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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공내전의 클라이막스, 회해전역(淮海戰役)!
1948년 10월 11일, 금주(錦州) 함락 나흘 전, 만주에서의 승리를 확신한 모택동은 남경 북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회수(淮水) 일대에 50만 대군의 투입을 결정한다. 중부 평원을 타고 장강(長江)으로 진격해 남경과 상해를 넘보는 작전이다. 만주에서 파견된 공군(共軍)은 북경 지역의 일부 세력과 합류해 놀라운 속력으로 중부 평원으로 몰려간다. 불과 1달이 못돼 공군은 강소(江蘇), 안휘(安徽), 하남(河南)성에 걸치는 200킬로미터의 전선에서 국군(國軍)과 맞붙게 된다. 지난 회에 북경 함락을 다뤘지만, 실은 공군(共軍)이 회수지역으로 남하해 승기를 잡고 나서야 모택동은 북경을 포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회해전역(淮海戰役)은 1948년 11월 6일부터 1949년 1월 10일까지 65일 간 양진영을 합쳐 110만의 정규군이 투입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면전이었다. 동원된 민간인 지원자나 사상자의 수에서도 단연 국공내전 최대 규모였다.
▲ 회해전역의 한 장면. 남경 북쪽 100마일 지점에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큰 강 회수(淮水)와 강소성의 해주(海州)의 첫 자를 따서 회해전역이라 부른다.
국군 야전사령관들은 안전하게 남경 북부 100마일 지점 회수을 끼고 넓은 방어선을 구축하자 했으나 장개석은 독단으로 그보다 70마일 위의 강소성 서주(徐州)에 병력을 집결시킨다. 당시 인구 30만의 서주는 천진-남경선과 농해(隴海)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장개석으로선 북경을 포함한 북중국의 수비를 위해 남경의 관문 서주를 지켜야 했는데, 다수 전쟁사가(戰爭史家)들에 분석에 의하면 바로 그 결정이 국공내전의 승패를 결정하는 최대 패착이었다.
장개석은 탱크, 트럭, 포병대 및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다. 장개석의 공군(空軍)부대는 C-47, C-46 등의 수송기, B-25와 B-24 등의 폭격기, P-51 무스탕 전투기 등을 갖췄다. 반면 공군(共軍)은 투입된 병력의 수에서만 국군과 견줄 수 있을 뿐, 포병대는 1대 2의, 탱크 수로는 1 대 10의 열세였다. 무엇보다 공군(共軍)의 공군력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장기로 치면 차포 떼고 둬야 하는 불리한 상황인데, 놀랍게도 공군(共軍)은 65일간 국군을 몰아붙여 결국 1월 10일 서주에서 위장하고 도주하던 국군사령관 두율명(杜聿明, 1904-1981)을 생포한다.
과연 공군은 어떤 전술을 썼기에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회해전역에서 완벽하게 승리했을까? 두율명의 회고록에 의하면 만주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장의 상황을 오판한 장개석 리더십의 패배였다. 이길 수 있었는데, 장개석의 간섭 때문에 지고 말았다는 패장의 항변이다. 미국 국무성 산하 연구소의 2004년도 논문에 의하면,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군(共軍)은 황하 유역 퇴적층 평원에서 병력을 이동시키는 기동전에선 오히려 유리한 상황이었다. 특히 이 지역엔 많은 인구가 밀집한 작은 농촌 마을들로 이뤄져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共軍)은 마을과 읍내에 산재한 토성과 해자(도랑)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무엇보다 놀라운 대민장악력을 발휘해서 인민을 전역(戰役)에 동원한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역사기록에 따르면, 회해전역에 동원된 민간인의 숫자는 543만에 달한다 (아래 상론). 공군(共軍)은 도로와 철도를 우선적으로 파괴한다. 포장로와 공항을 잃은 국군은 군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지만, 공군(共軍)이 동원한 민간인 노역자들은 등짐이나 외바퀴 수레에 식량과 탄환을 싣고 좁고 구비지고 외진 길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회해전역에 동원된 민공들. 보통 외바퀴 수레를 밀고 끌며 식량과 탄환을 날랐다고 알려져 있다.
지속되는 장개석의 토벌작전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1934년 모택동은 이른바 “군중노선(群衆路線, 대중노선)”의 원칙을 천명한다. “혁명전쟁은 군중의 전쟁이므로 군중을 위해 군중에 의지해 군중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기본노선이다. 군중노선은 오늘날도 실사구시(實事求是), 독립자주(獨立自主)와 더불어 모택동 사상의 삼대 기본방침이라 일컬어진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중국공산당이 농촌 지역으로 점령해 소비에트 정부를 세운 후 토지재분배로 농촌의 “계급모순”을 철폐해 적극적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음을 강조한다. 결국 인민해방군이 인민의 자발적인 지원을 받아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인민에 의한” 인민해방의 신화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 중국에선 이미 정설이 된 설명이다.
회해전투에서 자발적으로 공군(共軍)을 지원한 수많이 농민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맨손으로 농사짓는 수백 만의 농민이 과연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을까? 당시 농민의 동원령의 총지휘자는 바로 1978년 이후 "개혁개방"을 구현한 등소평(鄧小平, 1904-1997)이었다. 그는 각 마을마다 징발 인원수를 할당하고 명령불복종을 엄격하게 처벌했다고 알려져 있다. 농촌현실을 고려할 때, 강제성 없는 자발적 동원이란 공산당의 선전에 불과하다.
중공의 공식적 기록대로 60만 병력의 지원에 543만이 동원됐다면, 1명의 군인 당 아홉 명의 민간인이 따라 붙었다는 얘기다. 과연 543만의 농민들이 엄동설한에 장개석 타도의 깃발 아래 모여 자발적으로 인민해방군의 최전방 부대를 지원할 수 있었을까? 543만 명의 “지전민공(支前民工, 전방지원 민간인)” 신화는 이후 정치적 목적을 부풀려지고 윤색된 인민영웅담처럼 들린다. 인민해방군은 그러나 과연 어떻게 수백 만 대규모의 인민을 일사분란하게 군사작전에 동원할 수 있었을까?
▲ 회해전역에 동원된 민공들
2. 행존자(幸存者) 임정무(林精武, 1925? - )의 고백
만주 요녕(遼寧)성의 심양이 공군(共軍)에 함락된 지 불과 나흘 후, 1949년 11월 6일 강소성 서주(徐州)에서 국공내전 최대 규모의 전쟁이 발발했다. 11월 중국 화북지방엔 날마다 표표히 나린 흰 눈이 잔뜩 쌓여 가고 있다. 서주 성 밖의 지면은 양쪽에서 쏘아대는 포탄으로 온통 울퉁불퉁 파이고, 제대로 폭탄을 맞은 도로 면엔 큰 지프차 한 대가 쏙 빠질 만한 큰 구멍도 뚫렸다. 시골 마을 사이 흙길에도 말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사람이 끄는 외바퀴 수레가 끝도 없이 오가며 깊은 홈을 파놓았다. 여기저기 푹 튀어나온 진흙더미가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으면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날이 서서 오가는 군인들의 군화를 뚫거나 다리 살을 찢어 놓았다. 국군과 공군은 서로 포탄을 주고받다 총검을 빼들고 맨몸으로 부딪혀 죽고 죽이며 싸웠다.
현대 중국어에 행존자(幸存者)란 단어가 있다. 천운으로 죽임을 모면한 행운의 생존자란 뜻이다. 임정무 노인은 서주 최전선의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도 용케 살아남은 행존자다. 복건성 혜안(惠安) 출신 임노인은 18세 자발적으로 군입대하여 항일전선에 참여했다. 반년 후 일본의 항복 선언 후에도 그대로 군에 남아 국공내전에 출정했던 인물이다.
▲ 1945년 7군 소속 당시의 사진을 들고 있는 임정무씨. http://www.chinatimes.com/newspapers/20141030001053-260306
2009년 중화민국(中華民國) 문화국 수임(首任)부장을 역임했던 작가 용응대(龍應臺, 1952- )는 대북(臺北, 타이베이)의 온주(溫州)가에 살고 있는 임노인을 만나 회해전역의 체험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2009년 당시 83세의 임노인은 집 밖 재래시장에 과일을 사러 갈 때도 정장을 차려 입는 반듯하고 꼿꼿한 신사다. 60년 전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살아가는 그 깐깐한 신사에게 용응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주의 전장에서 가장 기억나는 사건은 무엇인지요?”
임노인은 휑한 눈으로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뭐가 제일 인상적이냐? 모든 게 다 인상적이지. 지원군이 곧 온다며 진지를 사수하란 명령이 떨어졌는데, 부대원이 다 몰살당해도 지원군은 오지 않았어. 인상적이지 않아? 동쪽으로 가면 전군이 포위돼 섬멸되는 함정인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최고 지휘관이 동쪽으로 가란 명령을 내리지. 인상적이지 않아? 양식이 다 떨어지고 탄약도 모두 바닥났는데 보급은 끊어져서 말을 잡아 뼈까지 다 빨아 먹은 다음에야 공군(空軍)이 물자를 투하하지. 볏짚에 총탄을 싸서 투하하는데, 한 포에 천 발씩 든 총탄을 공중에서 투하하면 매일 열 명씩 아군이 맞아 죽었어. 인상적이지 않아? 부상당한 병사들은 엄폐물 하나 없이 눈 바닥 위에서 나뒹구는데 기관총이 난데없는 폭우처럼 퍅퍅 쏟아져서 눈을 뜰 수도 없지. 인상적이지 않아?”
잠시 쉬었다가 임노인을 말을 이었다.
“하지만 60년간 악몽처럼 매일 같이 떠오르는 걸 하나 꼽으라면 바로 그날 못 먹었던 돼지고기지. 여러 낮밤을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한 채 전투를 하고 나선 입가엔 온통 진흙투성이고 안구가 시뻘겋게 되지. 전우들과 함께 눈 바닥을 헤치고 불을 지펴 어렵사리 돼지고기를 한 솥 삶았는데, 막 먹으려는데 포탄이 날아와서 솥 위에서 터져버렸어. 귀가 잠시 멀어 버렸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동료들의 머리와 팔다리가 다 조각나서 고깃덩이가 되어선 돼지 삶은 솥 속에 빠져 있더군.”
임노인에겐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을 압도하는 또 하나의 악몽이 남아 있었다. 일렬로 쭉 늘어선 병사들이 힘껏 적진으로 수류탄을 내던지자 움푹 파인 땅덩이가 들끓는 기름 솥처럼 폭발했다. 다음 순간 참호 속에서 그는 총구를 통해 겹겹으로 몰려와선 화염을 내뿜는 포구(砲口) 앞에 정면으로 몸을 던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공군(共軍)의 맨 앞에 서서 몰려오는 사람들은 무고한 민공(民工)이었다. 그들은 힘없이 전쟁에 불려나온 민간인들이었다. 바로 오늘날 중공정부가 전승의 최대공로자라 칭송하는 “지전”(支前) 영웅이다.
국군(國軍)은 바로 그 불쌍한 민공들을 향해 손에 힘이 빠지도록 기관총을 난사했다. 군인들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질을 멈추면 곧 죽임을 당할 판이어서 계속 사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격을 멈추면 그 자신이 곧 목숨을 잃기 때문이었다. 임노인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공군(共軍)은 수많은 민간인을 열 세워 총알받이로 희생시킨 셈이다.
한편 서주에서 공군의 포로가 된 국군병사들 중에선 공군(共軍) 부대에서 일반병사와 민공이 완전히 뒤섞여 아무 차별 없이 함께 생활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경악한 사람들도 있었다. 총알받이로 사용된 “민공”들이 실제로는 민간인으로 위장한 일반병사들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상세한 내막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3. 인해전술(人海戰術)의 진실
과연 회해전역에 543만의 민공이 동원됐을까? 중국학자 유통(劉統)는 당시 회해전역에 동원된 민공의 총수를 실제로 543만으로 집계하고 있다. 직접 전쟁을 지휘했던 제3야전군 후근(後勤) 사령관 유서룡(劉瑞龍)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민공 인원수가 230만이라 추산한다. 중국황자 황도현(黃道炫)은 회해전역에 230만, 이후 도강전역(渡江戰役)에 320만이 동원됐다고 적고 있는데, 이 두 인원을 합치면 550만 정도가 된다.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100만에서 200만 정도가 동원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동원된 민공의 실제 숫자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용응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주의 전투에 동원되어 “총알받이”로 죽임당한 민공들은 대부분 산동 지방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산동사투리를 썼으며, 공군(共軍)에 식사를 제공할 땐 쌀밥 대신 산동식 만두를 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 군벌이 발호하던 시절, 타지의 군인들이 원거리 전쟁에 투입되어 “개죽음” 당하거나 노략질, 강간, 살해 등의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최신 공개된 주중 영국대사 앨린 도날드(Allan Donald)의 보고에 따르면, 1989년 “천안문 대도살(大屠殺)” 당시에도 중국 정부는 멀리 산서(山西)성의 부대를 동원해서 학살을 감행했다. 이역만리 낯선 지방에서 익명을 보장 받을 때 인간은 더 쉽게 괴수로 둔갑하기 때문일까.
서주의 전투에 동원된 민공들은 포탄이 터지는 전장의 맨 앞에서 맨몸으로 식량과 탄약을 등에 지거나 옮기거나 외바퀴 수레에 실어 날랐다. 또 부상당한 병사들을 들것으로 들어 나르고, 총탄을 맞아가며 전선(電線)을 까는 노역에도 시달렸다. 체험자의 증언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확정할 순 없지만, “543만 민공”의 일부는 회해전역의 최전선에서 “인해전술(人海戰術)”의 병기로 소모됐던 듯하다. 공군(共軍)이 인해전술을 구사했음은 국군(國軍)의 기록에선 흔히 발견된다. 항일전쟁 시기 버마 전선에서 소령으로 복역했던 재미중국학자 황인우(黃仁宇, 1918-2000)는 회고록 <<황하(黃河靑山)>>에서 임표가 만주에서 “인해전술”을 구사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에선 거론 자체가 금기시되므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는 지난하다.
▲ 2017년 12월 13일 회해전역 박물관을 둘러보는 습근평 주석. http://www.xinhuanet.com/politics/leaders/2017-12/13/c_1122106839.htm
2017년 12월 13일 서주의 회해전역 박물관을 방문한 국가주석 습근평(習近平, 1953- , 시진핑)은 회해전투는 “외바퀴 수레로 이끌어낸 승리”라며 “우리는 인민에 잘 보답해야” 한다고 소감을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일반 중국 사람들에 물어보면 “지전민공(支前民工),” 즉 전방부대를 지원한 용감한 민간인 노역자들의 승리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인민해방군의 승리는 바로 수많은 인민의 희생 위에서 이뤄진 셈이다. 장개석의 국민당도 역시 공비(共匪) 토벌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전면전의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비/도덕적이라 단정할 순 없다. 전쟁이란 결국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보복의 악순환이다. 미국학자 러멜 (R.J. Rummel)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당 통치시절 2,72,400명이, 항일전쟁기엔 10,216,000명이, 일본점령지구에선 3,949,000명이, 국공내전기엔 4,968,000명이 희생되었다.
▲ 운남성의 노인들, http://photographersdirect.com/buyers/stockphoto.php?image=622992
중국 사람들과 중국의 문제에 대해서 대화하다 보면 늘 결론은 다음 한 마디로 요약되곤 한다. “왜냐면 중국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因为在中国人太多!)" 아마도 20세기 역사를 통해 중국 대륙에선 너무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혁명의 험한 파도에 휩싸여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르고 스러져갔기 때문이리라.
▲ 중국의 한 노인 부부 (출처불명)
1940년대 제국의 전장에 학병으로 끌려간 대작가 이병주(李炳注, 1921- 1992)는 말한 바 있다. “전쟁에는 본래 승전국도 패전국도 없다.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있을 뿐이다. 국적과 상관없이 살아남은 모든 사람은 승자이고, 죽어버린 모든 사람은 패자다.” 나는 중국에 갈 때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백발성성한 노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그들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혼자 읊조린다. “아름다운 분들이여, 여러분들이 바로 역사의 승자들이십니다.”
송재윤 / 객원 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교수)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