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빛 나날들> -양승국신부- 돌아보니 제 "신앙생활"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평탄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가파른 오르막이나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를 기어갈 때도 있지요. 지난 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 희망과 설렘으로만 가득 찼던 맑은 날이 있었는가 하면, 답답함과 좌절과 쓰라림뿐이었던 회색빛깔의 나날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와 이웃들 앞에 떳떳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절실하고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으로 가슴 뛰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하는가? 이게 도대체 뭔가?"하며 막막해하던 시절도 많았습니다. 제 신앙여정 안에서 참으로 피하고 싶었던 불행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들이었지요. 어떤 체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떠올리기조차 싫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불행했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이 비록 육체적으로 괴로웠지만 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병고의 십자가를 지고 가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평생 나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병고를 모른척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고통 당하시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연민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거듭되는 실패 속에 헤맬 때도 우리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외면한다할지라도 예수님 그분만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끝까지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 안에 계심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노화마저 거부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고목의 등걸에서 연녹색 푸른 싹이 돋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마저도 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마저 물리치셨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상지종신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정상적인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들에게 자신의 깨끗한 몸을 보여 줄 날만을 고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억눌렀던 온갖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복음(기쁜 소식) 자체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머무를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멍에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사제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제에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곧 나병의 치유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었는지, 그들은 자신이 온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사제들에게 달려만 갔습니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똑같이 나병을 앓았고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께로, 다른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로 향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서로의 길이 갈립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를 벗겨 준 해방자에게로 달려감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참 해방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해방자에게 멀어집니다. 한 순간의 일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지금까지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굴레를 벗어버렸다는 해방의 기쁨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이 해방의 기쁨을 온 몸으로 체험했기에 더 완전한 해방, 총체적인 해방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머리로서는 명확하게 대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결단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 충만한 내일을 향해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너는 과연 어디로 달려갈 것이냐?" "너는 과연 지금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느냐?" 오늘 주님께서 던지는 화두입니다.
로또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이 계셨지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인생은 한방이야.”를 읊조리면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을 이 형제님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 역시 일반 사람들의 취미 활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만약에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글쎄 시험을 빵점 맞아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났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의 시험지를 받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적어보시오.”
이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나의 행동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집니다.
먼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도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으며, 다시금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그래서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신의 치유가 마치 받을 빚을 받은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받은 이방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임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체의 치유만이 아닌, 영혼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누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바로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이방인이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 때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을까요?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합시다. E.T.라도 감사해요 - 임영인 신부- 한센병을 겪은 것처럼 코가 없고, 한쪽 눈과 눈썹도 없고, 입술이 뒤틀린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E.T.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채규철 선생님입니다. ‘E.T.할아버지’라는 말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랍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덴마크에 유학 가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 돌아온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에서 차가 굴러 폭발하면서 전신 3도 화상을 당해 얼굴이 도깨비처럼 변했습니다. 한창 나이인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2년 뒤에는 아내마저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다방에서 거지 취급을 당하고 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러워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살리신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주님 뜻에 순종하며 살자.’ 그 후 채규철 선생님의 삶은 변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고름이 나던 머리에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가려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귀가 없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남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입술이 없어졌어도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청십자 운동을 하고, 간질 환자들을 위해 활동 했으며, 86년에는 아이들을 위해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의 전도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 -조명언신부-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돈이 많았지만,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런 그가 어느날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목수를 불러 집을 좀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부부가 3개월쯤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최상의 건축재료와 초일류 목수를 총동원해 멋진 집을 지어주세요. 건축비를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주인이 여행을 떠나니, 목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는 싸구려 건축자재와 형편없는 인부를 동원해서 날림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건물을 다 지었어요 구멍이 나고 금이 간 곳이 생겼지요. 이런 부분은 페인트칠로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드디어 부탁을 했던 부자가 돌아왔고, 목수는 부자에게 열쇠를 주며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집을 지었어요." 그러자 부자가 목수에게 그 열쇠를 다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은 내가 당신 가족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목수는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요.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집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엉터리로 건물을 지었으니 말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요. 즉,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낭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은혜도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가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그들 중에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이란 불치의 병으로 뭇사람과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외를 당했겠지요.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서 예수님께 외치지요.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불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나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들은 모두 깨끗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치유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은혜도 모르는 짓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율법에는 나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였던 자신들과 접촉한 예수님은 이미 부정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부정해진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 자신이 또 다시 부정해 질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병이 나기 전의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지요. 이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지만, 우리 자신의 편리와 이해타산으로 인해 다시금 멀어지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홉 명의 유대인처럼 단순히 병의 치료만 될 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앞서 그 가난한 목수처럼 나에게 돌아올 것도 그냥 차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이 치유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인임을 고백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이인옥-
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참된 치유 -서현승 신부-
미국의 한 언론사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첨 이후의 삶을 조사해봤더니,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금을 받은 이후에 거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아주 행복하고 건실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복권 당첨금의 상당 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고나서도 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 결국, 육체적인 나병의 치유가 그들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죠.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 간절히 바랐던 것이 돈 자체였고 갑자기 행운의 돈이 생기자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병환자 아홉 사람도 육체의 치유를 통해 그들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만 병을 치유해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께 감사드리고자 찾아와서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이제는 몸만이 아니라 나병환자로서 살았던 삶까지 치유를 받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르십니다. 마침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된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아홉은 몸은 깨끗해졌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치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혼의 나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머지 주어진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도 부족한 작은 것 때문에,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감사의 정을 잊지 않는 매일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이강건 신부-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
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 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열 명의 문둥병자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가 17:11-19]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는 이상하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천시해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게 공노가 되는 것처럼 멀리하는 처지였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사마리아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인 불행에 처하게 되면, 서로가 "사람이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문둥병이라는 비극 속에서 서로가 고통받는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 유대인이라든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구별을 잊어버리고 함께 같은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서로도 하느님 앞에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타인을 멸시하거나 할 수 없고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손을 잡고 살 수 있으며, 진정한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이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가운데 이 장면에서처럼 인간의 배은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고 못견디게 부르짖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사제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낫게 해 주셨다. 그런데 자신들이 평생의 절망이요,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과 같은 그 무서운 문둥병에서 해방시켜주신 은혜를 모두 받았으나, 은혜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멸시 받아왔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은혜 받은 적이 없는가? 받았다면 얼마나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만큼 있는가? 누구는 그럴 것이다. 내가 하느님 덕본 것이 무엇이 있기에 그분에게 그토록 감사할 것이 있는가?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여유있게 살아가는데, 그분의 도움도, 그분께 감사할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그러한 자신이 자신 만만한 존재인가? 자신의 살아있는 목숨부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장재봉 신부- 하느님의 자비가 풍요로우심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편애’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오늘 치유를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가운데 아홉 명은 아마도 사제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러주셨으니까요. 열에 아홉은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우위입니다. 열 가운데 아홉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고 정의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잣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잣대가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합니다. 하지만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일이라면 강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홀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그리고 무엇을 감사하셨는지요? 그분께 엎드려 감사할 것이 지금, 이렇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우리들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지요.
수험생을 위한 기도
-임종심-
우리 성당 근처에 입시학원으로 유명한 종로학원이 있어서인지 주일날 청년미사에 수험생들이 많이 온다. 본당 신부님과 종로학원에서 가르치는 두 분 신자 선생님의 도움으로 4년째 수험생을 보살피고 있다. 고해성사도 보고, 냉담하는 수험생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봄에는 삼겹살 파티도 한다. 매년 수능 전날 미사에서 수험생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고 십자가나 기적의 패를 목에 걸어준다. 미사 후에는 구역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수험생들과 함께 나누며 1년 내내 수능이라는 굴레에서 마음 졸이고 힘들어한 그들을 격려한다. 시험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떠나겠지만 결코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일 수능을 치를 수험생들의 마음이 무척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지금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침착하게 시험 잘 치르고 그동안 노력한 모든 수고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지혜라는 큰 복을 주신 주님! 모든 수험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수능을 준비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장차 미래의 큰 일꾼이 될 수험생들이 수능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볕돋?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감사하는 삶 -강영구신부-
그들 중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5-18)
사랑하는 예수님,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까지 나음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있습니다.
감사는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잠을 깨우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곱게 물든 나무 잎과 아름다운 국화 때문에 감사하고, 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불평하고, 밝아오는 새날을 어떻게 살까 염려하고 걱정하며 투덜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귀찮아하고, 떨어져 수북이 쌓이는 낙엽 때문에 투덜대고, 국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불평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투덜대면 사는 것이 괴롭고 불행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인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초대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一明)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