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본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로 대무신왕의 첫 번째 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이다. 서기 32년 1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서기 44년 10월에 대무신왕이 생을 마감했으나 그는 어린 탓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대신 숙부인 해색주(민중왕)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서기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그 때에야 비로소 고구려 제5대 왕에 즉위하였다.
모본왕의 즉위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태자 책봉 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모본왕의 어린 시절을 추론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모본왕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정비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 때문에 대무신왕은 후궁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 입궐한 후궁은 갈사왕의 손녀 해씨였다. 그녀는 입궐한 지 오래지 않아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그때까지 아들을 어지 못했던 대무신왕은 득남한 기쁨으로 아이의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짓는다.
호동은 총명하고 뛰어난 아이로, 장성함에 따라 그의 뛰어남은 주변 국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호동의 명성이 드높아지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제1왕후 아이를 낳았다. 대무신왕은 그 아이의 이름을 해우라고 지었다(『삼국사기』는 해우를 맏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적통인 데다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같은『삼국사기』의 기록을 존중하여 여기에서도 그대로 맏아들로 기록하였다).
해우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호동은 이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낙랑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호동은 차기 왕감으로 지목되었고, 이에 따라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가 시작된다.
암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제1왕후는 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 호동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말하자면 호동이 태자에 책봉되리라는 생각에 거만하여 어머니인 자신을 능멸하고 심지어는 욕보이려 했다는 말을 꾸며 호동을 벌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자 호동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살을 감행한다.
이 사건은 서기 32년 11월에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달에 대무신왕은 해우를 태자에 책봉한다. 이 때 해우의 나이는 기껏해야 1, 2살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12년 뒤인 서기 44년에 대무신왕이 죽었으나 그는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무신왕이 15살에 왕위에 오른 것을 감안하면 당시 해우는 15살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이가 어린 탓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보면 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해줄 모후가 죽고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자 어린 태자는 졸지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해우는 민중왕이 왕위에 올라 있던 4년여 동안 누차에 걸쳐 죽음의 위기를 넘겼을 것이다. 해우는 민중왕에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고, 그래서 빌미만 있으면 여지없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행히도 해우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서기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 때 해우의 나이는 기껏해야 17, 18세 정도였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모본왕의 성격에 대하여『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이처럼 모본왕은 그다지 덕스러운 성격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즉위 시부터 그런 성격을 드러냈던 것은 아니었다.
모본왕은 즉위 이듬해인 서기 49년 2월에 대군을 동원하여 한의 북평, 어양, 상곡(현재 북경 근처), 태원(현재 화북 지방의 태원으로 황하 동쪽 근거리에 있음) 등을 습격하여 빼앗는다. 이 지역들은 한의 도성인 장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므로 모본왕은 즉위 초년에 벌써 요서 지역을 정벌하고, 황하의 동쪽을 모두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후한의 유수는 고구려에 한의 요동 태수 채용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이 때 한나라에서 요동 태수를 화친 사절단으로 보낸 것은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이 요동 태수의 관할이었다는 뜻이다. 이는 한의 요동이 곧 황하의 동쪽을 가리킨다는 것과 한의 요수가 황하였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한의 화친제의를 받은 모본왕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과 고구려 사이에는 한동안 평화가 지속된다.
이 무렵 고구려는 몇 년에 걸쳐 이상 기후로 어려움을 겪는다. 모본왕 즉위년에는 홍수가 나서 20개의 산이 무너지더니, 그 이듬해에는 서리와 우박이 심해 농사를 망친다. 이에 모본왕은 국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제하고 유랑민을 안정시킨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정세의 불안으로 이어졌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본왕은 역모를 두려워하며 모든 신하와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 같은 행동을『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본 4년,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가차 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아댔다.”
이 짧은 기록은 그의 폭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폭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모본왕의 충직한 근신 가운데 두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모본 출신으로 모본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다. 모본왕은 자신이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라고 할지라도 한순간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두로에게 어떤 사람이 왕을 죽이라고 부추겼다.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다. 그대는 백성의 원수인 왕 해우를 처단하라.”
이 말을 듣고 용기를 어은 두로는 서기 53년 11월에 칼을 품고 모본왕을 찾아갔다. 그러자 모본왕은 그를 정답게 맞아들여 앉혔다. 그 때 두로는 칼을 빼 모본왕의 목을 찔러 죽였다.
두로의 칼에 맞은 모본왕은 즉사하였고, 신하들은 유리명왕의 여섯 째 아들 재사에게서 태어난 궁을 새 왕으로 앉혔다.
모본왕은 모본 언덕에 마련된 능에 묻혔으며, 묘호를 모본왕(慕本王)이라 하였다.
모본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모본왕 원년인 서기 48년 10월에 ‘왕자 익을 태자로 세웠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봐서 그에게 왕후와 자식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