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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림맹주
금릉의 길에는 비단이 깔려있지 않았다. 금릉 사람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금릉은 그들이 보았던 어떤 곳보다도 훨씬 부유했고, 활기찼다.
금릉의 대기(大氣)는 돈과 술의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짙은 연지분을 바른 여자의 냄새도 풍겼다. 금릉은 흥청거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신기하게만 보이는 촌뜨기 장백쾌검문의 다섯 사형제들이 그곳에 도착한 한낮에도 금릉은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밤처럼 흥청거리면서 취해 있었다.
벌써 봄의 기운을 완연히 풍기는 따사로운 햇살이 그렇게 취한 금릉의 지붕과 거리를 아낌없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봄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다섯 사형제는 빈자리가 있는 객잔을 찾아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다. 어디에나 사람은 터질 듯이 많았고, 그들을 위해 남겨진 자리는 없었다.
사람의 물결 사이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거리를 헤매 다닌 끝에, 그들은 간신히 한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점소이에게 돈을 몇 푼 집어주고 간신히 객잔 앞의 거리에 상과 의자를 놓은 노천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거리에는 그들 말고도 노천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들은 별로 꺼리는 기색도 없이 어두운 객잔 안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으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금릉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치 사람으로 가득 차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도시가 바로 금릉이었다.
비록 노천일망정 그들 몫의 상과 의자를 받고 거기에 엉덩이를 붙인 다음에서야, 장백쾌검문의 다섯 사형제들은 비로소 그들이 강호의 중심, 금릉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강호는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것 봐."
검호가 음식을 날라온 점소이의 손을 은근히 잡으며 말했다.
"하룻밤 머물 방은 있겠지? 응? 잠도 바깥에서 잘 수는 없지 않나?"
검호가 점소이의 손을 놓아줄 때 점소이의 손바닥 안에는 은자 몇 냥이 남았다. 점소이는 굳이 손을 펼쳐 그것을 확인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는 히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지요. 제가 꼭 방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요."
"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 무슨 난리라도 났나?"
점소이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모르고 올라오셨습니까?"
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솔직해 질 수 있는 그였다.
"비무대회가 있지 않습니까요! 비무대회!"
비무대회. 그 말을 듣는 순간, 상위에 올려져 있던 사형제들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검호는 최대한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점소이에게 물었다.
"비무대회? 지난 가을에 있었던 비무대회 말고, 또 열리는 건가?"
점소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비무대회지요!"
"아직도 안 끝났단 말인가?"
"물론이지요."
"무슨 비무대회를 몇 달씩이나 해?"
점소이가 혀를 쯧쯧 찼다. 그의 눈은 은근히 검호와 그 일행이 메고 있는 검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제 딴에는 검객인양 온갖 모양을 내고 다니면서, 강호의 사정에 대해 어째 그리 모르는가 하고 비웃는 듯 했다.
"강호에는 고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지요. 그 많은 고수들이 모두 날짜를 맞춰서 비무를 하기도 어렵고, 십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인데 대충 아무나 우승자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명실상부한 천하제일고수를 가리는 대회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오랜 기간을 두고 한다는 말인가?"
"자질구레한 무명배들의 대결은 이미 끝났지요. 이제 남은 것은 그래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고수들의 대결이 남았지요.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분 고수님들의 대결이 이곳에서 벌어지는데 그것을 구경하려고 몇 달째 금릉을 떠나지 않는 유람객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요!"
"아!"
검호가 감탄했다.
"이거, 이럴 때 금릉에서 장사라도 하면 떼돈을 벌겠군!"
점소이가 히죽 웃었다.
"돈이야 벌 수 있지요. 하지만 돈을 모아도 모두 바다로 가고, 금은 쌓아도 모두 산으로 보낸다는 말도 모르십니까?"
"그게 무슨 소린데?"
점소이는 검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노천에 벌여진 다른 자리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허둥지둥 그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점소이는 건네받은 은자 몇 냥 몫만큼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려주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돈을 모아도 모두 바다로 가고, 금은 쌓아도 모두 산으로 보낸다'는 말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몇 푼의 돈을 더 집어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낭비를 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금릉의 물가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비쌌다. 바가지를 씌운다는 유주천궁의 음식 값도 이곳보다는 쌀 것 같았다.
그렇게 비싼 돈을 물어주고 받은 음식이란 고작해야 한 병의 죽엽청과 몇 접시의 소채와 까실까실한 밥 다섯 공기뿐이었다.
어제 문등표국의 일행일 때는 가는 곳마다 비싼 음식을 먹고 비싼 방에서 잘 수 있었던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모두 우울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고 그릇에 놓인 음식들을 쿡쿡 찔러 보았다.
오직 검란만이 아예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탁자가 즐비한 긴 거리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사형제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람이 아니라 돼지 같았고, 개 같았다. 어떻게 음식이 목으로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검호가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검학에게 속삭였다.
"언제 아란을 의원에게 보여야겠다. 증상이 심각하구나."
검학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백리 사숙을 찾는 것은 언제부터 할 생각이오?"
"이제 금릉에 왔으니 언제라도 찾아갈 수야 있지."
"낮에 갈 거요? 밤에 갈 거요?"
검학은 신중하게 물었다. 그는 아직도 검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만일 검호가 백리사숙을 낮에 방문한다면, 아직도 그를 믿고 있다는 뜻이고 밤에 간다면 믿을 수 없으니 동정을 염탐하려는 뜻이리라. 그러나 검호는 둘 중 어느 쪽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틈이 날 때 가지."
검학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짜증 섞인 소리로 막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독한 죽엽청과 함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검란이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는 거리의 끝에서 별안간 아련한 징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모두 검란처럼 거리의 끝을 바라보았다.
활기차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림처럼 정지되어 버렸다. 거리의 끝에서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츰차츰 다가오는 그것은 아주 거창한 행렬이었다. 징소리는 멀리서부터 퍼져왔고, 이어서 북소리도 울렸다. 피리 소리도 그 뒤를 따라왔다.
징과 북과 피리를 든 한 떼의 사람들이 행렬의 맨 앞에서 나아오는데, 그들의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앞을 향해 똑바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이리 저리 걸음을 어지럽게 하며 갈짓자로 걸어오는데,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비틀거리는 동작이 한 사람처럼 일치했다. 게다가 북과 피리와 징의 소리도 그 걸음걸이에 딱딱 맞추어졌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그들의 걸음걸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검호의 뺨이 막 부풀어 올랐다. 웃음을 터뜨리려는 것이다. 그의 입안에는 음식이 가득 들어있었기 때문에 만약 웃음을 터뜨리게 되면 사방으로 밥알과 음식찌꺼기들이 흩어질 것이다.
별안간 노천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일제히 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너나할 것이 없었다. 음식을 나르고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와 있던 점소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검호에게서 은자 몇 냥을 받았던 점소이가 허둥지둥 그들의 자리로 달려오더니 어서 상 밑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데?"
"일단 들어가세요! 들어가서 말씀을 드릴 테니!"
점소이는 벌써 그들의 상 밑으로 먼저 기어 들어갔다. 검란과 검매와 검웅과 검학도 얼떨떨해하며 그 밑으로 들어갔다. 검호는 점소이가 옷소매를 당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기어 들어갔다.
낮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더욱 재미있었다. 그들을 포함하여 모든 거리의 사람들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길거리의 건물들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바닥에 엎드렸는지 창문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밥그릇과 젓가락을 손에 쥔 채로 바닥에 엎드린 검호는 옆의 점소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어왔으니 이야기를 해봐. 저 행렬은 뭐야?"
점소이가 이를 딱딱 부딪히며 대답했다.
"강호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무서운 분의 행차이지요!"
"그가 누군데? 황제 폐하라도 되나?"
"황제 폐하는 존귀하지만 강호의 사람이 아니지요. 저 악단의 걸음걸이를 보면 모르십니까?"
"저 사람들은 술이라도 마신 것 아닌가? 왜 저렇게 비틀거리면서 걸어?"
점소이가 울상이 되었다. 그는 아주 검호를 불쌍하게 여기는 듯 했다.
"정말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군요. 저건 무당파의 구궁보법(九宮步法)입니다! 십년을 수련해도 익히기 힘들다는 절세의 보법이예요!"
십년을 수련해도 익히기 힘들다는 절세의 보법을 쓰는 수십 명의 악단. 그 악단이 선두가 된 행렬.
악단들의 뒤에는 십 여 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따라왔다. 그녀들은 옆구리에 낀 바구니 안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뿌리는 손은 하얗고 매끈했으며 아주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점소이는 그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아미파(峨嵋派)의 난화산수(蘭花散手)라는 수법이올시다! 저 아가씨들은 모두 아미파에서 인정받은 속가제자(俗家弟子)들이지요."
아가씨들의 뒤에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지붕을 가진 엄청나게 큰 가마가 따라왔다. 가마에는 옷을 해 입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결 고운 비단으로 만든 차양이 늘어져 있었다. 가마꾼만 해도 이십 명이 넘었는데, 가마꾼들의 허리에는 매화가 새겨진 검집이 똑같이 매달려 있었다.
"저 가마꾼들은 모두 화산파(華山派)의 정예들입니다. 날고기는 고수들이지요."
검호가 혀를 내둘렀다.
"자네, 정말 고수일세?"
점소이가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어째 그리 강호의 절기들을 쉽게 알아보나? 자네, 점소이로 변장한 강호고수 아닌가?"
점소이가 피식 웃었다.
"제가 이 가게에서 일한 지 오년이 되어 가는데, 반년에 한 번쯤은 이 행차를 봅니다! 못 알아보면 제가 병신이게요?"
"대체 누구의 행렬인가? 어디로 가는 거야?"
상가들이 늘어선 거리의 한쪽 끝에서 오기 시작한 그 행렬은 검호네가 엎드린 곳에 닿기 직전에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거리의 반대편 끝, 호화로운 거리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한 채의 누각에서 두 명의 아름다운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들은 땅에 떨어진 금화(金貨)라도 찾는 사람들처럼 깊게 허리를 숙인 채, 무거워보이는 빨간 비단 천을 말아 가지고 양쪽에서 들고 있었다.
그녀들은 그 비단을 누각의 입구에서부터 땅바닥에 쭈욱 깔기 시작했다. 붉은 비단은 길바닥을 덮어 마침내 행렬의 맨 앞까지 깔렸다. 바람이 불어도 흙먼지가 일지 않는 청석(靑石)이 깔린 대로(大路) 위에 다시 붉은 비단으로 길을 만들어 둔 것이다.
그러자, 가마에 드리워졌던 차양이 살짝 걷히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그 안에서 날아 나왔다. 검호는 상 밑에서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자 했으나 햇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허공으로 비상한 그 사람이 옥색의 도복(道服)을 입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옥색의 도복을 입은 그 사람은 가볍게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길 위에 내려섰다.
검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린 그 길을 가로질러 붉은 비단을 밟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한 사람의 옥색 바지뿐이었다.
그는 꽃과 같은 두 아가씨의 마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거리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한 채의 누각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누각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비로소 가마꾼들과 악단과 꽃을 뿌리던 아가씨들도 왔던 길로 돌아섰다.
가마꾼들과 악단과 꽃을 뿌리던 아가씨들이 길 끝으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거리의 바닥에 엎드려있던 사람들이 다시 상위로 올라왔고, 객잔 안에서 들려오던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고함소리도 되살아났다.
거리는 다시 활기를 찾은 듯 했다. 검학과 검웅과 검매와 검란과 아는 것 많은 점소이도 상위로 기어 나왔다.
그러나 검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밥그릇과 젓가락을 든 채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점소이가 위에서 그를 불렀다.
"이제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
검호는 엎드린 채로 그냥 물었다.
"저 사람은 일 년에 몇 번이나 이곳으로 행차를 하나?"
"많으면 세 번, 보통은 두 번이지요."
"그때마다 이런 행사를 치러야 한다면, 모두가 그를 원망하겠군?"
점소이는 크게 웃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바로 저 분 때문에 강호가 이렇게 평화롭고 태평한데, 이 정도의 번거로움 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점소이는 엄숙하게 말했다.
"강호 무림의 군주(君主)라고 할 수 있는, 무당파의 송호자 어른이십니다! 하지만 모두들 그분을 맹주(盟主)님이라고 부르지요. 무림맹의 맹주, 송호자 어른이라고요!"
아직도 상 밑에서 기어 나오지 않는 검호를 보며 다른 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킥킥 웃었다. 모든 사람이 상 밑을 길 때는 기지 않는 사람이 바보가 되지만, 모두가 상위로 올라왔을 때는 기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이다. 비웃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도 방금 전까지 상 밑을 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검매가 상 밑을 내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사형! 창피하니까 그만 좀 올라와."
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엎드린 채로 젓가락을 놀려 밥을 먹었다.
"이렇게 엎드리는 것이 얼마나 편한 자세인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어. 마침 잘 기억이 났군."
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땅바닥에 붙어 밥을 먹었다. 검매는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창피는 당할 만큼 당해버린 것이다.
남들이 비웃는 상 아래에 엎드려서 검호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그는 거리 끝에서 가장 화려한 그 누각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누각은 화려하면서도 정교했다. 누각의 지붕 끝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땅과 가장 가까운 땅바닥에서 장백쾌검문의 검호는 엎드린 채로 밥을 먹을 때,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누각의 꼭대기 층에서, 무림맹의 맹주 송호자는 한 병의 백건아를 주문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처럼 먼 거리가 있었다.
"달리 하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송호자가 즐겨 마시는 백건아 한 병과 낙화생(落花生) 한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누각의 여주인이 물었다. 송호자를 대하는 여주인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누각의 창문 아래로 휘황하게 뻗어있는 금릉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송호자가 온화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를 보내고, 자네는 물러가게."
"예."
여주인은 나갔다. 송호자는 잠시동안 창문 가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방금 뭇사람들의 지극한 예를 받으며 지나온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중년으로 접어든 그의 눈빛은 오만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겸허하지도 않았다.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는 세상에는 상 밑에 엎드려 밥을 먹는 검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궁궐의 관리들조차 공손히 찾아와 강호의 일에 대한 조언을 구하곤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나직한 말 한 마디에 구파일방이 움직였고, 녹림도들이 잡았던 칼을 놓았으며, 뭇 사람들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모든 것을 이루고 누각의 꼭대기에 이른 사람에게 세상은 아주 자그마하고도 나약한 존재로 비쳤다. 그 보잘 것 없는 중에서도 특히 보잘 것 없는 장백쾌검문의 몇몇 조무래기들이 지금 저 아래 거리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창문 가에서 물러나 탁자에 앉아 백건아 병을 기울여 백옥(白玉)으로 만든 술잔에 따랐다. 아름다운 손 하나가 다가와 술병을 든 그의 손을 잡았다.
"존귀하신 분께서 어찌 손수 술을 따르십니까? 천첩(賤妾)이 따르겠습니다."
송호자의 입가에 비로소 사람다운 웃음이 떠올랐다.
"네가 왔구나."
방 안 가득히 찰 것 같은 폭 넓은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꽃장식을 단 삼백안의 미인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아니 그녀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작은 방 안은 온통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꽃향기를 풍기는 미인은 선 채로 송호자의 잔에 술을 마저 채워주었다.
단숨에 술을 들이키는 송호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인이 문득 말했다.
"오늘은 도인께서 어쩐지 심기가 어지러워 보이십니다."
송호자가 웃었다.
"내가 너를 찾아올 때마다, 심기가 어지럽지 않았던 적이 있었더냐?"
"그래도 오늘은 각별히 어지러워 보이십니다."
송호자는 묵묵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다물자 미인도 입을 다물었다. 한참만에 송호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잘 보았다. 나는 다른 날보다도 더욱 우울하다."
미인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송호자는 그런 일을 말하려고 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 병의 깨끗한 백건아일 뿐이고, 세상이나 무림과 상관없는 한가로운 정담(情談)을 그녀와 나누는 것뿐이었다.
송호자는 미인이 다시 따라주는 백건아의 향기를 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 한 병의 백건아는 언제나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미인이 입을 다시 열었다.
"거력당주와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송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 아직 풋내기였고, 강호의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날, 내가 이 한 병의 백건아를 마시고 있을 때 덩치가 산 같은 거력당주가 술을 마시는 도사는 결코 참된 도사가 아니라고 비웃었다……."
송호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회상에 잠겼다.
"난 그와 싸워서 이겨야 했다. 그래서 술을 마실 자격이 있는 도사임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싸웠다…… 그날 등왕각에는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내가 일장을 날리고…… 산 같던 거력당주가 무너지자…… 숱한 사람들의 박수 소리, 고함소리가……"
송호자는 마치 그 날의 그 환호를 다시 듣는 듯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웅이 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나는 그날 비로소 알았다."
미인이 말했다.
"지금까지 도인께서 싸우고 물리쳤던 사람들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도인의 말처럼 영웅이 되는 일이 쉽다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겁니다."
송호자가 별안간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하느냐?"
미인의 신비한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도인께서는 강호에서 가장 존귀하고 높으신 분입니다."
송호자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그럼, 영웅은 아니라는 소리로구나?"
"천첩은 청루의 높은 담 안에서만 자라, 무엇이 영웅의 기상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감히 영웅의 의미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송호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그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나는 진짜 영웅을 만나보고 싶다."
미인이 웃으며 말했다.
"거울을 보세요."
송호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빈 잔을 들어 미인에게 거듭 술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자꾸만 비어 가는 술잔에 백건아를 따르며 미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도인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백건아의 뒷맛을 음미하면서, 송호자가 말했다.
"그건 한 마리 매에 대한 일이다. 그 매가 내 심장을 쪼고 있다."
송호자의 술병은 비었고, 검호의 밥그릇도 비었다. 시간은 흘렀고 금릉에도 밤이 왔다. 금릉의 밤은 금릉의 낮보다도 열 배로 더 흥청거렸다. 흥청거리는 밤에 익숙하지 못한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감히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간신히 얻은 방 두 개에 들어간 그들은 놀 줄 모르는 촌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잠이 바로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고나서 더욱 잠이 안 오기도 한다. 걱정이 많은 검학도 그런 사람이었다.
고민이 생겨도 금세 잊어버리곤 하는 검웅은 벌써 코를 골며 잠자고 있었다. 검학은 이불 밑에 송곳이라도 묻어둔 사람처럼 뒤척거리며 만가지 잡념과 싸우고 있었다.
백리 사숙을 찾아가 무엇을 해야 하나?
백리 사숙은 사부의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황금 만냥은 어떻게 모아야 하는가?
황금 만냥을 가지고 금적산을 찾아가면 전 노야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설화는 어째서 그들의 뒤에 큰 힘이 있다고 소제갈에게 말했을까?
그 자신도 모르는 큰 힘이 언제부터 그들의 뒤에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이사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혹시나 그의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닐까?
금릉. 금릉의 밤은 그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대사형과 함께 왔을 때도 그는 이와 같은 금릉의 밤을 겪었었다. 멀리서 아련하게 풍악과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가면 온갖 환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사형……
검학의 만 가지 잡념에 하나가 더 보태졌다.
대사형은 무엇 때문에 밤마다 그렇게 외출을 했을까?
누구를 만나기 위해? 거경방의 부방주인 방우창과 같은 사람을 사귀기 위해?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사형이 죽고, 허울뿐인 대사형의 자리에 앉은 그의 못난 이사형이 침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도 대사형처럼 밤나들이를 떠날 모양이었다. 대사형에게는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었지만, 검학은 이번에는 질문을 참지 않았다.
"어디 가?"
문 가에서 멈칫거리던 검호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바람 좀 쐬고 올게."
검학은 더 묻지 않았고, 검호도 더 대답하지 않았다. 검호가 방을 나간 뒤 검학은 다시 그 만가지 잡념들에 하나를 더 얹어서 싸워야 했다.
장백의 거친 산바람 속에서는 그토록 게을렀던 이사형을, 야행까지도 서슴지 않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대답은 오직 부드러운 금릉의 밤바람만이 알고 있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