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들뢰즈와 철학} Difference Engineer, Keith Ansell Pearson(ed.). London Routledge. 1997. pp. 211-229
기계적 연속체의 실재성에 적합한 유일한 사고는 기계적인(machinic) 사고이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자본주의 정신분열증 제 1권으로 기획된 {앙띠 외디푸스}에서 이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기계의 구성요소는 질료(matter)와 공학(engineering ; 설계)이다. 경험주의를 포함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응답하기에 충분히 조형적인 사유라는 개념은 그로 인해 철학에 대한 저주였다. 기계적인 사유는 여전히 철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구성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에 흩뿌려진 다른 기계적 구성요소로 이들 구성요소를 솎아 내려는 것이다. 재인(recognition)과 반영의 모델로 구성된 사유의 이미지는 기계주의의 특이성을 포착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기계주의의 핵심적 요소는 철학사로 대변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칸트가 세운 어떤 철학적 기계류를 어느 정도 언급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생각자체를 기계로 만들었다기보다는 기계에 관한 사유의 어떤 자율성을 전제했다는 점에서 아직 기계적인 것도 아니다.
사유를 기계화한다는 것은 니체로부터 시작되는 철학의 모서리로 향해 가는 것과 같다. 개념적 오류는 실재와 분리된 공간을 차지할 수는 없다. 비판 또한 기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잘못된 추리는 실재를 직접적으로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특정한 조건에서는 실재의 생산물의 일부로서 응답하려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적인 오류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생산조건의 산물이며, 동시에 인식의 생산조건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실재도 철학의 위대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응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재적 시스템이 갖고 있는 광범위한 구조는 철학과 연관된 단순화된 개념들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예컨대 국가를 살펴보자. 정치학등이 거대한 권력을 국가에 귀속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실재적인 현존과 실재적인 결과물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만든다. 이와 연동된 부분으로 국가가 법의 선험론적인(trenscendental) 저장고로 승격되는 인식론적 오해는 계보학적 역사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합리성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것을 사랑하나?"고 묻는 질문과 [천개의 고원]에서 "왜 선험성에는 개념적 오류가 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은 둘 다 잘못되어 있으며 부적합하다. 이 두 질문 모두 서양철학을 특징짓는 의식의 과대평가와 맞닿아 있다. 이 장 말미에서 [천개의 고원] 중에 [도덕의 지질학]에서의 들뢰즈가따리의 진단이 갖고 있는 환상(illusion)의 정확한 본성에 대해서 언급할 것이며, 추상의 사유기계와 탈영토화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기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개념 - 공학, 기계, 질료 - 은 재현이론에서의 이율배반에 지배되고 있다. 들뢰즈가 제안했듯이, 재현은 선험론적 환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개념 모두가 본질적으로 제거될 것이거나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 때때로 긍정적인 힘을 위협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설계라고 하면 철학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설계는 단지 과학의 결과물에 대한 기술적인 적용인 것이다. 철학이 실재로는 설계라는 생각은 반대되지도 않을뿐더러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다.
시작부터 공학은 기술의 가장 위협적인 발전과 상응하였다. 산업혁명시기에는 악마와 같은 기계로 통했을 정도다. 17세기 중반에 엔진이라는 말은 전쟁산업에서만 통용되었다. 전쟁기술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 다른 수준에서 작동한다. 즉, 왕립과학이라기보다는 노마드적이다. 전쟁공학은 잡동사니의 조합이라기보다는 과학이론의 물질화의 문제로 변해왔다. 이러한 기계류에 대한 생각은 칸트 철학이 갖은 특정한 정점에 도달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기계류는 구성적인 힘이나 욕망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단지 내연기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단순히 외적으로 움직이는 힘의 도구로서 작동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칸트주의자의 기계류에 따르면 시스템성은 내연기관성의 외재성과 괘를 같이한다. 그러므로 기계류가 시스템을 구성하는 한, 그들은 시스템 속에서 발견되지 않고 어느 곳에나 발견되는 연합의 조건을 갖는 초월적이고 계획적인 시스템을 기술하려 할 것이다. 칸트가 발전시킨 외재성이라함은 정밀화된 예술작품의 실존으로부터 예술가의 실존에 이르는 전통에 따른다. 기계류는 항상 결핍되어 있고 원동력과 구상력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 기계류는 위협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기계화는 산업혁명에 대한 반동적 거부의 지배적인 무기이다. 버크(Burke)와 엘리엇(eliot)에 따르면 경제적 충돌하에 있는 사회의 해체는 기계류와 관련된 수식어구를 갖는다. 즉, 합리화, 전산화, 하이데거의 techne, 비인간화 등이 그것이다. 유기적인 것과 대비되는 사회적인 것의 전환은 유기적인 것과 대립되며, 기계류를 통해 연합의 본질적인 원칙을 텅비게 만들어 버린다. 기계에 대한 기술적인 도그마에 따른다면 연합을 제보증하려는 시도는 외재적으로 부과될 뿐이며, 이를 통하여 그들의 전환에 따르게 된다. 탈가치화되고 부정적으로 정의된 재현이라는 개념은 이율배반적으로 긍정적이며, 긍정적으로 위협적인 활동이 된다.
그러나 이율배반의 구조는 질료에 대한 사고를 철학적으로 취급하는데 있어 가장 명백하게 보여질 수 있다. 질료는 철학적인 전통에서 탈가치화된 개념이다. 질료는 정확하게 비물질적인 속성을 부여받은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 선험적인 것으로 반복적으로 정의된다. 즉, 질료는 운동성이 없고, 생명력이 없으며,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로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질료를 생산해 낼 수 없듯이 텅빈 비인지적인 질료가 사유하는 지적인 존재를 생산해 내는 것을 인식해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의 자신의 강도를 통한 질료는 그 자체로 운동처럼 생산될 수 없다. (로크 1690: Ⅳ Ⅹ. 10)
칸트도 동일하게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살아있는 질료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관한 바로 그 생각은 적대에 관련된다. 왜냐하면 질료에 대한 본질적인 성격은 생명력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kant 1790 : §73; Ak. 5: 394)
파스칼은 '질료가 그 자신을 안다고 말하는 것만큼 인식불가능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 위협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질료의 수동성이다. 칸트는 살아있는 질료의 가능성은 모든 자연철학의 죽음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질료는 순수한 일신교의 목적론의 환자일 뿐만 아니라, 카오스의 순수한 행동이다. 카오스의 위협의 질료이다. 즉, 질료가 갖고 있는 이 위협한다는 개념이라는 중립화는 죽어 있는 활성의 질료라는 배치의 조건이 된다. 밀턴의 실낙원 4장에서 그는 카오스의 형태없는 활동성에 대한 억압이 갖고 있는 선-창조적인 행동에 연관된다. 밀턴의 신의 역할은 둘러싸는 우주의 역할이며, 무한한 카오스적 바다를 보유하며, 그것에 경계를 부여하며, 카오스적 바다를 적용가능한 에너지의 저수지로 바꾸는 것이다. 밀턴의 신은 측정불가능한 심연의 활동적 물질성에서 죽은 질료를 생산해 낸다. 창조란 해양과 야성의 비반응적인 활동성을 억압하고 발육을 저지하고 억제하는 것으로 복무하는 선-창조적인 운동인 것이다. 창조란 발생을 설계하는 계획에 따라 진행되며, 무기력하고 비활성적이며, 병들고 수동적인 원초적인 질료를 제공한다.
각각의 경우에서 그것들은 일정한 가능한 내용과 결과에 관해 부재하다. 그리고 그 밖의 어떤 것은 그것들을 넘어선 분리되어 있지만 인도하고 통제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 그것들은 불가능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철학적인 영토가 된다. 공학은 그것이 적용되는 것처럼 인식론적 과학에 완전히 종속된다. 예컨대 기계는 외적인 힘에 종속된다. 그리고 기계 자체가 단순히 도구로 존재하는 선험적인 telos로 작동한다. 질료는 그것이 할 수 있는 것과 분리되어 단지 형식에 대한 병자일 뿐이다. 적용이랄지 도구랄지 환자라는 용어의 비효과성을 반대하면서, 또한 각각의 용어는 저번에 깔린 복잡성과 뿌리깊은 비타협성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래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발견은 고상한 물리학이나 덜 인식되어 왔던 공학의 실험실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본체는 점점 더 그러한 복잡한 체계를 드러내게 된다.
칸트의 방법론은 두 개의 크고 관련된 실수를 드러낸다. 첫 번째는 칸트의 사유의 선험론적인 구성요소가 선험론적인 것의 자율성을 생각해 내는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칸트의 선험론적인 것은 들뢰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듯이, 여전히 단지 경험적일 뿐이다.
칸트가 소위 선험론적 구조를 심리적 의식이라는 경험적 행위로부터 따라 갔다는 점은 분명하다. 즉, 이해의 선험론적 종합은 직업적으로 경험론적 이해로부터 도출된다. 이러한 분명한 절차를 숨기기 위하여 칸트는 두 번째 판에서 이것을 억누르려 한다. 그것이 최대한 감추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심리학을 통해 추진된 방법론은 존재한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반은 들뢰즈가 공통감과 선의지의 연결지점으로 기술하였던 것의 기반이다. 이것을 문제시하는 이유는 심문해 볼 필요가 없는 전제조건을 심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칸트주의의 비판적 측면은 칸트 그 자신이 창안했던 과제를 통해 수행되는데 실패하였다. 들뢰즈는 '우리는 기반하여 구축된 것이 이전에 있었던 것, 기반하지 않았던 것, 기반하는 것의 시럼을 통과하지 않았던 것을 보유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들뢰즈 1968 : 154) 가장 효과적인 비판은 그것의 반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칸트의 시도는 그러하지 않고 그것을 도로 보충한다.
사실상 비판적인 작업은 공학을 단순한 적용으로 보고, 기계를 단지 도구로 보고, 질료를 단순히 환자(patient)로 보는 그런 도그마적인 오성을 제공해 준다. 칸트가 완전히 죽어있는 질료를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를 도그마적으로 기계적인 것인 선험론적 생산물에 대한 생각으로 묶어내야 할 것이다. 칸트에게는 자연이란 생산물이다. 즉 설계(engineering)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경험주의와의 절단지점이다. 그의 자연에 대한 공학의 모델은 특히 자연의 연합체가 자연 자체에 외재적으로 사고되기를 원한다. 자연의 구성과 통제된 의도의 외재성이나 기계에 대한 사용이라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 칸트의 모델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제기되는 설계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과학에 대한 적용방법과 관련된 도그마적인 적용일 뿐이다. 순수한 선험적인 기하학과 수학을 세상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선험론적인 이상주의가 해결될 가능성인 것이다. 그 대답은 학문(wissenschaft)이다. 즉, 역동성으로 묘사되는 자연의 구성물에 대한 반응인 오성에 대한 순수한 개념인 것이다.
결과물은 순전히 기술적인 기계주의이다. 수학적으로 계산가능한 과학이 전제되며 질료는 과학의 단순한 수용으로 사고되며, 공학은 적용으로 이해된다. 남아있는 공학의 문제는 칸트에게 어떠한 어려움도 야기하지 않는다. 출발부터 칸트는 어떻게 과학이 적용가능하며, 어떻게 실재적인 것이 과학과 관련하여 소모적인 성격이 되어 왔는가를 확증할 수 없었다. 실재적인 것은 개념적인 결정을 벗어난다. 현존에서 특이한 힘이 있으며, 현존에서 개념에 의해 특별하게 취급되더라도 저항하는 본능을 가진 현존의 완고함이 있다. 즉, 거기에는 항상 반역적인 질료가 있기 마련이다. (들뢰즈 1968 : 13-14 ; 264) 칸트는 계산가능한 개념화와 과학의 결과물로 자연에 대해 설계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기계류의 불가능한 다른 부분을 제기한다. 그는 우리에게 두 가지 추론을 제시하는데, 도식주의를 통해 시간-결정의 추론과 공간결정의 추론이 그것이다. 그 모든 것은 판단력 비판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칸트는 자연의 산물의 문제를 공학의 문제로 파악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계주의를 무비판적이고 순전 기술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풀어낼 수 없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주의적 기계류에 대한 비판이며, 사고자체도 기계가 될 필요가 있다고 요구하는 비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을 들뢰즈가따리가 작동시켜 내고 있다.
비판은 또한 역사와 계보학이다. 거기에는 이러한 비판에 놓여 있는 모든 물질적인 역사 또는 물질의 역사가 있다. 어떤 것이 연속체로부터 추출된다. 연속체는 편편해 진다. 어떤 것은 편편한 것 위에 높이 걸리게 된다. 재료는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된다. 거기에는 이제는 그 밖의 어떤 것이 활동하게 될 재료가 있다. 이중적인 실행이 다양한 수준에서 또다시 반복된다. 즉 플라스마로부터 에너지와 재료의 분리가 그러하고, 재료의 덩어리로의 응집화가 그러하다. 전제군주는 유일신의 종교에서, 개인적인 의식에서, 국가에서 머무른다. 일단 재료는 환자다. 그리고 그 밖의 곳에서 언급되기 위하여 나타나는 능력이다. 그러면 기계는 기술적인 것이 되고 공학은 완전한 적용이 된다.
모든 것은 위험하다. 모든 철학적 가정은 연속적이며 이러한 분리를 가정한 용어 속에서 이해되기 적합하다. 모든 탈영토화는 재영토화되기 적합하다. 질료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는 행동처럼 질료의 비인식가능성은 긍정적인 독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질료의 활동성은 규범적으로 비물질성을 부여받은 활동과는 다른 것이다. 철학의 무능의 정도는 활동적인 질료가 전통이 내재적 물질성을 버리는 정도의 징후 정도만은 아니다. 질료에 부여받은 활동성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영원히 활동의 종류로 고쳐진 존재의 위험 속에서 있다. 그것은 물질적 생산양식이 무비판적으로 생산물의 기초로 이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내재적인 질료는 물활론과 혼동된다. 질료에 내재하는 능력을 분배받고, 유일한 지점에 그것을 집중시키는 것의 결과인 활동은 질료로 삼투된다. 전통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질료의 불합리성은 바로 분석적인 선험성이다. 일단 활동이 유일하게 집중된 지점으로 정의된다면, 일단 계획이 목적론적 지성과 친밀해 진다면, 그것은 이들이 질료 속으로 분배된다는 점이 파악불가능해지고 만다. 따라서 전통이 질료가 가질 수 있는 활동성을 표현하고자 의도할 때, 그것은 이미 우선 활동(의식, 사고, 지성)과 분리된다. 활동성이나 생산에 대한 고려는 그것 자체의 생산물을 전제할 수 없다. 물질성의 이율배반이나 기계주의와 공학은 활동이 그것의 주체로서 작동하는 유일한 지점으로 집중한다는 점에 따라 단일한 기본적 오류추리를 통해 생성된다. 각각의 경우에 생산물은 오래된 물질적인 역사를 통해 제한된 조건 하에서만 사실상 그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의 기원으로서 역행하여 삼투된다.
그것은 비판에 대한 복잡한 개념이며 개념적 구성요소와 역사적-기원적 구성요소를 포괄한다. 한편으로 개념적 오해는 실질적 체계의 기능을 불가능하게도 체계를 위협하고, 그것을 외부로부터 통제하는 어떤 것과 혼동하는 정도에 따라 연루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 자체를 오해하게끔 만드는 체계는 기계적으로 설계된 질료의 실질적인 배치이며, 마찬가지로 그것은 분석될 만한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이 두 가지 비판의 구성요소를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작에서 비난한다. 들뢰즈는 거기에는 감각적인 환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험론적 물리적 환상도 존재한다고 제기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환상은 불가피한 엔트로피의 증가이다. 그러한 환상은 왕립과학이 갖고 있는 광범위한 물리학의 공모를 표현한다. 차이는 그것이 순수이성의 명령을 통해서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통계적인 물리적 과정의 기술적 결과물에 의해서 오래 지속되는 정체성이다. 실재적인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만큼이나 다양성은 이성이라기보다는 자연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선험론적인 환상이 있다.
강한 양들에 속박된 환상이 있다. 이러한 환상은 강도의 차이는 제거되는 운동이다. 그것은 분명하게 제거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실재로 제거되지만 그것의 외부에서만 그것의 범위에서만 제거된다. (들뢰즈 1968 : 240)
선험론적인 물리적 환상이 있다. 실재로는 지층이다.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와 가따리에 의해 활성화된다. 그것 없이는 그들의 텍스트에 기계적인 관련은 여전히 계몽 형태를 유지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들뢰즈에 대한 베르그송의 중요성이다. 수많은 지층- 물질적, 생명공학적, 사회적 지층 - 으로 기계화되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층으로 설계된다. 거기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지층은 기관없는 신체이며, 강렬한 연속체이며, 내재성이다.
이러한 선험론적인 물리학적 환상은 인간도 기계적으로 구성된다는 모순적인 논증 쌍인 들뢰즈가따리의 prima facie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실재로 선험성에 내재하는 것은 설계된 그것 자체이며 그러므로 이미 기계적인 것이다. 과정을 설계하는 일반적인 경우의 전체적인 경향은 선험성의 소모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의 시스템은 동시에 기계가 됨이다. 기계주의는 지층적인 선험성과 영속적인 탈지층화 둘 다를 설계한다. 지층은 거대한 탈영토화의 운동의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재현이론을 구성하는 선험론적 환상의 집합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실재적인 것과 강렬한 연속체에 기반한다. 강도로서의 질료는 연장 속에서 그 자체를 표현한다. 즉, 기관없는 신체는 그밖의 어떤 것으로부터의 도움 없이 그 자체를 지층화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상은 선험론적 물리적 환상이다. 외연적인 시스템을 기술한다는 것은 지층화되었지만 여전히 내재적인 시스템의 산물에 부여된 물질적으로 설계된 기계류의 계통학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인식은 가장 지층화된 피드백 시스템이다. 인식이란 그 자신의 생산조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설계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그 어떤 것을 위해서 설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설계되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내재적인 기반을 무시하고 실재적인 구성으로서 선험론적인 물리적 환상을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선험성의 내재적인 기반을 지나치는 것은 지층화된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심리철학자 다니엘 데넷(Diniel Denett)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일정한 용어를 제공한다. 거기에는 skyhook가 없다. 거기에는 크레인이 있을 뿐이다. 크레인(crane)이란 skyhook처럼 초월성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 시스템에 대한 내재적인 기계적 설명이다. 크레인은 과정의 촉매제이다. 자연적인 선택은 아마도 크레인 페러다임이다. 크레인의 사례는 유전학적 공학을 볼 수 있다. 공학은 돌연변이율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선택을 위한 공간적인 최적 조건을 설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유전학적 공학이 천천히 진화하는 과정보다 이른 전체적인 산물인 것이다. skyhook는 문제가 되는 신비로운 선험성의 간섭을 통하여 끌어올리는 현상(crane phenomena)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생물학적 사유의 가장 큰 경향은 목적론이라는 형태로 생물학적 세계에 대하여 의인화를 특징으로 하는 계획성을 투사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초-다윈주의 즉, 이기적인 유전자이론(Dawkins 1976)으로 패러디되었다. 초다윈주의자의 저작들에서 계획성과 이해요구(interest)라는 용어는 잘못 이해되어 왔다. 물론 유전자가 이해요구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더킨스의 저작의 실수는 많이 이해되어왔다. 그 상황은 들뢰즈가따리의 활력론과 정확히 유사하다. 또는 쇼펜하우어가 세계를 자발주의의 의지로 본 것과도 유사하다. 의도와 활력과 자발성은 물질로부터 분리된 이후에 그 외부에 있는 초월적 자연이라는 상상적 지점으로 투사된 활동성을 위한 명칭이다.
흥미를 가질 지점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더킨스 이상으로 데넷이 얼마나 많이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문화는 크레인이다. 그것들은 기계주의적 과정을 자기 수집의 집단으로 만들기 위한 아니러니한 짧은 시도였다.
진화론적 설명으로부터 면제된 우리자신의 실재적인 마음의 산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므로 다윈의 생각은.....우리 자신의 저자에 대한 환상을 해체시키면서 모두 사라져간다. (데넷, 1995: 63)
더킨스가 착목했던 부분은 인간도 이해요구를 갖는다는 생각이다. 더넷은 어떤 이해의 기반도 파괴해 버린다. 영장류의 활동을 더 진행하여 철학적 작업 즉, 기계적인 사유를 포함시킨다. 더킨스는 엄격하지만 의식적으로 제한된 방식으로 화장된 표현형태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의 연구는 유전자가 동물의 코드라는 특이한 생각을 연구한다. 유기체의 외적인 반경은 임의적이다. 제한된 경우의 집합으로 보자면 외적인 형태학으로부터 동물적인 생활방식과 동물적인 인공물을 통해 다른 종의 유기체주의의 생활방식과 표현에 대한 한 유기체의 유전에 대한 표현적 영향까지 그러하다. 더킨스는 어쩔 수 없이 제한된 '확장된 유전학'에 대하여 논의한다. 디자인 공간의 단위는 모든 인공적인 산물을 비개인적으로 설계된 프로그램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크레인 선험성에서 내재적인 것이다. skyhook는 선험적이다.
언어학과 추상적 표현주의는 재현의 조건을 가진 철학적 추상을 인식적으로 근대형태로 보는 오랜 강박관념을 전개시켜 왔다. 가따리는 언어학을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너무 추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판한다. 모든 것은 언어로 재현된다. 다른 한편 언어와 동일한 수준에 비언어적 요소 즉 가따리가 존재론적 이질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포괄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다. 유사하게 들뢰즈는 재현이 일반적으로 추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사고의 이론은 그림 그리기와 같다, 그것은 추상의 재현으로부터 예술을 끄집어내는 혁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추상이 그 자체는 너무 추상적이라고도 비판한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비유기적이고 유기적이고 문화적인 지층에 조응하는 탈지층화와 재지층화의 연속을 기술한다. 그들은 각각의 지층을 내용과 표현의 차별적인 분배에 기반하여 특성화한다. 특히 표현은 점점 더 자율적이게 된다. 유기체의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둘 다가 되며 표현은 내용으로부터 독립적인 노선이 된다. 마지막으로 음성적인 기호는 일단 표현이 내용에 독립적이라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표현의 형식이 내용의 실체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된다는 면에서 초선형성과 시간적 선형성을 획득한다. 이 거대한 탈영토화는 위험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적인 사유에 특히 중요한 면을 갖는 기계적 추상에 대한 사고로 형식화된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이형성의 산물에 대하여 할당하는 탈영토화는 내용의 형식으로부터의 표현뿐만 아니라 내용으로부터 일반적인 표현을 갖는 형식의 자율성의 증대에 의해 양산된다. 이러한 탈영토화는 데넷의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분석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데넷은 자연적 선택을 연산(algorithm)적 과정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컴퓨터화될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일축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네가지 이류에서 추상기계에 대한 좋은 생각이다. 그는 분명하게 그의 연산이라는 정의에서 발견교수법(heuristics)을 포함한다. 둘째로 자연선택은 변이의 형태에서 차이로 무작위적으로 뿌리내린 정도에 따른 과정이다. 셋째로 자연적 선택은 특별히 어떤 것에 대한 연산이 아니다. 그것은 자동사(intransitive)이다. 네 번째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극도로 독립적인 기준이라는 점이다.
조금 오래되었지만 생명공학에서 흥미를 갖고 있는 문제는 생명복제의 기원에 대한 문제이다. 기계적 목사는 다양한 영역에서 수단을 제공해 준다. 예컨대 카이른 스미드(Cairns-Smith)는 엄밀하게 생명공학적인 복제자는 다양한 지층에 끼워 넣어진 더 오래되거나 덜 정교한 복제자의 기생적 인수인계의 결과이다. 기계는 탈영토화되고 더 추상적이게 된다. 그것의 코드들이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으로 유출될 때 그러하다. 기술-과학적 기획으로부터 탈영토화된 공학적인 경향이 연결접속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언제나 서구의 꿈이었다. 즉, 지식의 순수한 독재상태가 말이다. 서구에서는 기술관료가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선험성이야말로 특히 유럽의 질병이다라고 들뢰즈가따리는 말한다. 최근에 인간게놈 프로젝트은 70년대 인공지능프로그램과 괘를 같이 한다. 인곤지능은 논리적 모델을 산출하고, 컴퓨터 순환의 연결논리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 한다. 마찬가지로 배아논리적인 전개도 전개과정에 기술적 개입을 위하여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하여 차례로 지도를 그린다.
들뢰즈가따리는 결코 강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내용과 표현사이의 조응과 만족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기계적 사고와 엥글로-아메리카의 분석적 공학철학의 동맹은 얼마간의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철학적 이율배반에 대한 논의는 서구에서는 이원론으로 바뀐다. 가치와 사실, 자율성과 이질성, 비결정론과 결정론이 그러하다. 들뢰즈의 저작에 대한 미학적 접근은 그 비판의 정도를 중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가따리의 저작이 미학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홈볼트에 의해 착수된 대학의 재조직화는 직접적으로 기계주의에 대한 응답이었다.
첫댓글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