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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page / 성경속의 문제]
주님은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가셨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가끔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움직이는 데 이 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38년 되었다는 것은 그 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그만큼 병자가 당한 고통이 큰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병자의 병이 참 오래되었음을 아셨습니다.
사람이 1년 동안만 병을 앓아도 마음과 몸이 지쳐버립니다. 병을 앓고 있는 환자 자신뿐 아니라 옆에서 돌보는 가족들의 고통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질병의 문제는 병에 시달리는 사람과 가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살아갈 소망과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더군다나 환자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았습니다. 당시로서는 태어나서 거의 한 평생을 병자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38년이란 세월이 이 사람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죠, 소망도 없고 비전도 없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 병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병자의 대답이 좀 엉뚱합니다.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으니 그냥 낫기를 원한다고 대답을 하면 되는데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힘이 들었는지 자신이 낫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그는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누군가가 자신을 물에 넣어주기만 하면 자신이 나을 수 있을텐데 아무도 자기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병이 나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낫지 못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자신이 낫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처음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치유 받는다는 말은 전설이요 미신일 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솔로몬의 못이라는 곳에서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한꺼번에 많이 밀려들어오면 물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마치 천사가 내려와 일으킨 기적이라고 믿으면서 그 현상을 통해 병이 치유를 받는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만 치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과 소문은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병자들에게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야겠다는 열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은 무한경쟁 속에 내몰린 병자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은 오늘 이 시대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은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강박관점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이 세상이 바로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에게 이 연못은 자비가 아니라 무자비를 경험하게 하는 연못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병자가 들었던 모든 전설, 즉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치유 받는다는 이 소문은 결코 병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낱 미신일 뿐이었고 병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오답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이처럼 오랜 지병이 자신의 인생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믿고 있는 병의 치료방법도 오답일 뿐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병자는 잘못된 미신과 헛된 소망으로 인해 38년 동안 끊임없이 좌절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2page / 세상속의 문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병자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잘못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답이 틀린 답인지조차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좌절감과 패배의식만 쌓여갑니다. 또 사람들과 경쟁에서 이겨야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불필요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화] 작년 10월 경, 인천 남구 주안동 한 빌라에서 중학교 1학년 이모(12)양이 부모와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이양의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이들을 발견한 아버지(51)가 뒤따라 숨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5평짜리 작은 빌라에선 타다 남은 연탄과 이양 모녀가 쓴 유서 5장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이양이 적은 1장짜리 유서에는 “아빠 저는 엄마하고 먼저 가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밥 잘 챙겨 먹고 건강하세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 할 것이기에 슬프지 않아요”라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이양 가족은 오랜 시간 대출금 상환 압박에 시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오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었고 긴급지원을 신청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양은 학교 급식비도 전혀 밀리지 않았을 만큼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해 왔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양의 아버지가 부동산 경매에 집착하다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만약 빚을 갚지 못하면 연말에 집이 넘어가는 상황에 처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양의 어머니는 자살을 결심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어린 딸은 만류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양 어머니는 유서에 “딸에게 (힘든) 상황을 설명했더니 엄마를 따라간다고 했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고 썼습니다. 큰 빚을 지게 한 남편을 원망하는 내용도 적었습니다.
아무리 생활고에 지쳐 있었어도 어떻게 사랑하는 딸까지 스스로 죽음의 선을 넘게 할 수 있을까요? 부모로서 겪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분명 아버지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의 경우 아버지는 필요이상으로 돈에 집착한 결과 도리어 그 돈으로 인해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도리어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예화] 모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든 마음을 치유받기 위해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집사 직분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사님의 꿈에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자꾸 배가 고프다고 말을 합니다. 집사님은 죽은 아들이 자꾸 배가 고프다고 하니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배고픈 아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거하게 장만해서 가족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가 가정으로 심방을 하고 말씀으로 권면을 드렸습니다. 꿈이나 환상을 믿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셔야 합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제 권면을 듣지 않았습니다. 또 항상 말씀보다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다 보니 믿음이 자라질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최근에는 신천지라는 이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과연 집사님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들의 영혼을 달래는 길일까요? 또 제사를 지내야만 정말 아들이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고 자신도 우울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집사님 역시 나름대로의 영적인 처방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처방이 집사님을 자신의 문제로부터 구원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청년문제의 핵심은 바로 취업할 곳이 없다는 겁니다. 청년들이 죽어라 공부해도 도무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청년들의 인생 자체에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청년(15~29세)이란 기성세대로 편입되기 직전의 젊은 새싹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젊은 새싹들이 새로 싹을 피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의 자조감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다보니 연애ㆍ결혼ㆍ출산을 포기한다는 소위 ‘삼포 세대’란 말이 나온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엔 연애ㆍ결혼ㆍ출산ㆍ집장만ㆍ꿈ㆍ희망ㆍ대인관계까지 포기한 ‘칠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노인 문제도 심각합니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갈수록 연장이 되면서 평균수명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수명이 늘어남으로 인해 생기는 노인문제입니다. 한국의 노인 분들 중 70%가 퇴직 후에도 여전히 경제적인 기반이 약하여 노후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10명 중 3명만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노후가 준비되어 있고 나머지 7명은 노후에도 돈을 벌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 분들의 삶의 질은 떨어지고 행복해야 할 노후가 짐스러운 고통의 삶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쓰라린 좌절을 맛보고 있습니다. 무조건 경쟁해서 이기면 될 것 같지만 그거야 말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 역시 진정한 인생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름대로 인생의 해답이라고 믿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 역시 오답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오답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헛된 소망을 가지고 좌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3page / 성경속의 은혜]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병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병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그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숨김없이 고백합니다. 이 병자가 가진 믿음은 헛된 것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낫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망을 예수님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가 전설과 미신에 의한 잘못된 해답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외적인 모습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낫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던 병자가 스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두 발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곧 나았다’는 말은 자연적인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초자연적인 치유가 일어났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에 의해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는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병자는 38년 동안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신과 같은 잘못된 믿음에 붙잡혀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으로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이처럼 병자가 치유를 경험하게 된 것은 그가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얻게 된 놀라운 기적은 미신이나 요행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질적인 삶의 문제와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예수님을 만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인생문제의 진정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으시고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좌절과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인생의 큰 은혜요 자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분 안에서 삶의 궁극적인 소망과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은 주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정한 해결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겸손히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속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page / 세상속의 은혜]
2천년에 호주 시드니에서 하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이때 여자 10미터 다이빙 종목에 출전한 미국의 로라 윌킨슨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실 올림픽에 나가기 3개월 전에 오른쪽 발 뼈에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7주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올림픽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7주 동안이나 연습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선수로서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라 윌킨슨의 마음도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올림픽 출전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연습을 하지 못했으니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로라의 마음에는 패배의식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렸던 올림픽에 나갈 수 없는 현실은 죽는 것만큼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로라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한 구절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이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로라에게 이 말씀을 주시면서 마음을 위로하셨고 다시 일어서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로라는 그 말씀을 붙잡고 얼마 남지 않은 올림픽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드니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올림픽 다이빙 종목은 중국의 독무대였습니다. 예상대로 중국 선수들의 기량은 대단했습니다. 모든 취재진이 중국 선수들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고 모든 카메라가 중국 선수들의 모습을 담기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예선과 준결승을 거쳐 결승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중국 선수들의 기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이었습니다. 결승전에서도 중국 선수들끼리 서로 1위와 2위를 다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로라는 종합순위 5위의 성적으로 결승전에 진출하게 됩니다. 거기까지 올라간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라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부터는 영상을 통해서 이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로라 윌킨슨의 영상 / 5분 8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로라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순종한 로라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무엇이 여러분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해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