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천수에 비친 월파정(月波亭)
이대규(시인)
‘요천수’는 섬진강 상류의 고향 냇물을 말한다. 폭이 넓고 사시사철 수량이 많아, 들판을 휘돌아 흐르는 은빛 물결이 강이라 불러도 좋은 곳이다. 마침, 지리산 관문에 들어설 때 백두대간 한 자락 물빛 반해 낙오된 것 아닐까. 솔숲 사이로 화가의 붓 찍은 듯 ‘월파정’ 또한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월파정은 달빛에 파도가 부서지는 풍경 속 정자를 말한다. 이런 덕분인지 물 좋은 우리나라 곳곳에는, 강릉 경포호를 비롯하여 참 많이도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인 1960년대 초였다. 고향 누른대(黃竹)마을 위로는 식정리 마을의 낮은 산자락위에 사과 배나무 과수원이 있다. 언젠가부터 주변 다랑논에도 포도나무를 심어 ‘월파농장’이 된 것이다.
친구 아버지인 그곳 주인은 진완택 씨로, 훤칠한 외모에 풍채 좋은 부자임을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티 내지 않은 보릿고개 시절, 낡은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길을 따라 시내를 오르내리던 모습이 선하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사친회장을 하시며 지역 발전에도 관심이 많은 존경받는 분이셨다.
그런 어느 봄날이다. 텃밭을 갈고 목화씨를 뿌리던 아버지는 하던 일을 어머니와 내게 맡기시고, 흰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중절모를 쓰고 황급히 바람을 날리신 것이다. 당신 마음에 얼마나 달떠왔을지! 그 모습 이제 내 일인 양 읽혀져 온다. 그날이 바로 월파정 준공식이 있는 날이었으니 왜 아니었겠는가.
관내에서 글 좀 한다는 친구들을 모두 초청하여 시조창도 하고, 한시도 짓는 그런 풍류마당은 당시에 쉽게 볼 수 없는 신선놀음이요, 별천지가 아니었을까. 얼마 후 아버지 책상에서 본 소책자에는 그날의 글들이 실려 있었다. 월파는 주인공이셨던 친구 아버지의 호라는 것과, 내 아버지의 호가 죽포(竹圃)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에는 어려서 잘은 몰랐지만 한시에 대한 한글 풀이와 함께, 자연 속 산수풍경을 신선의 눈과 마음으로 노래했다는 생각이 어렴풋 든다.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신 농사꾼 아버지는 한문 붓글씨체가 수려했다. 내 눈에 뿐만 아닌 남들에게도 명필이란 말을 들으셨다. 겨울철 농한기 밤이면 아랫마을에서 시조를 배워와 곡선을 느려놓고, 목청을 한껏 돋아 꺾으셨다. 그것이 곧 무아의 세상이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것 아니겠는가.
봄가을이면 그런 월파정에 초대되었고, 6~70년대 가난하고 소박한 나름의 시향어린 삶을 사셨다. 하여 영혼이 맑은 풍운의 백학이 되지 않았을까. 이것도 어쩌면 숨길 수 없는 씨도둑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고향의 월파정을 가슴에 지워내지 못한 까닭 또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동창인 진형모는 그 과수원집 아들이었고, 몇몇 친구와 함께 과수원 남쪽 천변에 위치한 월파정에 간 적이 있다. 육각형 모양의 한옥으로 된 기와지붕의 아담하고 정겨운 모습이라니, 마루에 올라앉아보면 그때는 잘 몰랐지만 생각하면 선경이 그려진다. 요천수가 발아래 유유히 흘러가고, 바람결에 속삭이는 물소리도 좋다. 달밤이면 그 물빛 부서지는 상상 속 풍경이, 티눈처럼 박혀와 아리도록 찌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건너 이백면 쪽의 산 아래는 말을 닮았다는 ‘말바위’와 함께, 푸른 물이 소용돌이치는 일명 ‘말바위소’가 있어, 어릴 적 학교에서 소풍을 자주 가기도 했다. 이런 빼어난 자리에 일찍이 월파라는 어울리는 호를 짓고, 정자를 세운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고는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보고 자란 나에게도 마음의 양식이 되어, 정녕 축복이었으리라.
농사철 ‘정자들’에 가뭄이 들면 삽과 괭이를 메고 보막이를 다녀야 했고, 나무하고 쇠꼴 베며 틈 날 때면 낚시를 즐겨하던 추억도 새롭다. 더 들어가면 역사 속 한 페이지로 유자광이 요천수 은어를 잡아, 임금님 아침 수라상에 올렸다는 최명희의 소설 ‘혼불’ 무대이기도 하다. 은빛 전설이 흐르는 곳, 달무리 져와 혼불 같은 시정을 타고 어쩌면 나, 여기 있지 않을까. 비록 엄하셨지만 바담풍 같은 풍류일지라도 나이 들어가며 달란트를 주신 아버지를 더욱 떠올리곤 한다.
늙어서도 외로워 말고 심상의 날개 활짝 펴 새로운 세상 찾아 떠나는 여행자가 되라고, 오우가 부르며 바람처럼 살라는 분부였을까. 억새꽃 아늑한 요천수 월파정, 시어의 바다에 파도가 친다.
#이대규 시인 #전북 남원 누른대 #수원문인협회 #월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