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3. 12
정의용·서훈을 미국 특사단으로 보내던 8일 아침, 문재인 대통령은 일산 킨텍스에서 기독교계가 마련한 국가조찬기도회 단상에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기적같이 다가온 소중한 기회를 도널드 트럼프가 차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복잡한 심경이 교차했을 것이다. 설교자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특사단이 오늘 출발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평화의 설국열차가 통일열차가 돼서 쾌속 질주하도록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그의 발언은 문 대통령의 마음을 대신 표현한 효과를 냈다.
스무 시간쯤 뒤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난 정의용 특사단장은 목사의 설교를 대통령의 인사말로 살짝 바꿨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어제 아침 국가조찬기도회에서 5000여 명의 한국 목사님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님께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트럼프 대통령이 큰 힘이 됐다.” 칭찬받기 좋아하는 트럼프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외교관 생활로 잔뼈가 굵은 정의용다운 노련함이었다. 문 대통령은 기도회에서 “남북 대화뿐 아니라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만들어 낸 성과다. 성도 여러분, 미국과 손잡고 북한과 대화하며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이라는 나라 이름만 꺼냈고, 소 목사는 트럼프라는 인격을 입혔다. 소강석이 한국의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미국 대통령을 끄집어낸 것은 대중적 감수성이 풍부한 복음주의 목회자의 면모다. 그러나 감수성 이상의 무엇도 감지된다. 소강석을 설교자로 내세운 한국 기독교의 본류가 북핵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통합과 정체성, 한·미 동맹이 훼손돼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통일을 이루려면 대한민국이 하나가 돼야 한다. 평화통일의 열차 안에 탄 승객들이 서로 증오하고 충돌하고 싸워서야 되겠나. 세계 역사에서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갈등과 분열이었다.” 4, 5월 연쇄 정상회담은 핵무기를 둘러싼 한국·북한·미국 3국의 진실들이 환히 드러나는 무대다. 한국의 진실은 이 메시지에 담겼다. 특정 목사나 기독교 세력의 정치관이라기보다 한국인의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믿음이라 하겠다. 평화통일의 종착역에 이르기도 전에 열차가 내부 사정으로 탈선한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나. 우리 정부가 금언처럼 새겨 둬야 할 말이다.
진실의 첫 순간은 김정은이 북한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할 의지와 실천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느냐다. 이게 흐리멍덩하면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진실의 두 번째 순간은 트럼프가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김정은 체제를 보호할 명실상부한 대책을 내놓느냐는 것이다. 세 번째 진실은 한국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살려 낼 막대한 평화비용을 지불하겠느냐의 문제다. 여기까지가 진실의 서열이자 수순이다. 노파심이지만 회담 과정에서 미군 철수가 암시되거나 한·미 동맹이 해체될 조짐이 보인다면 그때부터 문재인 정부는 협상을 중지하는 게 현명하다. 철수와 해체론이 나오는 순간 대한민국은 두 패로 갈려 증오하고 충돌하는, 정권이 감당하기 어려운 내분이 생길 수 있다. 자유 대한민국을 쇠락·소멸시켜 얻는 핵 문제의 해결은 아무 보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용과 동행한 서훈 국정원장은 엊그제 인터뷰에서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은 양보할 문제가 아니다. 안보에선 단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대통령도 나도 안보에선 보수”라고 말했다. 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이라면 참으로 다행이다. 문 대통령은 안보에 관한 한 국가조찬기도회 얘기들을 부담이 아니라 도움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전영기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chuny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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