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 시인
달에 가는 기차 - 김상미
바람난 모자 무시무시한 무더위가 한풀 꺾인 토요일 오후, 인사동에서 신현정 시인을 만났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인 〔바보사막〕(랜덤하우스)을 축하해 드리고 싶어서이다. 한줄기 청량한 바람처럼 기분 좋고 유쾌한 시집. 어느 페이지 어떤 시를 읽어도 마음이 지붕 위로 구름 위로 하늘 가까이로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게 만드는 시집. 참 천진하고, 깊고, 자유로운 시집. 시집 제목처럼 재미있고, 아프고, 모래 위의 향연처럼 비장하고 애틋하고 아름다운 시집,〔바보사막〕. 나는 그 시집을 읽으며 눈과 마음과 몸이 확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하여 그의 시 〈바람난 모자〉에서처럼 〔바보사막〕을 가슴에 쓰고 즐겁게 그를 만나러 나갔다.
모자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휘파람새 같은 것으로
너구리 같은 것으로
물고기 같은 것으로
아니 사르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푹 눌러쓰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쓰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악어 같은 것으로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 〈바람난 모자〉 전문
그는 웃는 모습이 일품이다.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 소년같이 맑고 천진스럽다. 예순 살 먹은 소년이랄까. 온 마음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 뒷주머니에 ‘악어 같은 것’이 들어 있어도 휘파람새처럼 노래하며 악어와 함께 놀 소년 같은 모습이다. 시인이 아니었음 큰일 날 뻔한 사람이다. 그런 그와 함께 나는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반주도 한두 잔 하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술이라면 절대 사양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애석하게도 지병 때문에 술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와 마주앉아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서울 왕십리 근처에서 태어나 지금 살고 있는 삼송역 근처로 이사오기 전까지 내내 그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는 그. 그런 그가 풍광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뜻 이곳 응달마을로 둥지를 옮겨 앉았다. 그러면서 20여 년 잃고 있던 시심을 다시 되찾았다. (그는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1983년 첫 시집 〔대립〕을 출간한 후, 거의 20여 년을 시와 단절해 살다가 2003년 두 번째 시집 〔염소와 풀밭〕을 내면서부터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발하게 시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 5년 사이에 시집을 3권이나 출간했으니 그의 시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치열한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게다가 세 번째 시집인 〔자전거 도둑〕으로는 ‘신현정 매니아’층을 만들어내면서 단시간에 한국 시사에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스타일로 우뚝 선 시인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시란 무엇일까? ‘바보사막’, 아니면 ‘멀리서 더 멀리서 오는 고래’ 같은 것? 아니다. 그런 추상적인 것보다는 더 달콤새콤한 ‘그리운 마름모꼴의 박하사탕’이거나 ‘예쁜 별 모양의 별사탕’ 같은 게 아닐까? 그래야만 ‘새 가슴 모양을 한’ ‘참, 아슬한 벼랑을 지닌’ ‘오오래 녹여 먹어야 하는 행복’이 되지 않을까? 그래야만 강아지풀하고도 놀고, 역광하고도 놀고, 빨래, 빗자루, 토끼, 수평선, 염소, 오리, 장수하늘소, 잠자리, 맨드라미, 분꽃, 지붕, 해태, 와불, 여기저기…, 저 높은 하늘에서 하나님도 끌어내려 함께 놀 수 있지 않을까?
왜 박하사탕은 새 가슴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너의 입 안에 환한 마름모꼴 한 개를 넣어주었다
얘야, 참, 아슬한 벼랑, 오오래 녹여 먹어라. - 〈박하사탕〉 전문
시인기러기아빠 그는 자신을 미학주의자라고 말한다. 가슴 밑바탕에 시시포스를 품고 사는. 그리고 그 페이소스의 힘(매번 바위를 끌어올렸다가 다시 굴리고 또 다시 끌어올렸다가 다시 굴리는)으로 시를 쓰고, 그 시를 즐긴다고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거울에 비쳐보는 나르시시즘 개결미! 하여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시를 읽고 눈물 대신 행복한 마음을 갖기를 원한다. 나는 그런 그가 참 부러웠다. 자신의 슬픔과 절망을 박하사탕이나 별사탕을 녹이듯 살살 녹여 그곳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낼 줄 아는,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천년 이상 침묵만 하고 묵묵부답인 운주사 와불 앞으로 가 당당하게 맞장을 뜨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다.
나 운주사에 가서 와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와불이 누우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게 무심코 내쳤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와불〉 전문
그는 현재 깻잎도 키우고, 호박도 키우고, 상추도 키우면서 ‘바우’와 ‘아톰’이라는 개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부인과 아이들은 모두 캐나다로 이민 가 혼자서 꿋꿋이 응달마을의 둥지를 지키고 있다. 너무나 외롭고 쓸쓸한 집 안팎을 시의 기운으로 꽉꽉 채우며 살고 있다. 이름하여 시인기러기아빠! 그래서일까? 명랑, 재미, 해갈, 풍자, 유머, 산뜻, 싱싱, 생명감… 충만한 그의 시들을 읽으면서도 왠지 모를 적막이 문득문득 내 마음을 치고 가는 것은.
나는 고슴도치가 슬프다
온몸에 비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을 보면 슬프다
그렇게 하고서 웅크리고 있기에 슬프다
그 안에 눈 있고 입 있고 궁둥이 있을 것이기에 슬프다
그 몸으로 제 새끼를 끌어안기도 한다니 슬프다
아니다 아니다
제 새끼를 포근히 껴안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니
나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 -〈고슴도치는 함함하다〉 전문
마치 그의 자화상 같은 한 편의 시. 누가 고슴도치를 보며 이처럼 처연하고 사랑스럽고 순발력 있는 시를 쓴 적이 있었던가. 〔바보사막〕이라는 한 권의 시집에는 이와 같은, 이보다 더 크고 빛나는 시들이 많이 있다. ‘뼈가 보이도록 투명하고’ ‘끊임없이 들녘을 허물고 있는 바람’을 타고 달리는 은빛 자전거 페달 같은 시들이. 바보사막 사막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바보이기는커녕 위대할 정도로 영리하다. 그런 사막을 향해 그는 감히 ‘바보사막’이라고 말한다. 왜냐고? 사막은 가도 가도 사막이고, 끝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막을 그는 건너가고 있다. “… 사막여행은 그냥 떠나본 것이다. 미안하지만 하도 심심한 나머지, 하품이 나고 두지개가 틀어지고 급기야는 몸 둘 바를 몰라서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왜 거길 가는가라는 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여행은 내 심장을 더욱 크고 붉어지게 했다. 그런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는 ‘낙타는 나에게 먹히고 나는 사막에 먹히고 사막은 사막에 먹히는…’ 이 우아한 짓거리를 언제까지고 계속하고 싶었다. 이래도 바보사막이 아닌가.”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 〈바보사막〉 전문 “이렇듯 그의 시는 겉으로 보면 담담하고 산뜻하나 그 속마음을 짚어보면 처연하다. 달리 말한다면 담담한 것도 처연함 뒤에서이고, 산뜻한 것도 그 처연함의 힘에서이다.”라고 황현산 평론가는 말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시집을 읽으며 많이 즐거워했다. 아주 작은 미물(굼벵이)조차도 그의 시 속에선 모두 기꺼이 ‘모래 위의 향연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그의 시 〈빨간우체통 앞에서〉를 보라. 얼마나 귀엽고 순한 득도인가. 시 한 편 한 편이 달에 가는 기차가 되어 그대, 그대들의 탑승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 〈빨간 우체통 앞에서〉 전문
## 신현정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서라벌 문학상과 한국시문학상 수상. 서라벌고등학교 국어교사, 카피라이터를 거쳐 현재 편집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시집으로 〔대립〕〔염소와 풀밭〕〔자전거 도둑〕〔바보사막〕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