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복음교회, 2022년 10월 16일
♱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함께 부르는 노래] 묵상하는 찬양, 110장(꿈꾸지 않으면)
[공동체고백] 사도신경
[어린이시간] 찬양; 이은혜선생님
말씀; 장수경선생님(다음 주;김현정선생님)
활동; 김현정, 전영호, 이기범, 장수경, 이은혜
[성시 교독] 교독문 46장(시편 104편)
[찬 송] 397장(주 사랑 안에 살면)
[강 론]
“도로 찾으리라”(삼상30:8,19 읽을 말씀; 삼상30장)
저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만은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되네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전하고 싶어서, 좀 더 심오한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고 싶어서 안달인 저를 발견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만은 욕심쟁이입니다. 설교의 분량을 줄여서 집중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인 설교인 지라 분량을 줄이지 못하고 때로는 중요한 말씀들을 너무 쉽게 흘려보내는 듯합니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지난주에도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았죠? 오늘은 지난주에 급히 흘려보낸 내용 중의 하나를 더 심도 있게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생명싸개에 싸여 존귀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는 설교했고, 그 방법은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강조 했습니다. 다윗은 “악인에게서 악이 나온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당신의 생명싸개에 싸인 보물처럼 소중하게 대하셨고, 존귀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소중히 여김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삽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 생명싸개에 싸서 영생하게 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도로 찾으리라”는 설교제목은 “네가 반드시 따라 잡겠고 도로 찾으리라(8)”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블레셋 ‘가드’라는 곳의 ‘아기스’왕에게 피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아기스왕과 함께 전장에 갔지만 다른 부족장들의 반대로 다윗의 사람들은 귀향했습니다. 3일 만에 돌아왔지만 집은 불타버렸고, 처자식은 약탈자 ‘아말렉’에게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울 기력도 없을 정도로 슬퍼했고, 빼앗긴 자식을 생각할 때는 다윗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말렉을 따라 가서 치고 처자식을 되찾아 올수 있을지를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죠, “네가 반드시 따라 잡겠고 도로 찾으리라.”
저는 여기서 예수님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표상을 봅니다. 울 기력도 없이 지쳐 있는 모습과 믿고 따랐던 예수님을 향해 돌을 들듯이 원망하고 분노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 음성을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반드시 따라 잡겠고, 도로 찾으리라!” 뒤처진 듯 보이는 우리 인생이지만 따라 잡을 수 있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 젊은 날을 허비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십일조뿐 아니라 모든 것을 걸었지만 물질과 젊음등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무가 밀려오고,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빠져 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나야 알 수 있고(만남), 알아야(깨침)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오늘 설교제목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으로 들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네게 반드시 따라잡겠고, 도로 찾으리라!” 그 음성을 듣고 다윗의 사람들처럼 돌을 내려놓고 영적전투에 임한다면 뒤처진 삶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크고 작은 것 어느 것 하나 잃음이 없이 도로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깨어진 마음과 관계들이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잃어버린 자존감이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성경에는 처자식을 되찾고 모든 재산을 되찾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이는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라 자존감의 회복도 포함),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이 삶이 생명의 삶이고 영원한 삶(영생)입니다.
1.당신도 다윗(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젊은 날도, 자식도.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바뀝니다. 예수님 때문에 잃은 것이 ‘1’이라면 예수님 때문에 얻은 것은 ‘10’이고 ‘100’이고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불에 탄 마을과 붙잡혀간 처자식을 생각하며 울 기력도 없을 정도로 슬퍼하며 다윗에게 분노했던 사람들처럼, 저도 꺾인 나이와 더 가난해진 현실에 슬픔과 분노가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이 충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사랑도, 운명도 모든 것을 건다”는 유행가 가사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걸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한다는 것, 산다는 것 등등. 인생은 모든 것을 거는 여행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본의든 타의든 모든 것을 걸어서 사랑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의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고 운명을 개척해 가는 ‘저항자’입니다. 신교(新敎)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는 같은 의미입니다, 저항자.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항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불의에 저항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권유린의 상황에 저항합니다, 오늘 우리는 맘몬숭배(물질숭배)와 심화되는 양극화에 저항합니다. 이 저항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성역(聖役)입니다.
십일조도 하지 않으면서 저항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한 구절 묵상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사랑도, 인생도 모든 것을 걸어야 하듯 신앙도 모든 것을 걸고 하는 겁니다. 저는 모든 것을 걸었고, 그래서 오는 허무와 무위 그리고 원망과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저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럼 금시, 저처럼 얻은 것이 잃은 것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그의(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6)”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분노하여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 앞에서 다윗은 “크게 다급”했지만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배신과 십자가 죽음 앞에서 성부하나님으로 인하여 힘을 얻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유추). 사도바울도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벗들로 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여호와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했고, 영생할 수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안에서, 혹은 밖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원망과 분노의 소리. 그리고 자신 안에서 죽음(절망)의 꽃처럼 피어오르는 자괴감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으로 잠재워질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힘입어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삽시다.
3.무심코 영접한 ‘소자’가 영적 전쟁의 훌륭한 길잡이가 됩니다(11절 이하)
집을 잃고 처자식마저 빼앗기고 아말렉이라는 약탈자를 뒤쫓는 다급한 상황에서 다윗의 사람들은 한 소자(유대인이 아닌 애굽사람)를 목격합니다. 그는 3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소자를 다윗의 사람들은 영접합니다. 음식을 주고 무화과와 건포도를 줍니다. 저는 여기서 무화과와 건포도를 주목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는 보양식이고 건포도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과일이었습니다. 병들어 버려진 종. 3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소자를 영접하여 먹이고, 보양시켜 주고, 기분 전환시켜 주는 환대를 집을 잃고 처자식마저 잃었으며 큰 전투를 앞둔 다윗의 사람들이 일면식도 없는 소자에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이 소자가 아말렉과의 전투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다윗이 큰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것을 모두 되찾을 수 있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19).
이렇게 우리가 환대하는 소자가 우리의 영적성장에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길 안내자가 되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소자를 환대하는 일이 회복의 길입니다.
4.나눔
마지막으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다윗의 사람들이 그 전리품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대에서 전리품은 전쟁에서 이긴 군대의 권리로, 오롯이 자신들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전리품을 나눕니다. 첫째, 아말렉을 쫓을 때 피곤해서 뒤처진 2백 명의(6백명 중 2백명) 동료들에게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는 “불량배”들의 요구에 “그(여호와)가 우리에게 주신(승리를)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고 다윗은 거절하고 전리품을 똑같이 나누게 합니다(22,23).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법이 됩니다(25). 둘째, 전리품을 “친구”인 “유다 장로들”과 나눕니다(26).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래 했던 모든” 사람들과 나눕니다(31).
그렇습니다. 우리가 얻은 소득은 오롯이 우리의 것입니다. 십 분의 1만 헌금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얻은 전리품(성과)을 뒤쳐진 사람들과, 벗들과, 아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찬 송] 569장(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주님의 기도]
첫댓글 신념을 지키며 살다보면,
신앙으로 살다보면,
인생에서 뒤처진듯 느껴질 때가 종종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신 따라 잡을 것이고,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다 되 찾을 것입니다.
하여, 원망과 분노를 가라 앉히고 주님의 임재속에 그분과 동행하시는 한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