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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 안내
역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과 '기록된 사실'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사실'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조선에 위대한 성군으로 세종대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사실'은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표현될 수 있습니다. '기록된 과거의 사실'인 역사책에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가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과거의 사실을 전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선택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주관적인 해석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볼 수도 없고,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를 우리는 왜 공부할까요? 그것은 과거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의 세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과거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과거 세계와 현재의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인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세계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슬기와 노력으로 극복한 조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펼쳐진 역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여, 현재를 사는 우리의 성장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를 통하여 감리교회의 성도들이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길을 뒤따라 걸어감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감리교회 성도로서의 성화의 길, 온전하심을 향한 인생의 순례 길을 걷는 가운데 한국기독교의 유적지 순례를 통하여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고, 차갑게 식어진 가슴을 다시 따뜻하게 적시며, 주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를 안내해 드립니다.
* 첨부 파일: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구본선 목사)
2012년 6월
교육국 차세대교육정책부 부장 정현범 목사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
구본선 목사
전국에 있는 한국기독교 유적지를 지역별, 교파별로 분류하여 지역은 8군데로 나누고, 특정 교파의 경우 충청북도 이남과 충청남도 대부분은 북감리교, 강원도는 남감리교, 경상남도는 호주장로교, 전라도 전역과 충청남도 서해안 일부는 남장로교, 충청북도 이북과 경상북도, 그리고 제주도는 북장로교, 충청도 공주와 논산 강경은 침례교를 중심으로, 각 지역별 복음전래와 교회 유적지를 소개한다.
초기 한국에 들어 온 개신교는 북감리교, 남감리교,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5개 교파가 주도권을 가지고 선교를 시작 했다. 이들 교파가 한국에 들어 온 시기[1885년(북감리교회 북장로교) - 1891년(호주장로교) - 1892년(남장로교)- 1896년(남감리교)]는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교파간 선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차례 선교협의(혹은 선교지 분할협정)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인천과 같은 대도시는 공동 선교구역, 도와 시 단위는 각 교파별로 선교지 분할’로 이어졌다.
참고로 성결교와 성공회, 침례교와 같은 군소 교단은 선교협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장로교는 1907년 하나로 통합되면서 독노회를 조직했고, 감리교는 1930년 남.북 감리교 통합을 이루어 냈다.
감리교. 장로교 외에 천주교 성지와 개신교 군소 교단[성공회(1890년), 침례교(1895년)]의 유적지까지 정리해 놓았다.
<목차>
제 1 장 서울
1. 감리교 선교의 출발지, 정동제일교회
2. 정동, 근대 교육의 발상지(I)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3. 서대문구, 근대 교육의 발상지(II)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4. 종로구 , 남감리교의 흔적을 찾아서 (배화학당, 종교교회, 자교교회)
5. 정동과 종로구, 북장로교의 흔적을 찾아서
6. 종로구, 중앙감리교회와 대동서시 터
7. 정동, 성공회 대성당과 옛 구세군사관학교
8. 중구와 마포구, 명동성당과 절두산순교성지
9. 마포구와 동작구, 양화진선교사 묘원과 국립서울현충원
제 2 장 인천
10.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린 곳, 중구 내리교회
11. 동구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사회복지관
12. 옹진군 백령도 중화동교회
13. 강화군 교산교회와 홍의교회
14. 교동교회와 망월교회
15. 강화읍성당과 온수교회
16. 서도중앙교회
17. 강화중앙교회
18. 흥천교회
제 3 장 경기도
19. 화성시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
20. 수원시 종로교회와 매향역사관
21. 용인시 소래교회 예배당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22. 안산시 샘골교회와 최용신기념관
23. 이천시 구연영 순국추모비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 4 장 강원도
24. 춘천시 춘천중앙교회
25. 철원군 철원제일교회와 장흥교회(서기훈목사 순교기념비), 대한수도원
26. 원주시 원주제일교회와 원주기독병원
27. 홍천군 한서교회와 남궁억기념관
28. 동해시 천곡교회와 최인규 묘역
제 5 장 충청도
29. 충북 청주시(I) 청주제일교회
30. 충북 청주시(II) 수동교회
31. 충북 진천군 성공회 진천교회
32. 충남 음성군 성공회 음성교회
33. 충남 공주시 공주제일교회와 영명중.고등학교
34. 충남 천안시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
35. 충남 논산시 (구)북옥감리교회 한옥 예배당
36. 충남 서천군 한국최초성경전래지와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37. 충남 보령시 고대도교회
38. 대전시 한남대 인돈기념관과 오정동 선교사 주택
제 6 장 경상도
39. 부산시(1) 한강 이남 최초인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구)일신여학교 건물, 일신기독병원
40. 부산시(2) 성공회 부산주교좌교회
41. 대구시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제일교회와 동산의료원 선교사주택
42. 경북 안동시 안동교회
43. 경북 영천시 자천교회
44. 경북 봉화군 척곡교회
45. 경북 울진군 행곡교회와 행장교회
46. 경남 창원시 주기철목사 기념관,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47. 경남 그 외의 지역(호주장로교 중심)
제 7 장 전라도
48. 전북 전주시 전주서문교회, 신흥학교, 엠마오 사랑병원
49. 전북 익산시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
50.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51. 전남 목포시 목포양동교회와 구 목포중앙교회 예배당(현재 오거리 문화센터)
52. 전남 순천시 순천선교부 유적
53. 전남 여수시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54. 광주시 광주선교부 유적지
55. 그 밖의 기독교 유적지
제 8 장 제주도
제 3 장 경기도
1890년 경기도 화성에 복음 전파, 첫 교인 박승효, 1892년 북감리교 수원, 공주를 선교지역으로 결정, 1893년 화성군 동탄면에 감리교회 설립, 1898년 북감리교 스웨어러가 수원.공주구역 책임자가 됨, 1900년 수원 종로교회 설립, 1905.3 화성군 수촌교회 설립, 1905.8 화성군 제암리교회 설립
경기도는 고려 성종 때부터 사용된 행정조직으로 왕도(개경)의 외곽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에서 경(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수도를, 기(畿)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에서 500 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다. ‘경기’란 말은 당나라 시대 왕도의 주변 지역인 경현(京縣)과 기현(機縣)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때 지방 행정구역인 5도 양계 외에 경기(京畿)라는 특별 행정구역을 두고 개성부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도를 재조정했고 지금과 유사한 윤곽을 이루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복음이 들어온 경로는 세 갈래였다. 북감리교는 노량나루를 출발해서 경기도 과천, 시흥, 수원, 안성을 거쳐서 충청도 천안, 공주로 가는 길과 송파나루에서 경기도 광주, 이천, 음성을 거쳐서 충청도 충주와 단양으로 내려가는 길을 이용했다. 특히 화성은 경기도 선교의 교두보로 경기도 중심지인 수원보다 먼저 교회가 설립되었다.
반면에 장로교는 한강나루를 출발해서 경기도 성남, 용인, 안성을 거쳐서 충청도 진천, 청주, 보은, 영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사용했다. 특히 안성 둔병리 교회를 통해서 충청북도 첫 번째 교회인 신대교회가 설립되었다.
19. 화성시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
1890년 경기도 화성에 복음 전파, 첫 교인 박승효, 1893년 화성군 동탄면에 감리교회 설립, 1905.3 화성군 수촌교회 설립, 1905.8 화성군 제암리교회 설립, 1919.4.5,11 수촌리 예배당 방화, 1919. 4.15 제암리교회 사건(23명 학살당함), 1919.4.16 제암리 사건이 밝혀짐
수촌교회와 제암리교회는 3.1 만세 시위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는 일본군의 방화로 한 줌 잿더미가 되었고, 29명의 마을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수촌교회와 제암리교회는 화성시에 속해 있다. 그러나 삼일만세 시위 당시엔 각 기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수원은 고려시대 부터 사용된 명칭이다. 수원도호부, 수원부, 수원군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5도 중 하나인 양광도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수원은 경기도에 속했다. 그 당시의 수원은 지금의 수원보다 훨씬 넓었다. 1789년 정조 임금 때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하면서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다가 1896년 지방 개편 때 다시 수원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1905년 수촌교회와 제암교회가 설립되던 당시에는 두 교회가 다른 행정구역(제암리는 수원시, 수촌리는 남양군)에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이 수원에 편입되면서 동일한 행정 구역에 묶이게 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수원읍은 수원시로, 그 밖의 다른 수원지역은 화성군으로 분리되었다. 1989년 화성군에서 오산시가 분할 독립했고, 2001년 화성군은 화성시로 승격했다.
지금의 화성시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890년 어간이다. 화성군 동탄면 장지리에 살던 박승효가 처음 믿었고, 1893년 동탄면 장지리에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동탄면에서 일어난 감리교회는 용인, 광주, 시흥 등 인근 경기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01년경에는 수원읍(현재 수원시)에 예배처(수원 종로교회)까지 마련하게 된다.
당시 남양군 수촌리 마을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900년경이다. 처음에 수촌리 사람들은 4시간 거리에 있는 남양읍 교회로 나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1905년 3월 정창하의 집에서 자체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다. 수원시 제암교회는 같은 해 8월 안종후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3.1운동 당시 이 지역의 만세 시위는 다른 지역보다 격렬했다. 화성으로 진출한 일본인들이 간척사업으로 땅과 염전을 얻고 막대한 부를 축척할 때 한국인들은 민족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차별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일어난 만세 시위는 불타오르는 반일감정에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성난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주재소(파출소)를 불 태워버렸고 시위대를 향해서 총을 쏘던 일본인 경찰 2명을 죽였다. 이에 따른 일본군의 진압도 잔혹했다. 4월 2일부터 14일 까지 800명의 시위대를 체포했고 진압과정에서 10여명의 주민들을 죽였다.
일본군이 수촌리로 들어 온 것은 이 시기였다. 일본군은 4월 5일과 11일 두 차례 수촌리 마을로 들어와서 가옥 42채와 예배당을 불태워버렸고, 수촌교회 담임인 김교철 전도사를 잡아갔다. 일본군이 제암리로 들어 온 것은 4월 15일이었다. 일본군은 마을 주민 23명을 예배당 안에 가둬놓고 불을 질러 버렸다. 그 것도 부족해서 인근 고주리 마을로 가서 천도교인(동학교도) 6명을 학살했다. 이날 제암리에서 학살당한 교인들은 12명(나머지 11명은 천도교인)이었고 그중엔 제암교회 창립자인 안종후와 홍원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제암리 사건은 일본군의 통제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제암리 사건은 수촌리 교회 방화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수촌리 예배당이 불탄 것은 선교사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4월 16일 피해 상황을 보러 수촌리 교회로 가고 있던 언더우드 목사, 영국 공사관의 커티스 공사, 테일러 기자는 제암리를 지나가다가 수촌리와 비교도 안되는 참상을 목격했다. 예배당이 불탄 것은 고사하고 23명의 마을 주민들이 에배당 안에서 학살을 당한 것이다. 테일러 기자의 노력으로 제암리 사건은 전 세계로 알려졌고 일본군의 잔학한 행위가 만 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제암리, 고주리 학살 책임자인 일본군 지휘관 아리타 중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30일 근신하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제암교회는 제암리 순국기념관(국가지정 사적지 299호)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2002년 건립한 순국기념관 안에는 2개의 전시관이 있다. 제1 전시관은 제암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와 학살 사건에 관한 자료를 전시했고, 제 2전시관은 경기도와 전국의 만세 시위와 일본의 만행, 임시정부에 대한 전시물들이 있다. 예배당은 전시관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는데 밖에서 볼 때, 십자가가 종탑이 없다면 교회인지 일반 기념관인지 구별하기는 어렵다.
전시관 안에는 1969년 일본 기독교인들이 보내온 속죄 헌금으로 만들었던 예배당 모형이 있다. 교회 평면은 ‘3.1’을 상징하는데 순국기념관을 만들 때 헐어버렸다. 교회 뒤편 언덕에는 ‘제암리 삼일운동 23인 순국묘지’가 있고, 삼일운동 당시 불타 없어진 예배당 터에는 3.1운동 순국기념탑(이승만 대통령이 쓴 글씨 임)이 있다. 기념관 안에는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서 해설을 부탁할 수 있다.
수촌교회 예배당(향토유적 9호)은 1922년 새로 지은 것이다. 아펜젤러와 노블 목사의 지원으로 8칸 지었는데 1932년 현재 자리로 예배당을 옮기면서 6칸으로 축소되었고 1987년 복원 증축했다. 예배당 지붕은 초가를 얹었다. 예배당은 정방형(직사각형)으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정문 쪽이 길고 양쪽 벽이 좁다. 양쪽 창은 격자창(바둑판식) 이다.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칸이고, 마루와 방 2개, 부엌, 현관이 한 공간 안에 있다. 현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 건물은 1965년 미국인의 후원으로 지은 것이다.
☞ 주 소
제암교회(향남읍 제암리 392-2), 수촌교회(장안면 수촌리 674)
☞주변 유적지
남양성모 성지(화성시 남양동 1704)와 홍난파의 생가(화성시 남양동 651-6)가 제암교회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남양성모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목숨을 잃은 무명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성지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이고 유일한 성모마리아 순례 성지이기도 하다.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는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다.
‘울밑에 선 봉선화’, ‘성불사의 밤’으로 유명한 홍난파가 태어난 곳은 남양군이었다.(지금은 화성시 남양동) 그리고 그가 살았던 곳은 서울(종로구 홍파동 2-16, 홍난파가옥)이었다. 그는 YMCA 학관에서 공부를 했고, 새문안교회 성가지휘자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 6년을 살았던 ‘홍난파 가옥’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딜쿠샤(행복한 마음이란 뜻)가 있다. 딜쿠샤는 제암리 사건을 전 세계에 보도했던 알버트 테일러 기자가 살았던 집이다.
20. 수원시 종로교회와 매향역사실
1892년 북감리교 수원, 공주를 선교지역으로 결정, 1893년 화성 동탄에 교회 설립, 1898년 북감리교 스웨어러를 수원ㆍ공주구역 책임자로 결정, 1900년 수원 종로교회 설립, 1902년 매향학교 시작, 1903년 삼일학교 시작, 1909년 노리마츠가 동신교회 세움, 1923년 아담스기념관 신축
종로교회의 역사는 1900년 감리교 선교사 스웨어러 부부가 수원 북문안 보시동에 기와집 10여 칸을 매입해서 복음을 전한 때를 기준으로 한다.(그런데 수원종로교회에서는 1899년부터 이주해온 교인들의 전도활동이 있었고 이때를 교회 설립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감리교의 수원지역 선교는 1892년과 1898년 두 차례에 걸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1900년 스웨어러, 그 이듬 해(1901년) 이명숙 전도사 가족이 이주해 옴으로써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보시동(수원시 북수동 116)에서 현재 위치(북수동 386)로 이전한 것은 1907년 경 이다. 새로 옮긴 곳은 원래 관청 소유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던 곳이다. 현재 예배당은 1969년 신축한 것이다.
선교 역사를 추억할 수 있는 곳은 매향학교(현재 매향중학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에 있는 '매향역사실‘과 삼일학교(현재 삼일중학교) 현관이 있다. 매향학교는 1902년 스크랜튼 부인이 시작한 여학교로, 매향역사실에는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예배 때 사용했던 중에 악기인 양금과 학교 초기 역사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향 여자정보고등학교 앞을 흐르는 수원천변의 다리는 1926년 매향학교 교장 밀러 선교사가 사비 1,400원을 들여서 만든 것이다.
삼일학교는 1903년 스웨어러 선교사가 시작한 남학교이다. 삼일중학교 현관(경기도기념물 175호)은 1923년 건립된 교사(校舍)로 미국 아담스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해서 ‘아담스 기념관’으로 불린다. 우진각 지붕의 2층 벽돌건물로 현재 1층은 방송실, 2층은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수원에 있는 또 다른 유적지로 일본인 노리마츠가 설립한 동신교회 예배당이 있다. 노리마츠는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서 무참하게 살해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죄하는 의미로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경상도와 충청도에 38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1921년 건강의 악화로 일본에서 사망했다. 노리마츠는 죽으면서 “조선에 내 뼈를 묻어주시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노리마츠의 무덤과 기념비는 동신교회(1909년 신축) 뜰 앞에 있다.
☞ 주 소
수원종로교회(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386), 매향학교(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 350),
삼일중학교(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 342), 동신교회(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6)
☞주변 유적지
조선 정조 때(1796년) 완공한 수원화성(수원시 팔달구 행궁길 18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팔달문(보물 402호)과 화서문(보물 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종로교회 맞은 편에 화성행궁(정조가 현릉원에 들릴 때 머물던 임시 처소)이 있다.
21. 용인시 소래교회 예배당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1884년 황해도 소래교회 설립, 1895년 용인 아실리에 감리교회 설립, 1988년 총신대 양지 캠퍼스에 소래교회 예배당 복원, 1989년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건립
용인에 복음이 들어 간 것은 1895년 감리교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남아있는 유물이 없다. 대신 새롭게 복원한 소래교회 한옥 예배당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통해서 초기 선교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 외에 성공회 한옥 성당을 감상할 수 있다. 성공회 성당은 1937년 건축한 것으로 한천서원(1865년 대원군이 철폐)을 매입해서 그 자리에 지은 것이다.
황해도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이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로스 목사와 함께 성경 번역에 참여했고 1887년 ‘예수셩교전서’ 가 발간 되는데 큰 역활을 한 초기 교인이다. 그리고 1882년 만주에서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한국인으로는 6번째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언더우드가 베푼 첫 번째 세례는 1886년 7월 18일 노춘경이다. 감리교는 1887년 7월 24일 아펜젤러가 박중상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최초가 된다.)
소래교회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1887.9)와 정동제일교회(1897.10) 보다 먼저 세워졌고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전도해서 세웠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현재 총신대학교 양지 캠퍼스에 복원한 소래교회는 1896년 증축된 예배당의 모습으로 팔작지붕을 지닌 ‘ㄱ’자 형태의 한옥이다. 교회 마당에는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최권능 목사, 소래교회 설립자인 서상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세례(1883.4.29)받은 첫 개신교 신자인 이수정의 기념비가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총신대 양지 캠퍼스에서 1Km 떨어져 있다. 1989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개관했고 3층 건물이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순교자들의 이름과 성경구절을 새긴 자연석들이 늘어서 있다. 건물 1층은 한국교회 역사를 담은 사진 40여 점, 2층 예배실에는 초기 한국교회와 사회상을 담은 사진 120여점, 3층에는 순교자 189명의 초상화와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한국 기독교 순교자 2,600명 중 600여명의 순교자 명단을 볼 수 있다.
순교자기념관에서 18Km(30분 소요) 떨어진 곳에 성공회 용인성당이 있다. 성당 건물은 1937년 건축한 것이다.
☞ 주 소
소래교회(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41-11),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용인시 양지면 추계리 산 84-1), 성공회 성당(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274-2)
☞주변 유적지
한국 민속촌(개인 15,000원/단체 12,000원)이 있고 그 외에 포은 정몽주와 정암 조광조의 무덤이 있다. 고려 시대 몽골군의 2차 침략을 지휘했던 적장 살리타이가 죽은 장소에 승전 기념비가 있다.
22. 안산시 샘골교회와 최용신기념관
1907년 샘골교회(구 천곡교회) 설립, 1931년 YWCA에서 농촌계몽가로 최용신을 샘골에 파송, 1933년 마을주민과 YWCA의 지원으로 샘골강습소 신축, 1935년 최용신 사망,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부문에서 심훈의 상록수 당선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은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공부했고, 1931년 YWCA 농촌계몽가로 선발되어서 샘골로 파송되었다. ‘인민속으로’라는 뜻을 가진 브나르도 운동은 제정러시아 말기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활동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주도했고 농촌의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을 목표로 했다. 최용신의 활동도 이 범주에 속한다.
최용신은 샘골강습소(구 천곡학원)를 신축했고 마을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1934년 일본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다시 귀국했고 1935년 사망했다. 그 해 심훈의 상록수가 동아일보 장편소설 부문에서 당선되었다. 소설에서 여 주인공 이름은 최영신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샘골강습소 터와 강습소의 추춧돌 15개, 그리고 강습소 건축 당시에 심었다는 향나무 몇 그루, 심훈 문학기념비, 최용신 묘역이 있다. 2007년 건축한 최용신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한옥 형태로 지은 것이다. 전시실에는 옛날 샘골강습소의 생활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당시 사용했던 교가 악보와 국어 교재, 심훈의 ‘상록수’ 초판본이 구비되어 있다.
1995년 정부는 최용신의 공훈을 기려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그의 무덤을 향토유적 18호로 지정했다. 그의 무덤 곁에는 약혼자였던 김학준의 묘가 있다.
☞ 주 소
샘골교회와 최용신 기념관(안산시 상록구 본오 3동 879-4)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지가 없음
23. 이천시 구연영 순국추모비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1893년 화성에 교회 설립, 1895년 용인에 교회 설립, 1896년 이천에 교회 설립, 1900년 수원에 교회 설립, 1901년 진천, 충주, 청주에 교회 설립, 1902년 이천중앙교회 설립, 1905년 구연영전도사 이천중앙교회에 부임, 1907년 구연영 전도사 부자가 일본군에게 총살당함
이천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896년경이다. 북감리교에서 전도를 했고 덕평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교회는 이천중앙교회이다. 이천중앙교회는 1902년 문경호 전도사가 설립했다. 처음엔 창전리 153번지(구 읍사무소 자리)에 있다가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은 1914년 이다. 교회 건물은 오래 되지 않아서 역사적 가치는 없다. 교회 주차장 옆에 구연영, 구정서 전도사 부자 순국추모비(1979년 제작)가 있다.
구연영은 서울 출신으로 1895년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했던 의병장 출신 전도사였다. 그는 1897년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엡윗청년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민족 운동에 힘썼다. 그는 1905년 이천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이천중앙교회를 비롯해서 9개 교회 교인들을 돌보았고 인근 마을을 다니며 부지런히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1907년 일진회의 밀고로 아들과 함께 체포 되었고 일본군에 의해서 총살을 당했다. 그가 총살을 당한 이유는 복음 전도와 의병활동, 애국 계몽 활동을 병행했던 것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이었다. 더구나 1907년은 국채보상운동, 헤이그밀사 사건, 고종 퇴위, 정미 7조약과 군대해산 등 국가적 위기가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고종퇴위와 군대 해산은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구연영 전도사의 평소 활동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적법한 절차도 없이 구연영이라는 반일 지도자를 처형해 버린 것이다. 정부에서는 1963년 구연영 전도사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교회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창전동 개나리 공원에도 구연영 부자의 순국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2007년 구연영 전도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 추진위원회가 세운 것이다.
기독교역사박물관(2001년 개관)은 고 한영제 장로가 사재를 털어서 세운 사립박물관으로 10만 여점의 기독교역사 관련 자료를 구비하고 있다. 박물관은 3층 벽돌 건물이고 5개의 상설전시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정 오래된 주보와 전도지, 1887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목사가 공동으로 번역해 출간한 ‘마가의 전한 복음셔 언해’ 등을 전시되어 있고, 박물관 뒤편에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한 평양 장대현교회 모형이 서 있다.
☞ 주 소
이천중앙교회(이천시 관고동 32 9-4), 기독교역사박물관(이천시 대월면 초지리 474-2)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지가 없음
제 4 장 강원도
1888년 아펜젤러와 존스목사 강원도 방문, 1897.12 남감리교 연회에서 강원도 선교 결정, 1898년 하디목사 강원도 전도, 같은 해 4월 서울 광희문교회에서 춘천중앙교회 설립, 1901년 철원 지경터와 새술막에 교회 설립, 강릉에 교회(강릉중앙교회) 설립, 1905년 감리교 무스 목사가 원주제일교회 설립, 1908년 춘천 선교부(스테이션) 설치
강원도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1888년 북감리교 아펜젤러와 존스목사의 방문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서울, 인천 외에 다른 지역을 전도하는 것은 선교사 숫자와 예산 등의 문제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오히려 강원도 선교는 남감리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는 1896년 8월 리드 목사의 입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남감리교 첫 교회는 경기도 고양에 세워졌고 이어서 서울 광희문 교회가 설립되었다. 현재 고양에 세워졌던 감리교회는 사라져 버렸고 광희문교회가 남감리교 첫 번째 교회가 된다. 1897년 12월 남감리교 제1회 연회(참석 인원 5명)에서 강원도 선교를 결정했고 다음 해(1898.5)부터 하디 선교사가 원주를 거점으로 삼고 강원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했고, 원산, 춘천, 철원, 강릉, 원주 등 강원도 주요 거점마다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24. 춘천시 춘천중앙교회
1898년 하디목사 강원도 전도, 그 해 서울 광희문교회에서 춘천중앙교회 설립, 1908년 춘천 선교부 설치
강원도에 세워진 첫 교회는 춘천중앙교이다. 그런데 춘천중앙교회는 강원도에서 전도활동을 했던 하디목사가 아니라 광희문교회 교인들을 통해서 설립된 교회이다. 1898년 4월 광희문 교회는 나봉식과 정동렬을 춘천으로 파송했고 그 해 퇴송동(현재 석사동 남춘천 파출소 자리)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1908년 춘천 선교부(최소 5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한 팀을 이루어 지역 선교를 담당하는 지역 선교부)이 설치되었고 무스 목사 부부가 파송되었다.
현재 자리로 교회를 옮기고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2001년이다. 춘천중앙교회의 선교 초기 유적은 없고, 1955년부터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예배당은 원래 미감리교 선교부 병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1955년부터 2001년 교회를 이전할 때까지 예배처였다. 지금은 춘천시에서 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주 소
춘천중앙교회(춘천시 퇴계동 202), 시립미술관(구 춘천중앙교회 예배당, 춘천시 옥천동 73-2)
☞주변 유적지
1950년대에 사용했던 춘천중앙교회 예배당(현재 시립미술관)과 1949년에 건축된 천주교 죽림동 주교좌성당(춘천시 죽림동 30)과 소양로 천주교회(춘천시 소양로 2가 78-1)가 있다. 그 외에 단편 소설 ‘봄 봄’, 과 ‘동백꽃’을 지은 김유정의 문학촌(춘천시 신동면 실레길 25)이 있다. 실레는 김유정의 고향 마을이고 문학촌 안에는 김유정기념관과 김유정 생가가 있다.
25. 철원시 철원제일교회와 장흥교회(서기훈목사 순교기념비), 대한수도원
1901년 지경터와 새술막교회 설립, 1905년 철원제일교회 설립, 1907년 선교분할로 철원이 남감리교 구역이 됨, 1920년 장흥교회 설립, 철원 선교부 설치, 1937년 철원제일교회 석조 예배당 건축, 1940년 대한수도원 설립
춘천 다음으로 강원도에 교회가 설립된 곳은 철원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쇠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철성(鐵城) 혹은 쇠둘레로 불렸다.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해서 강원도 쌀 생산량의 1/6을 차지한다. 후 삼국 시대에는 궁예가 세운 마진국의 수도였다.
철원 전도는 남감리교 하디 선교사가 담당했고 1901년 지경터(철원군 갈마읍)와 새술막 교회를 각각 설립했다. 그러나 지금은 두 교회 모두 사라져 버렸고 지경터에는 장로교회가 들어와 버렸고, 새술막 교회 터는 농지로 변해 버렸다.
철원에서 오래된 기독교 유적지는 철원제일교회 터(근대문화유산 국가지정문화재 23호)가 있다. 원래 철원제일교회는 장로교 웰번 목사가 설립한 교회였다. 그러나 1907년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분할 결정으로 철원이 남감리교 구역으로 확정되면서 감리교회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 원래 예배당은 1937년 건축했다고 하는데 보리스가 설계했다. 원래 예배당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석조 건물이었고, 가로 24m, 세로 12.2m의 현무암과 화강암을 쌓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공산 치하에서는 기독 청년들의 반공 투쟁 거점으로 사용되었고 육이오 때에는 지상 건물은 북한군의 병동으로, 교회 지하실은 양민 학살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6.25 때 인민군이 숨어 있었다고 하여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근에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박물관에서 보리스의 설계도면이 발견되면서 감리교단에서 예배당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주변의 기독교 유적지로는 장흥교회(서기훈목사 순교기념비)와 대한 수도원이 있다. 장흥교회는 192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분립된 교회이다. 해방 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나누어졌을 때 철원은 이북 지역이었다. 1946년 철원제일교회와 장흥교회 청년들 중심으로 ‘신한애국청년단’이 결성되었으나 철원 보안서원(경찰관)에게 발각되어 40여 명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6.25 때에는 교회 청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청년단이 인민군 1개 중대를 격멸시키기도 했다. 대한 청년단과 마을 청년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죽이려고 하자 장흥교회 담임인 서기훈 목사가 만류했다. 형제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삿짐까지 싸면서 반대하는 서기훈 목사로 인해서 포로들은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1.4 후퇴 당시 서기훈 목사는 철원에 들어온 인민군에 의해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대신 그의 행적과 믿음은 교회 마당에 ‘서기훈 목사순교기념비’로 남았다. 순교기념비에는 그가 생전에 남겼던 말이 새겨져 있다. “죽을 때를 당하여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 ”(死於當死 非當死 生面求生 不是生)
교회 뒤편에 있는 충혼탑은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후손들이 참회의 뜻으로 세운 것이다. 원래는 공산당원이었던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새겨 넣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 부분을 떼어 냈다고 한다.
대한수도원은 1940년 장흥교회 박경룡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항일 기도단체가 주축이 되어서 ‘조선기도원’이란 이름으로 설립 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서 말(馬)을 키우는 ‘양마장’이란 명칭을 내세우며 수도원 언덕 위에 말을 키우기도 했다.
지금은 한 해 10만 명이 방문해서 기도하고 은답받는 은혜의 동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도원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소성전으로 1959년 완공했다. 수도원은 한탄강변 순담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고, 여름이면 래프팅 족들이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 주 소
철원제일교회(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0-2), 장흥교회(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577) 대한수도원(철원군 갈말읍 707-6), 지경교회 터(철원군 갈말읍 지경리), 새술막교회(철원군 김화읍 학사리 274)
☞주변 유적지 (철원답사, 장흥교회 84년 주년 기념집 참조)
대한수도원 - 지경교회 터(현재는 지경장로교회가 있음) - 새술막교회 터(근처에 김화감리교회가 있음) - 장흥교회와 서기훈목사 순교기념비, 충혼탑 - 철원제일교회 터와 노동당사 건물
26. 원주시 원주제일교회와 원주기독병원
1905.4 남감리교 무스 목사가 원주제일교회 설립, 1913년 앤더슨 부부가 서미감 병원 개원, 1959년 원주기독교병원 개원
원주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강원도 감영(도청소재지)이 있었던 지역이다.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의 첫 자를 딴 것이다. 현재는 인구 12만 8,000명의 중형 도시이다.
원주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905년경이다. 남감리교 무스 목사가 4월 15일 상동리(현 일산동) 4칸 초가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교회 마당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하나는 모리스 선교사 기념비고 또 다른 하나는 레어드 선교사 기념비이다. 모리스 선교사는 1901년 내한했고 처음에는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1916년 원주 선교부로 파송받았다. 1926년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전도하러 나갔다가 병을 얻었고 이듬 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했다. 기념비는 1928년에 건립했다.
레어드는 1926년 내한했고 원주에서 전도와 교육활동을 했다. 1931년 원주기독병원을 세웠고, 해방 후에는 원주와 대전에서 활동했다. 기념비는 1983년 건립했다.
원주제일교회에서 100 m 떨어져 있는 원주기독병원은 1913년 의료 선교사 앤더슨 부부가 설립한 서미감병원에서 출발한다. 병원을 지을 때 스웨던 감리교회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스웨덴의 ‘스’의 한자음인 ‘서’와 미국의 ‘미’, 감리교의 ‘감’을 따서 서미감 병원으로 표기했다. 1933년 폐쇄되었다가 1959년 현재의 원주기독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1976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원주기독병원으로 합병되었다. 병원 본관 뒤에 붉은 벽돌 양옥집이 있는데 1913년 어간에 지은 건물로 지금은 연세대 의대 동문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 주 소
원주제일교회(원주시 일산동 114)
☞주변 유적지
강원도에서 3번째로 오래되었다는 용소막 성당(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이 있다. 성당은 1898년 설립되었고, 예배당은 1915년 완공된 것이다.
27. 홍천군 한서교회와 남궁억기념관
1918년 남궁억 홍천 모곡으로 귀향, 1919년 한서교회(구 모곡교회) 설립, 1933년 무궁화 사건으로 교회 폐쇄, 1939년 남궁억 사망, 2004년 남궁억기념관 개관
한서교회는 새 찬송가 580장(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작사한 남궁억이 설립한 교회이다. 남궁억은 칠곡군수와 양양군수를 역임한 관료 출신으로 애국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독립협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황성신문을 창간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교육계에 투신해서 배화학당 교사, 상동청년학원 원장으로 활동했다.
1918년 고향인 홍천 모곡(보리울)로 내려와서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3년 기독교계열의 비밀 결사 조직인 십자가당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39년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새로 복원한 옛 한서교회 예배당(1998년), 남궁억 기념관(2004년) 그리고 무궁화동산과 남궁억 선생 묘역(강원도기념물 제77호)이 있다.
기념관에는 십자가당 당시의 취조 장면, 모곡학교 모형, 남궁억 선생의 붓글씨와 저서, 십자가당 사건 재판 기록,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영인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옛 한서교회 예배당에도 다양한 유물들과 흰 천을 중심으로 남녀가 따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무궁화 동산은 남궁억 선생이 일제에 대항해서 무궁화 30만 그루를 심어 전국에 퍼트리기 위해서 만든 묘목장이었다. 지금은 2,000여 그루가 남아 있다.
무덤은 교회 뒤편에 있다. 무덤 입구에 있는 돌계단 300여 개를 걸어 올라가면 남궁억 선생이 기도하던 유리봉 정상이고, 그곳에는 기도하는 자세로 조각된 남궁억 선생의 기념 동상이 있다.
☞ 주 소
한서교회, 남궁억기념관(홍천군 서면 모곡리 387)
☞주변 유적지
특별한 기독교 유적이 없음
28. 동해시 천곡교회와 최인규 묘역
1913년 북평교회 설립, 1925년 천곡교회 설립, 1932년 천곡교회 예배당 건축, 1933년 천곡교회로 이명, 1935년 최인규 전 재산을 천곡교회에 헌납, 1942년 대전형무소에서 최인규 순교
천곡교회는 1925년 북평교회 기도처로 출발했다. 1932년 교회를 건축할 때에 일이다. 마을 주민들이 교인들에게 “교회는 만신(萬神)의 대장되시는 예수를 섬긴다고 하니 아무 해도 없을 것 아닌가? (서낭당 나무를)가져다가 교회를 지으시오”라고 했다. 당시에는 서낭당 나무를 자르면 재수가 없거나 심지어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서낭당 나무를 잘라서 예배당 마룻바닥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 최인규 권사(당시는 탁사 겸 속장)는 북평교회 교인이었지만 천곡교회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 최인규 권사는 천곡교회로 아예 이명을 했고 1935년 전 재산(논 539평, 밭 1,369평)을 천곡교회에 헌납했다.
1940년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창씨개명을 반대하다가 불경죄로 체포되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보다 못한 교인 하나가 일본 경찰 서장에게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였습니다. 예수 믿고 나았는데 다시 정신병이 재발했으니 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경찰 서장은 “당신이 정신병자요, 최인규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니 예수를 믿으려거든 최인규처럼 믿으시오”라고 핀잔을 주었다.
재판을 받을 때 최인규 권사는 “너희는 똑똑하게 들어두라, 너희 일본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또는 우리나라를 강탈하여 식민지를 만들고 우리 민족을 못살게 하는 이 큰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너희가 지금 강대하다고 자랑할지라도 로마와 같이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고 담대하게 증거했다.
그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형무소에서도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동방요배와 국민서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수한 고문을 받았다. 1942년 최인규 권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순교했다.
현재 교회 앞에 있는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는 1986년 세운 것으로 최인규 권사가 사용하던 강대상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기념비 아래에 최인규 권사를 안장했다.
☞ 주 소
천곡교회(동해시 천곡동 1081-8)
☞주변 유적지
회진포로 가면 1920년 대 영국 선교사들이 지어 사용하던 주택(동해시 고성군 거진읍 봉평리)이 있다. 6.25 이전에는 인민군 간부 휴게소였고, 전쟁 후에는 자유당의 실력자였던 이기붕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영국선교사 주택 주변에는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별장 그리고 이승만 기념관이 있다.
태백시로 가면 1965년 성공회 대천덕 신부가 세운 예수원(태백시 하사미동 산 7)이 있다. 천곡교회에서 예수원까지 약 1시간(44Km) 거리다.
제 5 장 충청도
1896년 침례교 공주와 강경에서 선교활동, 1900년 경기도 안성 둔병리교회 설립, 같은 해 밀러 목사 청주에서 전도, 1901년 청주 신대교회 설립, 1904년 청주 스테이션 설립 및 청주제일교회 설립, 북감리교 스웨어러 목사도 감리교회 설립, 1907년 북감리교와 남장로교 선교 협약, 1909년 북감리교와 북장로교 충청도 선교 협약, 1913년 성공회 수동교회 설립
충청도는 남장로교의 선교구역이었다. 1893년 남. 북 장로교 공의회는 ‘충청도와 전라도는 남장로교 구역으로“ 하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남장로교가 인원과 재정적인 문제로 충청도를 포기하고 전라도 선교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북장로교가 충청도에 들어 온 것이다. 북장로교의 충청도 선교는 경기도 성남, 용인, 안성을 거쳐서 충청도 진천, 청주, 보은, 영동으로 내려왔다. 안성을 통해서 충북에서 가장 오래된 청주 신대교회(1901년)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청주 노계교회(1901년), 괴산교회(1903년), 청주제일교회(1904년)가 계속해서 설립되었다.
충청도 선교는 북 장로교 외에 여러 교파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침례교(엘라딩 선교회)는 1896년부터 공주와 강경에서 활동했고, 성공회는 1905년 진천에 교회를 설립했고 1913년엔 청주에 도 교회를 설립했다.
북감리교는 1892년부터 대구, 공주, 수원 등지를 선교 구역으로 정하고 한강 이남 선교를 준비했다. 1893년에는 유치겸 권사를 두 차례 공주로 파견해서 선교 정찰을 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선교는 1898년 스웨어러를 수원.공주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부터이다. 1903년 맥길 선교사를 보내서 공주 선교부를 설치했고, 1904년 스웨어러는 청주에 교회를 설립했다.
인력과 재정 문제로 충청도를 포기했던 남장로교가 충청도에 관심을 보인 것은 1903년 부터이다. 전라도 군산 선교부를 통해서 충남지역 일부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1907년 북감리교와 남장로 협의를 통해서 충남 서남부 지역을 제외한 충남 전 지역을 북감리교 구역으로 결정했다.
29. 충북 청주시(I) 청주제일교회
1900년 밀러목사 청주에서 전도활동, 1904년 청주 선교부 설치, 청주제일교회 설립, 광남학교 인수, 1905년 현재 자리로 이전, 1907년 청신여학교와 소민병원 시작, 1921년 로간부인 기념비 건립, 1939년 현재 예배당 건축
청주란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지명이다. 백제시대엔 상당(上黨),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西原)으로 불렸다.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6명을 배출했는데 감리교 목사는 신석구, 정춘수 목사가 있고 천도교(동학) 대표로는 손병희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전사한 송상현, 독립운동가 단채 신채호 등이 청주 출신이다.
청주에서 감리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1904년 스웨어러 목사가 청주에 교회를 설립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1909년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 협약으로 강원도(강릉,원주)와 충청북도 북부지역(충주,진천, 음성, 제천, 단양)은 북감리교, 충청북도 남부지역(청주, 옥천, 영동, 증평, 괴산)은 북장로교 구역으로 확정되면서 청주에 있던 감리교회는 장로교회로 흡수되었다. 감리교가 다시 청주에 들어 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현재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는 청주제일교회(1951년 설립, 기장 청주제일교회와 이름이 같음)이다.
우리가 둘러보게 될 장로교 청주제일교회(기장 총회 유적교회 6호)는 밀러목사와 김흥경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밀러와 김흥경은 청주에서 장날이 되면 시장과 길거리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다가 1904년 밀러 목사가 청주로 내려오면서 청주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 설립 초기 광남학교를 인수해서 청남학교로 개칭해서 계속 운영했고, 시약소(소민병원으로 발전)와 청신여학교를 통해서 청주지역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설립 당시 첫 예배당은 청주성 남문 밖에 있는 방 6개 딸린 초가집이었다. 그리고 1년 후 현재 자리로 이전을 했다. 원래 이곳은 영장(청주성 내에 거주했던 병마절도사 다음가는 관리, 지역 방어와 치안을 담당했음) 관사와 감옥이 있던 곳으로 천주교인들이 고문 받고 순교했던 장소였다. 조선 말기 충청도 전역에서 잡혀온 천주교인들은 이곳 감옥에서 고문 받다가 죽었고, 목숨이 붙어 있는 신자들은 무심천 변으로 끌려가서 처형당했다.
현재 예배당은 1939년 건축했고 1950년 부분적으로 증개축을 해서 약간 늘린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다. 예배당은 2층 벽돌 건물이고 전형적인 고딕식이다. 입구 정면에는 벽돌로 세운 4층 높이의 종탑이 있고, 종탑 좌우에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은 2층에 있어서, 밖에 나와 있는 계단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출입문이 두 개인 것은 남녀가 들어가는 문을 구별했기 때문이다. 2층 전면 중앙에는 예서체(중국 진나라 때 교도관들이 사무 문서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글씨체)로 쓴 淸州第一敎會禮拜堂 돌판 9개가 붙어 있다.
예배당 바깥벽에 여기 저기 움푹 패인 자국은 6.25 때 떨어진 폭탄의 파편 자국이다. 교회 마당에는 ‘로간 부인 기념비’, ‘망선루 터’, ‘충북지역 기독청년, 기독여성운동, 민주화운동의 요람’ 등 3개의 기념비가 서 있다. 로간 부인은 1909년 조선에 건너와서 10년 동안 청주지역 여성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사로 1919년 별세했다. 그의 무덤은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있다. 로간부인 기념비는 1921년 청주제일교회 여선교회가 건립한 것으로 충북 최초의 한글기념비라는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중앙공원이 있다. 그곳에는 망선루(충청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110호)가 있다. 망선루는 고려시대에 만든 정자로 1921년 일본인에 의해서 해체되었다. 그러나 김태희를 중심으로 한 청주제일교회 청년들이 교회로 옮겨와 다시 복원해서 세우고 청남학교 교사(校舍)로 사용했다. 다시 중앙공원으로 옮긴 것은 2000년이고, 교회 마당에는 ‘망선루 터’비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탑동은 청주 선교부가 있던 곳이다. 현재 선교사 주택 6채가 남아 있는데 모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장 오래 된 건물은 포사이드기념관(1906년)이고 가장 늦은 건물은 퍼디기념관(1932년)이다. 일신여고 안에 4채가 있고 밖에 2채가 있다.
포사이드기념관은 학교 미술실로 사용 중이고 기념관 앞에는 청주 선교의 선구자인 밀러 목사의 무덤이 있다. 그 외에 로위 기념관 혹은 매클렁 성경학원(1911년 건축, 현재 교목실), 던컨기념관(1920년 구 소민병원 건물로 현재는 도서실), 밀러기념관(1925년 건축, 현재 생활관), 솔타우기념관(1930년 건축, 현재 개인주택), 퍼디기념관(1932년 건축, 현재 충북성서신학원 건물)이 있다. 특히 퍼디기념관은 전도하러 나갔다가 장티푸스에 거려 목숨을 잃은 퍼디 선교사의 희생을 기념하는 건물로, 미국교회에서 실시한 주일학교 어린이 성탄헌금을 모아서 건축했다.
☞ 주 소
청주제일교회(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1가 154), 일신여자고등학교(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
☞주변 유적지(청주시내 답사)
답사 일정을 잡는 다면 청주 외곽에 있는 신대교회(청주시 흥덕구 신대동)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신대교회는 1901년 설립된 교회로 충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신대교회는 마을 주민들이 안성 둔병리 교회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은혜 받고 돌아와서 세웠다. 마을 어귀에 기독교전래 기념비가 있고, 이춘성전도부인 공덕비와 오을석장로 추념비가 있다.
중앙공원은 충청병영이 있던 자리로 망선루 외에 충청병마절도사 영문, 척화비, 압각수라고 불리는 900년 된 은행나무 등이 있다.
신대교회 - 청주제일교회 - 중앙공원 - 탑동(일신여자고등학교) 선교사 주택 - 성공회 수동성당 - 삼일공원 - 수암골
30. 충북 청주시(I) 수동교회
1905년 성공회 진천교회 설립, 1915년 성공회 수동교회 설립, 1935년 수동성당 예배당 건축
성공회의 충청도 선교는 진천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08년 성공회 선교부가 전국을 서울(제물포 포함), 강화, 수원, 진천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청주를 진천구역의 전도대상으로 분류된 것을 보면, 청주에 성공회가 들어 온 것은 1907년 혹은 1908년 어간이 아닐까 추축된다. 그러나 청주에 정식으로 수동교회가 설립된 것은 1915년경이다.
1920년대 이후 성공회 충청도 선교 중심지는 진천에서 청주로 바뀌었다. 이것은 충청북도 도청을 충주에서 청주로 옮긴 것과 관련이 있다. 청주가 충청도 선교의 중심지가 되면서 수동교회의 위상도 달라졌다. 이런 배경에서 1935년 현재 예배당을 짓고 축성식을 했다. 건축비의 대부분은 영국 세인트그레고리 교인들이 감당했다.
예배당 건물은 남북으로 세워져 있고 전면 4칸, 축면 8칸으로 32칸이다. 짝수 칸은 우리나라에서 잘 쓰지 않는 방식으로 수동교회 외에 강화읍 성당(40칸)과 진천교회(32칸), 천안 부대동교회(24칸) 정도가 있다. 그 외에 서도중앙교회(35칸), 온수리교회(27칸), 진천교회(35칸), 음성교회(15칸), 익산 두동교회(4칸 건물에 3칸 덧붙임), 김제 금산교회(5칸에 2칸 덧붙임)는 홀수 칸이다.
건물은 장방형이고 주초 사이에 고막이(일반 벽보다 3cm 정도 나오도록 두껍게 하는 것)를 했고, 건물 아래 중간 중간에는 환기구를 만들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했다.
실내는 2열의 기둥으로 회중석과 복도를 구분하고 있다. 제단은 북쪽에 있다.(강화읍 성당 건물은 동서로 세워져 있고 제단은 동쪽에 있다) 출입문은 ╂자 문양의 亞자형 창살이고 중간은 교살창(빗살무늬)으로 했다. 건물 안에 있는 창문은 두 짝 여닫이로 했는데 위창은 트레서리(여러 가지 곡선무늬)장식이고 아래는 ╂문양의 亞자형이다. 천장은 서가래와 들보가 훤히 보이는 연등식이고 바닥엔 장마루를 깔았다.
예배당에서 볼 만한 것은 대리석 세례대와 자개 칠보무늬를 한 사제석(司祭席)이다. 석등을 닮은 세례대는 팔각면이고, 각 면에 重 生 聖 潔 을 새겨 놓았다. 덮개는 십자가 종탑과 비슷하다. 제단에 있는 칠보 무늬 사제석은 1889년부터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1935년 축성식 때부터 사용했던 종이 있는데, 현재 교회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 주 소
성공회 수동교회(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202)
☞주변 유적지
삼일공원과 수암골이 있다. 삼일공원에는 청주(청원) 출신으로 삼일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신흥식, 신석구, 손병희, 권병덕, 권동진 등 5명의 동상이 있다. 신석구는 감리교 목사 대표로 삼일운동에 참여했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 탓에 일제시대에는 1년마다 목회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6.25 때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순교했다.
5명의 동상 옆에 횃불 동상이 있다. 원래는 정춘수 목사의 동상이 있던 곳이다. 정춘수 목사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지만 후에 변절하고 친일행위를 했다. 1996년 청주 시민단체가 동상을 끌어 내렸고 텅 빈 기단만 남아 있었다. 최근에 횃불 동상으로 대치되었다.
수암골은 원래 6.25 피난민들이 만든 마을로, 청주에서 가난한 일들이 모여 사는 하늘 아래 달동네였다. 수년 전부터 지역 예술가들이 마을 담장과 벽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었다. 예술촌으로 바뀐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생겼다. 몇 해 전 모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제빵왕 김탁구’의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졌다.
31. 충북 진천군 성공회 진천교회
1901년 감리교 진천교회 설립, 1905년 성공회 진천교회 설립
진천이란 명칭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부터 사용된 지명이다. 그 이전 고구려에서는 만노군(萬弩郡)으로 불렸고 신라에서는 흑양군(黑壤郡) 혹은 황양군(黃壤郡)으로 불렸다.
진천에 기독교가 전파 된 것은 1900년 이후이다. 진천에 먼저 들어 온 것은 감리교였다. 1901년 스웨어러 목사(1898년 이후 수원, 수원ㆍ공주구역 담당자)와 이천 덕들교회 교인 박해숙의 전도활동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볼만한 감리교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기독교 유적지로는 성공회 진천교회(등록문화재 9호)가 있다. 진천에 성공회가 들어 온 것은 1905년 거니 신부가 부임하면서 부터이다. 초기 선교는 전도와 병원, 교육을 병행해서 이루어 졌다. 거니신부가 경기도 여주와 충북 음성, 청주, 충주 등지로 다니며 열심히 전도한 결과 진천은 충북지역 선교의 구심적이 되었다. 또한 의료 선교사 로스는 애인병원(愛人病院)을 설립해서 환자들의 병을 치료하며 전도했다. 애인병원은 6.25 전쟁 전에 문을 닫았고, 건물도 없어져 버렸다. 새 성전 오른 편에 있는 ‘애인병원 수술실’은 최근에 복원한 건물이다. 교회에서 진명학교와 신명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진명학교는 1925년 경 폐쇄되었고, 신명학교는 공립학교로 바뀌었다가 삼수초등학교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있는 한옥 예배당은 1923년 건축한 것이다. 크기는 청주 수동교회와 마찬가지로 32칸이고, 강화도 온수리 교회와 똑 같은 설계도로 건축했다. 성전 건축비용은 영국 홀리로드 성요한 교회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했다.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했는데, 외벽은 붉은 벽돌이고 전면 출입구 좌우에 문이 있다. 전면 문과 문 사이 그리고 좌우측면엔 여닫이 격자창문을 달았고, 주초와 주초 사이에는 고막이를 했다. 건물 왼쪽에 있는 작은 비석은 1910년 별세한 터너 주교를 기념해서 진천교회 교인들이 세운 것이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백두산에서 뗏목으로 실어왔다는 두 열 기둥과 9개의 들보가 ‘구원의 통로’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밑에는 시원한 마룻바닥을 깔았고, 천장은 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식이다.
오래된 유물들은 한옥 예배당 옆에 있는 새로 지은 성전 안에 있다. 제단 앞에 있는 오르간은 1940년 경 영국 레익세스터의 벨그레이브 교회에서 선물로 보낸 것이고, 나무 촛대는 1937년 별세한 윤다비다를 기념해서 후손들이 기증한 것이다. 화강암 세례대는 1908년 진천 석공이 만든 것으로, 원형 모양으로 덮개는 문짝을 닮았다.
☞ 주 소
성공회 진천교회(충북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63-9)
☞주변 유적지
이상설 생가(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기념물 77호)가 있다. 1907년 상동교회 청년이었던 이상설은 이준(상동교회 청년회장),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만국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조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민족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1917년 러시아 니콜라스크에서 순국했다.
천주교 베티성지(백곡면 양백리 360)는 조선의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학생들을 지도했던 곳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조선교구 신학교 건물’과 ‘무명의 순교자 묘’가 있다.
32. 충북 음성군 성공회 음성교회
1896년 천주교 감곡성당 설립, 1906년 감리교 음성교회 설립, 1909년 성공회 음성교회 설립
음성의 옛 이름은 잉홀이다. 잉(仍)은 물이고, 홀(忽)은 골, 고을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가뭄이 없는 동네로 유명했고, 산이 많고 물이 깨끗해서 황기, 백출, 차, 욱이 등 약초가 많이 났다. 음성은 신라 경덕왕(757년)때부터 불린 지명이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 넘는다”는 노래는 음성군 맹동면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비전승이다. 자린고비의 주인공인 조륵은 금왕읍 삼봉리에 살았던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음성의 기독교는 천주교, 감리교, 성공회 순으로 들어 왔다. 천주교 감곡성당은 1896년 임가밀로 신부가 세웠고 충북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 두 번째로 들어 온 음성감리교회(1906년)는 경기도 이천(1896년), 충북 충주(1902년), 음성으로 이어지는 감리교 전도의 과정에서 설립된 교회이다.
성공회는 음성교회는 1910년 설립되었다. 그 전 해(1909년)에 무극리(음성군 금왕읍)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견진성사도 받았다는 기록(성공회백년사)이 있지만, 교회에서 지키는 설립연도는 1910년 이다.
성공회 음성 한옥 예배당은 1923년 지은 것으로, 음성 부자 현씨 집안에서 새 집을 지으면서 헐어 버린 건축자재들을 가져다가 지은 것이다. 건물은 15칸 조선 기와집 형태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특이한 것은 지붕 용마루에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970년대 지붕을 개량 지붕으로 바꾸면서 용마루에 있던 십자가를 떼어냈기 때문이다. 건물 양쪽에는 8개의 4각 유리창이 붙어 있고, 중인방 아래 벽은 고막이를 해서 둘렀는데 회색이다.
내부는 천장 가구가 훤히 드러나는 연등식이고, 대들보에는 먹으로 쓴 ‘主降生一千九百二十三年十月七日上樑’이 선명하다. 공간은 6개의 기둥으로 회중석과 측랑을 구별하고 있고, 한 칸 크기의 제단은 안으로 들어가 있는데 제단 양 옆에 고해실과 성의실이 있다.
진천 한옥예배당처럼 음성교회 한옥 예배당은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건물을 처음 지을 때 새 건물이 아니라 헌 집을 뜯어다 지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남아 있는 유물은 기도상(祈禱床)과 일제시대 야마하 올겐, 화강암 세례대와 성자 마르땡 성화가 있다. 기도상은 1916년 트롤로프 주교가 내려올 때 서울 교인들이 만들어 보낸 것이고, 성화는 1973년 예수원 대천덕 신부의 부인이 그린 것이다.
☞ 주 소
성공회 음성교회(충북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640-3)
☞주변 유적지
음성교회 외에 2개의 오래된 성공회 교회가 있다. 대소교회(음성군 대소면 오산리, 1934년 건축)와 매일교회(음성군 삼성면 상곡리 209, 1938년 건축)가 있는데, 대소교회는 팔작지붕에 겹처마가 나온 것이 특징이고 매일교회는 통간구조에 마룻바닥이 특이하다.
감곡성당(감곡면 왕장리 357-2)은 명성황후의 육촌오빠 민응식의 집을 구입해서 지은 성당으로 1930년 신축했다. 고딕양식 성당이고 종탑 높이만 40m이다. 성당 옆에 매괴박물관에서 초기 천주교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그 외에 음성 꽂동네(맹동면 인곡리 산1-45)와 반기문 생가와 기념관(원남면 상당리)를 방문할 수 있다. 큰 바위 조각공원(세계 각국과 우리나라 유명 인사 1,000명의 큰바위 얼굴 전시, 생극면 관성리 9-1)가 있는데, 입장료는 일반 6,000원(학생 단체40명 이상은 2,500원)이다.
33. 충남 공주시 공주제일교회와 영명중.고등학교
1893년 북감리교 전도인 유치겸이 공주방문, 1896년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의 공주선교, 1898년 북감리교 스웨어러목사가 수원.공주구역 책임자가 됨, 1903년 스웨어러의 공주방문, 맥길과 이용주가 공주 입성, 하리동 초가집에서 공주 선교부 설치과 공주제일교회 설립, 1906년 샤프 선교사의 죽음, 1909년 협산자 예배당 건축, 1930년 현재 예배당 건축
삼한시대 공주는 마한 54개 국 중 하나인 불운국(不雲國) 이었고, 백제에 편입되어서는 웅진(熊津)으로 불렸고,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명에 곰(熊)이 들어가는 이유는 곰과 관련된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 나루에 살고 있던 암곰 한마리가 고기 잡는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멀리 도망가 버렸고 실연당한 곰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곰은 죽어서 지명(地名) 속으로 들어갔다. 웅진은 말할 것도 없고 공주(곰주), 금강(곰강)도 곰과 관련된 이름이다. 공주란 명칭은 고려 태조 23년(940년)부터 사용되었다.
공주제일교회(등록문화재 472호)는 1903년 7월 의료선교사 맥길과 이용주 전도인이 공주로 내려와서 하리동(현재 중학동) 초가집에서 예배드린 날이 창립일이다. 현재 있는 예배당은 1930년 건축한 것으로 하리 초가집 예배당, 협산자예배당에 이어서 3번 째 예배당이다. 물론 교회 터도 3번째이다.
고딕양식의 2층 붉은 예배당으로 건물 중앙에 3층 높이의 종탑이 있다. 건물은 중세 시대 작은 성(城)과 같고 종탑은 망루와 같다. 건물 양쪽에 있는 붉은 벽돌 벽은 방패처럼 붙어 서 있고 건물 왼쪽 지붕에 있는 굴뚝은 창검(槍劍)을 세워놓은 것 같다.
건물 안에 있는 천장은 나무판목이고 제단 뒤에 세 개의 아치형 스테인글라스가 있다. 이 스테인글라스는 성부, 성자, 성령을 형상화 한 것으로, 1979년 우리나라 스테인글라스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남규씨가 만든 것이다.
교회건물은 몇 차례의 증축공사를 했기 때문에 1930년에 만든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6.25 때는 인민군이 교회를 보급창고로 사용하는 바람에 미군의 조준폭격으로 한쪽 벽면과 굴뚝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1956년과 1979년 두 차례 증축 공사를 하면서 초기 70평 예배당은 130평이 되었고, 왼쪽 모서리에 있던 종탑은 지금처럼 중앙으로 옮겨졌다. 정말 오래된 것은 폭격에도 살아남은 ‘건물 왼쪽의 굴뚝’이다.
그 이전에는 협산자 예배당으로 불렸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1907년 봄 교회 부흥회를 마친 후에 교회가 급속하게 부흥했다.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이 시급했지만 돈은 없고 날마다 철야기도를 했다. 1908년 여름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목사님을 찾아왔다. 그는 “나의 가진 재산을 쓸데없는 곳에 쓰고 싶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기를 원한다.”며 6,000원을 내 놓았다. 목사님이 이름을 묻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성경에 쓰여 있지 않느냐”며 그냥 돌아갔다. 그 후 교회 이름은 비오는 날 우산을 기고 찾아 온 사람이 낸 헌금으로 교회를 지었다고 해서 협산자예배당(挾傘者禮拜堂)이 되었다. 협산자예배당은 단순한 별칭이 아니라 공주제일교회의 첫 번째 이름이다.
교회 마당에는 ‘고 양두현 지루두 기념비’가 있다. 이 비는 1939년 건립된 것인데, 양두현 지루두 부부는 논 18,000평, 밭 2,700을 교회에 바쳐서 교회 자립의 기반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교회에서 나와서 큰 길 건너편에 영명중고등학교가 있다. 영명고등학교의 역사는 샤프 선교사 부인이 세운 여학교(1905년 명선여학교)와 윌리암 선교사가 세운 남학교(1906년 중흥학교)에서 출발한다. 두 학교는 1915년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학교 안에 기념비로는 ‘백주년 기념 탑’, ‘유관순 열사의 동상’, ‘윌리암교장공덕비’, 등이 있다.
윌리암교장공덕비는 모양이 특이하다. 기단은 크고 높은데 그 위에 있는 비석이 너무 작은 편이다. 원래 이 기념비는 1936년 윌리암 교장 근속 30주년 기념으로 만든 것으로 기단 위에는 흉상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구리 공출한다고 흉상은 떼어가고 기단은 내다버렸다. 광복 후 영명학교 동창들이 기단을 다시 찾아 왔다. 그리고 기단 위에 흉상 대신에 작은 비석을 올렸다.
유관순 열사가 영명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약간 생소할 수도 있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 천안이고, 서울에서 이화학당을 다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유관순 열사를 공주로 부른 것은 샤프 부인이다. 샤프 부인의 도움으로 유관순은 영명학교에서 2년 초등과정을 마쳤고, 이화학당에서 중등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 외에 영명학교를 빛내는 동문들은 많다. 초대 내부무 장관을 지냈던 조병옥 박사, 초대 충남 도지사 황인식, 중앙대학 설립자 임영신, 국내 최초 경찰서장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의 여자 목사 전밀라, 감리교 감독을 역임한 변홍규 목사와 표용은 목사가 영명 출신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5분 정도 야산으로 걸어 올라가면 샤프 선교사의 무덤이 있다. 샤프는 공주 구역 순행 목사였다. 1904년 공주에 왔고 1906년 사경회를 인도하러 논산으로 갔다가 이질에 걸려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부인(샤프부인, 한국이름은 사애리시)은 공주에서 교육과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샤프 무덤 외에도 윌리암 선교사의 두 아들 무덤, 아멘트 선교사의 아들 무덤, 테일러 선교사의 딸 무덤이 있다.
묘지 가까운 곳에서 아멘트 선교사 주택(등록문화재 233호)이 있다. 이 건물은 1921년 지은 것으로 한 때 ‘일연암’이란 절집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지금은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다시 구입해서 ‘일연암’ 간판은 사라졌다.
☞주 소
공주제일교회(충남 공주시 봉황동 10), 영명중.고등학교(충남 공주시 중동 318)
☞주변 유적지
천주교 성지인 황새바위 성지(공주시 금성동 6-1, 충청남도 기념물 178호)가 있다. 황새바위는 황새가 많이 서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목에 커다란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처형당한 곳이라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에서 천주교인 248명이 순교했다.
꿈의 교회(구 공주침례교회, 공주시 웅진동 242-11)는 1896년 스테드만 선교사가 설립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침례교는 공주와 강경에 있다. 1896년 침례교 계통의 엘라딩 선교회는 충남에서 선교를 개시할 때 스테드만 선교사는 공주에서, 폴링 선교사는 강경에서 교회를 설립했다. 꿈의 교회 안에 작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천주교 중동성당(공주시 중동 31-2)은 1936년 완공된 건물이다. 외형은 붉은 벽돌이고 평면은 라틴식 십자가형이다. 중앙 종탑을 비롯해서 현관 출입구와 창의 윗부분은 끝이 뾰족한 아치형이다. 내부 공간은 6각형 돌기둥 6개가 중앙과 양쪽 복도를 구분하는 형식이다.
그 외에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공주시 웅진동, 사적 제13호), 구석기 시대 유적을 볼 수 있는 석장리박물관(공주시 장기면 장암리 98)이 있다.
34. 충남 천안시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
1901년 북감리교 교회설립, 1907년 성공회 부대동교회 설립, 감리교 매봉교회 설립, 1915년 천안읍에 감리교 설립, 1920년 유관순 열사 순국, 1921년 부대동 한옥 예배당 건축
삼국시대 천안은 도살성(道薩城)으로 불렸다. 도살성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하던 전쟁터였다. 천안은 6세기 까지는 고구려 영토였다가 백제의 땅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신라 영역이 되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독점하고 천안(도살성)마저 장악하게 되면서 100년간 유지되던 나제동맹의 폐기되었고, 신라와 백제는 원수가 되었다. 백제 성왕은 신라에 보복전을 감행했지만 관산성(충북 옥천군)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또 다시 100년이 흐른 후 신라와 백제군이 도살성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 싸움에서도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승리했고 백제군 9,000명이 전사했다.
천안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3년(930년) 부터 사용되었다. 천안(天安)은 서울에서 삼남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천안에서 삼남을 볼 때 평안해야 나라도 평안하다는 의미에서 ‘천하평안(天下平安)’을 줄여서 천안(天安)이라는 설도 있다.
천안에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901년경이다. 그 해 북감리교 이천 덕들교회 박해숙의 전도활동으로 목천(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근방)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천안 외곽에서 출발한 감리교회가 천안읍에 나타난 것은 1915년 안창호 목사의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공주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안창호 목사는 1천 호가 넘는 읍내에 교회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천안읍으로 이주를 했다. 3개월 동안 각 가정을 돌며 전도했고 새롭게 결신한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설립했다. 현재 천안시에는 5개 지방 159개의 감리교회가 있다.
매봉교회는 1907년 설립되었다. 유관순열사가 신앙생활을 했던 모교회가 된다. 교회 지하 전시실에는 연보(年譜), 수형기록표, 재판기록 등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교회 바로 옆에 유관순열사 생가(‘ㄱ’형 한옥 초가집)가 있다. 이곳은 1904년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교회와 생가에서 1Km 떨어진 곳에 유관순열사 기념관과 추모각, 초혼묘, 봉화탑이 있다.
☞주 소
매봉교회와 유관순열사 생가(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38-6)
☞주변 유적지
성공회 부대동교회(천안시 서북구 부대동 118)가 있다. 1921년 건축한 24칸 한옥 예배당이 남아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인데 제단은 동쪽에 있고 서쪽 출입구에는 남녀가 들어가는 문 2개가 있다. 교회 앞 종탑은 부대동교회에서 15년 동안 목회했던 쿠퍼 주교의 별세 기념으로 1966년 건립한 것이다.
6.25 때는 인민군이 미군 폭격을 피해서 한옥 예배당을 마구간으로 사용하면서 많은 성전 기물들이 파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들(성작, 성반, 놋 십자가, 촛대, 유향합 등)은 신도회장 차솔로몬이 땅에 숨겨 두는 바람에 무사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볼만한 유물로는 성작(聖酌)으로 불리는 잔이다. 금도금을 했는데, 잔 바닥에는 ‘祝永遠安息 權요한 別世記念, 一九三三,十,二 別世’ 라고 새겨져서 잔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지금도 매 주일 미사 때 마다 이 잔을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성물은 1908년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는 나무 세례대이다. 나무로 만든 세례대는 부대동교회와 강화 온수리교회에만 있다.
독립기념관(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230)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120만 평 대지 위에는 겨례의 집, 겨례의 탑, 독립군 체험학교, 통일 염원의 동산, 시어록비 93기 등이 있다. 전시관은 7개로 구성되어있다. 관람료는 무료이지만 주차료는 따로 받는다. 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서 태극열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올라갈 때는 1,000원, 내려올 때는 500원)
답사 일정은 독립기념관 - 유관순열사기념관과 추모각 - 매봉교회와 유관순생가 -성공회 부대동교회 순으로 하는 것이 좋다.
35. 충남 논산시 (구) 북옥감리교회 한옥 예배당
1896년 침례교 폴링 선교사가 전도활동, 1901년 강경제일교회(감리교) 설립, 1918년 강경성결교회 설립(성결교), 1923년 구 강경북옥감리교회 예배당 건축, 1924년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 57명이 신사참배 거부, 전원 퇴학조치, 1950년 병촌성결교회 교인 66명이 인민군에게 학살당함
논산 강경은 전북 익산과 충남 부여와 맞닿은 지역으로, 금강 줄기를 따라서는 충청도와 경기도, 전라도 해안으로 연결되는 해운 중심지였다. 특히 논산평야와 호남평야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서해안에서 나는 해산물의 집결지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 후기 강경은 대구, 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다.
금강 물줄기를 통해서 강경과 부여, 공주, 군산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된다. 기독교 복음은 금강 물길을 타고 강경에 상륙했다. 강경에는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의 유적이 몰려 있어서 하루 답사 코스로 적당하다. 강경 기독교 유적지와 관련된 소책자로 ‘기독교 성지순례코스’와 근대역사문화의 보고 강경’이 있는데, 이 자료집은 강경제일교회(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강경기독교 연합회에서 출간했다.
강경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침례교 계통의 엘라딩 선교회였다. 1896년 폴링은 강경, 스테드만은 공주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 다음에 감리교가 들어왔다. 강경제일교회는 1901년 스웨어러 목사의 강경 방문을 교회 설립일로 지킨다. 그러나 방문 이후 본격적인 전도활동은 1903년 공주선교부가 설치되고 부터일 것이다.
(구) 북옥감리교회 예배당(등록문화재 42호)은 1923년도 건물이다. 건축 당시에는 성결교였지만 1953년 성결교회가 이전을 할 때 북옥감리교회에서 구입했다. 지금은 다시 강경성결교회로 되 팔렸다.
예배당 크기는 전면 4칸, 측면 4칸으로 16칸(36평)이다. 대부분의 예배당이 직사각형인데 비해서 정사각형인 것이 독특하다. 출입문 좌우에 남녀가 들어가는 문을 따로 만들었고, 지붕은 팔작에 겹처마를 했다. 내부는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벽체를 내고 오른 쪽은 목사 준비실, 왼쪽은 창고로 사용했다. 좌우 벽체 때문에 강단은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 되었다. 천장은 들보와 종보 서까래가 훤히 드러나는 연등식 구조로 9개의 소나무 들보와 15개의 종보(들보)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북옥교회 역사는 성결교에서 시작된다. 원래 교회 이름은 강경성결교회였다. 강경성결교회는 1918년 12월 경성성서학원(현재 서울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정달성 전도사가 설립했다. 교회가 설립되고 4달 후 삼일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 강경을 방문한 동양선교회(성결교단 전신) 토마스 감독이 시위대로 오인 받고 일본 경찰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이 문제는 영국과 일본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었고 일본은 사과하는 의미로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구)북옥교회 예배당은 그 보상금으로 지은 교회이다.
(구)북옥교회 예배당과 관련된 또 다른 사건은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이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학생들은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었고 ,학교 교사였던 김복희도 강경성결교회 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복희 선생은 면직당했고 학생 57명 전원이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사 최초의 신사참배거부 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는 흥교리에 있는 강경성결교회 마당에 세워져 있다.
☞주 소
(구) 북옥감리교회 한옥예배당(충남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96), 강경제일교회(충남 논산시 강경읍 대흥리 10-206), 강경성결교회(충남 논산시 강경읍 흥교리 129), 병천성결교회(충남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228)
☞주변 유적지
옥녀봉으로 올라가면 침례교 최초 선교지 건물(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137)이 있고 주변에 강경중앙감리교회 안득순 권사 순교 기념비가 있다. 안순득 권사는 1950년 7월 17일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최후의 기도를 마치고 총살당했다.
강경제일교회로 가면 역사 전시관이 있고, 강경 성결교회로 가면 ‘최초의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를 볼 수 있다. 병천성결교회는 6.25 때 교인 66명이 인민군에서 학살을 당했다. 병촌성결교회는 성결교단의 순교 사적지 1호로 지정된 교회이고, 교회 마당에는 ‘66인 순교기념탑’이 있다.
이외에 감리교 샤프부인이 만동여학교를 시작했던 팔괘정(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1)과 강경 최초의 유치원이 시작된 임리정(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 등이 있다.
답사일정은 강경제일교회 역사 전시관 - 옥녀봉, 침례교 최초 선교 건물과 안순득 권사 순교 기념비 - (구)북옥감리교회 한옥 예배당 - 강경성결교회 - 병천성결교회 순으로 한다.
36. 충남 서천군 ‘한국최초성경전래지’돌비와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1816년 영국 순양함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마량리 앞바다에 출몰, 성경을 전달, 1902년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가 마량포 앞바다 어청도 부근에서 순직
서천군은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곳이다. 1816년 9월 5일 영국 순양함 알세스트호와 리라 호가 서천군 서면 마량이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의 목적은 조선 서해안의 해도(海圖)를 작성하는 것이다. 갑자기 출몰한 이양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은 알세스트호 선장 맥스웰과 접촉하게 된다. 그때 맥스웰이 두 사람에게 성경을 선물로 전달했다. 영국 순양함이 마량진을 떠난 후에 조대복과 이승렬은 파직당했고 성경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마량포구에는 ‘한국최초성경전래지’ 돌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그 인근에 1816년을 상징하는 181.6m 높이의 황동 십자가 탑과 선교박물관을 조성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마량진 앞바다는 아펜젤러 목사가 순직한 곳이기도 하다. 1902년 6월 아펜젤러는 인천에서 목포로 가던 중에 마량포 앞바다 어청도 부근에서 조사 조한규와 여학생 한 명을 구하고 순직했다. 감리교회에서 이를 기념하는 순직기념관을 세웠다. 2011년 12월에 준공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은 연면적 106평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체험관, 선교역사 자료실, 전망대 등으로 꾸밀 예정이다. 현재 2012년 6월에 개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주 소
마량진 성경전래지와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
☞주변 유적지
이상재 선생 생가과 유물전시관(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15)이 있다 이상재 선생은 주미 1등서기관을 비롯해서 여러 관직을 거친 관료 출신이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되었다. 그 후 관직을 사퇴하고 교육 계몽 운동에 투신했다. YMCA에서 활동을 했고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27년 사망했을 때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을 치뤘다. 그의 생가는 목조 초가 3칸 규모이고, 생가 옆에는 유물 전시관이 있다.
37. 충남 보령시 고대도교회
1832.7.26 귀츨라프선교가 방문해서 25일 동안 머뭄, 1982년 고대도 교회 설립
고대도는 옛 집터가 많다고 해서 고대도라 불린다. 100여 가구(300명)가 살고 있다. 배를 타고 1시간 40분을 가야하는 고대도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명해진 것은 귀츨라프 때문이다. 1832년 여름 귀츨라프가 이 섬으로 왔다. 이 섬에서 25일 간 머물면서 성경과 전도문서를 나눠주었다. 또한 주민들에게 감기약을 처방해 주었고, 감자 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귀츨라프가 타고 온 배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암허스트호였다. 단순한 선교 목적이 아니라 통상을 위한 조사차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량포구에 와서 성경만 전달하고 돌아가버린 알세스트호와는 달리 20일 넘게 섬에 머물면서 주민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선교적 의미가 있다. 고대도교회 2층에 작은 전시관이 있다.
☞주 소
고대도교회(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951)
충남 대천항에서 하루 3번 (07:30, 12:20, 15:00) 배를 운항. 운임료는 고대도로 들어 갈 때는 대인 10,250원, 나올 때는 9,300원, 약 1시간 40분 걸림.
☞주변 유적지는 없음
고대도교회를 수련회 장소로 활용할 수 있음.
38. 대전시 한남대 인돈기념관과 오정동 선교사 주택
1907년 대전제일감리교회 설립, 1938년 대전제일장로교회, 1954년 목원대학교와 침례신학대학교 설립, 1955년 남장로교 오정리선교사 주택 건축, 1956년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 설립
조선시대 대전은 회덕현, 진잠현, 공주목 유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금강 하구에 있는 충남의 다른 도시들처럼 상업이 발달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부선이 생기면서 대전은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대전에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은 1907년이다. 대전제일감리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성결교, 구세군, 장로교가 들어왔다. 현재 대전에 있는 기독교 유적은 남장로교에 속한 것이고, 건축물은 50년대 중반에 지은 것들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4채로, 하나는 한남대 본관 건물이고 나머지는 셋은 선교사 주택이다.
한남대 안에 있는 본관은 1957년 완공한 것은 ‘인돈기념관’으로 불린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라멘조(철근과 철골이 뼈대가 되는 구조) 슬라브 지붕이고, 붉은 벽돌 외벽 면에 있는 십자가 무늬는 부조형식이다.
선교사 주택들(대전 문화재 자료 44호)은 한남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건물들은 모두 팔작기와지붕이고 ‘ㄷ’자 형으로 되어 있다. ‘린튼하우스’는 남장로 선교사 린튼이 살았던 집이고, ‘서머빌하우스’는 한남대 교수였던 서머빌 선교사, ‘크림하우스’는 한남대와 장신대 교수였던 크림 선교사가 살던 곳이다.
☞주 소
한남대학교와 오정동 선교사 주택(대전시 대덕구 오정동 133)
☞주변 유적지
국립 대전현충원(대전시 유성구 갑동 산 23-1) 은 1979년 개원했다. 애국지사 묘역으로 가면 거창읍교회 주남선 목사와 공주제일교회 현석칠 목사의 묘가 있다. 주남선 목사는 삼일 만세 시위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뤘다. 육이오 때에는 교회를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기념관은 거창교회 예배당 5층에 있다.
현석칠 목사는 삼일운동 당시 공주제일교회 담임목사였다. 당시 교인들과 영명학교 교사,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주동다가 4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이 후에도 상해임시 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뤘고, 1938년 신사참배가 노골화되자 만주로 건너갔다. 1943년 만주에서 죽었고 그의 유해는 2005년 대전 현충원으로 모셔졌다.
이외에 삼일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칼에 학살당한 익산 남전교회 문용기,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목포양동교회 박연세 목사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