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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도보여행 2(낭만 가도)
정현수
그냥 가벼운 배낭, 그리고 더 가벼운 생각과 함께 가을의 산과 들, 바다를 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때 되면 자동 모드로 전환되어 스스로 움직이 듯, 내 몸을 그 공간으로 내딛는 첫걸음은 가볍고 상쾌하다. 그윽하고 훈훈하게 화려함이 색색이 입혀지는 산과 들, 양털 구름과 파란 하늘이 맞닿은 푸르다 못해 보라가 깃든 드넓은 쪽빛 바다는 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내며 변변하게 그 자리에서 나를 손짓한다. 심심치 않은 추억이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과 환희, 또한 슬픔, 고독이 서로 엮어져 조화 속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들을 추억하고 느끼기 위한 이번 여정은 느림과 유유자적(悠悠自適)으로 일상의 찌듦이나 권태를 내던져 버리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맛볼 참이다.
첫째 날.
해포 전에 다녀갔던 속초등대전망대를 끼고 돌아 해변에 다다르니 횡으로 줄줄이 밀려오는 높은 파도가 무엇인가 앗아갈 듯 무섭게 밀려온다. 백사장에도, 뭉텅한 방파제에도, 길가 콘크리트 벽에도, 파도는 사정없이 요동친다. 불공평하고 마땅치 않은 모든 것들을 휩쓸어가듯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휘몰아 무섭게 내리친다. 이참에 내 이기에서 오는 절대 필요치 않은 욕심, 노여움, 미움 등의 부산물을 저 파도가 휩쓸어 가버리면 좋을 텐데……
속초와 고성의 경계까지는 철책선을 끼고 오르락내리락의 연속이다. 철쭉은 완전 물 들어저 있고 칡넝쿨은 작은 나무를 휘감아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듯하다. 참새들은 산자락 풀씨들이나 작은 열매의 먹이를 위해 분주히 떼 지어 나는 모습이 정겹다. 본격적인 낭만가도 길로 접어들어 찬찬히 길을 걸으니 느긋해지고 편안해져 어느새 봉포항을 지나 청간정 밑 천진 해변이다. 오늘 첫 휴식이고, 백사장 벤치에 앉아 찬란한 고독을 즐긴다. 부드러운 바람은 애무하는 듯 나를 스치며 살며시 지나가고 소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포근함을 안겨 준다. 언제나 혼자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고독은 항상 내 곁에 있는 듯하다. 늘 직장에서 천진난만한 그들과 함께 하고 가끔 지인들과 어울릴 때도 나는 그 속에서도 침묵하고 명상하는(남들 보기에) 버릇이 있다. 오랜 습관일까? 아니면 생활 속에서 오는 못남일까? 그들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편하게 해줌은 그것 또한 복이다. 어떻게 하든 다가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청간정은 중층 누정으로 동해안 일출의 최고 명소라 한다. 절벽 위에 세워진 이 누각은 기암과 소나무가 잘 어울려 아담하다. 고성의 8경 중 하나로 자연을 사랑한 정철의 관동별곡을 생각나게 한다. 길가에는 코스모스, 들에는 고성의 꽃인 해당화가 산자락에는 구절초와 벌개미취, 노랑의 산국 등 들국화가 서로 어울리어 피어 있고 그것들은 제각기 꽃씨를 휘날려 날아와 자유의지로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틀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지만 사회적 불평등이나 원칙에 얽매여 맹목적인 것에 복종하면서 그것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틀이나 복종에서 벗어나려면 나(틀) 밖으로 일탈해야 하며, 기존 질서와 다수의 의견을 벗어나는 타락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참새와 꽃들은 비록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고 개념과 무개념 사이지만 나는 미물의 자유의지를 동경한다.
아야진 해변이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고프다. 모래사장을 약간 벗어난 해변 정자에서 여장을 풀고 햇반과 라면을 끓인다. 티타늄 일색인 내 취사도구는 여행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며 우선 크기가 작고 가볍다. 먼저 코펠에 물을 붓고 햇반을(코펠에 햇반이 틈도 없이 딱 걸쳐진다) 익히고 그물로 라면을 끓이면 식사 준비 끝이다. 거기에 편의점에서 산 한 끼 먹을 불량의 김치만 있으면 그야말로 땡이고 그 맛은 누군가가 "알랑가 몰라"다. 정말 양도 많고 싸고 맛있는 최고의 별미다.
상하천광,(上下天光) 거울 속에 정자가 있어 천학정이라 이름 지어진 고성 2경인 이곳도 기암괴석과 소나무로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나고, 검푸른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기암에 부셔 저 흩날림은 운명적 서곡인 듯 장엄하다. 드넓은 백도 백사장과 삼포 해변을 뒤로하고 오호항에 도착하니 꼭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황량한 마을을 보는 듯하다. 포구의 배들은 파도에 묶여져 잔물결에 출렁이고 마을은 포구 밖 높은 파도에 조업을 못한 탓인지 인적이 드물어 쓸쓸하다. 바다 저쪽에서 오지 않을 기다림을 기다린지도 어언 12년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집 문밖 저쪽에 마냥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기다리는 것은 이제는 포기했다. 처음의 그 황량하고 쓸쓸한 마음 쓰임은 세월이 약이었다.
약간은 지쳐 있지만 또 타박타박 길을 걷는다. 해가 저물어 가고 송지호 백사장 길 건너 산등선에 노을이 져 백사장의 긴 내 그림자는 참으로 처량하게 인상적이다. 해가 짧을 때는 여정을 일찍 끝내는 게 좋다. 길 건너에 민박촌이 보인다. 역시 평일이라 간단한 읍소에 하룻밤 숙박비는 2만 원이면 충분하다. 해 뜨는 남쪽 창이 있고 잘 정돈된 2층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둘째 날.
피곤해서 인지 아침 해돋이도 못 보고,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자고 느긋하게 8시까지 누워 있다가 송지호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난다. 죽왕면 사무소에서 조금 올라가 해안 반대편인 국도 안쪽으로부터 진입한 송지호 호수는 주변 둘레길이 둘레가 약 한 시간 거리인 4km이고 걷기 좋게 잘 정비되어 오전의 적당한 햇살과 상쾌하고 편안한 바람, 고즈넉함이 산책하기에 그만인 길이다. 겨울엔 철새 도래지로서 고니와 기러기 등 철새를 볼 수 있는 짚으로 호수가 가려진 관망대와 전시장 겸 옥외 전망대도 있다. 그러나 오늘 일정을 생각해 왕곡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볕이 따갑다. 호수를 끼고 가로수 하나 없는 군 도로를 30여 분 와 길가 그늘 밑 벤치에서 커피와 함께 휴식을 취할 때 휴대폰 벨이 울린다. 전화번호가 02) ***~****인 곳에서 '고객님 ** 카든데요.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주저리주저리, 틀림없는 피싱이 의심되는 스팸 전화다. 심심하던 차 잘 됐다 싶어 장난기가 발동한다.
"고객님 제가 ** 카드 고객이 아니라서 많이 놀라셨죠. 저도 많이 당황 했습"
툭 끊어 버린다. 히죽 웃음이 나오고 잠깐이지만 한낮의 지루함을 잊게 해준다.
왕곡 마을은 산자락 밑 낮은 계곡 사이 약간 경사진 들판에 예쁘게 자리 잡은 역사가 꽤 깊은 오래된 마을이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민속마을에 차분하고 조화롭게, 예쁘게 자리 잡은 마을 집들의 넉넉한 마당은 여유로움이고, 한 편 부엌에 딸린 외양간은 하잖은 것에 대한 배려이고 높고 단단한 뒷담은 각오가 엿보이는 가장의 의지인 것 같다. 지붕 위의 두룽박 모양의 항아리 굴뚝은 주위 경관과 어울려 토속적이고 회화적인 아름다움은 멋들어진 조화이다. 역사적 민속자료인 좋은 향토마을을 보고 저잣거리부터 해변으로 나가는 약 200여 미터 도로는 도보 여행자를 전혀 배려치 않은 인정머리 없는 길이다. 차는 쌩쌩 달리지만 보행자가 거니는 보도는 전무이고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직장에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무난한 그날 그날을 위해 그저 작은 친절이나 타협으로 그들과 거래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다. 그들의 사정이나 말, 행동에서 오는 의미를 진정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움을 주려는 시도는 게으르지 않았나? 나 스스로 자문하지만 결코 좋은 이해 내지는 동조자는 아닌 것 같다. 얼마 남지 않은 그들과의 생활을 좀 더 의미 있고 가까이하며 낮은 자세에서 서로 의지하며 따뜻이 다가가는 나 스스로가 필요한데…… 공현진 백사장이 기다랗게 쭉 이어져 평화로이 보이지만 파도는 높게 다가온다. 약간 늦은 점심이지만 해변 벤치에서 나로서는 우아한 식사인 라면 엔드 햇반의 정식은 뙤약볕에 지친 나에게 힘을 돋우어 준다. 다시 길은 내륙 7번 국도 쪽으로 이어져 지루하다. 국도 밑 오솔길에서 대진에서부터 속초까지 도보 여행하는 여행자를 처음 만났는데 나와 서로 반대되는 지점에서 출발해 딱 중간 지점에서의 만난 셈이다. 인천에서 왔다는데 나와 비슷한 연배여서 반가움이 더하고 서로 무사한 여행길이 되길 빌며 또다시 길을 간다. 국도변 LPG 충전소를 우회해 해변 길로 다시 접어들어 연어맞이 광장을 지나 반암 해수욕장에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지난날을 돌이킨다. 기쁨도 많았지만 아쉬움이 더 많았던 내 인생에서 내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지나온 삶이 나를 못 견디게 한다. 아주 못된 근성과 이기에서 오는 자유분방은 남자로서 점수는 빵점이었고 여지의 변명은 단호하게 없다. 지금의 고통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뿐이고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나를 내던져 버리고 그걸 즐기고 싶다. 벌써 4시가 가까워지고 이곳에서 40여 분이나 소비했다. 계획대로 거진항에서 버스를 타고 대진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시 거진 쪽으로 거슬러 내려와 거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동서울행 고속버스를 탈 예정이다. 거진 등대까지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조금은 지쳐있지만 걸음은 빨라져 시나브로 거진항에 도착했지만 땅거미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등대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버스를 탈까? 아니면 여기서 대진행 버스를 탈까? 인생에서 좌우되는 기로는 아니지만 이 어스름에 영화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한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Do or not, there is no try"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뿐 해보겠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고 기로에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결국 어두움이 깔리는 해변길을 걸어 등대에서 내려다보는 거진항과 바다를 보고 싶어 강행군이다. 그러나 나와 어울리는 적막한 어두움을 봤을 뿐 찍은 사진도 별 볼일이다. 하고 나서 후회는 막급이지만 경험이나마 남으니 다행이다. 8시가 거의 다 돼 대진에 도착했고 더 이상 이 버스도 북쪽으로 가진 못한다. 하룻밤 묶을 곳을 찾는 게 관건이다. 거리에는 어두움만 있을 뿐 인적은 아예 없고 이곳저곳 민박이라는 간판을 보고 기웃거리지만 난감하다. 그러나 여행길에 항상 우연이 필연으로 나를 돕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바다가 보이는 아래층 방에 보일러를 시험 가동하고 도로변 2층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집 주인과 만나게 되고 사정을 얘기하니 방금 시험 가동한 아래층 방 아무 데서 자란다. 정말 난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백사장이 불과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아늑한 곳이고 아침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여유롭고 푸근하게 따뜻한 방에서 나만의 정식을 먹은 뒤 간단한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셋째 날.
6시 45분쯤 해가 뜬다 해서 일찍 일어나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기다린 일출은 아쉽게도 대진 등대 전망대 뒤 쪽에서 떠오른다. 모든 게 내 뜻대로 이루어지면 재미도 없고 사는 맛이 없을 것이다. 20여 분 거리인 등대까지 갈까 했지만 포기하고 등대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어슴새벽에 가벼운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여장을 챙기고 바로 출발이다. 대진항에선 조업이 끝난 어선에서 잡은 생선을 하역하며 경매까지 동시에 이루어지는 풍경이 분주하고 색다르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왕좌왕 시끌시끌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열중인 삶이 참 보기 좋다. 경매가 끝난 생선에서 자투리인 작은 생선을 아무나 가져가도 탓하지 않는 것은 이곳 인심을 말해주듯 여유롭고, 어떤 아낙은 귀찮게 하는 나에게 포즈도 취해주며 커피도 건넨다. 대진항을 빠져나와 작은 언덕을 오르니 그림 같은 성당이 보인다. 묵상을 아니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성당 안, 감실이 보이는 중앙 복도에서 무릎 꿇어 경배하고 의자에 앉아 이 시간 오롯이 그분께 나를 맡긴다. 이후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든 그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선만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도할 뿐이다. 화진포 해양 박물관이 있는 앞 바다 거북섬인 금구도에 아직도 고증이 확인되지 않은 광개토대왕 능이 있다. 대륙을 포효하고 정벌한 대왕은 우리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다. 그 옛날 만주를 휩쓸던 대왕의 기상이 새삼 떠오르는 듯 화난 파도와 약간의 해무가 능의 신비를 감싼다. 부디 능이 확인돼 광개토 대왕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다시 길을 따라 화진포를 끼고 이승만, 이기붕, 김일성 별장이 있는 쪽으로 갔지만 정작 별장은 별 뜻이 없어 생태 박물관에서 동해안 연안의 많은 석호 호수의 생성 과정을 확인했을 뿐이다. 움푹 들어간 바다가 오랜 밀 썰물로 인한 침식 작용으로 바닷물이 가둬져 호수가 된 것이다. 해변 길을 비껴 이승만 별장을 지나 버스를 타기 위해 7번 국도를 향해 산 오솔길을 택했다. 조용하고 인적이 없는 길을 한참 걸으니 옛날 고승들의 마지막 죽음인 천화(遷化)가 생각난다. 이미 내 모든 것을(육신) 병원에 기증을 약속했지만 여행 중 남모르는 깊은 산속에서 기력을 다해 홀로 세상을 마감한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순리대로 사는 삶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병인 암, 돌발적인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인한 것 등 모든 두려움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어서도 한평 한 조각의 땅을 소유할 생각은 없고 그저 훌훌 날리는 바람에 흩날려 아무 곳이나 정착하고 싶다. 민들레 홀씨 마냥 두둥실 떠다니다 꽃무릇이 피어 있는 산자락이나, 엉겅퀴가 살고 있는 덤불이나, 자작나무 숲이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2시가 훌쩍 넘었다. 배고프다. 국도변에서 운 좋게도 메밀국수 집을 찾았다.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맛있는 국수 집이다. 3대째 국숫집을 운영한다는 "화진포 박포수 가든"이다.(꽤 유명한 집) 정말 여느 춘천 막국수 보다 맛있는 메밀국수는 처음이고 점심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식당 안은 북적인다. 두 그릇을 후딱 해치웠다.
거진 터미널에서 동서울행 4시 15분 발이다.
지혜가 요구되는 총명함도 이젠 예전 같지 않다. 일상에서 더 많은 것을 남기려고 메모도 열심히 하고 생소한 것을 기웃거리고 눈여겨보지만 내게는 항상 어려운 숙제 같은 삶이다. 어려움이나 수고에서 얻어지는 가치는 나에게는 축복이며,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며 활용하려는 내 의지는 아직도 긍정적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지금 내가 어디로 흘러가든 내가 지켜야 하고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은 끝까지 안고 가야 하는 내 업보이다.
집에 도착하니 9시가 다 돼간다.
2013.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