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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일 시 | 장 소 | 비 고 |
2012년 09월 15일. 09시15분 | 5호선 상일동역 | 보성 사우나 앞. |
09시:30분 출발 | 상일동역 | 버스로 성지까지 이동함 |
09시:50분 도착 | 구산성지 도착 | 묵상,묵주기도, 성가기도 |
11시 미사 참례 | 구산성지 성당 | 참례 |
12시 20분 | 구산성지 점심 식사 | |
13시 30분 출발 | 구산성지- 강변길 - 미사리 | 강변길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
16시 00분 | 배알미동. 도착 |
이벽선조와 정약종 형제들이 한양에 계신 왕을 배알하던 곳에서 삼각산 조망. |
17시 30분 | 창우동 도착 | 평가 및 저녁 후 해산. |
상일역에서 성지까지 버스로 이동하겠습니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
성인께서는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김영춘과 청주 한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고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셋째 동생
문집과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830년 경이다. 이때 둘째 만집 아우구스티노는 입교를 망설이다. 이내 신앙을 받아들여 3형제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면서 친척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산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1833년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김성우 성인께서는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마장안( 마장동)으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이후에는 한여름 동안 모방 신부를 이곳에 거처하도록 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3월 21일(음력 2월 7일), 포졸들이 구산으로 와 동생을 체포하였다. 이때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났으나그 해 말 배교자의 밀고로 동생들과 사촌 김주집이 체포되어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둘째인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뒤 고문을 받으면서도 관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2월 19일(음력 1월 28일) 옥중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반면에 셋째인 문집과 사촌인 주집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당시 김성우는 미리 포졸이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방으로 피신하였지만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년 1월경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온갖 형벌을 받아내면서 석방될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다음날인 4월 29일(음력 윤 3월 9일) 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그의 나이 47세에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한 뒤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암브로시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된 것이다.
성인의 굳은 신앙심은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 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 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Maubant, Pierre Philibert, 1803~1839)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서양인 신부로 한국명은 나백다록. 그는 1829년 사제 서품 후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고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포교지로 가는 도중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주교의 용기에 감동을 받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35년 11월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가자로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장사지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므로,
즉시 마가자를 떠나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1836년 1월 13일 조선 국경에 이른 모방 신부는 조선의 밀사 조신철 등을 만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성문을 비밀리에
통과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 머무르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1836년 12월까지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성무활동을 하였고, 신학생을 선발하여 1836년 12월 3일 선발된 세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김대건 안드레아로부터 순명 서약을 받고 그 날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 일행에 신학생들을 포함시켜 중국으로 보냈다. 1837년 1월과 12월에 입국한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와 함께 한국 교회는 3명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되었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의 기해박해로 그해 9월 21일 성 마태오 축일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세 선교사는 1984년 5월 6일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거북이 등을 형상화하여 성지 정문을 만들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서 마을 북쪽 한강변 작은 동산이
거북이 닮았다하여 구산(龜山) 이란 지명을 얻은 곳이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께서 교우촌을 만드셨으며 순교한 후
아들에 의해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성인께서는 자신의 집에 작은 경당을 만들어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P.maubant)
신부를 모셨다. 모방신부께서는 김성우 안토니오를 회장으로 임명한 후 공소를 설립하였다.
구산에서 배출된 순교자는 1841년 4월 29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그의 둘째 동생 만집 아우구스티노, 셋째 동생 문집과 김성우의 아들 성희, 만집의 아들 차희, 문집의 아들 경희, 사촌인 주집의 아들 윤희와 최지현, 심칠여 등 모두 9명이다.
인류와 가정의 평화를 기려주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 동상
성인들의 묘역과 성당으로 들어 가는 안당문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 현양비와 무덤. 그리고 뒤에 보이는 건물이 성당입니다. 작지만
아늑하고 아름답습니다.
성지 경내에 세워진 10개의 순교자 십자탑은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이곳 출신 8분의 순교자를 상징한다.
나머지 하나의 십자가 탑은 구산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십자가다. 다가가 거룩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왜? 우리들은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