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이야기 4
가을밤의 소란
김재희
가을비 치고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것 같다. 애써 가꿔 놓은 곡식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생물들의 피부가 온통 눅눅하고 끈적거린다. 흙 속에도 물이 흥건해서 호미로 파면 그 자리에 그대로 물이 고인다. 씨앗을 넣고 흙을 덮으려면 질컥한 흙이 그냥 호미에 눌러붙어 손으로 그 흙을 긁어내야만 되니 아예 호미보다는 손이 더 나을 정도다.
저녁을 먹은 후의 포만감에 텔레비전 화면이 유난히 느긋하게 보이는 시간이다. 방안까지 차오르는 습기를 제거할 겸 보일러를 틀어 놓고 뜨듯한 방바닥에 누워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교장선생님이 뭔가 의논할 게 있다고 오셨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누고는 두 분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다소곳이 현관 문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그때 귀뚜라미 한 마리가 폴짝 뛰어 들어왔다. 그 뛰는 모양이 참 귀엽고 앙증맞은 데다 청량한 울음소리를 가까이서 듣겠구나 싶은 마음에 반가움이 앞섰다. 그런데 그 마음도 잠시 저 귀뚜라미를 밖으로 다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언젠가 집안에 들어온 귀뚜라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나가지 말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내 바람을 들어 주었던지 그 귀뚜라미는 나가지 않고 며칠을 울어 주었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으로 마음이 풍요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아주 힘겨워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제자리를 잃어버린 귀뚜라미가 가여워서 밖으로 나가기를 원했지만 길을 잃었는지 풀 냄새를 잃었는지 날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던 소리가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나갔는지, 아니면 어느 구석에서 밤이슬을 그리다 죽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애써 밖으로 내보내려 쫓아 보았지만 그 귀뚜라미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면서 더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손으로는 안 되겠기에 좀 더 큰 물건을 사용해 볼 양으로 출입문 앞에 있던 발수건을 드는 순간,
" 엄마얏 ! "
하고는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그 수건 밑에는 나무젓가락만 한 커다란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놀라서 허둥대는 모습이 어디 곱던가. 악을 쓰면서 사색이 된 채 발을 방방거렸으니 그 모습이 어땠을까. 그것도 어려운 교장 선생님 앞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녁때 파 씨를 심으려고 나가면서 문을 조금 열어 놓았을 때 물이 흥건한 습기를 견디지 못한 지렁이가 기어 들어와 보송보송한 수건 밑에서 몸을 말리고 있었던가 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발 씻고 물기를 닦으려고 그 수건 위에서 몇 번 질겅질겅 밟았던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발이 근질거려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 애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지렁이가 온전할까 하는 생각에 자꾸 마음이 불편해졌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 발놀림으로 인해 어쩌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작은 생명은 생과 사를 다투는데 나는 그저 징그럽다는 생각만으로 그 호들갑을 떨었던가. 귀뚜라미와 지렁이가 비록 생김새는 다를망정 생명체로 태어나 한 생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이거늘, 어느 건 귀엽고, 어느 건 징그럽다 규정하는 것은 참 묘하다. 이것도 다 생각 나름일 터인데.
오래된 화분의 식물이 시들해질 때 그 화분에 지렁이를 넣어 주면 지력이 화복된다. 흙 속을 돌아다니며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흙 속의 공기를 유통시키며 그가 배설한 분비물은 식물의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렁이를 아주 귀한 생명체로 여긴다는데 그게 징그럽다고 이리 소란을 피운 나는 아무래도 흙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못 되나 보다. 자투리 땅에 조금씩 가꾸는 채소를 놓고 반 농부나 되는 척했던 일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 눈에 보이는 수확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싹 틔우고 키워주는 흙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지렁이까지도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지닌 자만이 진정한 농부가 아니랴.
제발 그 지렁이가 아무 탈 없이 살아 주고 그 난리 통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귀뚜라미도 이슬 가득한 풀잎 위에서 한 철 멋지게 살아가면 좋겠다.
첫댓글 무릇 아무리 작은 생명체들도 다 필요에의해서 세상에 존재 한다고 하지요 그들은 조그맣고 힘이 없으니그들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떼어 내곤 하지요 지렁이. 달팽이. 거미등 그들은 힘이 없으니 생긴 모습만으로 피하도록 하나봐요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무해한 애들인데도요 지렁이 보고놀라서 소리치는 광경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나네요 가슴이 두근 거려서 그날밤 편히 자지 못했을거 같아요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합니다.
달라졌다면, 지금은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