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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門正路에 나타난 如來禪의 특성
The Characteristics of ‘Yeorae-Seon’ in
the Seonmun-jeongno
김 원 영 (Kim Wo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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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선사상연구원 운영위원
ssnim@chollian.net
■차 례■
1. 서 언
2. 金剛三昧經論에 나타난 如來禪의 특징
2.1. 여래선과 三解脫觀
2.2. 여래선과 止觀
2.3. 여래선과 十地說
3. 禪門正路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3.1. 여래선과 조사선
3.2. 여래선과 화두 참구
3.3. 여래선과 三關 透過
3.4. 여래선과 無生法忍
4. 결 론
禪門正路에 나타난 如來禪의 특성
1. 서 언
禪門正路는 견성과 성불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제시하기 위하여 선 수행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頓悟이다. 즉 구경의 깨침이란 실제 체험으로서 無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돈오하기 위한
수행방법으로서 화두를 참구하는 如來禪을 주장하고 있다.
여래선은 화두와의 관련에서만 주장되는 것이 아니고 이론적으로 아는 것을 중시하는 頓悟漸修說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견해를 종합할 필요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선문정로에서 비판하고 있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롯하여, 선종이 성립되기 이전에 성립한 원효스님의 金剛三昧經論을 통해 이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금강삼매경은 초기 선종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이
선문정로와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선문정로의 주장에 대해 보완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상의 여러 주장들 이외에 선문정로에서 주장하는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선문정로에서 강조하고 있는 화두 참구를 大乘止觀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정안종사들이
여래선의 수행과정에서 통과하는 寤寐一如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三關의 특성을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여래선은 수행상에서因位만이 아니라 果位인 究竟, 佛地의 無生法忍까지를 말하는 것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2.1. 여래선과 三解脫觀
금강삼매경에서는 여래선을 三解脫과 관련하여 설하고 있는데,
원효는 삼해탈은 곧 三慧라고 하면서
聞思修 三慧는 人空과 法空을 관하는 大乘觀이라고 한다.
삼혜를 해탈이라 하는 것은,
人과 法이 空함을 관함으로써 二執과 現行의 二縛을 伏離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여래선은 大乘空觀이라고 할 수 있다.
여래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삼해탈에 대해 셋을 남겨 두고(存三) 하나를 지킴(守一)으로써
여래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므로, 이에 대한 經文을 중심으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력보살:범부 중생은 어떤 법으로 統御하여야 (여래장의) 實際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셋을 남겨 두고 하나를 지킴으로써 여래선에 들게 한다.
대력보살:어떤 것이 셋을 남겨 둠이고, 하나를 지킴이며, 여래선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셋을 남겨 둠이란 삼해탈을 남겨 둠이며,
하나를 지킴이란 一心의 如를 지킴이며,
여래선에 들어감이란 理觀하는 心의 如가 이런 지위에 들어감이니 곧 實際에 들어감이다.
대력보살:삼해탈법은 어떤 것이며, 이관삼매는 어떤 법으로 들어갑니까?
부처님:삼해탈이란 虛空解脫․金剛解脫․般若解脫이다.
理觀하는 心이란 心이 如理하게 淨하여 可否心이 없는 것이다.
대력보살:어떤 것이 用을 남겨 둠이며, 어떤 것이 그것을 觀함입니까?
부처님:心事가 둘이 아님을 用을 남겨 둠이라 한다. 한 모양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에 得失이 없으며,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지위에 淨心이 흘러들어가니 그것을 觀함이라고 한다.
먼저 삼해탈관에 대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聞慧 또는 第一解脫 혹은 初解脫이란 안으로 色相이 있고 밖으로 色 등을 관하는 것이다.
즉 안으로 色․受․想․行․識 등 五陰法相이 남아 있어서 我空을 관하는 것으로 이들이 衆生空임을 관한다.
즉 중생공임을 듣고(聞),
이 들음에 의하여 信과 解가 일어나게 되므로 이것을 문혜라 한다.
이 空은 문혜로써 얻어지기 때문에 들어가기 쉽다.
문혜로써 얻는다 함은 內假와 外假의 二相이 모두 不可得이기 때문이며,
다만 듣고서 信할 뿐이다.
또한 밖으로 色 등을 없애지 않으면서
안으로 空을 관하는 것이 허공이 색상을 없애지 않음과 비슷하므로 이것을 허공해탈이라 한다.
思慧 또는 第二解脫이라 함은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즉 안으로 색 등 오음법상을 없애고, 밖으로 一切山河 등이 공함을 관함으로써 욕계의 제법이 공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이 공은 난해하며 사혜의 소관이기 때문에 사혜라 한다. 안의 오음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사혜로써 내외 제법을 추구하고 析破함이 마치 金剛이 모든 色法을 파괴함과 흡사하므로 이것을 금강해탈이라 한다.
修慧 또는 第三解脫은 팔해탈관 중 나머지의 六解脫이니 이것은 모두 수혜이다.
욕계는 물론이고 上 2계인 색계와 무색계에서 일체법이 공임을 관하기 때문이다.
이 수혜의 六觀은 모두 삼매인 定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총칭하여 반야해탈이라 한다.
수혜에서 일어나는 육관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의 것이 중시되어 제삼해탈은淨解脫 身作證 具足住解脫이라 부른다.
색계오음이 光潔寂靜하여 모두를 공이라 관하므로 정해탈이라 하고 自內所證이므로 신작증이라 한다.
이때 身이라 함은 意身을 가리키며,
작증이라 함은 智로써 번뇌를 끊고 證을 일으키거나 혹은 內色想을 伏하기 때문이다.
색계오음이 공함을 구족한 것이 제삼해탈이다.
이와 같은 삼해탈에 있어서 聞慧와 思慧에서 慧라 함은 思察尋思하고 簡擇함을 말한다.
사혜의 단계에서도 三昧 定의 관을 닦지만 思察分別함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수혜는 삼매인 定에서 이루어지므로 수혜의 육관에서는 모두 定慧不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행 단계와 관련해서 그 특색을 보면, 먼저 셋을 남겨 둠이라 함은 삼해탈관의 세력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관의 처음 시작은 十信位이며 用이 남아 있기 시작하는 것은 十住位이다.
용이 남아 있다 함은,
만약 훌륭한 용을 얻지 못하면 靜心에서는 공을 관하지만 涉事하면 失念하여
我와 我所를 取하고 違順의 경계에 집착하므로 心과 事가 서로 다르게 된다.
또한 하나를 지킴이라 함은 一心의 如, 즉 一心法 中 心眞如門을 지킴을 말한다.
入觀時에는 고요히 一如之境을 지키고
出觀時에도 一味之心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를 지킴이라 한다. 이 관의 시작은 十行位에서이다.
이리하여 “만약 삼해탈관을 修함이 淳熟하면 (入觀時에는 물론이고) 出觀하여 涉事하여도 觀勢가 남아 있으므로
我와 他의 相을 취하지 않고, 好惡의 경계에 집착하지 않으며, 入과 出을 함께 잊어버리고 心과 事가 둘이 아니다.
이리하여 입관해서는 寂照行을 하고 출관해서는 化物行을 하지만,
入과 出에서 중도를 잃지 않으므로 입과 출이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관을 행함에 “입과 출이 둘이 아니다” 함은
動과 寂에 있어서 “動이면서 常寂이고, 또한 寂이면서 恒動하여 動과 寂에 출입이 없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動靜이 一如한 경지이다. 그러므로 여래선은 동정일여한 상태에서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경지는 수행 계위상 보살 초지 이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여래선이라 함은 초지 이상에서의 선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그것을 관함”에서는 두 가지 관을 설명하고 있는데,
“한 모양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二諦觀이기 때문이며,
“마음에 득실이 없다” 함은 平等觀이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方便觀에 의하여 초지의 法流水 중에 나아가므로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지위에 淨心이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本業經에 의하면
“從假入空을 이제관이라 하고 從空入假를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관은 方便道이다.이 두 공관에 의하여
中道第一義諦觀에 들어가서 雙照二諦하며 心心이 寂滅하여 초지의 법류수 가운데에 나아간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제관이라 함은 遣俗觀眞함이니 곧 正體智의 方便 작용이고,
평등관이라 함은 融眞觀俗함이니 곧 後得智의 방편 작용으로서,
俗을 幻과 같이 관하여 득실을 취하지 않으며 適도 없고 莫도 없으므로 평등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방편관 중에서 앞서 말한 삼해탈관은 이제관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금강삼매경론)에서는 다만 처음과 나중의 두 관만 널리 설한다.
중간의 관은 미루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은 방편관으로서의 이제관인 삼해탈관을 통하여
초지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을 正觀이라 한다.
地前位에서의 觀이 相似觀이라면 이것은 眞觀이고 正覺이며, 또한 중도제일의제관이라 한다.
2.2. 여래선과 止觀
다시 삼해탈관과 止觀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원효의 이론은 一心二門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守一은 일심법 중 心眞如門을 지킴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眞如門에 의한 것이므로 그 근거에 있어서는 修習止行과 같다.
또한 存三은 일심법 중 心生滅門에 의한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存三이 심생멸문에 의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守一心如者 一心法中 有二種門 今先守其 心眞如門”이라 하고서
‘一心法中 有二種門’인데 ‘今先’하여 守一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존삼은 심생멸문에 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거에 있어서는 修習觀行과 같다.
이와 같이 존삼과 수일에 의하여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므로 여래선은 지관으로 말하자면
止觀俱行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보살지의 地上位이다.
2.3. 여래선과 十地說
止觀行은 地前에서는 正觀에 隨順하지만 地上에서는 雙運하게 되는데,
십지설에서 주장하듯이 차례대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원효는 십지에 있어서 그 地를 각각으로 구분하지 않고
다만 大地, 一地 혹은 一不一地라 하여 초지 즉 십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초지에 들어감으로써 일시에 十重法界에 頓入하기 때문이며
또한 初門에 들어감으로써 곧바로 遍滿하기 때문이다.
앞의 삼해탈관 등 2종 방편관에 의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로 인하여
一不一地인 초지의 법류수 중에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여래선에 들어감으로써 초지 즉 십지라 하여 이를 구별하지 않지만,
초지 이전의 관은 방편관이라 하고
초지 이후의 관은 정관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地上位에 있어서 원효는 특히 제8지에 주목하고 있다.
제8지에 있어서는 功用과 無功用의 차이가 있어서 그 이전에는 有加行 有功用으로 이루어지지만
8지 이상에서는 無加行 無功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이런 단계를 번뇌를 끊는 것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근본번뇌인 無明住地煩惱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에는 等覺에서 妙覺에 頓入할 때에 모든 번뇌가 끊어지지만,
종자의 상속에 의하는 경우에는 각 단계마다 번뇌는 끊어진다.
3. 禪門正路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3.1. 여래선과 조사선
여래선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능가경인데,
여기에서는 禪을 4종으로 분류하면서 여래선을 가장 높은 지위의 선이라고 한다.
이후 여래선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아마도 荷澤神會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북종선을 淸淨禪이라고 하고
이에 대응하는 남종선을 여래선이라고 했다.
역대법보기에서 전하는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神會和尙은 매월 법회를 갖고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淸淨禪은 부정하고 如來禪을 주장하며 知見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청정선이라 함은 看心看淨하는 漸敎의 禪을 말하는데 이것은 부정하고(破),
여래선이라 함은 여래장의 본성이 공적함을 돈오하여 여래의 법신을 얻는 것이니 이것은 긍정하였다(立).
또한 無住心의 空寂한 體 위에 이 智의 作用으로서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보는 知見을 돈오라고 하여 강조하고 있다.
하택의 知를 중시하는 이런 사상은 후에 華嚴家인 규봉 종밀을 거쳐 고려의 보조 지눌스님에게로 이어졌는데,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 대하여 선문정로에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圭峯이 先悟後修의 뜻을 總判하여 말하였다. 此性이 원래로 번뇌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본연히 구족하여
불타와 더불어 차이가 없음을 頓悟하여 이를 의지하여 修習하는 사람은 이를 最上乘禪이라 하며 如來淸淨禪이라 명칭한다.
(중략) 達摩門下에서 展轉하여 대대로 相傳하는 것이 곧 이 선이라 하였다.
그런즉 頓悟와 漸修의 二義는 乘車의 二輪과 같아서 한 개도 없어서는 안 된다.
* 達磨正傳의 禪門巨匠들은 如出一口로 無心無念인 究竟覺의 圓證으로써 頓悟와 見性이라 하였으며,
十地 等覺을 초월하여 미세망념이 滅盡한 佛地의 無生法忍을 正悟라 如來淸淨禪이라 하였다.
객진번뇌가 여전히 다름이 없는 解悟로써 達磨相傳의 禪宗이라 함은 선종을 모욕하는 일대망언이다.
여기 修心訣에 대한 評釋에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하나는 규봉의 돈오점수설을 달마 정전의 여래청정선이라고 한 점과,
또 하나는 달마선의 선종이 解悟를 견성이라고 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수심결에서 말하듯이 달마선 즉 여래선이란 해오인 견성 즉 돈오에 근거하여 점수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래선에 대한 보조스님의 이런 잘못된 견해는 규봉스님을 이은 것이며, 또한 규봉의 이와 같은
이해는 하택의 견해를 계승하고 있으므로 하택과 육조와의 견해 차이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택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이 강조되었지만,
혜능의 조사선에 있어서는 여래장의 自性인 空寂性은 반드시
색성향미촉법에 住著하지 않음을 통과하여야만
이 여여한 空寂心인 般若心(淸淨心, 無念心)이 드러난다고 한다.
신회에 있어서는 공적심을 아는 것(知)에 근거하여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서는 “이 한 자 知字가 모든 오묘함을 다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혜능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며, 또한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모든 外境에 집착하지 않는 한 과정을 통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선문정로에서는 신회와 혜능 간의 이런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으로 昭昭靈靈한 靈臺의 智性이 있어서 능히 보며 능히 듣고 五蘊의 身田 속에서 主宰를 짓나니 이렇게 하여 善知識이라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임이다. 만약에 昭昭靈靈을 認得하여 너의 진실을 삼는다면 瞌睡할 時에는 어째서 昭昭靈靈이 없어지는가.
만일 瞌睡할 때에 없으면 이것은 도적을 誤認하여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 이는 生死의 근본이며 妄想의 緣起이다.
‘昭昭靈靈한 靈臺’에 스스로 아는 知의 성품이 있고 그 작용에 의하여 보고 들을 수 있는데,
靈臺에 이 작용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써 깨친 선지식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한다.
이것은 바로 앞서 신회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昭昭靈靈함을 진실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라 하고,
이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도적을 오인하여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여 부인하고 있다.
또한 “아무리 크게 깨치고 또한 지견이 高明한 것 같아도 실제 경계에 있어서 숙면할 때에
암흑이면 이는 망상의 변동이요 實悟는 아니다”고 하여, 지견으로 아는 것은 절대로 부정하고 있고
반드시 熟眠一如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깨침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색성향미촉법의 外境에
住着하지 않기 위해서는 숙면일여를 통과해야 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구별이나 우열을 논하는 경우,
그 시작은 仰山스님의 법문에 근거하고 있다.
즉 앙산이 香嚴에게 말하기를 “여래선은 곧 사형께서 알았음을 인정하나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습니다”고 한 것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피상적으로 보아서 臨濟三句와 관련하여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그러나 선문정로에서는 임제삼구는 그 우열을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사선과 여래선에 있어서도 이 둘은 같은 것으로서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여래선이 곧 조사선임을 주장한다.
如來禪과 祖師禪이 어찌 兩種이 있으리요.
媕含不決하여 각각 皂白을 妄分하여 특히 종지에 乖背함을 未免하는도다.
원오스님은 이처럼 여래선과 조사선이 두 가지가 아니며 그 우열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中峰스님도 달마스님이 전한 선이란 여래의 圓極心宗이라 하였고,
또한 여래선과 조사선을 나누는 것은 흡사 하나의 손을 두고 손바닥과 주먹으로 다르다고
구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達磨가 멀리 西天二十七代의 조사들을 계승하여 여래의 圓極한 心宗으로써 禪을 삼았느니라.
如來禪과 祖師禪이여 一手를 掌과 拳으로 兩分함과 같도다.
(중략) 照破하여 生死가 皆空한 明眼을 구비하지 못하면 어찌 仰望하여 龍天이 부끄럽지 않으리요.
그러나 간혹 佛祖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여래선과 조사선을 양분하여 그 우열과 深淺을 妄論하는
瞎眼衲僧이 왕왕 있으므로 원오는 “특히 종지에 乖背함을 未免한다”라고 꾸짖었으며,
또한 중봉은 “烏焉을 馬字로 誤寫함은 지금도 다 그렇고 黃葉을 眞金으로 誤認함은 예도 또한 그렇다”고 통탄하였으니,
이처럼 正傳巨匠들은 如出一口로 여래선 즉 조사선임을 명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여래선이란 여래장의 究竟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如來心을 領得하여 如來意를 明見하고 如來色相을 正見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래선을 그 후에 조사들이 서로 전하였으므로 조사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서,
卅三祖師들이 여래선을 계승하였다 함은 正眼宗師들의 定論이다. 따라서 조사선 즉 여래선임은 당연한 귀결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깊고 얕음이나 우열이 없는 것이다.
한편 앙산과 향엄의 문답에 보이는 조사선과 여래선에 대한 내용은
“이는 法門擧揚으로서 禪家의 回互時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앙산과 현사의 대화에서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을 논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신기한 기틀인 如來心의 大用을
말한 것으로서 오직 정안종사만이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3.2. 여래선과 화두 참구
선문정로에서는 수행방법으로서 화두 참구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래선이 원래부터 화두 참구를 그 수행방법의 특질로 하는 것은 아니다.
화두가 널리 행하기 이전인 원오스님 시기에 이미 여래선과 조사선이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여래선이 반드시 화두 참구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조사스님들의 인연 설화 가운데서 極則處에 도달한 機緣 또는 言句
혹은 부처님의 인연 설화를 공부인이 참구하는 명제로 삼은 것을 말한다.
화두의 본질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공안(話頭)은 佛祖의 大寂光三昧中의 玄機大用이다”고 한다.
즉 화두라는 것은 최후의 조사 관문에 도달한
金剛正眼의 玄機大用이므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뜻은 암호밀령인 것이다.
따라서 공안은 수행자가 통과해야 하는 일종의 시험이며, 그 관문을 통과해야만 인가를 받을 수 있으므로,
공안은 조사들이 설치해 놓은 관문 즉 祖師關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화두 참구가 자성을 깨치기까지는 하나의 방편인 止觀行이므로,
화두라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의식 집중의 구심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분별 집착과 惡知惡覺을 쳐부수는 무기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화두도 역시 하나의 망상이며 깨친 다음에는 버려야 하는
‘강 건넌 다음의 뗏목’인 것이다.
화두 참구가 다른 수행법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금강삼매경론은 여래장에 들어가는 觀法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隨事取行,
隨識取行,
隨如取行이다.
여기에서 取라 함은 能取所取의 분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攝行함이 心에 소속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먼저 수사취행이란 37道品行인 止觀法을 가리키는 것으로 4諦와 12因緣法 등을 관하는 것이다.
수식취행이라 함은 일체 중생은 一心의 所作이라는 唯識道理를 관하는 것이다.
수여취행이라 함은 일체법이 모두 평등하므로 평등한 一如에 따라서
六度行을 행하는 것으로 일체개공의 공관을 관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화두 참구는
萬法唯識의 唯識觀法도 아니며
또한 일체개공의 대승공관도 아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조사스님들의 극칙처에 도달한 기연 또는 언구 혹은 부처님의 인연 설화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수사취행인 지관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眞覺國師는 “간화선의 한 문이 가장 지름길이니 止觀과 定慧가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견성의 가장 지름길이라고 하면서 화두 가운데에 定과 慧가 함께 갖추어 있고 止와 觀이 함께 있다고 한다. 곧 화두 참구는 止觀雙修이고 定慧不二라는 것이다.
止는 定과 통하고
觀은 慧와 통하는 것으로서,
慧라 함은 관찰하고 간택함을 말하고
定이라 함은 審正思察 즉 不沈不浮한 一境에 住하는 것을 말한다.
화두 참구에 있어서는 오직 화두라는 一境만을 대상으로 하여
慧의 작용과 定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정혜불이라고 하며 또한 지관쌍수라고 한다.
따라서 견성 성불하는 데에는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이라고 한다.
화두 참구에서는 처음으로 화두를 들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바로 정혜불이가 이루어지는데,
그 定의 상태 (혹은 慧의 상태)에 깊고 얕은 차이가 있어서 뒤에서 보듯이
이른바 三分段 혹은 三關이 설정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초관․중관․末後牢關의 三關은 선정의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말후뇌관을 타파하면 定과 慧가 等等하여 견성이고 성불이다.
또한 화두 참구는 처음부터 정혜불이로써 추구해 가지만
다른 隨事取行에서는 定과 慧가 각각으로 수행하다가 地上에서 雙修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화두를 活句라고 할 때, 화두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언구
심지어 4제와 12인연법 등은 모두 死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禪門에서는 圓頓과 信解를 추구하는 것은 사구라 하여 이를 배제한다.
뿐만 아니라 疑團 없이 집중만 하는 화두 참구도 사구라고 한다.
이는 慧는 없고 오직 止인 定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효는 앞의 三行 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를,
“수사취행은 不住生死門하고 수식취행은 不住涅槃門하며 수여취행은 一切皆空으로서
생사와 열반에 平等無二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수여취행을 하면서도 항상 隨事行과
隨識行을 하므로 寂滅에 住하면서도 空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수사행과 수식행을 하면서도
항상 수여취행의 平等行을 하므로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한다.
한편 화두는 그 기연으로 보면 世諦法이므로 수사취행에 속하며,
그 본질에서 보면 일체개공인 수여취행의 玄機大用이다.
따라서 화두 참구는 적멸에 머물면서 인연법의 생멸을 관하는 것이며,
또한 인연법의 생멸을 관하면서도 적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滅卽生이나 不住生이며 生卽滅이나 不守滅이다.
그러므로 생과 멸이 不二하고 動과 寂이 無別하여
動卽寂이어서 動寂一如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태가 三關을 투과하여 실천될 때에 구경각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선문정로는 화두 참구에 있어서 정안종사의 역할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숙면일여의 假無心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경책하여 활로를 지시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정안종사뿐이기 때문이다. 삼관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함에 있어서는 정안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 점은 법맥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점은 성철스님이 평소에도 화두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에 화두를 받은 스님에게서
그 지도를 받게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화두 공부에 대한 지도는 수행자가 신뢰하는 종사에게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3.3. 여래선과 三關透過
선문정로에서 정안종사들은 모두 寤寐一如의 경지를 투과하여 비로소 正眼을 얻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처럼 여래선에서 구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매일여를 포함하여 세 단계의 관문 혹은 삼관이 있다.
삼관이라 함은
初關,
重關,
末後牢關의 세 관문을 가리키는 것인데,
선문정로에서 삼관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에서는 이것을 주장하고 있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점수를 격렬히 배척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이 점수를 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오해도 있었다.
먼저 삼관을 말한 부분을 살펴보자.
日間 浩浩히 분주할 때에 一如하느냐. 답하되 一如합니다.
夢中에도 一如하느냐. 一如합니다.
또 묻되 정히 熟眠할 때에는 주인공이 何處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언어로써도 가히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가히 伸說할 수 없었다.
먼저 일상에서 지극히 분주할 때에도 화두 참구가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觀에 들어서 고요히 앉아 있을 때에 화두 참구가 순일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매우 분주하게 오가면서도 화두 참구가 그처럼 순일하여 차이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즉 動과 靜에서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의 관문 즉 초관이다.
다음은 낮 동안 의식이 깨어 있을 때에 화두 참구가 일여하게 되듯이
밤에 잠잘 때 꿈속에서도 화두 참구가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즉 몽중에도 일여한가 하는 것으로, 이것이 두 번째 관문 즉 중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이 아주 깊이 들어서 꿈도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화두 참구가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숙면 중에도 일여한가 하는 것으로, 이것이 세 번째 관문이다.
이 세 단계를 두고 각각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하는데,
이 세 단계를 지나서 더 나아가야 구경인 여래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몽중일여와 관련한 오매일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오매일여는 寤寐恒一이라고도 하는데,
이에는 몽중에서의 오매일여와 숙면에서의 오매일여 두 경계가 있다.
이 둘은 諸識과 十地說 등과의 관계에서 볼 때 확연히 구별된다.
먼저 몽중 위의 오매일여는 제6의식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설법 기타에 아무리 능한 것 같아도
수면시에 캄캄하면 이는 전혀 제6의식 중의 사량분별인 知解邪見이요 實悟가 아니다”고 한다.
또한 이 몽중일여는 敎家인 화엄 7지에 해당하며,
이 제7지의 無想定에서는 麤重妄想이 慴伏되므로 몽중에서도 화두가 여여하여 어떤 장애도 받지 않는다.
숙면 위에서의 오매일여는 다시 제8 아뢰야식의 微細妄想에 住着하는 8지 이상의 自在菩薩位와
이 미세망상까지도 완전히 떠난 佛地에서의 眞如恒一로 나누어진다.
자재보살과 여래는 오직 멸진정의 一位만 남아 있지만 자재보살은 제8의 無記無心에서 일여하고
여래는 진여의 구경무심에서 일여하므로 진정한 일여는 불지의 구경무심뿐이다.
또한 제7지와 제8지와의 구별에 있어서 제7지까지는 加行이 있고 功用이 있지만
제8지 이상에서는 무가행, 무공용의 무심지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阿賴耶가 남아 있어 미세하게 流住하는 假無心이니,
이 미세를 永斷하고 대원경지를 實證하여야 眞無心이며 正眼이다.
다시 말하면 몽중일여인 무상정에서는 제6의식의 추중망상이 떨어지는데,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제7지 보살의 位이다. 그리고 숙면일여인 멸진정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화엄 제8지 이상인 자재보살 위에서는 제8 아뢰야의
미세망상이 남아서 작용하고 있으나,
불지에서는 이 미세망상까지도 완전히 떠나서 구경에 무심하다.
그리고 선문정로는 말후뇌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자재보살위에서의 숙면일여 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설하고 있다.
앞에서 오매일여에 대한 설명에서 보았듯이, 숙면일여에서는 추중망상인 제6 의식은 멸진하고 제8 아뢰야의 무기가
남아 있는 상태인데, 이것을 또는 大死라고 한다. 왜냐하면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여 자기의 渾身을 전연 망각하며
세간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며 또한 세간의 塵勞가 그를 매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大死한 사람은 불법도리가 전연 없어서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이 쉬어 버리므로 옛사람들은
이것을 ‘평지상의 死人’이라고 하거나
‘見地가 淨潔하지 못하다’고 하거나
‘命根이 단절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 상태는 생철을 두드려서 만든 사람과 같아서
혹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은 惡境界를 만나도
그의 면전에 있어서는 전연 몽중과 흡사하여 자기의
육근이 있는 것도 모르며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는 “外境과 諸心을 寂然息滅하여 장벽이나
목석과 같은 무심경계”라고 한다.
또한 여기에서는 오직 화두삼매에 들어가 있으므로
“(밖으로) 사물을 抵觸하여도 (화두가) 散去하지 않고
(안으로) 蕩蕩히 亡失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이 도리는 흡사히 개가 끓는
기름냄비를 봄과 같아서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한 勝妙境界도 正悟가 아니므로
이 死地인 승묘경계의 大死한 상태에서 한번 뒤집어서
다시 大活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말후뇌관인
승묘경계의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비록 動相이 不生하나
도리어 淨裸裸處에 坐在하게 되면 이것은 견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이것은 正知見을 장애하며” 道眼을 障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비록 이러한 경계에 도달하였어도 오직 轉身하는 대활로가 있어야 한다.
즉 숙면일여의 승묘경계는 깊은 선정의 상태이긴 하지만
그 선정의 淨裸裸處에 住着하여서는 아직 禪想이 남아 있으므로
이 淨裸裸한 곳에서 다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뒤에서 보듯이
不動이긴 하지만 아직 不禪이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단계가 말후뇌관으로 구경각은 이 단계를 지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후뇌관인 숙면일여한 경지는 팔지 이상에서 등각까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十地等覺의 大死深坑에서 忽然大活하여야 梨耶의 無記까지 永滅한 眞大死이니
바야흐로 선문의 本分種草가 된다”고 하여 십지와 등각까지를 ‘大死의 深坑’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앞의 몽중일여와 관련해 볼 때 8지 이상으로 한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문에서 정안종사들은
누구나 다 이러한 오매일여의 玄關을 투과하지 않은 바가 없고, 또한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하였으므로 그 悟는 究竟覺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또한 “8식의 窠臼를 타파하고 무명의 窟穴을 頓飜하면 一超하여서 佛地에 直入하여 다시는 남은 법이 없나니
이는 上上利根의 실증한 바이다. (중략) 眞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識神을 오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량겁래의
생사근본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本來身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一關을 투과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한다.
제8식을 自我인 本來身이라고 오인하여 이에 집착하지만 마지막 관문을 투과함으로써 佛地에 直入하게 되고 다시는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최후의 굳센 관문인 말후뇌관을 부수어 확철히 크게 깨쳐야만 비로소 옛사람의
입각처를 알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微細賴耶를 透脫하여 말후뇌관을 타파하면 구경무심인 無上涅槃이
現前하여 大死大活하고 常寂常照하여 明暗이 雙雙이요 定慧가 等等하니 즉 견성이며 성불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선문정로에서는 삼관 중에서 중관과 말후뇌관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초관에 대해서는 거의 설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앞에서 보았듯이 금강삼매경론에서 삼해탈관의 수행에서 초지에서 동정일여가 된다고 하므로 초관은 보살 초지에서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3.4. 여래선과 無生法忍
선문정로는 제5 無生法忍章에서 무생법인과 관련하여 여래선에 대해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內心과 外境을 了亡하여 妄想이 生起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무생법인이니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
修道와 坐禪을 假借할 것 없이 修治하지도 않고 生起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여래의 淸淨禪이다.
무생법인에서의 선이 곧 여래청정선이라 하므로, 먼저 무생법인에 대해 살펴보자.
무생법인이란 내심과 외경을 요망하여 망상이 생기하지 않음이니 밖으로는 소취의
경계가 멸하여 남아 있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의 識이 생겨나지 않음이다.
만약 意言分別로써 법의 무생을 관하여 散亂心을 攝守하여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것을 두고서 무생법인이라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그것은 바로 분별의 마음이 生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 무생인이라 함은 心이 무생의 경계에 住함이 없음이며 또한 모든 분별을 떠남이다.
空境에 住하는 能住心이 없는 것이므로 生滅俱滅이라 한다.
그러나 이 滅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고 본래의 空함에 證會한 것이므로
이 空寂은 能所平等하다. 따라서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여래 청정자성을 본래 갖추고 있음(本有)을 비로소 자각함(始覺)으로써
처음으로 갖추게 되는 것(始有)이다.
이와 같은 청정자성의 本有함을 了覺하는 무생법인이 수행상의 어느 지위에서 인정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선문정로에서는 “여래선을 내용으로 하는 馬祖의 돈오는 구경무심인 證悟가 분명하다.
마조뿐만 아니라 달마 직전의 정안종사들은 모두 무생법인을 圓證한 大聖들이다”라고 하고 있다. 돈오는 구경무심을
증오하는 것이며 또한 무생법인을 원증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구경무심이 무생법인이다.
즉 무생법인위는 究竟位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지위에 頓入하여 여래의 聖智를 自證함을 여래청정선이라 한다”라고 함에 있어서 원문에서
‘여래선’이라고 한 것을 평석에서는 ‘여래청정선’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선문정로에서는 여래선과 여래청정선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지위에 돈입함을 여래청정선이라고 하므로 여래선은 불지에서의 선을 가리킨다. 이 점은 이 법문에 대한 평석에서 “마조가 말한 여래선은 능가경의 究竟佛地를 표현한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결론이다.
따라서 여래선이 여래청정선이며 무생법인이며 돈오이며 구경무심이다. 즉 여래선이라 함은 구경 불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다음은 여래청정선에 대해서 “修道와 坐禪을 假借할 것 없으며”와 “修治하지도 않고 生起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大抵 學道하는 자는 우선에 반드시 雜學과 諸緣을 倂却하고 결정코
一切 不求하며
一切 不着하여
甚深 妙法을 聽聞하되 屆耳함과 흡사하야 瞥然히 지나치고
다시는 追尋하지 않나니 이것이 甚深히 如來禪에 得入함이 되어서
禪想이 生起함을 離脫함이니라.不動하여 不禪함이 卽是 如來禪이니 禪想이 生起함을 離脫하니라.
황벽어록에 의하면 선을 익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모든 外緣을 쉬어 버려 일체를 구함이 없고 또한 집착함이 없다.
그리고 수행함이 純一하여 무슨 말을 듣더라도 이에 얽매이지 않게 되어 설사 부처님의 심심미묘법을 듣는다고 해도
마치 바람소리를 듣는 듯하여 이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즉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무생법인의
설명에서 말한 내심과 외경을 요망함과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甚深히 여래선에 得入함이 되는 것”이며,
이 경지가 되면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므로 “禪想이 生起함을 離脫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禪想이 생기함까지도 떠나는 것이 여래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백장스님의 법문에서도 “여래선이란 不動하여 不禪함이며,
禪想이 생기함을 이탈함이다”라고 한다.
부동이라 함은 밖으로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는 움직임(動)을 쉬는 것이며,
불선이라 함은 안으로 모든 시비분별을 쉬어 버려서 모든 생각이 쉬는 것
즉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떠난 것이다.
앞의 황벽어록과 같이 여래선이란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모두 떠난 상태”라고 한다.
또한 六祖스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도 없고(無生) 멸도 없음(無滅)이 여래의 청정선이니라.
여기에서 무생무멸이라 함은 생각이 일어남이 없음(無生)이며
또한 일어남이 없으므로 멸함도 없는 것(無滅)이다.
그러므로 앞의 부동불선과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무생무멸의 상태는 諸識과 망상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망상을 그 상태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누는 경우에
추중망상은 6식 경계이고
미세망상은 8식 경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無生이란 제6 의식과 제7식의 추중망상은 물론이고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상까지를 멸진한 무생을 가리킨다.
따라서 무생무멸이라 함은 구경의 불지이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음은 다른 사람들도 일찍부터 주목해 왔는데
이에 대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자.
經:禪은 곧 動이나 不動不禪함이 無生禪이다. 禪性은 無生이어서 生禪相을 떠나고
禪性은 無住이어서 禪함의 動을 떠난다. (중략)
論:禪은 곧 動이라 함은 世間禪을 말한다. 散亂함은 아니지만 境相을 取하므로 相을 取하는 마음이 生하여 起動이 生한다.
이런 生하고 動하는 禪을 떠날 수 있어야 理定에 들어갈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無生禪이라 한다.
이런 理定은 性에 生과 動이 없으므로 禪性은 無生이라 한다.
無生일 뿐만 아니라 또 寂에 住함도 없으므로 禪性은 無住라 한다.
만약 生이 있다면 이것은 相이고, 住著함이 있다면 이것은 動이다.
이제 이것들에 反하므로 따라서 禪의 相이 生함을 떠나고, 禪에 住하는 動을 떠난다.
이것은 理定을 밝힌 것으로,
이정을 無生禪이라 하여 有生인 世間禪과 대응하여 설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세간선 즉 세간에서 선이라 하는 것은 산란함이 없는 점에서는 禪이고 定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란함은 없지만 그 寂相인 境界相을 取하는 것이다.
즉 動을 떠나지만 적상을 취하는 마음이 生하여 起動이 생한다.
그러나 진정한 선이란 寂의 외경에 대해 적을 취하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적에 住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이정 또는 무생선이라 한다.
이 이정인 선은 적정을 취하는 動이 生함이 없으므로 無生이고,
또한 寂에 住하지도 않으므로 無住이다.
즉 부동불선이란 산란함이 없으므로 부동이라 하고,
고요함도 없으므로 불선이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삼관 투과에 대한 해석에서 “삼관 돌파를 강조하는 뜻도 수행계위의 점차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구경각에 못 미치는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즉 不住不禪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不動不禪,
是無生禪,
離生禪相,
離住禪動의 네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부동불선, 시무생선, 이생선상이라는 구절은 선문정로에서의 여래선에 대한 설명,
즉 부동불선, 是如來禪, 離生禪想이라는 구절과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부동불선인 무생선은 곧 여래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면 선문정로에서 강조하는 삼관 돌파에 대한 이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삼관 돌파를 강조하는 뜻도 수행계위의 점차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구경각에
못 미친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즉 不住不禪함을 강조한 것이다.
5. 결 론
이상으로서 선문정로에서 말하고 있는 여래선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래선이라 함은 선 수행을 통하여 여래장의 구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래선을 정안종사인 조사들이 서로 전하였으므로 이를 또한 조사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여래선과 구별되는 별도의 조사선이란 인정하지 않으며,
仰山스님과 香嚴스님 간에 오고간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이야기는 법문 擧量이라고 한다.
또한 고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은 하택신회와 규봉스님의 여래선에 대한 견해를 이은 것으로,
이것은 여래장에 대해 아는 것을 중시한 것이어서 육조스님의 주장과 같이 이것의 實證을 중시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둘째 여래선의 수행 방법으로서 오직 화두 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강삼매경론의 주장에 의한다면 대승 止觀法의 하나로 이해된다.
그리고 다른 止觀行과는 구별되게 화두는 참구하는 그 처음부터 定과 慧가 둘이 아니며
또한 止와 觀이 雙運하는 특색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定 혹은 慧는 그 정도에 따라서 처음 화두를 들기 시작하는 데에서부터 구경에 이르기까지
대개 세 단계 즉
動靜,
夢中,
熟眠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선문정로에서는 숙면에서의 오매일여를 말후뇌관이라고 하며 특히 강조하여 禪門의 정안종사로서
이 경지를 투과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 점이 바로 性徹스님의 見處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불교의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경지를 實證한 스님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넷째 여래선은 그 선정의 힘이 구경에까지 곧바로 가는 것으로서,
이 구경을 무생법인 혹은 돈오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부동불선하며 또한 禪想의 일어남도 없으므로
무생선이라고도 하며 수도와 좌선을 하지도 않는다.
다섯째 여래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원효스님은 보살 초지에 들어가서 행하는 선으로 이해하였고,
보조스님은 三賢인 十住 초에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화두 참구에 있어서
삼관을 투과하도록 일여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여래선은 그 시작에서부터 구경에 이르도록
일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각각의 주장은 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나 선종의 입장에서는
성철스님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여래선을 선종의 입장에서 이해할 때에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된다. 즉 삼관을 투과하여 구경을 얻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는 바라밀행을 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The Characteristics of ‘Yeorae-Seon’
in the Seonmun-jeongno
In the Seonmun-jeongno(禪門正路),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and Sudden Cultivation(頓悟頓修) is recommended as a proper way to attain enlightenment, of which the Yeorae-Seon(Zen transmitted by Tathāgatha, 如來禪) is stressed to be practiced. Though the meditation by Koan(公案) originally suggested by Tai-hui(大慧) in Song dynasty, the characteristic of Yeorae-Seon that especially is described in the Seonmun-jeongno also has to be examined since it has been transmitted longtime ago. Here, we also examine the view on the Yeorae-Seon by Song-chol(性徹), Won-hyo(元曉), and Shen-hui(神會) together. Specially the standpoint of Won-hyo look to compromise the one of Song-chol.
In his Commentary on Vajrasamadhi Sutra, Won-hyo alluded that the Yeorae-Seon means the entering into the Tathāgatha-garbha, which is accomplished by the Threefold Vision of Unattachedness, or Mahayanic View of Emptiness. Through the learning of the next two steps, that is, the Listening of wisdom or the First Unattachedness and the Thinking on Wisdom or the Second Unattachedness, the Third Unattachedness or Cultivation of Wisdom would be allowed. Cultivation of Wisdom is to be arise from the proper state of meditation, so it should be refered to the Giving Up the Illusive Thinking. From the standpoint of the theory of Ten Bhumis, this can be applied to the First Bhumi. For Won-hyo, Yeorae-Seon denotes the Samadhi that is accomplished at the stage of Boddhisattva’s First Bhumi. Because this state is the same with the tranquility and turmoil of everyday routine, from the point of Three Stage, this is the sameness of move-and-stillness.
For Kui-feng(圭峯), Yeorae-Seon is to practice meditation after under- standing on the fact that the nature of Tathāgatha-garbha is originally empty and tranquil. This is what is called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頓悟漸修). In this context, the knowledge is more important. Ji-nul(知訥) said that the enlightenment can be attainable in the First Step of Ten Stage, thus it means to say that he enters the Yeorae- Seon. Once this stage was called as the Insight into the Nature, the ortho-praxis of Zen Buddhism but, this view is strongly criticized in the Seonmun-jeongno.
By the way, Yeorae-Seon(Zen Buddhism of Tathāgatha) and Josa-Seon(Zen Buddhism of Patriarch) have often been involved in the argument about whether the both of them are same or not, which was originally derived from the discussion by Yang-shan(仰山) and Xiang-yan(香嚴). For this discussion Song-chol insists that the dialogue looks superficially to tell the differences between Yeorae-Seon and Josa-Seon, but reflects the equality of them. Song-chol also said that this is the very essence of the Zen.
It is can be said that Yeorae-Seon described in the Seonmun-jeongno would be available from the very beginning of Koan practice to the ultimate state of Mindlessness.
Thus, there are different views on the Yeorae-Seon. First, Ji-nul told that it is accomplished at the First Stage, for Won-hyo it is at the First Bhumi of Boddhisattva, and for Song-chol it is at the Ultimate Enlightenment. However, when it comes to the Utilization of Mindfulness and Concen- tration together, Song-chol would get it to correspond to Koan Pract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