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방에 세들어 살던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되어 방을 세놓는 처지가 되었다. 집주인인 우리한테 알릴 겨를도 없이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사연은 순전히 빚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빚을 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빚쟁이들의 발길만 봐도 그들이 진 빚은 한두푼이 아닐성 싶었다. 빚쟁이가 오는 날은 서로 험한 욕설을 퍼부우며 싸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집안은 늘 시끄러웠다. 마음같아선 그들이 방을 비우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매달 세경처럼 꼬박꼬박 바치는 월세가 아까워 선뜻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전 그들이 마당에 몇 꾸러미의 이사짐을 내놓는 것을 보게되었다. 이사를 가게 되었단다. 어디로 가는지 물었지만 일급비밀이라도 되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기야 빚쟁이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쥐도새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래도 훤한 대낮 에 이삿짐을 내 놓는 걸 보면 조금은 양심이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이 이사를 가고 난 후 텅빈 방을 바라보니 보통 어수선한 것이 아니었다. 방에 가구도 있고 소소한 물건이 있어야 사람 냄새도나고 채취도 물씬 풍기는 법인데 인적이 없는 방은 적막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원룸처럼 깔끔하거나 살기가 편한 것도 아니고 보통크기만한 방 한 개에 입식 부엌 그리고 화장실도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전형적이 단독주택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세를 놓기가 아주 어려울 것 같았다.
웬만하면 돈을 조금 더 보태서라도 깔끔하고 살기 편한 원룸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 때문에 이렇게 누추한 방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세를 빨리 놓을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복덕방에 내놓자니 수수료가 턱없이 높아 아깝고 교차로에 내놓자니 일주일에 13,000원하는 한 줄짜리 글귀가 제대로 홍보 효과가 있을지도 만무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전봇대였다. 전봇대를 이용하면 행인들의 눈에 쉽사리 띄게 되어 금방 홍보 효과가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수십장의 용지에 월세를 구한다는 쪽지를 만들어 전봇대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어딜가나 마찬가지지만 우리집 주변 골목에는 전봇대가 길목마다 서있어 월세쪽지를 붙이기가 참 좋았다. 어디에 눈을 돌려도 전봇대는 넉넉한 품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이미 오래 전에 써붙인 쪽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전봇대는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대해 주는 것 같았다. 애견을 찾는다는 읍소형 쪽지에서 부터 가난한 대학생의 과외 쪽지가 행인들의 발길을 하염없이 기디리기도 했다. 더구나 술취한 행인이 전봇대 아래에 오줌을 갈겨도 묵묵히 받아주었다.
머리 위에 몇만 볼트의 변압기를 이고 힘겨운 삶을 살아도 전봇대는 다만 우리같은 서민들의 따뜻한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눈에 잘 띌만한 전봇대를 찾아 부지런히 뛰어 다녔다.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모두 전봇대에 붙이고 났을 때 전봇대는 나에게 따스한 인사말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
'아저씨, 힘 내세요. 밤이면 전깃불이 환하게 켜지듯 한 칸짜리 어둑한 셋방에도 볕들 날이 있을 거예요.'
며칠이 흘러갔다. 방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찾아왔지만 한결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는 사라졌다. 그럴수록 한숨소리만 쌓여갔다. 방을 세놓기가 영영 힘들거라는 불길한 생각만 스쳐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앳띤 목소리의 청년한테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방 나갔어요?" "아직 안나갔는데요" "거기 위치가 어디쯤 되지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위치를 알려주고는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도 분명히 방을 보고 간 사람들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나의 생각과는 아주 딴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 안을 한번 쓱 훓어보고 나온 그 청년은 넓은 마 당과 텃밭에 서있는 감나무를 쳐다보고는 안도의 말을 꺼냈다.
"방이 참 조용하고 좋네요. 제 맘에 쏙 들어요" "그럼 빨리 계약합시다"
나는 그 청년을 놓칠까 싶어 단번에 계약을 하고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허허 별일이야. 이런 방도 좋다는 사람이 다 있네.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딱 맞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