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강다리를 폭파한게 잘못이냐, 이승만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어야 했느냐는 말이냐, 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애들 말싸움 같은 수준의 저급한 토론입니다. 따지고보면, 저들 말마따나 군 통수권자가 전황이 불리할 때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퇴각하는건 전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건 오히려 상식적이고 당연한 작전상 조치이겠죠.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의 행위에 대한 저런 말들은 요란한 빈 수레와 같을 말일 뿐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가 물어야 하는 더 중요한 질문은 아래와 같은 것입니다.
당시 이승만의 피난과 한강교 폭파가 국가란 이름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고 하더라도, 그와 정부가 과연 피난하는 국민들, 정권과 군대가 보호해야할 책무를 가진 대상인 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는지 그리고 그후 이승만 정부가 그 조치와 그로 인한 희생에 대해 어떤 위로를 했고 어떤 책임을 졌는가? 라는 것이죠.
국가가 모든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최대한 많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그 과정 그리고 사후 국가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졌는가, 라는 질문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애들 말다툼 수준의 회피는 정말 비겁하기 그지 없는 행동입니다. 아마 그들도 여기까지 생각 못할 리가 없기 때문에 저따위 말들이 더욱 역겨운 것이구요.
이승만이 철교를 끊고 도망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부가 존립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요? 그것이 맞다고 전제하더라도 우리가 궁금한 건, 당시 누가 어떻게 철교를 끊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했는지 그리고 이후 정부가 철교를 끊은 행위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졌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없이는 당시에 대해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까고 보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에 대한 언급 자체로 효과를 발하는 "나 애국 보수야!" 라는 정치적인 워딩에 불과할 뿐인거죠.
그런데 어차피 여기까지야 새로운 말이 아니니 지금부터는 조금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피난을 가면서 한강 다리를 끊은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저는 당시 다리를 끊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게 과연 철면피 처럼 그렇게 해야만 했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인지.
6.28 때 폭파된 한강인도교는 1.4후퇴 때까지 복구되지 못해서 그 밑에 부교를 놓아 국군 유엔군 피난민이 사용하도록 했다. 6.28에 폭파된 한강다리의 하류에 철제 아치가 사진 왼쪽 얼음 속에 앙상하게 드러나 보인다. 앞에 보이는 남쪽으로 강을 건너가고 있는 피난민들은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중지도 섬 위에서의 모습이고 강 건너 왼쪽으로는 정조가 수원능행할 때 거쳐간 행궁 '용양봉저정(망해정)' 이 흑석동 뒷산 중턱에 보인다.
위 사진은 남쪽 노량진에서 북쪽 중지도쪽으로 올려다 본 한강인도교와 부교
저는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월남자들의 생애에 들을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중에 전쟁 이전에 월남하여 전쟁 당시 공병학교에서 소위였던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을 통해 한강다리 폭파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 분과 그의 동료들이 당시 한강다리를 직접 끊었던 장본인들이었거든요. 이 분은 당시 육군 공병학교 교장의 지시에 따라 다리를 끊었고 다리가 끊어지던 현장에 있었으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들은대로 그날의 상황을 복기해보겠습니다. 구술자는 당시 다리를 끊으라는 지시를 받고 폭탄을 설치하던 팀과 지휘부와의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다리를 끊던 날은 비가 부슬부슬 오고 달도 없어 아주 어두웠던 새벽이었습니다. 이분의 기억으로는 시간은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라고 했습니다. 미아리쪽으로 진격해오는 북한군의 포 소리는 이미 서울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던 그날 새벽, 폭파 지시를 최종적으로 받고 공병대는 한강 다리를 일제히 폭파시켰습니다. 그 폭파의 위력이 어마어마했기에 흑석동 지역의 건물들의 창문이 모두 깨졌다고 했습니다.
예고치 않은 폭파였기 때문에 한강 다리 근처에 있거나 건너고 있었던 사람들은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당연히 다리를 폭파시킬 것이기 때문에 다리에 대한 통행을 저지시켜야 했으나, 당시 바리게이트를 따로 치지는 않았으며 새끼줄로 꼬아 다리로 가는 길을 막아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는 깜깜한 새벽, 새끼줄로 통제를 했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고 피난민들이 탄 차들이 계속해서 다리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폭파했을 때 그 차들은 모두 한강으로 떨어지는 것을 자신이 목격했고 모두 죽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폭파 이후에도 다리가 끊어진 사실을 몰랐던 피난민들의 차가 계속 그 길을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한강 다리 근처에는 사람들의 시체와 여기저기 흩어진 시체의 파편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당시 한강 다리 폭파 현장의 모습입니다. 구술자 역시도 너무나도 참혹해서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 역시 군인으로서 명령에 의해 실행하긴 했지만 그것만은 국가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한강교의 폭파는 서울을 빠져나가려던 많은 시민들의 발을 묶었고 피난을 가야만 했던 우익이거나 우익으로 몰렸던 죄없는 시민들이 9.28 수복 이전까지 학살에 그대로 노출되어야만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실종되었습니다. 본래 국가가 한강다리를 끊어서 서울시민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서 서울의 시민들을 무책임하게 적의 수하에 노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수복 이후엔 오히려 살기 위해 피점령지인 서울에서 북한에 협력해야만 했던 이들까지 전부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국가가 그들의 손에 던져버린 책임은 커녕 그들에게 부역당했다고 책임을 물어 적으로 취급한 것이지요.
이 일은 당시에도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강 다리를 끊은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당시 사회적으로 큰 비판이 있었고 정부 역시 이러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수복 이후 한강 다리 폭파의 책임은 당시 일본군 출신이었던 공병감이 지게 되었고 공병감은 군법에 의해 9월15일 사형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면 충분할까요? 일개 대령인 공병감이 정부의 의지에 반해서 한강 다리의 폭파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당시 공병장교로 복무했으며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는 구술자의 증언을 토대로 제가 아는 걸 좀 보탰습니다. 구술의 한계상 문헌 기록과는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밌는 건, 피난하는 사람들의 발을 묶은 것이 서울에서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건 다른 구술자, 평양에서 이남으로 피난을 한 월남인에게 들은 내용으로 평양에서도 서울에서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여기서 주체는 북한이 아니라 국군, 아니 그때는 작전권이 없으니 유엔군이라고 쓰고 미군이라고 하는 애들이겠지만 (이때 신기한 건 끊을 다리가 있었다는 걸 보니 북한군은 철수하는 와중에도 대동강 다리를 끊지는 않았나 봅니다. 아니면 끊은 다리를 그 사이 임시 다리를 재건했든지 하지만 한강 인도교조차 복구하지 않았었는데 대동강 다리를 그 짧은 시간에 복구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가 없어서 폭파된 대동강 다리의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전자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멘트도 똑같았습니다. 평양은 반드시 국군이 사수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일상에 전념하시라고... 실제로 그 방송을 믿고 구술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는 당일까지도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1950년 10월 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고 이승만이 10월 26일인가 평양에 가서 기념연설을 했는데, 그가 연설하기 전날 평양에서는 후퇴하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한바탕 인민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해 셀 수도 없는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구술에 나온 내용) 그런데 그때는 이미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후였고 전황상 실제로 평양의 사수를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정부는 평양시민들에게 평양은 반드시 사수할 것이라고 방송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다음 상황에서 자신들은 비행기로 슝슝 남쪽으로 떠났고 이번에도 한강다리와 똑같이 대동강 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역시 당연한 행동이죠? 적군이 밀려오는 걸 막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북한은 북으로 후퇴를 하면서도 유엔군을 막기 위해 대동강 다리를 폭파시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번에도 폭파의 주체는 우리쪽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로 인해 피난은 당연히 지체됐을 것이고 (북한 입장에서) 수복한 평양에서는 또 다시 유엔군에 부역한 무고한 인민들에 대한 학살이 한 바탕 이루어졌을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당시 평양에 거주했고 현재는 인천에서 거주하시는 구술자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했습니다. 정확한 날짜나 전후관계는 실제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1950. 12. 04일 유엔군에 의해 폭파된 대동강철교 사진 - 북한군은 유엔군을 막는다고 철교를 끊지 않았었다.
- 당시 종군기자였던 AP통신 막스 데스포 기자는 이 사진으로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평양에 고립되거나 월남을 하지 못한 경우, 이후에 벌어졌을 일, 반동이라고 몰렸을 그들에게 벌어졌을 일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은 일은 아닙니다. 서울사람이 당했던 일을 평양사람이라고 면할 수 있었을까요? 이건 말 그대로 학살인데, 일반 기층민들이 전쟁을 겪은 경험이란 이런 식이었던 셈입니다. 내가 왜 죽어야 했는지 난 단지 살고자 했을 뿐인데 북한군이 죽이고 유엔군이 죽이고 국군이 서로 죽이고 죽였습니다. 일종의 '연극'처럼.
지난 번 구술을 풀었던 또 다른 한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전쟁 당시 서울에 거주했는데, 학도병에 끌려갈 뻔한 상황에서 미리 눈치를 채고 도망가서 위기를 모면했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어떻게 도망쳤냐고? 그냥 그때는 살기 위해서 항상 'Question(?)' 마크를 달고 살아가야만 했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끊임없이 의심하는 수밖에. 그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믿겠어? 그게 전쟁이야."
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사실상 국가가 부재한 그 상황에서 대체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요? 국가를? 위대하신 이승만 박사님을? 김일성 장군을? 미국을? 우리가 전쟁을 쉽게 이야기하거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일반 민중들의 희생을 가볍게 말하는 이들을 절대로 믿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들이 그 상황이 또 발생한다면 우리를 지켜줄 것 같은가요? 저들에게 우리 같은 인간들이 전쟁의 승패라는 국가의 당위 앞에 얼마나 중요해질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믿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 이 빨갱이 새끼들아 국가를 그냥 믿으라고. 국가를 좀 사랑해보라"고요. 나중에 똑같은 상황이 재발하면 그렇게 말한 국민에게 부역했다고 또 죽이겠지요.
그럼 전 저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니들 말을 믿겠냐고.
I Love NBA | 김진태의 거지같은 소리는 반박할 필요도 없지만, 당시 한강 다리를 끊던 날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 Daum 카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