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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사고를 할 줄 아는 인간교육을 위한 소고
-지식교육에 대한 사고의 전환과 교육 본질의 회복-
박철홍 명예교수(사범대학 교육학과)
1. 한국 교육의 자화상 : 시험에 찌든 죽은 지식교육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문호 엘리엇(T. S. Eliot)은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불후의 명저 “황무지”의 첫 줄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교육학도로서 그리고 사범대학 교수로서 바라다 볼 때에 우리나라의 가장 잔인한 달은 단연 11월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혹독한 겨울을 대지 속에서 견디고 새 생명을 싹틔우는 고통의 몸부림을 주목하여 새싹이 대지를 뚫고 움트는 바로 그 시기인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가 ‘11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는 희망찬 내일의 행복한 삶을 준비하는 청춘과 젊은이들의 수년간의 피땀 흘리는 노고와 그 노고의 실패로 인한 좌절에서 오는 아우성이 뼈저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11월은 교육학도로서 보면 수학능력고사가 실시되는 달이며, 사범대학 교수로서 보면 교사임용자격고사가 실시되는 달이다. 이때가 되면 고3 수험생이나 시험을 치르는 예비교사들 자신은 물론, 수험생이 있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지도하는 교사들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내게 된다.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 겪은 수험생들의 고초는 그만두고라도, 원하는 결과에 미치지 못하는 시험의 결과가 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낙심과 고통을 겪는 것을 옆에서 목도하면서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되면 누구나 정말이지 ‘11월은 잔인하고도 잔인한 달’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11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하는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시험 준비를 위한 고통과 시험의 실패에 따른 아픔과는 성격이 다른 그리고 훨씬 더 심각한 것으로 시험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비교육적 행태가 미치는 인간 정신의 파괴 현상을 뼈저리게 느끼는 교육학도로서의 깨달음 때문이다. 이 아픔의 중심에는 수학능력고사 응시자들이 적어도 3년 이상, 그리고 교사임용자격고사 응시자들이 최소 4년 이상 피땀 흘려 한 공부가 시험을 치고 나면 거의 쓸데없는 단편적 지식을 암기하는 일에, 교육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황금기를 탕진하고 있다는 비극적 사실을 적나라하게 목도하는 데에서 절절히 느끼는 허탈감과 안타까움이 있다. 대부분의 식자들이 인정하다시피 객관식 고사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는 청소년기나 대학생 시기에 가장 중요한 발달 과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정체성을 탐색하는 일, 앞으로의 삶을 영위해야 할 삶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평생 수행해야 할 천직을 찾는 일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공부가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사고의 능력을 발달시켜야 할 시기에 무의미한 지식들을 암기하는 데에 탕진함으로써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험에 나오는 단편적 객관적 지식들을 암기하는 공부는 죽은 지식들을 무작정 암기하는 가짜 지식교육일 뿐이다.
단편적 지식의 암기에 몰두하는 한국교육을 볼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모습이다. 그것은 한 발을 침대 위에 올려놓은 채, 한 손에는 톱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침대 위에 눕혀 있는 어린아이를 움켜쥐고 있는 흉측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캐리커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에 있는 캐피소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쇠침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의 키가 쇠침대의 길이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집으로 잡아 와서 쇠침대에 눕히고 키가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짧으면 늘여 죽였다고 한다.
이 신화가 교육에 대하여 시사해주는 중요한 사실은 일정한 길이를 가진 쇠침대라는 정해진 잣대에 모든 사람의 키를 맞추겠다는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특징을 규정하는 용어가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각하는 존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이다. 자유롭게 사고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획일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를 말살하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중대한 문제 특히 지식교육의 문제를 들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기위주의 지식교육을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육이 계속해서 교육 실제를 지배하는 원인은 교육의 목적과 지식의 성격에 대한 그릇된 신화적 믿음(myth)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믿음의 이면에는 교육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서로 상보적인 두 가지 교육을 보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교육목적과 관련하여 교육을 교육의 본질적 목적 이외의 다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외재적 목적관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내용의 성격과 관련하여 교과서의 지식을 진리처럼 대하는 절대주의적 지식관을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으며, 동시에 절대적 지식관이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독립된 낱낱의 지식이 그 자체로 진리라는 생각을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이 결합하게 되면 모든 학생에게 각가의 정답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교육의 전형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사고를 기르는 정답 위주의 지식교육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하 이 글에서는 외재적 교육목적관과 절대주의적 지식관의 결합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살펴본 교육적 문제를 극복하고 교육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2. 교육의 본질적 목적으로서 안목 형성
외재적 교육목적관과 절대주의적 지식관의 결합이 교육 실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교육의 본질적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는 것이 논제를 이해하고 논의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육목적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육이라는 활동의 성격과 목적을 명료화하기 위하여 교육철학에서 널리 사용하는 논의의 방식은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의 구분이다. 사용된 용어 자체가 암시하듯이, 내재적 목적은 교육활동 안에 들어 있는 본질적 성격을 교육목적으로 정하는 것을 말하며, 외재적 목적은 교육활동 밖에 있는 목적을 교육목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의 성격과 관련하여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Peters(1966: 4장), 이홍우(2008: 1장)를 참고할 것.
내재적 목적의 관점에서 교육의 가치에 대한 설명은 교육활동에 들어 있는 것 즉 교육활동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가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으로서 교육의 내재적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는 늑대 소녀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늑대소녀 이야기는 1920년 인도의 늑대굴에서 발견된 2세의 아말라(Amala)라는 여자아이와 8세의 카말라(Kamala)라는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에게 발견된 후 이들은 싱(Singh) 부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나 아말라는 1년 이내에 죽어 버렸고, 카말라는 9년 후에 죽어 버렸다. 이들은 발견 당시에는 신체적으로만 인간이었지 행동과 말은 늑대와 동일하였으나 양육된 지 6년 정도 지나서 카말라는 시람과 같은 행동과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편, 1999: p. 192).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늑대 소녀는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행동과 태도는 늑대였다. 짐작컨대, ‘아말라’와 ‘카말라’라고 명명된 두 소녀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늑대에 의해 양육되었고, 늑대와 살면서 소위 ‘늑대 교육’을 받은 소녀들은 늑대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소녀들이 늑대와 같이 된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들로부터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그 소녀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필수 요소인 인간적 안목을 형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2개의 생물학적인 눈만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물이나 현상을 인간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려면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눈인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안목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박철홍(2015)을 참고할 것.
안목의 차이는 단순히 어떤 지식을 갖는 것을 넘어서서 사고방식과 행동과 태도 등 인간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집에 찾아온 처음 보는 낯선 남자 어른을 보면 처음에는 ‘아저씨’라고 부를 것이며,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가지고 대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버지의 형제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사람을 ‘삼촌’이라고 부르게 된다. ‘삼촌’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의미를 알면서 그 사람을 ‘삼촌’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명칭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삼촌’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그 사람을 대하는 아이의 태도와 감정과 행동 등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교과를 배울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면 미술을 공부하지 않아서 미술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피카소의 그림은 색채의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고전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고전음악은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고전음악을 들어도 음악을 들을 때에 갖게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미술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없는 사람은 색채를 구분할 수 있는 시력은 있으나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심미적인 눈’은 없으며, 음악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력은 있지만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는 ‘음악적인 귀’는 없다. 심미적인 눈과 음악적인 귀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간에 미술과 음악을 공부한 결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미술이나 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교과를 배운다는 것은 교과를 배우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이해의 능력을 갖는 것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을 형성하는 것이다. 내재적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학습자의 마음에 안목을 길러 주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교육과 마음의 함양 사이에 불가분의 관련, 즉 논리적인(필연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늑대 소녀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앞에서의 논의가 시사해주는 중요한 사실은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의해 인간은 늑대와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성인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러한 차이는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는 안목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교육의 성패는 안목 형성에 얼마나 성공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3. 외재적 목적과 지식교육의 문제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는 달리, 교육의 외재적 목적은 교육활동 밖에 있는 목적이나 가치를 교육의 목적으로 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의 외재적 목적은 교육활동과는 관계없이 누구나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 예를 들면 경제 발전, 사회 발전, 건강 증진 등과 같이 가치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목적이나 가치를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이 경우 교육은 교육활동의 성격과는 관계없는 미리 정해진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필자는 현직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교육목적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할 기회를 수도 없이 가졌다. 그런데 교육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외재적 목적을 교육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았다. 가끔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내재적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약간의 일반화의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학생들과 수업에서의 토론, 고등학생이나 학부모와의 면담, 그리고 일반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실제로’ 사로잡고 있는 교육목적은 ‘부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지위를 차지하기’, 속된 말로 ‘잘 먹고 잘 살기’였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해서는 이홍우(2008: 1장)를 참고할 것.
그런데 외재적 목적에 따르는 교육도 내재적 목적에서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안목을 형성하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수능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육이 ‘안목’을 기르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0여년 전 ‘농무’의 시인 신경림씨가 경상북도의 한 중학교를 찾아갔다. … 신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교사들이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참고서에 나오는 국어 시험문제를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신씨의 작품 ‘가난한 사랑 노래’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하는 시에 대한 객관식 문제 10개를 신씨가 즉석에서 풀었다. 결과는 겨우 30점. 세 문제밖에 맞히지 못한 것이다(중앙일보, 2004.05.26).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문제를 푼 대부분의 중학생들은 신경림 시인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았을 것이며, 적지 않은 학생들이 만점을 받았을 것이다. 외재적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은 정상적이면서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본질적인 교육목적의 입장에서 보면 신경림 시인의 시를 가르치는 것은 신경림 시인과 같은 시적 안목과 심성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생들이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시에 대해 신경림 시인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만점 맞은 학생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결국 학생들이 배웠다는 것은 시가 아니라 좋게 말하면 시에 ‘관하여’ 배운 것이며, 심하게 말하면 시에 ‘반하는 무엇’인가를 배운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시’의 교육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 받았던 역사교육도 이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하 국사 시간에 대한 진술은 몇몇 대학교 1학년 학생들과의 대화와 필자의 기억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역사 교육에서 암기식 교육방법이 지배적인 것은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 일례를 들면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승유억불정책, 민본주의정책, 농본주의정책을 조선 건국의 3대 이념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는 것도 배웠다. 그 당시 수업시간에는 3대 이념이나 성리학에 대한 간단한 용어해설과 한두 가지 특징적인 사항을 제시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문제에는 ‘조선의 3대 건국이념을 쓰시오.’라는 괄호 넣기 문제가 나오거나, ‘다음 중 조선의 3대 건국이념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또는 ‘다음 중 성리학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라는 선택형 문제가 출제되곤 하였다.
사실 어느 정도 철학을 공부한 현재에도 필자는 성리학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암기했던 이(理)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며, 그런 만큼 성리학에 담겨져 있는 인간 형성의 원리와 이상사회에 대한 비전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고등학생들에게 성리학은 주자가 창시자라느니, 송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느니, 이(理)를 근본 원리로 한다느니 하는 단편적 지식을 암기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백배 양보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뜻도 모르는 단편적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그런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당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조선을 건국할 당시 정도전을 비롯한 건국이념의 입안자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바탕을 둔 이상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여기에 기초하여 고려 말의 사회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역사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의 바람직한 삶에 대한 생각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들은 바가 없다. 조각조각 나누어서 전달되는 단편적 사실들 속에 묻히어 그러한 점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시대적 상황을 지칭하는 몇 마디 말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을 가지고 역사를 가르쳤다거나 그것을 암기함으로써 역사를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안목은 그렇게 쉽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수능에 필요한 간단한 내용만을 가르치는 교육적 관행은 수능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교과에서 행해져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과의 원래 성격에 적합하게 교과를 가르치는 일이 거의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한 교육의 병폐를 비꼬아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학교에는 하나의 교과 즉 ‘암기교과’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교과의 원래 성격이 실종되고 암기교과만이 있다면, 학생들은 거의 무의미한 정보들만을 습득할 뿐 각각의 교과를 배우면서 길러야 할 적절한 안목을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교육은 교육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 목적과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만다.
4. 의미로서의 지식과 공부의 성격
지식을 암기하는 것을 교육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외재적 목적만 가지고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학생들의 공부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시험문제이다. 학생들의 암기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문제가 출제되면 학생들은 암기식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시험을 출세하는 사람들이 정답이 있는 암기식 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은 시험을 출제하는 사람들과 그러한 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게 만드는 사회 전체가 암암리에 모든 문제에는 정답이 있다는 생각, 나아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교과서에 있는 지식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인식론을 공부한 것도 아닐 텐데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일종의 진리라고 하는 생각은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학창시절에 계속해서 정답맞추기식 교육을 받은 결과로 교과서에 있는 지식은 진리라는 생각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전국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수학능력고사는 정답이 있다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가정으로 하고 있다. (창의성을 요구하는 문제도 정답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 3년 동안, 길게는 공부하는 거의 모든 기간 동안 수능에 나올 예상 문제의 정답을 암기하는 공부를 해왔다. 모든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으며, 이 정답만이 올바른 지식으로 인정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들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구체적인 명칭과 방식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수능과 유사한 고사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대학입학의 필수 요소로 시행되어 왔다. 그 결과 지금은 어른인 대부분의 사람들까지도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고착되어 있다. 이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과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믿음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의의 이면에도 암암리에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 학생들에게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그대로 주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국정화를 지지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보다 근본적인 국사교육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암기식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결국 암기식 교육은 암기식 교육을 정당화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며, 암기식 교육을 대대로 이어가게 만드는 ‘암기식 교육의 악순환’의 중요한 동인이 된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볼 때에 거기에는 특정한 지식관에 기초를 둔 교육내용관이 도사리고 있다. 일체개진과 일체개의 라는 두 가지 지식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박철홍(2014: )를 참고할 것.
불교에서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전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로 종종 표현된다. 불교에 대한 표현방식에 맞추어 나타낸다면, 암기식 교육은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지식관을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생각에 따르면 자연 또는 세상은 불변하는 원래의 모습인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그대로 있는 변화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이 불변하는 세상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영원불변하는 진리이다. 일체개진의 관점에서 보면 교과를 구성하고 있는 지식은 진리이며 적어도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때에 바람직한 교육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된다.
외재적 목적이 교육목적을 생각하는 유일한 관점이 아니듯이, 절대주의적 지식관이 지식의 성격을 이해하는 유일한 관점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외재적 목적이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교육목적관인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주의적 지식관은 오늘날 철학에서는 틀린 이론으로 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되는 지식관 즉 일체개진의 지식관과 대조되는 관점으로는 ‘일체개의’(一切皆意)의 지식관이 있다. (이러한 지식관은 20세기 주요 사상가들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체개의에 의하면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앎의 내용은 영원불변하는 본질에 대한 앎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삶에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의미’인 것이다. 지식은 진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삶과 관계있는 것들에 대한 설명이며, 삶에 의미 있는 것들을 명제화해 놓은 것이다.
교육내용을 본질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미의 체계라고 하면 교수의 과정은 삶의 경험과의 관련 속에서 삶에 적합한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교육은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고를 하면서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때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공부한다는 것은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과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적합성을 따지고 검토하면서 학습자 자신이 납득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 지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공부법은 절대적 지식관에서 자유로웠던 동양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진정한 탐구와 배움은 학(學)과 사(思)의 통합이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공자의 공부법에 잘 나타나있다. 공자는 공부에는 두 가지 대표적인 폐단이 있음을 주목하고, 이 폐단을 간결하게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볼 때 공자의 언급은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고 사고하지 않으면 죽은 지식만을 갖게 되며, 교과서에 있는 지식의 보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세상을 재단하게 되면 앎은 빈약해지고 생각은 독선에 빠지고 만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학과 사를 통합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공자의 언급은 인류가 탐구하고 누적해 온 지식의 체계와 이 지식의 체계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개인이 만나 진정한 융합이 이루어지는 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공자의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말은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말하면 학습자는 교과서에 있는 옛것을 배우지만(溫故), 자유로운 사고의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새로운 것을 배운다(知新)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옛것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즉 현재의 삶과 관련하여 옛것을 검토하는 사고의 자유를 가진 사람이 옛것으로부터 새로운 앎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학(學)과 사(思)’ 그리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는 배움은 교육의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일상적인 공부의 보편적 현상이다. 사람마다 삶을 통해서 쌓아 온 앎과 경험의 전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지식을 공부하더라도 얻게 되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 특히 이러한 배움의 특성은 책을 읽는 경우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경우에 잘 드러난다. 어떤 문학작품을 읽을 때에 정상적인 독자라면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된다. 문학작품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경우라면 사람마다 이해하는 바와 얻는 바가 서로 다르다. 또한 한 개인의 경우에도 같은 문학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일반화하면 옛것만 계속 반복해서 갖게 되는 암기식 교육은 정상적인 공부가 아니다. 올바른 공부는 주어진 교과서를 공부하되 자신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5. 자유로운 사고를 조장하는 교육을 위하여
지금까지 지식교육의 성격에 관한 논의를 통하여 발표자는 크게 세 가지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첫째, 지식교육의 문제는 지식관의 문제만의 것이 아니라 교육목적관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지식교육의 목적이 안목 형성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둘째, 지식은 개별적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에 대한 탐구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삶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탐구된 ‘의미’라는 것이다. 셋째, 또한 지식은 명제 자체에만 주목하면 낱낱의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지식들은 탐구하는 학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앎에서 보거나 지식을 배우는 학습자의 내면의 앎을 주목하면, 앎은 총체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총체성의 측면에서 보면 교육내용은 교과서 속에 있는 명제가 아니라 학습자의 총체적 지식과 교과서에 있는 명제가 만남과 탐구 그 자체이며, 그 과정에서 갖게 된 새로운 총체적 지식이 된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적어도 정답암기식 교육에 매몰된 교육 실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육의 실제를 지향한다.
한 사회에서 전개되는 교육의 실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구성원들의 교육에 대한 집단적 사고가 반영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교육현장에서 나타는 교육현상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집단적 사고가 적나라하게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면상 충분히 분석하고 검토할 지회를 갖지는 못하였지만 우리나라 교육 실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배적인 교육적 사고는 외재적 목적과 절대주의적 지식관의 결합이었다.
이 두 가지 교육적 사고가 결합함으로써 암기식 교육은 가장 보편적인 교육방법으로 정착되었고, 암기식 교육을 영속시키는 ‘암기식 교육의 악순환’을 낳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는 수학능력고사에서 잘 나타나듯이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절대시하는 교육, 교과서에 있는 단편적 지식을 암기시키는 교육,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교육이 교육의 주를 이루게 된다. 그러한 교육은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여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만드는 교육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프로크루스테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에서 학습자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옛지식을 받아들여야 할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에서는 무엇보다도 학습자의 자유로운 사고가 허용되지 않는다. 교과서에 있는 지식에 자신의 사고를 더하는 것은 정답을 맞히는 데에 방해가 된다. 결국 이러한 교육은 교육의 본질적 목적인 안목의 형성에 방해가 된다. 안목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자의 자유로운 사고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할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앎과 삶에 비추어 삶의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탐구된 삶의 의미가 축적되면서 안목이 형성되며, 자신에게 적합한 안목을 가진 자아가 형성되게 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교육은 안목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는 활동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는 일은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청소년기는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제2의 탄생기이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아직 체계화된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만큼 살면서 접하는 온갖 정보와 현상에 대해 다양하면서도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통하여 세상을 탐색해야 할 청소년들에게 시험에 나오는 정답을 암기시키는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영혼의 자유로운 발달을 가로막는 영혼의 파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교육에 대한 프로크루스테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이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자유로운 사고를 촉진하는 교육관과 교육 실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 교과서의 표현 몇 줄을 바꾸는 문제 훨씬 이상으로 중대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이며, 교육의 본질에 비추어 교육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제도화하는 엄청난 과제이다. 우리 모두가 당파의 이익이나 편협한 교육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교육 본질을 이해할 때에, 그리고 교육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칠 때에 프로크루스테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교육에 구원의 희망이 보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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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홍(2015). 공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안목 높이기. 강신주 외 8인(2015). 스무살의 인문학: 청춘에게 길을 묻다. 서울: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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