날의 줄거리의 그물이
펄럭인다, 잊지 마, 넌 노예야
내가 비껴선다 또는 돌아선다
가을의 경사…윙윙 내 영혼의
벽을 따라 오르페의 울음소리
피처럼 뚝뚝 떨어진다, 안녕,
살아서 유령처럼 내가 존재의
변경에 이른다…그곳에서
이슬젖은 금가루처럼 후두둑
내가 흩어진다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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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거지
빨리 늙어 버리고 싶어 아예
아무런 생생함에도 더 이상 시달리지 않는
빛이란 빛, 빛의 예감, 소질들 몽땅 죽어버린
시커먼 돌덩어리, 지혜로운 쭈그렁바가지
실종의 욕심장이, 야차가 되고 싶어
추악하고 무거운 살, 살뿐인 살이 되고 싶어
이건 싫어 정말 이건 싫어
빅뱅! 연속되는, 이 견딜 수 없는 긴장!
늘 거기 눈뜨고 침을 삼키며 백열의 환희를
기다리는 늙지 못하는 여자, 시, 감질나는,
드러나지 않는 예감, 가끔 와서 내 영혼을
잔인한 빛으로 물들이고 가버리는, 일상의
어느 주름살 틈바구니 틈바구니에 악마처럼
숨어서 반짝이는 위험한 칼날, 날카로운 금빛 파편
나는 거지처럼 목을 빼고, 이 재산이 안되는
말의 금가루들을 구걸한다 지겨워 죽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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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가을, 나는 문득 죽음을 알아 버리지
바람,
난 문득 알아 버리지, 신비한 부서짐,
비스듬히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어딘가로, 나 알지 못하는,
곳.......... 있지만 없는......... 장소의
귀신들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가슴속엔 웬 수많은 목소리들,
속삭임, 말의 싹들, 작게 바시시
웃거나 한숨짓거나 조금 흐느끼거나
그리고, 산 너머, 오늘 유난히 짙은 석양
아래, 잔잔히 흔들리는 벌써 죽은 사람들,
투명한 귀신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두런거림
가만히 멀리 바라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마른 가랑잎처럼
바시락
부서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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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눈물, 나를 찾아오네
내 눈물 어디 갔나, 바장이며 빙빙 돌아보네
마음 한없이 무너져 저녁 바람
숨죽인 통곡으로 내 몸 무참히 흔들어도
내 눈물 어디 갔나 나는 울음소리
내지 못하네
길마다 길 가는 사람들 얼굴에서마다
마저 지워지지 않은 꿈의 옷자락
자꾸 내 눈에 밟히고
눈물 어디 갔나,
폭포처럼 무너지며
울고 싶네, 내 잘린 혀
뿌리로라도, 그것 아주 조금
남아 있기라도 하다면
세상에 아직 살아, 이렇게 멀쩡하게 아직 살아
진작에 죽은 여자
그 지워진 삶, 위태한 흔적 위로
소리없는 눈물, 울어지지 않는 통곡
그렇게도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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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에 손을 대어 본다
그리고 들여다보면 손금 속에는 작은 강물이 흘러
랄랄라 랄랄라 숨죽여 노래하듯 울고 있는
눈물 젖은 날개 상한 깃털들 그 강물 속에 보이네
청이도 홍련이도 민비도 죄 모여 앉아서
가만가만 그 깃털들 말리고 있어 가슴이 저려서
갸웃이 고개 숙이고 조금씩 조금씩만 걸어가지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갸웃이 바라본 그것
얼마나 가슴저리게 아름다운지 얘기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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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詩
-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나의 詩는 途上에 있습니다. 나는 아주 서투른 사인밖에 던질 줄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그들은 한결같이 게으르고, 한결같이 풀이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둥댑니다. 작은 나의 마음을 詩行마다 박아두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문을 열면 얼른 그곳에 물결을 일으키리라고 매복하여 기다리며. 오 우리가 함께 길의 '끝'에 대한 예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그때 우리의 정신과 정신을 잡아 뒤흔들던 눈물. 눈물로 하늘을 얻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으로 우리는 마음으로 가는〔耕〕세상의 밭을 얻습니다.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한 나의 詩는 당신을 꿈꿉니다. 당신에게 가는 것이 나의 궁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갇혀서 소외된 힘들이 참을 수 없는 갈증의 힘으로 버석이며 무한의 날개를 단 가슴을 하늘로 쳐올려내보는 것을. 장관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나는 헤매며 시를 쓰고, 그리고 당신을 꿈꿉니다. 나는 조금씩만 움직입니다. 어느 날 당신 영혼을 나꿔채어 이 얼어붙은 땅을 떠나게 될때까지, 시방 내가 택하는 형식을 찬찬히 훑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주실 테지요. 내 어눌한 말의 변신을? 그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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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또는 나지막한 들리움
나는 말들을 넘어선 고적함을 꿈꾸어요
한 송이 민들레의 지독한 섬세함 그리고
그것의 생의 결에 완전히 겹쳐지는
바람 오 내가 얼마나 깊이 그 열림을 이해한 것일까
내 가슴의 모든 섬모들이 그 바람을 따라 흔들려요
세상에 둘 곳 없는 흔들림, 의미의 오로라가 그것 위에
천년 전부터 있었던 광휘를 드리워요 내가
외양들의 거의 지워진 마지막 저항에게
손짓해요 쉿 조용히 해 그리고 기다려 봐
나의 존재가 잠깐 파르르 떨어요, 보아요, 내가?
지워진 자리에서 언제? 지금? 아니 천년 전에?
물빛 이슬처럼 자유롭고 순결한 규정되지 않는
윤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눈물이 나요 ―안녕
아직은 어스름 저녁 어두운 육체 안에서
망설이고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한번 드러난
부재를 잊지 못해요 ―우연한 형태 안에 갇혀 있는―
나는 그것의 이마 또는 눈썹 위에 조용히
내 마른 장작개비 손을 가져다 대어요
그때 얼마나 엷고 부드러운 불이
내 존재의 발치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인지
나는 조금 지워진 내 발목을 내려다보아요
언덕 위, 또는 조금만 벗어난 삶,
흔들림―나지막한 들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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