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밥통
손진숙
누가 그랬을까. 내부가 시커멓게 변한 스테인리스 밥통이 설거지통에 들어 있다. 짚이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 불에 덴 듯 놀라 소매를 걷어붙이고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는다.
알고 보니 남편이 ‘궁물촌’에서 포장된 곰탕을 사 와서 먹고 남은 양을 스테인리스 밥통에 담아 냉동시켰다 한다. 냉동된 채로 가스 불에 올려서 녹이고 데우느라 그랬단다. 그게 어디 가스 불에 올릴 용기(容器)냐고 나무랐지만, 이미 지난 일, 탓해도 별무소용이었다. 남편은 내가 느끼는 밥통의 소중함을 눈치채지 못한 게 당연할 테니까.
내게 이 밥통의 의미는 특별하다. 결혼할 때 나는 전기밥통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전기밥솥만 샀다. 끼니마다 밥을 지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희망이었는지 이내 알게 되었다. 단 두 식구라지만 밥을 해서 늘 같은 시간에 먹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지어놓으면 늦게 귀가할 때가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밥을 내놓을 수도 없고, 찬밥을 두고 새 밥을 지을 수도 없고, 결국 전기밥통을 살 수밖에 없었다.
속이 시커먼 밥통을 닦노라니 어린 시절 집안 풍경이 풍속화 한 폭처럼 떠올랐다. 제사나 명절이 가까워지면 어머니는 찬장 속에 있던 놋으로 된 제기祭器들을 몽땅 꺼냈다. 마당가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짚수세미에 기와 가루를 묻혀 싹싹 닦았다. 바쁜 어른들의 일손을 도우려고 어린 나도 한몫 거들었다. 팔이 아파지는 만큼 놋그릇은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꿈이 자라나던 아이의 맑은 눈동자도 투명해진 놋그릇에 비치는 듯했다.
가스 불에 검게 탄 스테인리스 밥통은 불구덩이와 같은 삶을 인내하며 사신 어머니의 가슴에 난 상흔처럼 느껴진다.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에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정성을 다해 문지른다. 그런대로 깨끗해져서 다행이지만, 조금 덜 지워진 흔적은 남았다. 우리 삶에서도 극심한 고통이 지나간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기란 어려운 일일는지 모른다.
친정어머니는 홀로 시골집을 지키고 계셨다. 어머니는 전기밥솥과 밥통 겸용을 사용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똑같은 스테인리스 밥통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당신이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주셨다. 주시는 거라 별생각 없이 받았다.
그 후로 어머니 집에 몸도 마음도 허기진 채로 찾아들면 언제든 이중으로 보온된 따끈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해서 적당한 양을 드시고 나머지는 보온 저장하셨다. 그냥 전기밥솥에 보온해도 되는데 왜 굳이 스테인리스 밥통에 퍼서 넣어 두셨을까?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전기밥통이 없던 시절, 밥그릇을 이불 속에 넣어두던 습관을 버리지 못해 겹겹으로 덮어두어야 안심이 되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여러 식구 밥상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하루도 밥그릇을 아랫목에 묻어두지 않는 날이 없었다. 외출이 잦았던 아버지, 학교에 간 언니와 오빠, 끼니때를 함께하지 못하는 식구는 늘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대가족이 뿔뿔이 떠나고 어머니 혼자 지내시는데도 혹여나 배고픈 자식이 불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설까 싶어선지 밥통을 비운 적이 없었다. 어머니 집에 가면 된장찌개 한 가지에도 밥맛이 왜 그리 좋았는지 신기하다.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쓰시는 것과 똑같은 밥솥과 밥통을 사용해 봤지만 어머니 집에서 먹던 그 맛은 살아나지 않았다.
어머니 다른 세상으로 가신 후, 빈집에 있는 빈 밥통을 내가 가지고 왔다. 그때부터 어머니 밥통은 우리 집에 있던 것과 함께 쌍둥이 밥통으로 동고동락한다. 요즘엔 밥을 담지 않고 주로 반찬을 무치거나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밥통을 탁자 위에 놓고 살펴본다. 뚜껑 윗면이 조금 볼록한 모양새다. 정월이나 한가위 보름달처럼 원만하다. 내 눈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은 늙고 야위고 그을었지만, 사진 속에서 본 어머니 젊었을 때 볼 통통한 얼굴과 닮았다.
밥통의 크기는 한 손으로 잡고 들기에 딱 알맞다. 밥 세 공기는 충분히 들어간다. 저 밥통에 채운 밥이면 어머니 하루 세끼 너끈히 배부르셨을 테다.
어머니의 매일매일 목숨을 부지해 주던 밥통. 두 개를 나란히 놓으니 아들딸 젖 먹일 때 탱탱하게 불어 있던 어머니 젖가슴과도 겹쳐 보인다.
뚜껑 위에 복福 자가 모란인지, 작약인지, 잎에 싸여 있다. 시골집 앞 밭둑의 나팔꽃인가도 싶다. 쌍둥이 밥통 정수리에 피어 있는 꽃은 아름답게 환생한 어머니 모습이 아닐는지. 이승에서는 부귀영화와 멀었으니 저승에서는 귀하게 한번 살아보자고, 눈부시게 찬란한 이 오월에 모란으로 활짝 피어났을지도 모르리라.
《선수필》 2024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