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상주
* 산행일시 : 2023년 05월 08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 산행코스 : 신의터재-윤지미산(인증)-화령재-봉황산(인증)-비재-갈령삼거리(인증)-(접속)-갈령(약24.4km/11시간)
* 산행시간 : 02:26~11:15 (산행 8:49분/휴식시간:0시간 27분)
* 산행속도 : 3.11 km/h
* 산행거리 : 26.05km
* 날씨 : 흐림, 비
* 기온 : 8~15
* 약수터 정보 :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100대 산 정보 :
* 산행난이도 : 고도차:중 , 거리:중상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정말 많이 들어본 산들의 이름이다.
명절 때이면 이곳 상주에 가는데.
그래도 가끔 가는 산들을 오늘은 백두대간으로 걷는다.!
주중에 날씨가 금요일까지만 비가 오고서 일요일은 좋다고 했는데..!
토요일 늦게까지 비가 오더니 결국 일요일에도 잠깐씩 비 소식이 있었다.
신의터재에 도착을 했다.
이곳 신의터재는 상주 화동쪽이라서 서울에서 가까워서
들머리에 2시 30분경 도착을 했다.
들머리에 너무 빨리 도착을 하는 바람에 버스에서 잠을 잤어야 했는데.
1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바람도 있고 기온은 7도 정도 되는데 제법 쌀쌀하기도 했다.
일전에 낮시간에 이곳에서 종료를 했는데.
이제는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이번 산행으로 상주 쪽으로는 다 끝나고 앞으로 몇 구간 남지 않았는데.
소백산 끝 부분으로 다음에 시작된다.
[신의터재] 280m
이 고개는 '지방의 관리나 귀양중인 옛 벼슬아치들이 나랏님(御)으로부터 승진, 도는 복직 등 좋은 소식(義信)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개'였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라하여 '어산재'라고도 불린다.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 이라 불리었고, 임란때 의병장 김준신(金俊臣)이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이 되어 상주진에서 많은 왜군을 도륙하고 임란 4월 25일 장렬하게 순절한 후부터 이곳을 신의터재라 불리었다. 왜군들이 김준신 의장의 고향인 화동면 판곡리를 찾아 김씨 일문을 멸하려 하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곳이 낙화담이라 한다. 이곳에는 고 이은상 선생의 비가 있다.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나네..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의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일제때 민족정기를 말살한다고 "어산재"로 개명되었고 문민정부 수립후 광복50주년을 맞아 옛이름을 되찾고 이곳에 표석과 의사비를 세워져 있다. 화동면 주민들은 화동재라고 부른다.
오늘은 화령재에서 아침을 먹을 예정인데 화령재까지 12km 정도 되는 것 같다.
비가 와서 풀들과 함께 나뭇가지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어서 발토시를 긴 것으로 가지고 왔다.
제일 앞에서 길잡이를 하면서 스틱으로 물기를 제거하면서 산행을 하였다.
무지개산이다.
이곳은 백두대간 길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가는데 몇 명만이 이곳 무지개산을 들렀다 왔다.
나중에 앞사람을 따라잡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의 3.5KM 정도 지나서 일행들과 합류를 했다.
따져보면 600M 차이만 있는데 걸음들이 빠르다 보니
앞사람을 따라잡는데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무지개산] 473m
선교리와 어선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대간에서 북동쪽으로 400m쯤 벗어나 있다. 서쪽 사면인 금강수계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북, 동, 남쪽은 험악할 정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산이름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폭포에서 유래했다. 무지개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폭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낙화담, 철새도래지, 판곡저수지 등이 있다.
무지개산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있는 육산이다. 야트막하면서 빼어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지개만큼이나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그러한 산의 하나다. 밤원고개 북쪽의 발치는 갈령에서 남하한 상주에서 가장 긴 내 이아천이 살짝 핥다가 함창으로 북진한다. 밤원에서 하우산까지의 소위 우산(愚山) 칠리강산(七里江山)의 시작인 것이다. 산이름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폭포에서 유래했다. 무지개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폭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낙화담, 철새도래지, 판곡저수지 등이 있다.
무지개산에서 어찌어찌 빨리 갔지만 결국 윤지미산 오르막에서 일행들을 따라잡았다.
요즘 산 정상에 가보면 이런저런 정상석이 정말 많다.
대표로 하나만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 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정상석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어지럽다.
다 치워버리고 대표 하나만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다.
특히 정맥길을 가다 보면 인쇄한 글씨로 정상이라 쓰인 표지판이 몇 개씩 붙어 있는데.
정말 보기 싫다.
[윤지미산] 538m
원래 소머리산이라고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는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써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장봉으로도 불린다.
판곡리 판곡저수지 북쪽에 있는 산이다. 서쪽으로는 경사가 급하지 ?ㄴ아 농경지가 즐비하지만 동쪽은 경사가 급하여 침엽수 등 경제림만 빽빽하게 심겨져 있다. 이 지역은 대간의 등줄기에 묘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쪽 아래로 판곡저수지와 제법 너른 들이 펼쳐진다. 대간 종주 중에 드물게 관찰되는 논농사지역이다.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다. 특별한 유래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정표 옆에 세워둔 정상석이다.
이 정상석은 아마도 시나 산림청에서 세워둔 정상석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정상석 이 정상석은 누군가 돌을 들어다 놓고서 매직으로 써 놓은 듯하다.
또 하나의 정상 표지판.
아래에 보면 산악회에서 만들어 놓은 정상석인 듯하다.
잠시 임도로 내려와서 조금 걷다가 산으로 향한다.
화령재로 향하는 길이다.
가끔씩 이렇게 조망이 된다.
화령재나 아니면 신의터재에서 이 표지판을 보고서 택시를 부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곳에 둥굴레와 함께 이렇게 은방울 꽃들이 정말 많다.
은방울꽃은 아직 조금 이르고 이렇게 어쩌다 하나씩 핀 은방울 꽃을 담아 보았다.
〈산마늘과 은방울꽃 구분〉
주름과 잎줄기의 형태 등이 차이가 있지만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뜯어보는 것이다.
산마늘은 쌈채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그만큼 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엄지와 검 지로 잎의 가쪽을 잡고 당기면 뜯어지지만 은방울꽃은 조직이 질기기 때문에 찢어진다.
이것만 기억한다면 산에서 산마늘과 은방울꽃을 혼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별로 유사하지 않지만 가끔씩 오인을 받는 식물로 박새와 여로가 있는데 이 둘 다 유독식물로 주름이 많이 있고 훨씬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한 번만 보아두면 별로 헷갈릴 염려는 없다.
산마늘은 생약명으로 격총이라고 하며 다른 이명으로는 산총(山蔥). 식물 전체에서 강한 마늘 냄새가 난다 하여 이름 지어졌고, 이 풀을 먹으면 장수한다는 뜻으로 <명이>라 불리고, 울릉도에서는 옛날 춘궁기에 구황 식물로 사용하여 명(命)이라고 부른다 멩이. 맹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는 이른 봄에 먹는 중요한 산나물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때 울릉도로 이주한 1백여 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겨울 동안 육지에서 가져간 식량이 떨어졌는데 기후가 안 좋아 배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이들이 굶어 죽을 위기 속에서 발견한 것이 눈을 뚫고 돋아난 산마늘 싹이었다고 한다. 싹과 뿌리를 캐서 먹으며 석 달 정도의 긴 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발아한 후 최소한 3~4년이 지나야 뿌리가 맛이 들고 제대로 숙성하려면 10여 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뜻한 곳으로 가져와 재배하면 여름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고 만다. 이 때문에 인공재배 역시 기후가 서늘한 해발 6백 미터 이상의 대관령지역 고랭지에서 이루어진다. 잎은 호텔의 식당에 고급요리 재료로 들어간다.
주로 울릉도, 강원도의 고산 지대에 자생을 한다. 그 외 지역에서도 고산지대에 부분적으로 자생하는 곳이 있다. 울릉도 지역에서는 낮은 곳 낙엽수림 하부에서부터 성인봉 정부까지 자생하고, 내륙에서는 가리왕산, 오대산, 점봉산, 지리산, 덕유산 등 해발 1,000m 이상 높은 산 정상부근에서 자란다. 산마늘의 잎과 부드러운 비늘줄기를 상식(常食) 하면 강장, 건위제가 되며, 봄에 채집하여 된장에 묻어 두고 동절기에 먹으면 장수의 비결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때 울릉도로 이주한 1백여 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겨울 동안 육지에서 가져간 식량이 떨어졌는데 기후가 안 좋아 배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이들이 굶어 죽을 위기 속에서 발견한 것이 눈을 뚫고 돋아난 산마늘 싹이었다고 한다. 싹과 뿌리를 캐서 먹으며 석 달 정도의 긴 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발아한 후 최소한 3~4년이 지나야 뿌리가 맛이 들고 제대로 숙성하려면 10여 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뜻한 곳으로 가져와 재배하면 여름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고 만다. 이 때문에 인공재배 역시 기후가 서늘한 해발 6백 미터 이상의 대관령지역 고랭지에서 이루어진다. 잎은 호텔의 식당에 고급요리 재료로 들어간다.
주로 울릉도, 강원도의 고산 지대에 자생을 한다. 그 외 지역에서도 고산지대에 부분적으로 자생하는 곳이 있다. 울릉도 지역에서는 낮은 곳 낙엽수림 하부에서부터 성인봉 정부까지 자생하고, 내륙에서는 가리왕산, 오대산, 점봉산, 지리산, 덕유산 등 해발 1,000m 이상 높은 산 정상부근에서 자란다. 산마늘의 잎과 부드러운 비늘줄기를 상식(常食) 하면 강장, 건위제가 되며, 봄에 채집하여 된장에 묻어 두고 동절기에 먹으면 장수의 비결이라고 한다.
화령재이다.
오늘 이곳에서 일출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했지만 날씨가 흐려서 결국 일출은 보지를 못했다.
가끔씩 비가 오는 바람에 정말 춥기도 했다.
[화령재] 320m
백두대간 1,425km 중 상주 구간은 69.5km이며 화령은 고려 때 이곳 일대를 관할하던 화령현(化寧縣)의 지명이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여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조령, 남으로 추풍령과 연하여 화령으로 불려 왔다고 전한다. 신라 때는 연비군(蓮匕郡), 경덕왕 때에는 화령군(化寧郡), 화령이란 지명은 고개 이름인 火嶺에서 연유된다. 고려 때에는 화령현으로 지금은 화서면이다. 북쪽은 봉황산을 거쳐 속리산 문장대로 남쪽은 국수봉으로 이어지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화령재는 火嶺으로 표기하는데 옛지명은 化寧이다. 火嶺이란 이름에 대해선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많이 일어난 국경지역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시 여겼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6.25때에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여 불火자를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는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 부른다 한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으며 지금도 상주에서는 옛날의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중화 (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達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상주]
상주는 낙동강의 이름이 유래된 도시이다. 낙동강은 상주의 옛 이름인 상락(商洛)과 낙양(洛陽)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상주는 고도이며, 삼국시대에는 경주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이중환도 '팔음지'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고, 경상도 인재의 절반은 상주와 선산에 있다고 하였다. 경상도의 지명도 경주와 상주의 첫머리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은난초이다.
그래도 곳곳에 제법 이런 은난초와 함께 야생화들이 있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 깊은 숲 속 응달에 하얗고 작은 예쁜 꽃을 피우는 은대난초와 은난초가 있습니다
꽃이 흡사하고 크기가 비슷하여 은대난초인지 은난초인지 늘 헷갈리지요. 은대난초와 은난초는 잎에서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포인트는 포에 있습니다. 은대난초의 첫 번째 포는 꽃차례보다 더 길게 뻗습니다. 은난초도 첫 번째 포가 길게 뻗지만, 꽃차례보다 훨씬 작습니다.
봉황산을 오르면서 본 건너편 청계산 쪽의 조망이다.
봉황산쪽은 산허리까지는 평탄하게 오를 수 있지만 정상 얼마 전부터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화령재에서 올랐던 봉황산 능선이다.
이전 백두대간에서 이 연달래를 정말 많이 봤는데.
이제는 다 떨어지고 조금씩만 남아 있다.
봉황산 정상이다.
조망이 되지 않다 보니 이렇게 정상 바로 전에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봉황산이다.
정상에는 둥그런 의자가 있어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봉황산] 704.8m
봉황산은 말 그대로 봉황이 살았다는 유래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전설에 의하면 1300년전에 봉황이 한 30년 정도 살았단다. 또한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일설에는 봉황산 장군이 싸움에 이겨서 봉황산, 반면 싸움에 진 장군이 있는 산은 원통산(596.9m)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 봉황산과 구병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峰)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峯)산,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峯)산은 구봉(峰)산(=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싸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 「산경표」에도 남는다.
벌써 여름인지 이렇게 병꽃도 이쁘게 피어 있다.
비조령이다.
지도에는 비재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표지석은 비조령으로 되어 있다.
저기 저 터널 위로 해서 형제봉 쪽으로 올라가는데.
몇 명만 이곳에 내려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비재] 427m
비재는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재, 비조령이라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 비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한다.
원목으로 만들어놓은 계단인데.
비가 와서 정말 미끄러웠다.
비조령에서 처음 올라가는 길인데 그래도 제법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이곳 비조령에도 은난초가 제법 많이 피어 있었다.
비조령에서 올라가면 못재에 도착을 하는데.
아직도 못재 까지는 많이 남은 듯하다.
갈령 삼거리가 1.7km 남았으니 이곳만 올랐다 내려가면 못재인 듯하다.
못제이다.
지금껏 이곳을 와봤지만 못제에 이렇게 물이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이곳 못제에는 정말 은방울꽃 군락이 있었다.
[못제]
비재에서 갈령 삼거리 가는 길에는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습지인 못제가 있다. 못제의 크기는 300-500평 정도, 10평 정도의 넓이에 물이 고이는데 유입수는 없고 빗물에 의해서만 못이 생기기 때문에 실제 물을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지도상에는 식수표시가 되어 있지만 사실 여름 장마철에만 물을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은 못제가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다고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제 전설_삼국유사(일연지음/권순형편역/출판타임기획)>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매일 싸움을 벌여 이겼다. 싸움을 벌이는 족족 패하는 황충이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비밀리에 캐내어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이는, 광주의 한 처녀가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얘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산(해발 873m인 두루봉을 상주시 화서면 청계 마을 사람들이 대궐터라고 부르는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임.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청계산이라 함.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임)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이 모두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였던 견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갈령삼거리이다.
이곳에서 형제봉까지는 약 600m 정도 되는데.
내려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형제봉을 패스하기로 했다.
[갈령 삼거리]
형제봉 오르는 중에 1Km 떨어진 곳의 '갈령'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갈령은 '칡고개'라는 뜻이다.
건너편 청계산 부분의 모습이다.
갈령터널 위다.
GPX 트랙
본산행의 트랙
설명이 포함된 트랙
|
첫댓글 무지개산이 정상석도 있네요
이구간은 들머리부터 날머리까지 비가내려 잊혀지지가 않네요
병꽃 수달래 초록 초록이 어우러진 대간길 평화롭고 아름답네요~^.^~
네.!
작고 아담한 정상석 입니다.
꽃 모양이 무지개 같이 생겼죠.
누가 이런 이쁜 돌을 찾아서 정상석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이제는 봄꽃도 다 지고 여름꽃으로 바뀌어 가고 있네요.
이번주는 지리산이나 한번 가볼까 생각 중에 있네요..!
항상 안산 즐산 하세요..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드는 멋진경치 잘 감상했습니다,
늘 안전산행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글을 다 쓰고서 이렇게 답글을 달고 있네요..!
비가 오락가락 하면서 날씨도 흐리고 하여 경치는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서 좋았습니다.
푸른계곡님도 항상 안산 즐산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