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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를 숭상하며 예(禮)를 지켜온 청신한 선비들의 땅 봉화
학산계곡 따라 만나는 조선 당대 다섯 선비들의 은거속 담소 나누던 와선대
태백오현들의 은든속 모여 후학양성을 논하던 자리에 지은 정자 와선정
문수산 정기 속에 청신한 조선 선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서려 있어
영남의 모든 산들은 태백산에서 시작되었다. 봉화에는 태백에서 문수산으로 내려오는 정기를 따라 춘전유해(春田酉海 춘양, 법전, 유곡, 해저)의 네 고을이 이름났다.
정감록에서는 십승지 가운데 제일승지가 태백산 아래에 있다고 했다.
웬만한 선비들은 풍수를 볼 줄 알았고 풍수에서 복지란 난을 피하고 살기에 좋은 곳, 사람이 자연의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임진년과 병자년의 난리를 통한 혼란과 당쟁으로 어지러웠던 정국은 선비들을 이상향이었던 태백산 아래로 은거하게 만들었다.
병자호란을 피해 다섯 젊은 선비들이 태백산 아래로 모였는데, 영의정 손암 심의겸의 손자 각금당 심장세, 형조판서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 송강 정철의 손자 포옹 정양, 예조참판 강징의 현손 잠은 강흡, 영의정 홍섬의 현손 손우당 홍석 등 모두 쟁쟁한 문벌의 후손이자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문수산 아래로 모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매진했다.
청나라에 항복한 나라의 변절은 임진왜란에서 구명지은을 입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었고 의(義)를 숭상했던 선비들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의 현실을 버리고 은둔을 선택했다.
법전과 춘양지역에 거처를 정한 선비들은 춘양 문수산 남쪽자락의 학산계곡 수려한 곳에 자리를 정해놓고 청명하고 좋은 날에 모여 담소하며 시국을 걱정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었다.
그 때 모였던 자리를 와선대(臥仙臺), 폭포를 은폭(銀瀑), 바위를 사덕암(梭德巖), 지나던 굴을 후선굴(候仙窟)이라 이름 했다.
당시의 춘양현에는 서당이 없고 배움의 활동이 없어서 예의(禮儀)의 모범이나 마을의 규약도 없었다.
사람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역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쫒겨 바람같이 들어왔다가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는 것이 흔했다.
그런 모습에 은거선비들은 공동체의 모습을 바로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저작에도 힘썼다.
효종이 즉위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하자 선비들은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각자 출사해서 백성들을 위해 애썼고 효종이 서거하자 벼슬을 버렸다.
주변의 사람들은 대명의리를 지키고 은둔으로 자기수행을 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쓰는 다섯 선비들을 일컬어 ‘태백오현’이라 했는데, 그 기록이 정조의 명으로 지은 ‘존주록 배신열전’에 남아있다.
태백오현들은 와선대를 중심으로 십리 근방에 거처가 있었다.
피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곡서당의 건립에 참여하고 후학의 본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태백오현들이 돌아가시고 백오십년이 지난 1832년에 후손들은 와선대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와선정’이라 이름 했다.
와선정은 여러 번의 증고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봉화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중들과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태백오현은 모두 경화의 인물들이다. 비록 피난을 내려온 분들이지만 봉화에 동화되어 공동체를 만들고 지역에 동화되려고 애쓴 분들이다. 또 갇혀있던 지방의 교육과 문화를 중앙과 접속하고 융합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노력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통해 자기를 수양하여 사회에 기여하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태백오현은 각금당 심장세가 1594년생, 막내 손우당 홍석이 1604년생이니 벗이라도 10년의 연령차이를 보이는 진정한 도의로 사귀는 분들이었다.
서로의 생각과 학문을 존중하고 나라사랑과 의리의 존중을 한 뜻으로 자연과 더불어 소요자적하던 태백오현은 봉화의 지식인으로 기여하고 사표로 살았던 분들이었다.
그 시대에 새로운 생각으로 수신(修身)의 방향을 제시한 젊은 학자들로서 태백산아래로의 은거는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태백오현의 후손들은 와선정을 지어 오현의 높은 학문적 성취와 정신을 기리며 와선정계를 수계하여 지금도 해마다 두 번의 모임을 갖고 우의를 이어가고 있다.
와선정은 춘양면 소재지에서 3㎞의 거리에 있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물길의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아도 제법 우렁찬 폭포를 만들고 은폭의 내리꽂히는 물줄기는 은하수를 연상시킨다.
문수산에서 흐르는 산줄기들은 험악한 모습이 없다. 우뚝하되 잔망스럽지 않고 우직한듯해도 미련하지 않다. 그래서 산천은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터전을 지켜왔다.
길고 긴 학산계곡을 따라 문수산으로 얼마나 오르는지 모른다. 그 가운데 와선정은 수려한 폭포 곁에 자리했고 작은 주차장에서 아담한 아치교를 건너고 우람한 소나무 사이를 지나면 꽤 넓은 풀밭에 이른다.
작은 출입문이 막고 있는데 대문을 열면 정자의 지붕이 내려다보인다.
정자는 평범하고 단아한 모양새다.
개울을 면한 정자는 전면의 들어열개문을 젖히면 은폭의 소리가 요란하다.
제법 많았던 가을비에 은폭의 웅장한 물소리는 옆 사람과 대화를 어렵게 한다.
더구나 여름의 와선정은 짙은 녹음 속에 있다. 스미는 숲의 향기, 부서져 내리는 은폭의 물안개, 스치는 서늘한 바람은 깊은 들숨 한번으로 폐부 가득히 자연을 들어앉힌다.
정자가 깔고 앉은 바위는 사덕암이다.
오현들이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고, 기다려서 나라를 걱정하고 후학의 양성을 상의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사덕(梭德)이다.
와선대나 사덕암, 은폭과 후선굴의 이름들은 태백오현이 지었다.
와선정은 전통대로 조그마한 정자내부 전체가 통마루이다. 사방의 문을 열어 제치고 작은 책상에 모여 한 수의 시를 논하다보면 세속에 찌들었던 모든 시름을 날린다.
오현들의 모임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풍류를 즐김은 검박했을 것이고 학문을 논함은 높고 깊었을 것이다.
태백오현의 면면이 그 당시의 최고학자들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등과 친구로 사귀고 뜻을 같이한 그 시대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의 충과 효는 반듯했고, 예는 조선의 표본을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정자의 겉모습으로 태백오현을 평가하고 있지만 그분들의 학문적 가치나 어려웠던 시대상을 되짚어보고 그 우뚝하고 정갈했던 모습을 오늘에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그 분들이 들었던 폭포의 물소리와 앉았던 자리에 내려앉은 지혜의 청음이 오늘 시대를 거슬러 아득히 들리는 듯하다.
시대의 스승으로 남긴 저작들이 문집들에 남아있다.
그분들의 시대적 아픔을 모두 가늠해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삼아야한다.
지금도 중복날에는 태백오현의 후손들이 모두 와선정에 모여 오현들의 소요자적 하던 모습과 우의를 다졌던 맑은 뜻을 이어가고 있다.
와선정은 한 시대의 스승으로 의리를 표방하여 고집을 지켜가던 조선 선비의 정신을 엿보는 귀중한 흔적이다.
역시 정자는 그분들의 가치를 대변한다.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슬기롭게 내일을 대비하는 지혜의 산실로 삼아야 할 의무가 있다.
봉화는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의를 숭상하며 예를 지켜가려했던 청신한 선비들의 땅이다. 신선처럼 살다가려했던 태백오현은 와선정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린다. <정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