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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왜 여전히 필요한가
오늘날 우리는 짧고 빠른 콘텐츠에 익숙해졌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고, 수백 쪽짜리 고전소설을 굳이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강의에서는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문학의 가치가 더 분명해진다고 말합니다.
문학이 주는 것은 단순한 정보나 명제적 지식이 아닙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 ‘E=mc²이다’처럼 한 문장으로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이라면 굳이 소설 500쪽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학이 전달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감정에 관한 지식, 즉 말 몇 마디로 압축하기 어려운 비명제적 지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왜 사랑하고, 미워하고, 복수하고, 후회하고, 용서하는지를 우리는 등장인물의 삶을 오랫동안 따라가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 장편소설의 500쪽은 단순히 작가가 말을 길게 늘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인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수많은 사건과 관계를 통과해야만 독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감정과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 500쪽이라는 과정 자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 50쪽을 읽는 데 며칠이 걸리다가 어느 순간 나머지 수백 쪽을 단숨에 읽게 되는 경험도 여기서 나옵니다.
*한국 콘텐츠의 ‘복수’와 능력주의
강의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 복수 서사가 유난히 많다는 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생존주의·응보주의·능력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의 강한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라 보상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능력에 맞는 몫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이 강할수록, 누군가 부당하게 자신의 몫을 빼앗았다고 느낄 때 응보에 대한 욕망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능력주의와 응보주의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경쟁이 강하고 생존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잘못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정서 역시 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복수극은 단순히 악인을 통쾌하게 처벌하는 오락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공정·능력·보상·응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거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과 《범죄도시》의 차이
강의에서는 복수극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에서는 복수가 성공하지 않습니다. 특히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복수하려던 사람들이 서로를 파괴하면서 결국 ‘복수란 정말 나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따라서 여기서 복수는 단순한 쾌감의 대상이 아니라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됩니다.
반면 《범죄도시》 같은 작품에서는 악인을 잡고 응징하는 과정과 그 뒤의 통쾌함이 중요합니다. 공권력에 대한 판타지가 작동하고, 악을 응징하는 인물이 명확합니다.
두 작품 모두 응보를 다루지만 한쪽은 응보의 쾌감을 주고, 다른 한쪽은 응보가 과연 정당한가를 묻습니다.
이 차이가 바로 오랫동안 살아남는 이야기와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휘발되는 이야기와 살아남는 이야기
어떤 이야기는 당시에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금방 잊히고, 어떤 이야기는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계속 읽힙니다.
강의에서는 그 차이를 시의성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문제에 빠르게 반응하는 작품은 당시에는 강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사회현상이나 유행에만 의존한다면 시대가 바뀌었을 때 힘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래 살아남는 이야기는 시대와 호흡하면서도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립니다.
외로움, 사랑, 질투, 욕망, 죄책감, 복수, 두려움, 죽음 같은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전혀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만나 “외롭다”고 말하는 순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대와 경험은 달라도 감정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문학은 시의성을 넘어 인간의 기본 감정을 파고들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냅니다.
문학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
강의에서는 이를 미학의 **‘미적 인지주의’**와 연결합니다.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술을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험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과 다릅니다. 문학은 ‘너 왜 공부 안 하고 소설 읽어?’라는 질문에 시험에 나오는 정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합니다.
‘나는 왜 저 사람을 미워할까?’
‘나는 왜 복수하고 싶을까?’
‘나는 왜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까?’
‘저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만들어내고 독자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문학이 생산하는 지식입니다.
따라서 문학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지식, 더 구체적으로는 감정에 관한 지식을 생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예술 장르가 드물다는 것이 강의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왜 고전은 그렇게 긴가
《마담 보바리》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처럼 고전 장편소설은 300~500쪽을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로 보면 두 시간이면 되는데 왜 굳이 500쪽을 읽어야 하지?”
“한 장짜리 요약본으로 읽으면 안 될까?”
이 질문에 대한 강의의 답은 분명합니다.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다른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줄거리와 결론은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그렇게 요약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과 함께 수백 쪽을 이동하고, 그 사람이 선택하고 실패하고 후회하는 과정을 따라가야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감정이 형성됩니다.
감정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복잡한 맥락과 시간을 거쳐 생산되고 이해되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의 500쪽은 처음부터 500쪽을 채우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작가가 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최대한 정교하게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필요했던 분량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강의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정답을 알려주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내면을 이해하게 만드는 지식을 생산한다. 그래서 좋은 문학은 시대의 유행을 넘어 살아남으며, 고전의 수백 쪽은 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앞부분의 K-콘텐츠·복수·능력주의 이야기도 결국 이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좋은 작품은 단순히 ‘복수에 성공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는 복수를 원하는가?”, “그 복수는 정당한가?”, “공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와 관객에게 되돌려 줍니다.
바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힘, 이것이 이 강의에서 말하는 문학의 중요한 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강의의 결론은 문학이 감정과 내면을 이해하게 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으며, 그 주장이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마담 보바리》와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생성 — 창작자가 지켜야 할 자기만의 힘
여기서 말하는 야생성은 거칠게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다른 사람의 기준이나 공식에 길들여지지 않은, 창작자 자신의 고유한 감각과 충동에 가깝습니다.
창작을 배우다 보면 ‘좋은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한다’, ‘요즘 독자는 이런 걸 좋아한다’, ‘이렇게 써야 평가받는다’ 같은 규칙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기술을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작품이 반듯하고 능숙해지는 대신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상하고 독특한 부분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창작자는 기술을 배우면서도 자기 안의 설명하기 어려운 관심, 집착, 감각을 없애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작품의 개성과 생명력을 만드는 야생성입니다.
*합평 — 작품을 고치는 시간이면서 야생성을 시험하는 시간
합평은 여러 사람이 한 작품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창작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부분은 이상하다”, “이건 빼는 게 좋겠다”, “이렇게 고치는 게 자연스럽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전부 받아들이면 작품은 점점 평균적인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모두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바로 그 부분이 사실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야생성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평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조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끝까지 지킬지를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합평은 작품을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작품을 다시 보고 내 작품에서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두 개념은 연결됩니다.
야생성 → ‘나만이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합평 →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
그래서 창작자는 타인의 비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어야 하지만, 모든 비판에 자신을 맞추지 않을 만큼 고집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부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뒤에서 나온 **“문학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와도 연결됩니다. 문학이 시대의 유행이나 독자의 즉각적인 요구만 따라간다면 빠르게 소비될 수 있지만, 작가 고유의 야생성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끝까지 붙들 때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AI가 쓴 글은 대체로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논리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문장이 매끄럽습니다. 무엇을 물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매끄러움’이 한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글을 쓰면서 망설이거나, 생각이 막히거나, 자기 생각과 충돌하면서 문장을 고쳐 나가는 과정이 글 밖으로 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쓴 글은 때로 어설프고 울퉁불퉁합니다.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논리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설픔 속에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세련되지는 않아도 **‘이 사람만이 이렇게 쓸 수 있었겠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부분을 아까 이야기했던 야생성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신형철 교수가 말하는 글쓰기의 야생성은 완벽하게 훈련되고 정돈된 문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각을 자기 힘으로 붙잡아 언어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AI가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문장은 이미 길이 잘 닦여 있는 문장이고, 인간의 어설픈 글은 아직 길이 없는 곳을 헤매면서 만들어낸 문장인 셈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설픔 자체가 훌륭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설픈 글이라고 모두 좋은 글은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 어설픔이 자기 생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어설픔인가 하는 것입니다.
합평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합평은 그 어설픔을 없애서 모두 비슷하게 매끄러운 글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글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고유한 감각과 가능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더 정확한 언어로 발전시키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결국 이 대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에 인간의 글이 지켜야 할 것은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생각에 도달하기까지의 흔적이다.”
*도덕과 윤리
여기서 도덕은 대체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거짓말은 나쁘다”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처럼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윤리는 그렇게 간단히 정답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문학은 흔히 도덕적 정답을 전달하기보다는 윤리적 질문을 발생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죄와 벌》을 예로 들면 아주 분명합니다.
“살인은 나쁘다”는 것은 도덕적 명제입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의 머릿속과 삶을 수백 페이지 동안 따라가다 보면 질문이 복잡해집니다.
인간은 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가? 죄를 지은 인간을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같은가?
여기서부터 문학의 윤리적 영역이 시작됩니다.
*명제적과 비명제적
**명제적(propositional)**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인은 옳지 않다.”
“복수는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인간은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생각들입니다.
그런데 문학에는 이런 문장으로 완전히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명제적(non-propositional)인 것입니다.
가령 《죄와 벌》을 다 읽고 나서 느끼는 라스콜니코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미워하면서도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서도 그의 살인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 모순된 상태 자체가 작품을 읽으며 얻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것을 “《죄와 벌》의 교훈은 살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정리하는 순간 작품의 엄청난 부분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네 개념이 연결됩니다
도덕 ↔ 명제적
옳고 그름을 비교적 명확한 문장과 규칙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윤리 ↔ 비명제적
구체적인 인간과 상황을 마주하면서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를 경험하게 합니다.
물론 도덕=명제, 윤리=비명제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신형철 교수의 문학론을 이해하는 틀로는 이렇게 대비하면 상당히 잘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까 말씀하신 AI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AI는 명제적인 것을 아주 능숙하게 정리합니다. 작품의 주제, 주장, 교훈, 논리 등을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 중에는 명제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이 있습니다. 인물에게 느끼는 양가감정,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 문장의 리듬, 침묵, 망설임 같은 것들이죠.

첫댓글 저는 합평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합평시간에 많은 의견이 오고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제 글을 읽고 다름과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는 분들이 늘 고마웠습니다. 저는 흥미롭고 좋은 글에 오히려 할 말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다소 엉뚱한글도 시도해볼 수 있었습니다. 한복용선생님 수필수업의 좋은 점이 바로 이 합평에 있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