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아프지 마
등에서 칭얼대던 손녀가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허리가 아파도 선잠 든 아이를 내려놓을 수 없어 서성이는데 문득, 잠든 딸애를 깰 때까지 업고 다니던 순이 아가씨 생각이 난다.
우리는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시댁에서 살았다. 시댁에는 지적장애가 있는 시누이가 있었다. 남편보다 세 살 아래인 그녀는 내가 ‘순이 아가씨’ 하고 부르면 수줍은 듯 볼이 빨개졌다. 나는 시내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하는 면사무소에 다녔는데, 어쩌다 버스를 놓치면 퇴근이 많이 늦어졌다. 성격이 급한 어머님이 화가 나셨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집 앞에 도착하면, 밖에서 서성거리던 그녀가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배가 아프다고 마루를 구르며 울어댔다. 어머님은 그녀가 꾀병을 부리는 줄 알고도 못 이기는 척 방 안으로 들어가시곤 했다.
나는 두 살 터울로 아들과 딸을 낳아 어머님께 맡기고 출근했다. 그때부터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가 그녀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어찌나 조카들을 귀애하는지, 낮잠을 자는 동안에 누군가 시끄럽게 할까 봐 방문 앞을 떠나지 않고 망을 보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에는 세탁기가 없어 냇가에서 빨래했다. 송악 강당골의 시원한 물줄기가 이어져 내려오는 작은 냇가였다. 여름철에 냇물에 손을 담그면 온몸이 서늘해 누구나 빨래하기를 즐겼으나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녀는 기저귀가 두 개만 나와도 냇가로 달려갔고 푸르죽죽하게 언 손으로 툭툭 털어 빨랫줄에 하얀 기저귀를 널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가을에 우리는 온양 읍내로 분가했다. 처음에는 매주 시댁에 가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방문횟수가 줄었다. 요일이나 날짜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날마다 대문 밖에 나가서 우리를 기다렸다. 햇볕에 그을려 빤질빤질하게 윤기가 도는 얼굴로 새언니와 조카들을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만 같다.
5년 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요양원에 들어가시자 그녀 혼자 시골집에 남겨졌다. 생전 처음 어머니와 헤어져 홀로 살게 된 것이다. 주말마다 찾아가 반찬도 만들어 놓고 목욕도 시켰지만, 그녀의 몰골은 갈수록 초췌해지고 성격도 점점 난폭해져 갔다.
어느 날 혼자 고향 집에 간 남편을 따라 그녀가 우리 집에 왔다. 남편은 내가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그녀를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낯선 환경에서 살게 되자 그녀는 유독 나에게 집착했다. 마트에 다녀오다가 거실 창문을 바라보면, 나갈 때 모습 그대로 창유리에 붙어 움직이지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목욕을 마치면 소파에 앉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잠들었다. 오래전 내가 생일에 선물한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나는 열 살 된 아이처럼 순수하게 나를 믿고 따르는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귀찮았다. 이제야 겨우 오랜 직장생활에서 놓여났는데, 그녀를 돌보는 일에 매이게 되면 어쩌나 하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하루하루가 힘에 부쳤다.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고 문화센터에도 갈 수 없어 점점 짜증이 났다. 그녀는 당뇨가 중해 이가 모두 빠졌는데, 틀니까지 집어 던지며 애를 먹였다. 무른 반찬을 따로 만들어야 하고, 덩치가 큰 그녀를 목욕시키는 일도 힘에 부쳤다. 그녀가 온 지 열 달 만에 나는 병이 나고 말았다. 밤새 열이 펄펄 끓었다. 병원에 갔더니 폐렴이라고 했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동안 몸은 아파도 마음은 너무나 홀가분했다. 입원하고 나흘이 지난 금요일에 퇴원할 수 있었지만, 의사에게 월요일까지 병원에 있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던 여의사는 빙긋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퇴원한 후에도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남편의 눈에도 내가 힘겨워 보였던지 그녀를 시설에 보내자고 했다.
그녀가 시설에 가기 전날, 나는 밤늦도록 뒤척이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그녀의 방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불은 꺼져 있는데 안에서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끼야’ ‘밥 잘 먹어야지’ ‘그러니까 언니가 아프지’라며 그녀가 토끼 인형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집을 떠나게 된 것이 마치 반찬 투정을 하고 나를 힘들게 한 자기 탓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던 그녀가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순간 죄를 지은 듯이 가슴이 움찔했다. 몸만 어른이지 정신 연령은 아직 어린애 같은 그녀를 놔두고, 입원 기간을 연장하며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던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내가 병이 난 것도 그녀를 돌보는 일이 힘에 부쳐서라기보다 그녀를 내 삶에서 밀어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새언니와 조카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차가운 냇물에 손을 담그고, 허리가 꺾이도록 등을 내어준 그녀. 나는 그 순도 높은 사랑을 고스란히 받고도 끝내 그녀를 밀어낸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제일 아끼는 토끼 인형을 나에게 주고 간 그녀를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뜨겁다.
그녀가 사는 시설은 전에 내가 자원봉사를 했던 곳이다. 그동안 기차도 타보지 못한 그녀는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어쩌다 집에 다니러 왔다가도 하룻밤 자고 나면 가고 싶다고 하니, 어느새 그곳에 정을 붙이고 지내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다시 아플까 봐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목욕 봉사를 마치고 나오다 돌아보면, 원생들이 창문에 붙어서 ‘엄마, 엄마’하고 떠나가는 우리를 애타게 불렀는데 그녀도 그렇게 지내는 것은 아닌지.
등에서 아이를 내려 소파에 눕히고, 그녀가 내게 주고 간 토끼 인형을 안겨준다. 잠결에도 인형을 꼭 끌어안는 아이를 보니, 토끼 인형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던 그녀의 천진스러운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코로나19 방역이 완화되어 지난 주말 오랜만에 면회 갔을 때 나를 꼭 껴안고 한참을 놓지 않던 순이 아가씨. 언제나 내 편이었던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