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여행>
징역살이를 배낭여행과 비교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징역을 오래 산 것도 아니고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것도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구속되기 며칠 전에는 이것 저것 정리하고 준비하느라 꼭 여행 떠나기 전 날의 기분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간 여행을 다니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살아가는 데에 그다지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작은 저가 항공의 엄격한 수화물 조건 때문이었지만, 10kg짜리 배낭 하나에 든 것들만으로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헬렌·스콧 니어링 부부의 삶의 방식을 저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이런 마음은 어쩌면 제가 이 땅에 쉬이 정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과정은 기존 사회의 가치, 삶의 방식 대부분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몇 번의 여행 경험은 저로 하여금 한국을 떠나서도 살아볼 수 있겠단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여기서 계속 싸우며 피곤하게 사느니 서로의 다름이 존중받는 공간으로 떠나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하는 추방자(디아스포라)의 삶이 제겐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삶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경험을 돌아보건대 여행의 와중에도 안주에 대한 욕망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나 텐트를 들고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을 다니면서 비를 만나거나 길을 잃었을 땐 당장 오늘 밤 잘 곳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일상의 안락함이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안정된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감옥은 내일은 어디에서 잘지, 덜 마른 빨래를 들고 어떻게 또 이동을 할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곳입니다. 여행 다닐 때처럼 매일 손빨래를 하긴 하지만 ‘짤순이’가 있으니 힘들게 손으로 물기를 짜낼 일도 없고 게다가 샤프란을 넣고 헹구면 그럴듯한 향기도 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징역살이에선 배낭여행과 같은 단촐한 살림에 적절한 일상성이 가미된 삶을 살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곳이 오래 있을 만한 공간이 아닌 것 만은 확실합니다.
며칠 전 지긋지긋하던 비가 개고 뜨거운 태양이 나오기가 무섭게 바로 이불을 싹 다 빨아 널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온 이후 제대로 해본 첫 이불빨래였습니다. 발로 자근자근 밟아 피존으로 헹구고 햇볕에 뽀송뽀송 말린 이불을 덮고 누운 0.5평 남짓 공간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닌 저남을 위한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여행자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저의 징역살이가 이렇게 슬슬 정착민 모드로 바뀌어가고 있나봅니다.
제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일상의 조건들 – 사람들과의 관꼐, 규율권련-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면서도 익숙함에 무뎌지지 않는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음 맞는 친구와 저녁에 맥주 한 잔 하면서 그 날의 여행을 정리하곤 하던게 그립긴 하지만 한편으론 여기에서도 새로운 길동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도 듭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고 나니 사회에서 먹던 시원한 콩국수와 팥빙수 한 그릇 생각이 많이 나네요. 다음주부터 아이스크림을 구매할 수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더운 날들, 자신만의 지혜로운 방식으로 피서 잘 하시길 바랄게요. ^ㅡ^
2011. 7. 23. (일)
날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