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희망
본문성구 : 전 1:2 ; 빌 3:14
관련찬송: 예수 앞에 나오면(205, 278, 360)
유머1. 직업별 겁주기
국회의원 : 내가 입만 열면 여럿 다쳐!
야구선수 : 밖에서는 오른팔 안 쓸려고 했는데….
깡패 :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대씩이야!
동네 노인 : 너 뉘 집 자식이야?
선생님 : 부모님 모시고 와!
네티즌 : 아~ 이거 진짜 로긴(login) 하게 만드네….
유머2. 진짜 명언
어떤 사람이 “관심이 없으면 정의가 없고 정의가 없으면 평화가 없으며 평화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말이 인쇄된 봉투에 편지를 넣어 보냈는데 그 편지가 되돌아왔다. 봉투에 인쇄된 문구에 이런 말이 추가되어 있었다. “주소가 없으면 배달이 없다.”
유머3. 흠 있는 유일한 곳
고대 그리스의 어느 재상이 화려한 대저택을 지었다.
자랑이 하고 싶어진 재상이 한 철학자를 초대해 집안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줬다. "어떻습니까?"하고 재상이 흐뭇한 표정으로 묻자 철학자가 갑자기 그 재상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하고 재상이 크게 노하자 철학자가 말했다. "집이 어찌나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지 침 뱉을 곳이라곤
당신 얼굴뿐이군요."
유머4. 동물구경
은행에 가서 줄을 서 있는데 어떤 여자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그 아이는 은행 창구 앞에서 쥐고 있는 빵조각을 남자 행원에게 불숙 내밀었다. 그러자 그 행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였다. 아이 엄마는 당황하며 "얘가? 그러면 못써!" 하더니 그 행원을 보고 "미안합니다. 얘가 방금 동물원에 다녀왔거든요."
유머5. 천당 갈래? 지옥갈래?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3 학생이 입시에 대한 중압감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하늘나라에 가니 염라대왕이 물었다. “너 천당 갈래? 지옥갈래?” 학생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어느 쪽이 미달입니까?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렌스(homo esperence)’, 즉 ‘희망하는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희망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입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음의 예화가 증명해 줍니다. 구소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냉동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에 갇힌 그는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문은 아무리 밀어보아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냉동칸 안에서 몇 시간을 허둥대었습니다. 그러든 그는 얼마쯤 지난 뒤 냉동칸 한쪽 구석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몸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왜나하면 그 냉동칸은 한 달이상이나 작동을 하지 않았고 산소도 충분했으며
그 안의 기온도 섭씨 15도로 사람이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온도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은 공포에 싸여 죽어갔던 것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잇었다면 그는 살아서 구조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희망이란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될 희망를, 말단 사원은 간부가 되는 희망을,
전세나 월세를 사는 사람은 집을 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전심 전력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러한 희망들은 매우 한시적인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서 떠나고 말 것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를 누려본 솔로몬은 그의 말년에 쓴 책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헛된 것이요 인생의 참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며 우리가 가져야 할 참 희망은 무엇일까요?
최후 승리의 희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세상이 영적 전쟁터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선한 그리스도의 세력과 악한 사단의 세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러한 영적 전쟁에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 참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이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대적인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께 도전할 만큼 매우 강력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된 성도들은 대적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때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다 잃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자기 가족의 생명을 잃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신자들로부터 가혹한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동방의 의인으로 불리웠던 욥이 당한 고통은 우리 성도들이 대적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고난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욥 1:13-19; 2:7). 그리하여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고난이 계속되고 승리의 보장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과 삶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놀라운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어 잇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대장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적의 수괴인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사(창 3:15)
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은 갈보리 전투에서 이미 그 위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우리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성도들이 일시적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우리의 몸은 해할 수 있어도 영혼은 어찌하지 못합니다(마10:28). 그들은 지금 영원한 멸망을 남겨놓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의 대장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멸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시고 우리에게는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환난과 고통 속에 있습니까?
우리의 대장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최후 승리의 희망을 가지십시오.
어떤 악한 세력도 우리 영혼을 해하지 못합니다. 승리의 면류관은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2).
2. 부활의 희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나는 그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죽음이 온 것은 죄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함으로써 그 대가로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창 3:19; 롬 6:23).
이러한 죽음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다 줍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존재의 끝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만큼 나에게 절망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ㄷ르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워합니까?
제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소리는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죽음은 인간이 이겨내기 어려운 고통이요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스런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절망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절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길 희망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오직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또한 장차 육체도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3일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도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성도 여러분, 정녕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벧전 1:3). 우리는 이 희망을 움켜잡고 죽음까지도 믿음으로 극복해야겠습니다.
3. 천국의 희망입니다.
요즈음 안락사 문제가 급격히 대두되고 있습니다.
안락사란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들의 곹오을 줄여주기 위해 인공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안락사는 현재 법으로 금지되어있고 윤리적으로도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높습니다.
물론 종교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살이나 살인 행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안락사는 비록 환자의 고통을 줄여 준다는 명목에도 불구하고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생명은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고귀한 것입니다.
또한 안락사는 생명의 주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너무 심하여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했습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사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지 못해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살아야 하는 삶이 어지 행복할 수 있겟습니까? 그것은 저주 중의 저주이며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저주스러운 삶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으나 그것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성도나 불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성도와 불신자가 다같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여 두 존재가 모두 행복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즉 성도는 천국에, 불신자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유황 불못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 20:10).
그런즉 그곳에 들어가는 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즉 불신자는 장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들어가 영원히 죽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행복이라 하며 어찌 영생이라고 말할 수 있겟습니까?
그러나 성도가 거할 천국은 저주나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사망이나 슬픔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오직 기쁨과 위로와 영광만이 있습니다( 계 21:3,5).
그러므로 성도의 영원한 삶은 실로 복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성도는 이러한 지복의 천국을 희망하는 자들이며, 이 천국 희망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대 우리는 이 세상의 힘들고 고달픈 나그네 생활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역동적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희망은 우리 인생에게 실로 역동적이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거짓 희망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듯하지만 허무감과 절망감만 안겨다 줍니다.
사단은 바로 그러한 거짓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속한 물질이나 명예로 희망을 삼게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지극히 한시적인 것으로 참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영원히 절망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참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희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만 최후의 승리가 있고, 부활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부여 잡읍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고 그만을 바라봅시다(빌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