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의 민중당
정영태 인하대교수
6월 민주화투쟁의 성과로 대통령직선제가 채택되고 곧이어 대선이 실시되게 됨에 따라 5․16쿠데타세력에 의해 그 맥이 끊겨버린 진보정당운동이 재개되었다. 87년 민주화투쟁이후 재개된 진보정당운동은 6․29선언 이후 확장된 합법적 정치공간과 정당․선거정치의 활성화에 따른 일부 재야민주화운동세력에 의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다. 6월 민주화투쟁 이후 개방된 합법정치공간에서의 정당․선거정치활성화라는 새로운 정치상황에 직면한 재야민주화운동진영은 한국민주주의의 전망이나 보수야당(특히 당총재)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반합법 전선체운동, 기존의 보수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참여, 독자적인 합법정당건설운동 등으로 나누어졌다. 민중당은 이 가운데 주로 독자정당 건설론의 입장을 가진 재야민주화운동세력에 의해 건설되었다.
1) 민중당의 이념, 노선, 정강정책
민중당은 창당선언문에서 ‘한국전쟁 이후 민중이 직접 건설하는 최초의 진보정당’으로 규정하면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민중주체민주주의)를 이념적 목표로 내세웠다. 또한 기본목표를 “외세와 군사독재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중주체의 민주정부를 수립하며 민중주도의 자립경제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창당원칙을 민중주체, 민주쟁취, 민권수호, 민주세력연합 주도, 민중재정 확립, 진취적 당풍 확립으로 설정하였다. 전문 16개항과 본문 14조 53개항으로 이루어진 당강령은 ‘민중권력 수립’의 전제하에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변혁내용을 담고 있다. 정당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경제강령을 보면, ‘사회주의적’ 요소를 많이 담은 ‘민중주도의 계획적 시장경제체제’(자본주의+사회주의)를 담고 있다. 즉, 독점재벌 해체나 기간산업 국영화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계획경제의 공평성을 살리는 한편 시장경제의 무정부성․반민중성을 최대한 극복하고, ‘시장경제적’ 요소를 유지함으로써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을 최대한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념과 정강정책들로 미루어 볼 때, 민중당은 변혁적 사회주의정당이 아니라 서구식의 사회민주주의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당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성격은 지지기반 또는 대변하고자 하는 사회집단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민중당이 ‘민중주체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민중’은 당시 급진적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진영에서 말하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민중이 아니라, ‘독재정권과 독점재벌, 외세의 지배로 고통받고 있으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모든 민족구성원들 즉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중간계층, 지식인, 여성, 청년학생 그리고 중소상공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민중의 개념 속에 중간계층, 여성, 지식인, 청년학생, 중소상공인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민중당은 자신을 계급정당으로서보다는 국민정당으로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한 조직체계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계급이나 계층을 조직하기 위한 기구로 노동위원회, 농민위원회, 여성위원회, 청년학생위원회, 교수위원회 등 5개 부문위원회만을 두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중당의 노선을 보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으로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정당을 통해 의회로 진출하여’ 다수를 점한 뒤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중주체 민주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 즉 의회주의노선을 채택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민중당은 변혁적 과제를 의회주의노선에 입각해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민중당은 해방정국에서의 근민당, 1950년대의 진보당, 4․19 당시의 혁신정당으로 이어지는 사회민주주의정당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 조직의 구조와 성격
민중당은 핵심적인 지지기반인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학생, 교수 등을 조직하거나 체계적인 연대를 이루기 위해 별도의 5개 부문위원회를 두었다. 5개 핵심조직과 함께 당의 집행․정책기능을 높이기 위한 사무처, 기획조정실, 정책위원회 등을 두는 한편, 조국통일위원회 등의 9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창당 당시 민중당은 51개의 지구당(13대 총선 지역구 224개 중의 약 1/4)을 결성함으로써 정당설립요건을 무사히 갖추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절반이 서울․인천․경기 등의 수도권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지방의 경우에도 영남지역에는 19개였던 반면 호남지역에는 겨우 2개로 지역적 편중이 대단히 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당이 지방에 대한 보수정치인들의 견고한 장악력과 1987년 이후 격렬해진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당이 지구당을 조직하는 데 겪은 곤란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내부의 노선갈등, 재정결핍, 인물부족, 홍보미숙 등의 문제가 조직과정에서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나아가 보수정당과는 달리 ‘투쟁 속에 당건설이라는 운동논리에 충실하려고 하다보니, 각종 시국사건에 동원하랴, 주관하랴, 또 참여하랴 …… 당과 재야단체의 두 기능과 역할을 해야’(이재오, 1993: 499) 하는 어려움도 결코 작지가 않았다.
이처럼, 민중당은 지방에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민중당은 지구당 결성과정에서 각 지역내의 재야단체와 기층 대중조직의 참여가 적어, 대중과의 조직적 연계도 미약했다(오창헌, 1990: 44).
조직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당 운영방식에 대한 것이다. 민중당은 기존 정당과의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 당내민주주의를 강령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즉, 민중당은 ‘당의 주요간부를 대표가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방식을 지양’할 것이며, 또한 ‘중앙의결기관이 아래로부터 선출되는 대의원을 중심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은 민중당이 재야운동권의 일반적 조직원리인 ‘집단적 의사결정’과 ‘밑으로부터의 의사결정’의 원칙을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중당은 이념이나 노선 또는 정강정책에서도 기존 정당과 분명히 구별되지만, 민중당의 이러한 원칙 또한 모든 권력이 총재 1인에게 집중되어 전체 당원의 의사가 구조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기존 정당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민중당은 이런 원칙에 따라 3인 공동대표제를 채택하였다.
3) 주도세력
민중당 건설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경력이나 노선에 있어서 다양한 인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선, 민중당 이전의 경력을 보면, 1987년 대선 당시 백기완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던 ‘독자후보파’에 속하면서 88년 총선 이후 민중정당 재건에 참여한 인사들, 1987-88년 당시 후보단일화파나 민주대연합파(한겨레민주당 참여)이면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 참여했다가 정치세력화를 위하여 89년 9월말 전민련에서 이탈하여 ‘새정당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인사들, 3당합당 이후 몰아친 공안정국으로 전민련이 무력화됨에 따라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원회(민연추)를 건설하거나 참여한 인사들, 노동운동진영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 위해 민중정당 건설 전국 노동자 추진위원회(전노추)를 건설한 인사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수도권지역에서 비합법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합법정당운동으로 전환한 뒤 민중당이 건설된 이후 합당한 노동자정당 건설 추진위원회(1992년 1월에는 한국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에 속했던 인사들 등과 같다. 이 가운데 민중당의 중심을 이루었던 그룹은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속했던 이들로, 반합법전선체운동(전민련)을 하다가 그 한계를 인식하고 합법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이탈한 이들이었다. 비합법(또는 반합법)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그룹(전노추 또는 한노당창준위)은 선진노동자들 가운데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노협이나 업종회의 또는 대기업노조 등의 노동조합, 전농 등의 농민조합 등 기층대중조직에 대해서는 커다란 영향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민중당과 통합한 뒤 당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이념적 성향과 노선을 보면, 대체로 민중민주주의(PD)적 성향이 강하면서 의회주의노선 또는 합법정당노선을 지지한 인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이나 노선에 대한 충실성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선거전술이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운동의 전개방식에 대한 입장차도 컸다. 후자의 문제는 주로 1960~70년대 민주화투쟁에 참여한 중진급 인사들과 198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서 재야운동에 합류한 소장층 인사들 사이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전자는 후자보다 선거와 의회를 통한 변혁가능성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전자는 명분이나 이념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한 반면 후자는 실리보다는 명분이나 이념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4) 등장과 해체의 요인
(1) 등장배경
민중당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국내외 정세가 중요했다. 첫째,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등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으나,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사실상 군부정권이 연장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중당건설에 있어서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민연추의 결성도 3당합당과 그에 이은 공안정국에 의해 추동되었다.
둘째, 보수진영의 총단결(즉, 3당합당)과, 국가보안법과 물리적 강제력(경찰과 안기부, 전경)을 동원한 진보진영(재야, 학생, 노동, 농민, 도시빈민 등)의 탄압과 검거에 대한 야당의 대응이 타협적이거나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집권여당과 마찬가지로 야당도 지역주의적 동원전략을 구사하거나 비민주적으로 당을 운영함으로써 야당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던 점도 민중당의 결성을 자극하였다.
셋째,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기층 대중운동이 활성화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주로 생존권확보 또는 사수를 목표로 하였으나, 노동자나 농민 등 기층대중들이 목숨도 불사하고 투쟁하는 모습에서 진보정당 추진세력들은 변혁에 대한 가능성을 찾았다. 그리고, 산업화가 급진전되고 산업이 고도화됨에 따라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기층 대중, 특히 진보정당의 주요한 기반이 되는 노동자계급(그 중에서 대기업의 남성노동자)의 비중이 대단히 높아진 점도 민중당의 등장에 있어서 중요한 배경요인이 되었다.
넷째, 방금 살펴본 기층 대중운동의 활성화와 확대에 따른 결과물로,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필요한 인적 자원이 풍부해진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변혁적 학생운동의 확장은 부르주아적인 운동을 넘어서려는 활동가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고, 이들은 노동현장과 농촌 또는 빈민촌으로 들어가 대중운동의 경험을 쌓았다.
(2) 해체요인
민중당이 해체된 직접적인 요인은 1992년 총선에서 당의 계속적인 존립요건인 3% 득표를 이룩하지 못한 데 따른 당 지도부의 해산결정이었다. 민중당이 3% 이상의 득표를 하기 어렵게 한 제도적․정치적 조건도 배경요인도 중요하다. 민중당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객관적 조건의 첫 번째는 진보진영에 대한 집권세력의 직간접적인 탄압과 방해공작을 들 수 있다. 집권세력의 탄압이나 지도부 검거는 정당 추진세력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진보정당 추진세력이 기층 대중운동과 결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기층대중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지 않고 경제투쟁의 테두리 내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집권세력은 기층대중조직에 대한 탄압과 지도부검거를 광범하고 지속적으로 단행했으며, 때로는 자본가집단에 대해서 압력을 가해서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보장’하기도 했다. 후자의 결과로 기층대중운동은 전투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합주의 내지 경제적 실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집권세력은 이러한 직접적인 탄압만 한 것은 아니다. 경찰 등 관에서도 가두에 붙인 창당포스터를 떼버리거나 창당대회 장소를 건물주 등이 빌려주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등 간접적인 탄압도 무수히 행했다.
둘째, 중산층은 물론 노동자들에게도 널리 확산된 반공이데올로기의 위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반공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실패로 더욱 강화되었다.
셋째, 격심한 지역감정 또는 지역주의적 대립구도(지역균열)를 들 수 있다. 민중당이 전라도지역에 지구당을 겨우 2개밖에 결성하지 못한 것도 바로 지역감정의 벽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넷째, 보수야당의 경계나 방해공작과, 민중당이 개발한 정책공약이나 인물을 흡수해 버리는 전략을 들 수 있다. 기존 보수정당의 지역조직들은 지역 내에서 갖가지 ‘방해공작’을 했는데, 보수야당의 이러한 방해공작은 특히 호남지역에서 심했다고 한다(이재오, 1993). 보수야당은 민중당이 개발한 정책공약과, 진보진영에서 성장한 유능한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빼앗아 갔다. 그 결과, 민중당은 인물부족을 겪어야 했으며, 또한 보수야당과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중되었다.
다섯째, 기존 보수정당에게는 유리하지만 신생정당에게는 불리한 정당법, 선거법, 정치자금법, 노동관계법 등 법적․제도적 제약을 들 수 있다. 당시 선거법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자본집약적인 선거운동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 새로이 정당을 건설한 진보진영에게는 불리했다. 예를 들면, “살농정책을 펴는 민자당을 찍지 마라”라는 지극히 단순한 구호조차 금지함으로써 호남지역에서는 선거사범의 절반 이상이 학생과 농민이 되어버리기도 했다(손호철, 1993: 211). 재벌의 경우 합법적, 음성적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고 국민당과 같은 사기업의 인력, 자금, 조직을 동원하는 정치활동은 허용하면서 노조의 정치활동과 정치자금 기부는 금지하는 불공평한 선거법과 노동관계법도 민중당의 선거정치에 있어서의 실패를 가져온 조건이 되었다. 이외에도 교원의 정당가입을 금지하는 등의 정당법도 민중당에게는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당이 실패하게 된 데에는 주체세력의 내적 조건도 크게 작용하였다. 첫째, 이념이나 노선 또는 보수야당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 등 내부논란을 가져오는 쟁점을 치명적인 부작용 없이 해결하기 위해 도입해 놓은 당내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느 조직, 어떤 운동이든 내부의 이견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한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오히려 조직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다양하고 때로는 대립적인 의견과 입장을 조직의 약화 또는 해체라는 극단적인 부작용 없이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 충실히 실천하느냐 하는 점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가장 나은 갈등해결 방식이 민주주의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민중당도 기존 정당의 보스 중심의 비민주적인 운영과, 운동권의 엘리트주의적인 ‘민주집중제’를 비판하면서 당내민주주의에 충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무간사들이 당 지도부를 ‘음해하는’ 문건을 돌린 ‘실무자사건’에 대해서 ‘제명처분’이라는 가혹하고 ‘비민주적인’ 결정을 내리는 등 진보진영의 분열을 자극하는 일을 저질렀다(이재오, 1993: 502).
이와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되어야할 것은 민중당의 ‘패권주의적’ 행태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과 노선이 다르거나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 어떤 경우에는 전국득표율이 3%를 넘을 경우 전국구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선거법상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민중당은 다른 진보진영과의 사전조율이나 협조 없이 일방적으로 후보를 출마시킴으로써 진보적인 후보간의 중복출마사태와 불필요한 경쟁을 야기했다. 민중당의 이러한 ‘패권주의적’ 행태는 진보진영의 ‘적전분열’은 물론 대중들의 진보세력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손호철, 1993: 212).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반드시 민중당(지도부)의 탓도 아니고, 다른 ‘분파’들의 탓만도 아니다. 혹자가 지적했듯이, 짧게는 30년 길게는 40년 이상 억압적인 군부독재체제 하에 있음으로 해서 공개적인 정치활동(또는 민주주의의 실천)을 제대로 해본 경험도 없고 또한 그런 억압적인 상황에서 운동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나 조직이 하루아침에 달리 행동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최장집, 1996: 49; 이재오, 1993: 4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구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고,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 했다. 대중적 지지도나 인적․재정적 자원의 측면에서 진보정당운동의 ‘주도권’을 잡은 민중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분파들을 끌어안고 민주주의를 실천했어야 했다.
둘째, 기층대중조직과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계를 이루어내지 못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주로 학생운동과 반합법전선체운동에 몸담아 왔던 민중당의 ‘주류’는 물론 노동운동을 해 왔던 ‘전노추’그룹과 ‘노정추’그룹조차도 기층 대중조직(예, 노조)과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연계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물론, 민중당이 기층 대중조직과 연결되지 못한 것은 민중당 주체세력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노조의 정치활동과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법과 정권의 탄압과 방해공작이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고, 또한 노동조합 간부들의 무성의나 ‘분파주의적’ 태도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당 주체세력은 이러한 제약조건을 바꾸거나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게을리 했던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임을 강조하면서도 ‘민해경 콘서트’나 ‘노대통령이나 민자당 대표와의 면담을 통한 정치관계법 개정시도’ 등과 같이 기존 보수정당과 별 차이가 없는 선거운동이나 사업을 마다함으로써 기층대중과 거리가 더 멀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민중당이 기층 대중조직과의 연계를 갖지도 못하고 기층대중들로부터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써 민중당은 선거에서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보수적인 중산층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붉은 색’을 순화시키기 위해 온건이미지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중당은 자신의 ‘진보적인 정책공약’에도 불구하고, 보수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어려웠다(손호철, 1993: 212-213).
셋째, 지역수준에서의 주민을 위한 활동이 미약했고, 지역에서의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나 결합이 미진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중앙당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갖가지 대중투쟁이나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지구당의 경우 인적․재정적 자원의 부족이나 적절한 사업을 찾지 못해 주민을 위한 활동이나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재야운동권의 분파주의적 또는 ‘패권주의적’ 태도나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필요성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연대사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넷째, 인물과 자금의 부족 등과 같은 기술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도 민중당의 실패를 초래하는 데 일조를 했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금과 적합한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정당운동은 물론 노동운동과 같은 기층 대중운동도 분열되어 있는 재야운동권의 현실은 그나마 부족한 인재와 자금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민중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민중당은 창당 때부터 해체될 때까지 재정난으로 허덕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혀 진보정당답지 않은 ‘민해경 디너쇼’까지 기획해야 했다. 진보정당다운 정당운영방식이나 선거운동기법을 개발, 실천하지 못한 것도 민중당의 문제점이었다. 그런 방법을 착안했을 경우에도 ‘민해경 디너쇼’에서처럼 ‘무엇을 위한’ 정당이며 선거운동이냐를 잊어버린 듯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섯째, 지도부의 조급성을 지적할 수 있다. 객관적인 여건이 대단히 불리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당의 중앙지도부는 과도하거나 방향이 잘못된 목표를 그것도 짧은 시간에 달성하려고 하는 조급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급성으로 말미암아 선거에서의 득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또한 기대하게 만들었으며, 득표에서의 실패를 선거에서의 실패 나아가 진보정당 실험의 실패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민중당은 선거목표를 ‘출마지역 평균 20%, 원내교두보 확보’로 설정하고 타 진보진영과의 중복출마도 무시하고 1992년 2월 8일부터 모두 66명을 공천하였다. 그러나,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단 하나의 의석도 차지하지 못했으며, 득표율도 출마지역만 보면 평균 6.25%, 전체적으로는 1.5%를 획득하여, 애초의 목표에 크게 미달했을 뿐만 아니라, 정당유지에 필요한 최소득표율인 2%를 못 넘겨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결과에 대한 민중당의 반응이었다. 총선 직후 1992년 4월 4일에 열린 중앙집행위에서 당의 핵심간부들이 ‘당 해체’를 제시한 뒤,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민중당 지도부와 핵심간부들은 4월 15일 민중당 해체를 선언하는 신문광고를 일방적으로 게재해 버림으로써 간판을 내리게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진보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잘 분석하고 있는 한 연구자는 민중당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민중당이 ‘민중당은 무엇이다’는 긍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노력에 비해 가시적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는 작업에 힘을 쏟기보다는 ‘민중당은 무엇이 아니다’는 ‘부정적 정체성’(negative identity)의 형성이라는 안이하고 손쉬운 접근법을 통해 대중과 접근하려고 (했고) …… (이러한 문제점은) 창당 당시부터 민중당에 내재해 있던 …… 두 가 목표, 즉 제도정치권 진입과 합법공간을 이용한 민중당 프로젝트의 선전간의 무게중심에 대한 내부의 이견과 긴장이 시간이 흐르면서 일방적으로 전자를 강조하는 쪽으로 흐르고 암암리에 무엇을 위한 민중당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제도정치권 진출 그 자체의 지상목표화 속에 매몰되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버린 조급증의 비극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손호철, 1993: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