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인회숙(友人會宿)
우리는 한자 문화권에 살고 있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 영 향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롭게 한자를 활용한 언어와 문자의 범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동안 국가의 교육시책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았는데 그 피해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예 한문 교육이 중단된 세대와는 문화의 단절의 장벽이 생겨 우리의 전통문화의 계승에도 비상이 걸린 형국이다.
이제 한자는 소수의 전공자와 학문에 필요한 사람만이 공부하는 것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실 생활의 언어와 신문이나 각 종의 서적, 법률을 비롯한 각 종 계약문서 등은 그대로 한자의 힘이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여하튼 계속 한자 무용론의 주장은 그 설득력이 부족하고 최소한이나마 병행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최근에 「안 경환」 전 서울법대 교수의 『이 병주 평전』을 읽으며 재밌는 일화가 있어 이를 소개하려 한다.
우리 영화의 스타였던 「김 진규」씨의 부인이 「김 보애」씨다. 그녀가 펴낸 회고록에 「이 병주」에 관련된 회고담이 있다. 그녀가 운영하던 한정식집 ‘세보’(世寶)에 어느 날 조선일보의 「선우휘」가 원로 소설가 「송지영」을 대동하고 온다. 손님을 정중하게 모시는 안주인의 품격이 마음에 들어 「송지영」은 음식점의 단골이 되었다. 1970년 가을 날 「송지영」은 붓글씨를 배우고 있던 안주인을 기특하게 여기고 제언을 하였다. 고급 문객 손님들을 맞으려면 실내장식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며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였다. 「김보애」가 정성들여 먹을 갈고 붓을 건네자 「송지영」은 까치발을 하고 벽에 일필휘지로 「이태백」의 시(詩)를 쓴다.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천고의 시름 씻으려고
留連百壺飲(유련백호음);연이어 백병의 술을 들이켰네.
良宵宜清談(양소의청담);청담을 나누기에 좋은 밤이요
皓月未能寢(호월미능침);잠 이룰 수 없는 밝은 달이로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송지영」은 붓을 멈춘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술잔을 비운 뒤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늘은 이 시를 여기까지만 써놓고 가겠네. 훗날 어떤 눈 밝은 놈이 들어오면 나머지를 채워 넣게”
그리하여 식당 ‘세보’의 안방 벽에는 끝자락 없는 「이백」의 시가 적혀 있었다. 대개의 손님들은 “글씨 잘 썼다. 달필 이고만”하며 의례적인 찬사를 보낼 뿐 이었다. 한시를 제법 안다는 문인들도 『우인회숙』의 구절이란 것만 알지 마지막 두 구를 채워 넣지 못했다.
1년이 지난 1971년 겨울 「이병주」가 그 방에 앉았다.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몇 잔 들이켜더니 벽에 그윽한 눈길을 주었다. “아니, 이거 「이백」의 『우인회숙』아냐? 그런데 왜 마지막 대구를 놓쳤나?” 그러고는 「이병주」는 나머지를 채워 넣었다.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취하여 빈산에 누우니
天地即衾枕(천지즉금침);천지가 이부자리이노라.
「송지영」이 기대했던 어떤 눈 밝은 놈이 다름 아닌 「이병주」가 되었다. 「김보애」는 “『우인회숙』은 만 1년을 넘긴 후 당대의 풍류객인 「이병주」 선생을 만나 비로소 완성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풍류객의 멋과 지성의 예지(銳智)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화이다.
제목은 '벗과 함께 잠자며'라는 뜻으로, 벗을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정회(情懷)를 묘사한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벗과 술잔을 나누며 잠들기도 아까운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청담(淸談)을 나눈 뒤 도도한 취흥에 젖어 빈 산 아무 곳에나 누우니 하늘이 곧 이불이요, 땅이 곧 베개라는 것이다. 천지를 이부자리로 삼는 자유인, 거침없고 호방한 「이백」의 풍모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시와 버금가는 조선시대의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의 글이 김제 망해사(望海寺)에 있다. 태어난 곳이 부근인 대사는 이 사찰을 1589년에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바다 건너 서방 정토를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풍광이 빼어나고, 서해 바닷가에 연해 있어 낙조의 모습이 아름답다. 특히 「진묵대사」가 중창 후 기념식수를 했다는 두 그루의 우람한 팽나무는 명품의 고풍스런 거목이다. 이 사찰의 영내에 「진묵대사」가 낙서전(樂西殿)을 지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진묵대사」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역시 「이백」에 버금가며 대장부를 초월하는 고승의 자유로운 상상과 호기로움이 살아난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으며 산을 베개 삼아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달빛은 촛불 되고 구름은 병풍이며 바닷물은 술통이라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크게 취해 일어나 한바탕 신바람 나게 춤을 추고 나니
劫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긴 소매 옷자락이 곤륜산 자락에 걸릴까 그게 걱정이네
「진묵대사」와 관련한 수많은 일화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일반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한다. 해산물(굴을 ‘석화’라고 함)에 술(‘곡차’라고 함)을 마시는 기행에다 신통력을 겸비하여 중생의 우상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찰 인근에는 그의 어머니를 모신 성모암(聖母庵)이 있는데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불거촌(佛居村: 부처님이 거주하는 곳)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부모를 잃고 7세에 출가하여 전주 서방산 봉서사(鳳棲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불경을 공부하는 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한 번만 보면 그 깊은 뜻을 깨닫고 다 외웠다고 한다.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받았으며,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신통력으로 많은 이적(異跡)을 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사화와 임진왜란 등으로 암울한 시대에 당시 답답하고, 불안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일반 백성이 구원자(救援者)이자, 활불(活佛)이자, 현세불(現世佛)이자, 위로자(慰勞者)인 신통력 있는 기인(奇人)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을 때 진묵 대사가 나타났고, 이로 인해 그의 활동을 담은 전설이 나와 널리 퍼진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이 한문에 능한 고수(高手)들의 삶에는 멋진 낭만과 자유로운 시상이 주는 풍요로운 삶의 여유와 사나이다운 기개가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사람냄새가 풍기는 이야기들이 점차 보기에 쉽지 않다.
여하튼 어느 정도까지는 한문에 대한 기초 지식을 구비하고 일정한 서예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 진정한 문화인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논점은 다소 벗어났을지라도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이라면 자작 한시 1수 정도는 읊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적어도 한 나라의 장수(將帥) 혹은 고위 공무원들에게는 체계적인 한문교육을 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2022.12. 29.작성/2023.1.24.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