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 6구 탄생
법계성(남정희)/강동6구
불기 2537년(1987년) 그때도 스님의 일 탈로 불광법회가 술렁술렁 했었다.
일부 형제들은 다른 사찰로 떠나고, 법등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소문만 무성한 법회가 되고 말았다.
대종사이신 광덕 큰스님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구 법회 숫자는 줄어들고. 법우들 간의 오해가 생겨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그때 정혜 지오스님께서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르셨다
법회 후 임원회의가 열리고 형제들의 불편한 사항도 점검하시고 법등도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하라 하셨고 불광을 안정시키기 위한 바쁜 일상을 이어 가셨다.
나는 그 당시 강동구 살면서 성동구 였는데 강동구 거주 하시던 보살님 몇 명과 함께 지오스님의 지침에 따라 가까운 지역구 법회로 이동하게 되었다
강동구 다른구에 소속을 했지만 그것마져 만만치 않았고, 있던 구들이 없어지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불광법회의 상징인 구법회를 잃어버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우리는 구 소속이 없다는 것이 절박 했었다
그 후 몇 명 보살님들과 함께 강동구에서 창단하기로 하고 강동 5구까지 있는 강동구에서 강동 6구로 창단하기 위해, 지오스님을 찿아 뵙고 간청을 드렸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서 어려움이 생겼다.
몇 번이고 지오스님께 간청을 드렸더니 저에게 숙제를 주시며 스님께서는 최소 법등 3개를 만들어 오면 강동 6구를 허락하시겠다고 엄중히 말씀하셨다.
저는 기쁘기도 하였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부터 형제들과 상의하여 법등 식구를 늘려서 3개 법등으로 만들어서 구를 만들어 보자 라는 원을 세우고, 구 법회 인원을 늘리기 위해 우선 가장 가깝지만 가장 어려운 가족 포교 남편들부터 전법 하기로 했다. 사회생활로 바쁜 남편들을 전법 하여 법당으로 인도하기까지도 쉽지는 않았으며. 가정에서도 남편을 전법하기 위하여 일과기도와 함께 불자다운 행동과 면모를 충실하게 보여주며 그렇게 공을 들여 많은 시간을 노력한 결과, 모두 남편들 전법에 성공하여, 구 임원 4 명과, 1.2.3 법등 임원 12명, 해서 모두 16분으로 되어, 드디어 지오스님께 영광스러운 강동 6구로 창구를 허락을 받고 그 이듬해인 1988년(불기 2538) 7월 31일 강동 6구가 탄생 되었다.
그 후 우리 구는 모두가 임원만 있었고, 구 식구 인원을 늘리기 위해 부모님 형제, 자매, 친지, 직장동료 선, 후배 등등에서 전법을 열심히 하였고, 새법우가 생기면 남편과 함께 일과 기도와 가정모임 기도를 달 달이 빠짐없이 형제들 댁으로 돌아가며 성실히 하며 불광법회에 정착하여 광덕스님의 위없는 높은 법문을 들을 수 있고 부처님께 귀의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후 강동 6구는 부부 법등이라는 명칭도 붙으며 열심히 신행 활동을 하게 되면서 법등가족이된 형제들은 다 같이 속세에서 불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 5계도 받으시고 지금은 4개 법등으로 법등 식구는 몇 배로 일요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보살님들은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흐트러지지 않게 구를 위하며 명등보살님을 도우며, 명등보살님의 공지에 즉각 행동으로 실천하는 건강한 강동6구 보살님들,
각 단체팀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는 선학보살님들과 회장단 명문부회장님, 심월행 보문부팀장님, 합창단원, 사무국봉사, 1인시위 등 각 처처에서 불광정상화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시는 강동 6구가 자랑스럽습니다
금하 광덕스님이 창건하신 불광법회 50주년,
승속과의 갈등으로 아픔은 격고 있지만 은사스님의 뜻에 따라 재정투명화가 이루어져 합리적인 사찰운영으로 한국 불교의 위상을 더 높게 드높아지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보현행원을 실천하시는 보살님들이 계시는 한 불광 정상화는 꼭 이루어질 것이며 불광법회는 영원히 빛날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
정혜 지오 큰 스님 열반일에 돌이켜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