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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Ⅶ.
너는 입맞춤으로 나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열 두 제가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 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22, 47~48)
브루투스의 동전
브루투스의 동전은 서양 고대사에서 일어났던 가장 충격적인 배신 사건을 이야기해 주는 동전이다. 기원전 44 년 일어난 한 암살 사건을 기념해 주조된 이 동전의 한 면에는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한 암살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다. 튀어나온 눈두덩과 묵직한 코, 굳게 다문 입 그리고 커다란 귀와 툭 튀어나온 목젖까지 전형적인 로마 장군의 모습이다.
동전의 다른 면에는 모자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단검이 새겨져 있다. 모자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로마인에게 주어지는 하사품으로 자유를 상징하며, 두 단검은 카이사르를 암살했다는 상징이다. 이 밑에 ‘EID MAR’ 이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는데, 이 문구는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일어난 기원전 44 년 3 월 15 일을 나타낸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을 대체할 새로운 집권체제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무찌른 후 권력과 명성을 한 몸에 얻었지만,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원로원 귀족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브루투스는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60여 명의 원로원 귀족과 함께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넣어 이 사건을 기념하는 동전을 주조했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왕을 신격화하지 않았으므로 살아 있는 사람을 동전에 새겨 넣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전에 통치자의 모습을 새겨 넣은 행위는 로마 공화정의 정신을 위해 독재 정치인 왕정을 용인한 셈이다. 실제로 수년 전 카이사르는 자신의 형상을 동전에 새겨 넣어 로마 원로원들이 그를 암살할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잘못된 관행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동전의 브루투스 형상 주위에는 ‘BRVT IMP L PLAET CEST’라는 라틴어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장은 ‘Brutus, imperator, lucius plaetorius cestianus’여기서 뒤에 등장하는 루키우스 플라이토리우스 케스티아누스는 이 동전을 생산한 노동자들을 관리한 주조 공증인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이 동전의 가치를 보장하는 표식인 셈이다. 맨 앞의 ‘브르투스 임페라토르’는 ‘군대 사령관, 브루투스’라는 뜻이다.
시저를 암살한 후 브루투스는 로마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도망친다. 그는 여기서 은으로 된 주화를 발행하고 자금과 용병을 모아 다시 로마로 입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2 년 후인 기원전 42 년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카이사르파 군인들에게 패한 후 브루투스는 자살한다.
이 동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기원전 60 년에 시작한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정치적으로 결탁해 로마 정치를 장악한다.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투에서 승리해 로마의 국경을 영국 해협과 라인 강까지 확장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다.
로마 원로원은 날로 세력이 커지는 카이사르를 로마로 소환해 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기원전 49 년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공격한다. 루비콘 강은 북쪽에 위치한 골 지방과 남쪽에 위치한 이탈리아 지방을 구분하는 국경이다. 로마 평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카이사르는 전쟁을 선포하고 3 년 만에 정권을 탈취해 공화정을 해산하고 제정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브루투스는 로마 원로원들과 함께 자신의 동지인 카이사르를 암살하려 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방자’라 불렀으며, 카이사르를 암살한다면 왕이 통치하는 독재의 위험으로부터 로마 공화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기원전 44 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평생 통치자임을 스스로 선포한 카이사르를 암살하자고 결의하기에 이른다.
카이사르는 암살되기 3 개월 전에 자신의 이미지를 로마 동전에 새겨 넣음으로 절대 권력자임을 선포한다. 기원전 44 년 3 월 15 일, 카이사르의 통치를 반대하는 로마 원로원들은 폼페이 극장에서 검투사 경기를 개최하고, 카이사르가 그곳을 지나려는 순간 원로원들은 그를 납치해 동편 현관에 위치한 방으로 데리고 간다. 브루투스를 포함한 원로원들은 그곳에서 카이사르를 스물세 번 이상 칼로 찔렀고, 그는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라틴어 et tu Brute 를 번역하면 ‘브루투스, 너마저’이다. 이 문장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브루투스에게 던진 말이다.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도록 만든 장본인은 영국의 문화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그는 그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카이사르가 죽기 전에 던진 말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대사를 사용했다. 그 이후 ‘에 투 브루테’는 서양 문명에서 친구나 가족과 같은 사람의 배신을 상징하는 문구가 됐다.
그럼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했던 브루투스는 왜 그를 배신하고 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남긴 마지막 말이 ‘ 에 투 부루테’가 아니라 그리스어 문장 ‘카이 수 테크논’ 즉 ‘내 아들아, 너마저’였다며,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사생아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를 다른 여자들보다 더 사랑했고 신뢰했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를 어릴 때부터 좋아하며 친자식처럼 여겼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나이 차이는 15 세 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마도 ‘카이 수 테크논’이라는 표현도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친밀감을 단적으로 표현한 외침일 가능성이 크다.
브루투스는 자신의 배신이 로마 공화정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사람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는 왕정이나 제국의 형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들이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강력히 반항했지만, 암살자들 사이에 있는 자신의 동지 브루투스를 보자마자 자포자기해서는 자신의 겉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에 투 브루테’라고 말한 뒤 순수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후대 작가들의 작품 주제로 자주 등장을 한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코키투스’라는 지옥에 감금된 장면이 등장한다. 단테는 지옥의 맨 밑바닥을 ‘통곡의 강’이라는 의미를 지닌 ‘코키투스’라 명명하였다.
지옥의 아홉 번째 단계인 이곳은 얼어붙은 강으로, 배신자들이 그 안에 몸을 담그고 목만 얼음 위로 내놓은 채 고통을 받는 장소다. 브루투스와 함께 ‘코키투스’에 감금된 자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다.
‘지옥 편’에는 배신이란 사랑과 신뢰를 저버리고 남을 속이는 행위라고 표현되어 있다.
단테는 이 지옥을 다시 넷으로 구분한다. 아담과 이브의 아들이자 자신의 동생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이름에서 따온 ‘카이나’, 조국을 배반해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파괴하게 만든 트로이 왕자의 이름을 빗댄 ‘안테노라’, 기원전 2 세기 마카베오 혁명 때 당시 자신의 장인이며 대제사장인 시모 마카베우스를 살해한 예리고 장군 프톨레미의 이름을 딴 ‘프톨로메아’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이름을 딴 ‘주데카’가 있다. 이곳은 바로 사탄이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탄은 세 개의 얼굴과 입을 가지고 있으며 입으로는 유다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다리를 씹고 있다. 왜 이들은 지옥의 맨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을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그리고 유다는 정말 영원한 저주의 대상일까?
유다와 반유대주의
유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 냥에 유대 산헤드린 지도자들에게 판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유다는 자신의 멘토이며,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다. 이 일로 유다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저주받은 인간이자 배신자의 상징이 됐다.
‘유다’라는 이름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고향 ‘가리옷’이라는 명칭을 붙여 그를 ‘가리옷 유다’라고 불렀다. 공관 복음서에 등장하는 열두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유다에게는 항상 ‘예수를 넘겨준 가리옷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카리옷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다는 악마이자 예수님을 배신할 인물로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이것은 시몬 가리옷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예수를 넘겨줄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유월절이 다가왔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축제일이며 이때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인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문에 구름 떼처럼 몰려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자신들을 로마 정치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줄 군사적, 정치적, 영웅이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외침을 빌라도를 비롯한 로마 군인들과 로마와 그냥 잘 지내기를 원했던 유대교의 제사장들이 반겼을 리 없다. 예수님은 3 년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느님 말씀의 선포를 위해서 일하셨으며 그리고 마지막에, 가족까지 버리고 자신과 동고동락해온 열두 명의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했다.
예수님은 이 만찬이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지막 식사가 될 것임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 날이면 자신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되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 개의 복음서는 이 장면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한참을 망설이다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기획한 사건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산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사실을 발설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를 마음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옆에 앉은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라는 눈짓을 보낸다.
그러자 요한이 예수님께 바짝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고는 빵조각을 적셔 시몬의 아들 가리옷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전에는 거의 언급된 적이 없는 제자이다. 복음사가들이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빵조각을 적시는 순간 이미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 그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갖게 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구절은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사탄은 신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매개체일 뿐 어떤 일을 독립적으로 도모하지 못한다.
구약성경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의 모습을 보면, 사탄을 욥을 시험하라는 신의 허락을 받았고,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사막에서 단식기도를 할 때 ‘성령’에 이끌려 사막에 가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제자들은 만찬 자리에 앉아 있는 가운데 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는 그날 밤 예수님을 은 30 냥에 팔아넘긴다.
몇 시간 후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고,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을 깊이 후회하며 제사장들에게 돌아가 돈을 돌려주려 합니다. 그들이 유다의 제안을 거절하자, 유다는 동전을 바닥에 내던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 먼저 목을 매 자살합니다.
왜 유다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유다는 200 년 동안 그리스도교에서 악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와 깊은 연관을 갖게 됩니다. 유다는 유대인들을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동료를 배신하고 돈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감행하는 인종의 상징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유대인의 상징이 되었고 유대인은 유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초래하는데 기여합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 그 사람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악을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지금은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악을 선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