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개혁신학자 우르시누스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해설』에서 자유의지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신본주의적 관점에 서서 논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순서에 따라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다. 이와는 (달리)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 양편의 공격을 받고 있던 개혁파 성도들이 자신들의 고난 속에서 찾고자 했던 궁극적 위로에 관심을 두었기에 유일한 위로이신 구원자 그리스도께 초점을 두는 구원론적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하기에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논의한다. 동시에 거듭난 성도조차 현실의 힘든 상황 속에서 여전히 죄를 저지르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땅에서는 완전한 순종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현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준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의 불완전한 순종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주어지는 상급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우르시누스는 당시 성도들을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지니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구원자 이미지보다 심판자 이미지였다. 중세 로마 가톨릭 신자에게 그리스도는 궁극적 위로를 주는 구원자이기보다 그들의 행위를 엄격히 평가해서 처벌을 내리는 무서운 심판자였다. 삼위일체적인 동시에 기독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나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두 가지 이상의 선택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외적 자유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자발적으로 원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내적 자유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작정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양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계시된 뜻을 서로 구분함으로써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도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경직,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해설』에 나타난 자유의지 이해" |
첫댓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문은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되게 살고 죽기 위해서는 어떤 것 들을 알아야 합니까?”라고 묻고서 세 가지로 대답한다. 첫째, 인간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하며, 둘째, 우리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알아야 하며, 셋째, 그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철저히 구원론적 관점에서 작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지식을 중심으로 첫 번째 지식이 전제되며, 세 번째 지식이 결론으로 나온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신론은 두 번째 지식과 관련하여 구원자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제시된다. “나는 믿습니다(credo)”로 시작되는 사도신경이 구원론과 관련하여 제시되는데, 사도신경의 상당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자 그리스도께 할애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리스도 중심의 사도신경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첫 번째이자 핵심인 대답인 “인간의 유일한 위로인 구원자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첨부 pdf 파일(이경직), p.1.
전부 다 읽기 어려우면 이렇게 집어주신 문단이라도 읽으면 좋겠네요.
저는 겨우 타붙 했는데, 전문 교수님의 개관과 해설을 보니 큰 도음이 되네요!
예를 들어 말기암에 걸려 죽기 직전에 있는 아버지가 있을 때, 그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를 데려가시려는 작정을 지니고 계셨음을 아버지의 임종 후에 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임종하기 전에 나는 하나님의 작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작정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하나님은 나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 “병든 자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라”는 계명, 즉 계시된 뜻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 계명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작정과 일치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내 기도를 기쁘게 받으신다. 이와는 달리 나쁜 의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기도를 한 사람의 경우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작정과 일치되는 결과가 나왔을지라도 그의 기도는 악하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반대되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첨부 pdf 파일(이경직), p.6.
하나님만이 아시는 작정과 인간에게 계시된 한계 사이에서 성도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좋은 설명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우르시누스는 거듭난 사람도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은 거듭난 자를 구원하시고자 한다. 둘째, 거듭난 사람은 비록 죄를 짓더라도 최종적으로 회개를 한다. 셋째, 거듭난 사람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가운데서도 참된 믿음과 회심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
첨부 pdf 파일(이경직), p.12.
이 카페에서 자주 듣던 종교개혁의 인간이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 오버랩되는 좋은 설명이십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우르시누스에 따르면 이 세상의 삶 이후에 오는 영화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주어진다. 그 사람은 오직 선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우르시누스는 이 상태의 자유를 최고의 완전한 자유라고 여긴다. 이런 자유를 지닌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영원토록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데 그치지 않고 죄를 미워하기까지 한다. 세 번째 상태의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지라도 원죄의 영향 때문에 죄를 철저하게 미워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죄를 매력적으로 판단하고 느끼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네 번째 상태의 인간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게 죄는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
첨부 pdf 파일(이경직), p.13.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에 이르는 구원의 서정을 잘 설명해 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우르시누스의 글을 읽으며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구원의 서정, 개혁주의 신앙의 공통분모 같은 어렴풋하게나마 느낍니다. 앞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제 한계 안에서라도 최선을 다해 읽어 보겠습니다.
공감 및 이해 후 댓글 감사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중립적이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교리서나 신앙고백들이 각기 자기 색깔이 있지만 이단만 아니라면 다 참고할 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시간 나실 때 pdf 원문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장코뱅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