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설화/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 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가장 쉽고 가장 단순하면서
뼈를 찌르고 척추를 세우는 말이다
이렇게 순수하고 쉽게 다가오는 시들이 있는 반면
요즈음은 너무 어렵고 깊숙이 내면을 다그치는 시들이
많아 부담스러워 떠나는 독자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신인류라고 생각하는 흐름이기도 하다
흐름도 바뀌는 것이니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도
못하겠다( ....)
치자꽃 설화 시 한 편에 마음이 선선해온다
산사로 어둠이 뒹굴고 보내야 하는 마음과
가는 마음이 치자꽃 향기를 몰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