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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룡(禹伏龍) 연관 실록(實錄) 기록(記錄)(2)
[8]선조실록 89권, 선조 30년 6월 18일 정축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중전의 강화도 피난과 각종 현안 문제를 의논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有司堂上)인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행 대호군(行大護軍)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는데, 동부승지 윤돈(尹暾), 기사관 송석경(宋錫慶),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허적(許𥛚), 기사관 이지완(李志完), 기사관 정홍익(鄭弘翼)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가 이러하여 마 도독(麻都督)과 양 경리(楊經理)가 올 예정이다. 그러나 중국군이 나오더라도 적을 꼭 토벌한다고 기약하기 어렵고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니,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마 도독과 양 경리가 나오기 전에 중전(中殿)을 피난시키고 싶은데 자세히 헤아려 결정하라."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동정을 중국에서 모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중국인들이 모르리라고 생각해서 그러겠는가마는, 소아배(小兒輩)들이 모여 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저 적들은 모두 10만인데 양호(兩湖) 지방을 유린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 총병과 양 총병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전에 조 총병(祖總兵)이 피해 돌아올 때에 평양에서 하룻만에 가산(嘉山)까지 도망쳤으니 중국군 역시 믿을 것이 못된다. 양 총병의 군정(軍丁) 역시 난병(亂兵)이 되어 마침내 조승훈이 했던 것처럼 우리 나라에 허물을 돌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마 도독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달자(㺚子)로서 남병(南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게 되면 필시 난처한 일이 많을 것이다. 양 총병이 남원(南原)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도 거짓말로 반드시 지킬 리가 없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만약 허홍기(許弘紀)의 말대로라면 적의 큰 세력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병(遼兵)은 기계(器械)가 없으니 어떻게 적을 막겠는가? 전에 황응양(黃應陽)이 조롱하기를, 양원(楊元)이 평소 왜적과 싸우려 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필시 겁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신과 김명원이 전에 중국군의 정상을 잘 알게 되었는데, 서로 미루면서 추격해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가 반드시 죽을 가운데에서 살아나겠다는 마음으로 힘껏 싸워 결판을 내는 것 외에는 달리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적이 만약 지구전으로 나와 양식이 떨어지면 매우 어렵게 되니, 오직 나아가 싸우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위에서 만약 경동(輕動)하면 성안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동요할 것이니, 매우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불가하다는 말인가. 필경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형세로 보건대 서쪽 지방이 먼저 궤멸될 걱정이 있습니다. 중국군이 나올 뿐만 아니라 사명(使命) 역시 많아서 식량을 대기가 매우 어려우니 어떻게 지탱하겠습니까. 강화(江華)로 피난하면 형세상 편리할 듯합니다만 인심이 동요될까 걱정입니다. 헤아려서 조처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길게 탄식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강화로 피난나가게 하고 싶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결정하지 못하겠다. 내전(內殿)을 좋은 곳으로 피난시키고 싶은데 나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수병이 나오고 장관(將官)이 많이 도착하면 강화 역시 어찌 완전한 땅이 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작은 배에 짐을 많이 실은 것과 같아서 반드시 물력이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뒷날의 계책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으니, 강화 등지에서 보장(保障)할 형세를 반드시 먼저 정하여야 합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중국의 식량을 강화로 운반하니, 이곳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지역입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심우정(沈友正)을 못잊고 있으니 이 사람을 다시 부사(府使)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식량을 쌓아둘 창고를 지금 짓게 하고 있는데, 김덕함(金德諴)과 변이중(邊以中)이 그 일을 주관하고 있으나 잘 주선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심우정은 적임자입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는데, 윤두수 역시 그가 성(城)을 많이 쌓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민심만 얻은 것이 아니라 또한 나라 일을 잘 해낸 것입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이문욱(李文彧)이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조국에 돌아오려 할 것입니다. 통사(通事) 박우춘(朴遇春)이 한어(漢語)와 왜어(倭語)에 능하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불러오게 하면 매우 좋겠습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바로 그날 전교하신 뜻이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다시 사세를 살펴보건대 십분 자세히 상의하여 처리해야 마땅합니다. 중국인들이 항상 우리 나라 사람은 근본(根本)이 굳지 않다고 하는데, 이제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말을 지어낸다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반드시 탁마(琢磨)하고 계교(計較)하여 형세를 보아가며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급박한 환란이 없는데 먼저 스스로 동요하는 것은 소신의 뜻에도 난처하게 여겨집니다. 오늘날 계책을 세울 때 밖으로 적을 방수(防守)하는 것만 중요할 뿐 아니라 안으로 중국인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는 것 또한 급선무입니다. 이제 중국 장수가 처음 나오는 때를 당하여 거조(擧措)를 신중히 하지 않다가 저들이 만약 우리 나라에 대해, 중국 장사(將士)들은 전지(戰地)에 두고 자신들만 화를 피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름지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아주 불편해 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좌우가 한동안 모두 조용히 있었다. 성룡이 아뢰기를,
"오늘은 마땅히 북병(北兵)을 호궤(犒饋)해야 하는데, 소신과 노직이 마침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군병이 이미 모였으니, 소신은 나가지 못하더라도 노직을 먼저 나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가서 호궤하라."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마땅히 상교(上敎)로써 유시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유시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역시 도감의 제조이니 나가서 호궤하라. 그리고 ‘중국군들도 고생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우리 나라 시람이니 홀로 편안히 쉬어서는 안된다. 공이 있으면 마땅히 중한 상을 주겠다.’는 뜻으로 하라."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오유충(吳惟忠)의 군사가 양원(楊元)의 군사보다 나은 듯합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요병(遼兵)이 믿는 것은 단검(短劍) 뿐이니 이기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전에 우복룡(禹伏龍)을 보았더니 ‘안동(安東)에 있는 식량으로 조금 지공할 수는 있는 형세이다.’고 하였습니다. 오 총병은 그곳에 주둔하게 하고 마 도독(馬都督)은 충주(忠州)로 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마 도독의 군사는 숫자가 많아서 충주에 합쳐 주둔케 할 수 없는데, 청주(淸州)로 나누어 주둔케 한다면 지탱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경상좌도가 위급하니, 윤두수가 아뢴 대로 오 총병의 군사는 안동에 주둔하게 하고 마도독의 군사는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및 공주(公州)에 나누어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노직은 아뢰기를,
"적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중로(中路)가 텅 비게 될까 가장 염려됩니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의 식량이 강화도에 도착되더라도 그후 전수(轉輸)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번에 적들이 대거 일어날 계획인데 그들이 오는 것이 반드시 한 길로만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전라우도(全羅右道)로 나오면 매우 염려가 되는데, 이는 앞뒤로 적을 맞는 형세입니다."
하고, 두수는 아뢰기를,
"진도(珍島)는 가장 긴요한 지역인데 지금은 탕패하여 백성이 유산(流散)되었으므로 지탱할 수가 없으니, 문신(文臣)으로 수령을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영경이 아뢰기를,
"어제 양 경리(楊經理)의 차관(差官)이 신을 보고자 하기에, 신이 가서 보니 ‘양 경리의 군량 대미(大米) 20만 석이 이미 여순(旅順)에 도착하였는데 장 참의(張參議)가 양식 운반하는 일로 내려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통찰(統察)하는 자는 양 경리이고 장 참의는 관찰사(觀察使)와 같습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선원(船員)들에게 비록 선가(船價)는 주지 못하더라도 양식은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으레 훔쳐 먹고는 물을 부어놓기 때문에 쌀이 많이 부패합니다. 만약 중국 양식 역시 그렇게 되면 미안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호군(犒軍)하는 일로 먼저 나가고 노직도 따라 나갔다. 응남이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편치 못하시니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어와 진찰하더라도 별로 살필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부은 곳이 혹시 상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요즈음 더위에 무척 괴로왔고 풍기(風氣)가 불순했는데 종일 옹색한 곳에 임어하셨다가 밤이 깊어서야 환궁하시면 많이 상하게 될까 염려되니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형조에는 별로 죄수가 없습니다. 의금부에서 결안(結案)한 죄인 김산중(金山重)은 죄가 아주 무거운데 장(杖)을 많이 받지 않았으므로 가둬 두었다고는 해도 도망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속히 전형(典刑)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오시(午時)에 인대(引對)를 파하였다.
[9]선조실록 115권, 선조 32년 7월 24일 신미 8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윤두수·한술·강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두수(尹斗壽)【*】 를 영의정으로, 한술(韓述)을 장례원 판결사로, 강연(姜綖)을 군기시 정으로, 경섬(慶暹)과 권경우(權慶祐)를 사헌부 장령으로, 유인길(柳寅吉)을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송석경(宋錫慶)을 사간원 헌납으로, 남탁(南晫)을 사간원 정언으로, 우복룡(禹伏龍)을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안창(安昶)【**】 을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삼았다.
【*성품이 본래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겉으로는 관후한 것 같으나 내심은 실상 음험하여 남을 해쳤다. 기축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역적의 변을 기회로 흉억(胸臆)을 자행하여 선류(善類)를 모함하였는데 그의 도당인 정철(鄭澈)·홍성민(洪聖民)·이해수(李海壽) 등과 더불어 밤낮으로 획책하여 일망타진할 흉계를 꾸몄다. 효행과 절의로 당시 청류(淸流)의 추복(推服)을 받은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 또 정철의 간사함을 항상 논척하였는데, 이 때문에 두수 등이 몹시 질시하며 죄를 얽어 만들어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두수는 남몰래 간원(諫院)에 있는 동료 및 같은 도당을 사주하여 번갈아 소를 올려 논박하게 하여 끝내는 영경을 옥중에서 국문을 받다가 죽게 하였다. 그리고는 뒤이어 당시의 유명한 선비들도 싸잡아 혹은 신문하고 혹은 귀양보내면서 그 흉악한 짓을 다하였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그 기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비행을 말하지 못하였다. 임진란 때에는 육경(六卿)에서 우상(右相)으로 뛰어 올랐는데,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충정(忠貞)의 절의를 바쳐 당시의 어려움을 구제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구습의 악행을 자행하면서 날로 사당(私黨)을 꾸미고 묵은 유감을 푸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방종하여 부정을 자행하면서도 조금도 꺼리는 일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 사람이 침을 뱉으면서 더럽게 여기게 되었다. 갑오년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로 3도(道)의 여러 진(鎭)을 전제(專制)하게 되었는데, 거제(巨濟)의 전투에서 이미 임기책응(臨機策應)하여 흉봉을 막지 못하더니 급기야 패전하고 나서 도리어 제장(諸將)의 허위 보고를 가지고 그대로 치계(馳啓)함으로써 기망하는 일을 많이 행하였으므로 남중(南中)이 모두 분개하며 그 고기를 씹어 먹고자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
【**사람됨이 교만 방자하여 행검(行檢)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으로 유격(遊擊) 모국기(茅國器)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중국 장수를 따라 성주(星州)·합천(陜川)·고령(高靈) 등 고을에 주둔하면서 사자(士子)들이 모은 곡식을 취하여 자기의 공로로 삼고는 마치 자신이 지휘하여 곡식을 모은 것처럼 유격에게 속여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유격으로 하여금 조정에 자문을 보내게 함으로써 군자 부정(軍資副正)으로 승진까지 되었다가 바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니, 그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이와 같았다. 】
[10]선조실록 122권, 선조 33년 2월 25일 기해 2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체찰사 이항복이 연해 지역을 순찰한 후 수군·진상·공물 문제와 수령들의 실적에 대해서 아뢰다
체찰사(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신이 연해의 여러 고을을 순찰하였습니다. 한산(韓山)에서 전라도의 지경으로 들어가니 주사(舟師)에 소속된 각 고을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수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울면서 호소하였습니다. 모두들 ‘당초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명을 내리기를 「주사에 소속된 고을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면의 혜택을 주겠다. 」고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각자 기뻐하면서 「주사의 역(役)이 매우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사세로 헤아려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믿고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주사의 역 이외의 다른 고역(苦役)은 일체 견감시켜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에 나아가는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안정되어 방해(防海)에 전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주사가 격군(格軍)을 정제하여 바다로 나간 지가 이미 한 철이 넘었는데도 실지로 여러 가지 조항의 고역을 하나도 견감시켜준 것이 없다. 똑같이 한 나라의 백성인데 연해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유독 주사의 고역을 받고 있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원민(怨民)들의 실정이요, 비통한 말이었습니다. 잘못된 정사를 두루 물어서 만에 하나라도 구제할 방법을 모색하여 보았습니다만, 전해 오는 구규(舊規)가 그러하여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저 문부(文簿)를 조사하면서 탄식만 할 뿐 감히 변경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좀 변통시켜도 될 것이 세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청어(靑魚)의 진상(進上)과 각사(各司)의 긴요하지 않은 공물(貢物)과 조운선(漕運船)이 파선되었을 경우 연해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징수하게 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를 견감하고 징수하지 말 것을 아울러 참작하여 시행하소서.
신이 조정에서 떠나올 적에 탑전(榻前)에서 직접 받든 전교 가운데 관사(官事)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뽑아 발탁하여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충청도 경계에 들어가면서부터 다방면으로 수령의 정적(政績)을 물어보았으나 너무 빨리 지났기 때문에 그 실상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김순명(金順命), 충주 판관(忠州判官) 김입신(金立信), 대흥 현감(大興縣監) 이질수(李質粹), 태안 군수(泰安郡守) 이광영(李光英)은 모두 정사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소문만 들었을 뿐 그 실상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목도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남포 현감(藍浦絃監) 민형(閔泂)은 염간(廉簡)한 정사를 숭상하여 조처를 마땅하게 시행하고 있었고,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성헌(金聲憲)은 군사를 조발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계책을 모두 마땅하게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부임한 지가 얼마 안 되는데 처음에는 잘 하다가도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니 한두 가지 정사를 새롭게 한다고 잘 다스리는 관리로 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은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에 각각 조리(條理)가 있어서 일이 있을 경우 백성들이 기꺼이 달려오며 공무(公務)에 지성을 다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말세의 수령으로 잘 다스린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보면 그 규법(規法)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백성을 아끼는 데만 전념할 뿐 공사(公事)는 헤아리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서 소요스럽게 되지 않도록 힘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 성문(聲聞)을 밖에서 들으면 헛된 예찬이 대단하지만 막상 그 실상을 들어가서 관찰하여 보면 정사에 아무런 공효가 없는 자도 있습니다. 또 명성을 과장하는 데에만 지나쳐 백성들의 고통은 구휼하지 않고 눈앞의 것만을 취판(取辦)하느라 가혹하게 일을 시키기 때문에 백성들은 노고에 시달려 걱정하고 관의 일은 날로 퇴패되게 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폐단은 예로부터 완전히 없게 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복룡은 공무를 봉행하는데 힘쓰고 백성을 구휼하는 것도 잘하였으니, 이것은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수령은 각별히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면시키소서.
회덕 현감(懷德縣監) 이담(李淡)은 도임한 이후 자봉(自奉)은 매우 간략하게 하고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였으니, 본 고을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이 사람의 힘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복룡은 가자(加資)하라. 기타 수령들에 대해서는 이조(吏曹)에서 수령이 될 만한 적격자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이런 사람들을 치부(置簿)하여 두었다가 승직(陞職)시킬 자리가 나면 서용하도록 하라고 이조에 이르라."
하였다.
[11]선조실록 122권, 선조 33년 2월 27일 신축 1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정언 안극효가 홍주 목사 우복룡의 가자를 철회하고 장연 현감 유여휘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다
정언 안극효(安克孝)가 와서 아뢰기를,
"작상(爵賞)은 임금의 대병(大柄)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중가(重加)를 어찌 외람되이 제수하여 요행을 바라는 문을 열 수가 있겠습니까. 물정이 모두 온편치 못하게 여기고 있으니 개정하소서.
장연 현감(長淵縣監) 유여휘(劉汝彙)는 성품이 본디 탐학하여 도임한 이후 오로지 침탈하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이 머지 않은 곳에 있는데 관고(官庫)의 물건을 공공연히 실어가므로 백성들이 더욱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복룡을 가자(加資)하여 포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유여휘의 범죄는 별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백성과 직접 접하여 다스리는 중임(重任)을 어떻게 경솔히 파직시킬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느니다."
하였다.
[12]선조실록 126권, 선조 33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사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 의정부 좌의정(四道都體察使兼都元帥議政府左議政) 이항복(李恒福)이 남방에서 올라왔다. 상이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했는데 동부승지 민중남(閔中男), 가주서(假注書) 변응벽(邊應壁), 기사관(記事官)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라·충청 두 도를 순심(巡審)하였으나 경상도는 소명(召命)이 계셨으므로 미처 순심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주사(舟師)를 보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에 이순신에게 있을 적에 보았는데, 그때엔 배의 수효는 많았으나 병사의 수가 부족하여 격군(格軍)을 충정한 배가 많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누어 배치된 것이 일정한 수효가 있고 격군의 충정도 잘 정제되어 있는 듯하였습니다만, 원수(元數)가 단약한 것이 우려됩니다. 조정을 떠나던 날 전교하신 봉수(烽燧)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면, 양남(兩南) 연해 지방의 봉수가 간격이 너무 먼 것 같아서 지금 두 곳을 더 설치하게 하고 잘 거행하도록 신명(申明)하였으니, 설령 사변(事變)이 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성(京城) 근처는 어렵습니다. 또 금년의 삼도(三道) 농사는, 밭곡식은 충실치 못하였습니다만 흉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논농사는 앞으로 7∼8월 사이에 풍재(風災)만 없다면 결실이 잘 될 듯한데 성패(成敗)는 바로 여기에 달렸습니다. 혹 풍년이 든다면 백성들이 그래도 의지할 바가 있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비가 많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폭우가 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오면서 본 것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냇물이 넘치거나 논밭이 무너져 떨어져 나간 것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간(開墾) 상태는 어떠했는가?"
하니, 답하기를,
"작년은 재작년보다 나았고 금년은 작년보다 낫습니다. 다만 남방의 물력(物力)이 매우 모자라는 형편임을 지난번에 이미 차자를 올려 아뢰었는데 이번에 소미(小米)를 포(布)로 바꾼 것이 8백 동(同)이나 되니, 판탕이 극심한 이런 때 징수(徵收)가 이러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과 방비에 대한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방비는 시원치 않았으나 이미 마친 일은 그래도 두서(頭緖)가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인심은 전라도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본디 성질이 강한(强悍)하고 쉽게 동요될 뿐 아니라 물력(物力)을 쓰는 것이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만이 요역(徭役)이 갑절인가?"
하니, 답하기를,
"하삼도(下三道)는 평시에도 부담이 많았지만 임진년 난리에 전라도만 무사했던 까닭에 서로(西路)의 모든 요역이 오로지 이 전라도 지방에 부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세가 대족(世家大族)이 이 지방에 많기 때문에 군량미 등을 거둘 때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는데 정유년 이후 변란이 끝난 뒤에도 차역(差役)이 여전하므로 물력(物力)이 고갈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적이 온다면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소규모로 온다면 방어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온다면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은 천하에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다. 임진 왜란 때 천하의 힘을 동원하였지만 어디 당하겠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은 어찌해서 패몰한 적이 있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배 위에서 무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패한 것입니다. 신은 용맹한 장수를 수군의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오로지 익숙한 사람이라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데, 각진(各鎭)의 첨사(僉使)나 만호(萬戶)가 타는 배에는 숙련된 뱃사공을 돌려가며 교체시키기 때문에 이내 서툴게 됩니다. 아무리 병선(兵船)이 있더라도 진실로 뱃사공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성패는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統制使)는 어떤 사람이던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본디 그 사람을 알고 있는데 영민하고 비범하며 날카로운 기상이 있습니다. 다만 처음엔 사졸들이 물에 익숙하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진정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장수는 수군 장수로서의 재능과 육군 장수로서의 재능이 각기 달랐는데, 이시언(李時言)은 수전(水戰)에도 능한가?"
하니, 답하기를,
"이시언은 육전(陸戰)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용맹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지금은 병이 없는가?"
하니, 답하기를,
"심하게 아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바닷가에 오래 있게 되면 반드시 상독(傷毒)을 받기 마련입니다. 신이 경도(鯨島)·노량(露梁) 등지에 며칠 동안 있어 보았는데 바다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옷이 다 젖었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얻게 됩니다. 또 양남(兩南)의 해안은 거리가 매우 멀어 동래(東萊)에서 해남(海南)까지 거의 1천여 리가 되는데 그 사이의 진소(陣所)가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엇물려 있으므로 부산(釜山)·경도·고금도(古今島)가 아득하여 서로 접속되지 않음은 물론 적이 오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비하지 않는 곳이 없고 분치(分置)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하라. 부산에서 진도(珍島)·비인(庇仁)·남포(藍浦) 등지에 이르기까지는 대부분 적이 쳐들어 올 만한 곳이니 모두 요해처(要害處)를 골라서 방어하라. 또 대마도에서는 부산이 매우 가까우므로 밤에 바다를 건너와 몰래 습격한다는 말이 전부터 있어 왔다. 공갈하는 말이지만 대마도는 뱃길로 한나절 거리라고 하니, 순풍(順風)을 만난다면 기습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수종(水宗)을 정탐하는 사람이 연락 부절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정탐(偵探)할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담한 자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강항(姜沆)이 나왔으니 틀림없이 적의 실정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어떻게 알겠으며 그의 말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답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은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하문하였으나 동병(動兵)의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원이 들은 바는 어떠하였는가?"
하니, 승지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형편으로 보아 동병하지 않을 듯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민중남이 답하기를,
"왜적 중 가강(家康)이란 자가 있는데 청정(淸正)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잘 모른 것이다. 왜적의 간사한 꾀는 그 부하 졸개도 오히려 모르는데 강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들은 은밀하게 맹세하면 부자 형제 사이라도 누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훈련하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이지만 그 백성들은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군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할 것이요, 적의 움직임 따위는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의 형편으로 말하건대, 그들이 이것으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기필코 그럴 리가 없다. 내년에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어찌 끝내 결말(結末)이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난날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사망자를 냈고 수길(秀吉)도 이미 죽었으며 나라의 물력(物力)도 많이 고갈되었으므로 스스로 중지할 계획이거나 아니면 자체에서 서로 틈이 생겨 스스로 도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어서 당장 군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왜적은 자구 침구하여 올 것이니 남쪽 국경이 반드시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들이 기를 쓰고 있다니 매우 큰 걱정이다. 그러나 스스로 굳건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그래도 믿을 수 있겠다."
하니, 답하기를,
"백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배는 80척에 지나지 않고 육군은 겨우 6천 명인데 경상도는 육전(陸戰)의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군이 원수(元數)도 매우 적은데 산성(山城)의 요새에 의지할 계획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적이 해안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대규모로 온다면 접전(接戰)하면서도 병력을 나누어 해안으로 상륙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80척의 전선(戰船)을 믿고 육전(陸戰)에 쓰이는 기계들을 준비하지 않으니, 적이 마구 휘몰아쳐 공격해 온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마치 분을 바르듯이 가까스로 군량을 공급하는 형편이어서 약간의 군대가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습니다. 안위(安衛)도 지금 두어 달 먹을 군량도 없어 장차 버티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반드시 한 곳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전자에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지킬 만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다. 단지 산성을 싫어할 줄만 알뿐 그것에 의지해서 지킬 줄을 모른다면 이는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니, 답하기를,
"전라 병사 안위는 금성(金城)을 지키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듣기로 금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좋지 않다고 하였다."
하니, 답하기를,
"담양 산성(潭陽山城)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平壤城)보다 낫습니다. 힘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안위는 어찌하여 좋지 않다고 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성은 큰데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운봉(雲峯) 싸움에 승리하셨을 때 변안련(邊安烈)에게 정병 5천 명을 주면서 ‘만일 차질이 생기거든 물러나서 금성(金城)을 지키라.’고 하셨고, 아기발도(阿只拔都)는 일찍이 ‘말은 금성에서 길러야 한다.’고 했고 주(註)에 ‘금성은 광주(光州)에 있는데 광주와 남원(南原)두 곳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기발도가 금성에 갔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운봉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변장 가운데 송희립(宋希立)·소계남(蘇繼男) 등은 다 쓸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수령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처음 지방에 도착했을 적에 매우 잘못 다스린 자는 이미 6∼7인을 아뢰어 파직시켰습니다만, 그 뒤에 역시 적격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 장벌(杖罰)을 가하여 견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전조(銓曹)가 잘 가리지 않은 탓이고 또 수령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남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기에 봉명 사신(奉命使臣)들이 한결같이 그의 선정(善政)을 일컫는가?"
하니, 답하기를,
"상길은 처사가 상세하고 부역(賦役)이 균평합니다. 또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도 참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 가운데 작은 것에는 능하지만 큰 것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상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감사(監司)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 사람을 살펴보면 말은 안하지만 일을 당하면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령을 포장(褒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처음엔 잘 다스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예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치적이 제일 좋은 자를 골라서 포상하고 그 나머지는 포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금년의 급무는 전결(田結)을 상정(詳定)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마음을 쓰지 않은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난리 뒤에 원정수(元定數)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하자, 답하기를,
"수령들이 상정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요역(徭役)들을 반드시 전결(田結)에 의거하여 분정(分定)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하는 고을은 부역이 매우 무겁게 되어 민원(民怨)이 한이 없게 되므로 수령들이 백성을 위하여 전결의 상정을 간략하게 합니다. 팔도(八道)가 다 똑같이 된 뒤에야 부역이 고르게 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노고가 매우 많다. 전에 있던 병세는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은 본시 담증(痰症)을 앓았는데 노상(路上)에서 더위를 먹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안색을 보니 전보다 매우 좋지 않다. 이는 필시 국사 때문에 노심 초사한 탓일 것이다."
하니, 항복이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아뢰기를,
"신이 올라오는 도중에 들었는데, 지난날 홍여순(洪汝諄)이 탄핵받을 때 장관(將官) 최한(崔漢) 등이 상소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지금 옥에 갇혀 형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곡절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형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죄범이 가볍지 않다. 경은 어찌하여 이 일을 말하는가? 장관들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상소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지금 경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발호할 조짐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발호할까 의심하시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지(無知)해서 저지른 망령된 행동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단한 일이건 대단치 않은 일이건 간섭해서는 안 될 일을 저들이 간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터이므로 통렬히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닌다고 하여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각사(各司)가 다투어 서계(書啓)하는 것을 보고 망령되이 사람들을 따라서 하려 한 일인데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면 성대(聖代)의 누가 될지 모릅니다. 설령 탈루(脫漏)되는 폐단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이르기를,
"남쪽 지방에서는 무사(武事)를 단련하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전라도엔 훌륭한 인재가 많은데 경상도엔 전혀 무사(武事)를 단련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 우리 나라엔 말이 없는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말을 탄 뒤에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두 준비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이 진실로 우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에도 포수(砲手)와 살수(殺手)가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령이 간혹 단련하려고 하지만 충총(衝銃)과 염초(焰硝) 등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살수는 백성들이 기예(技藝)에 서툴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유생들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남방의 폐습이 논의(論議)는 좋아하지만 학업에는 힘쓰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을 적에 이웃한 몇몇 고을이 해도(海島)에서 대나무를 많이 베어 왔는데 가을이 되면 더 많이 벨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 대한 일은 수령들이 상정(詳定)하려고 하더라도 세입(稅入) 외에 쌀을 거두는 등의 일을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결이 많으면 사람들이 원수처럼 보므로 양전(量田)을 쉽사리 할 수 없습니다. 상명(詳明)한 수령을 가려뽑아 5∼6 고을을 전담시켜 결부(結負)를 자세히 살피게 한 뒤에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죽(箭竹)은 충청도에도 있다고 하니 베어서 써도 된다. 또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전죽을 북도(北道)에 옮겨 심은 것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경기와 황해도 등지에 옮겨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13]선조실록 152권, 선조 35년 7월 23일 임오 2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김수·이용순·정인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수(金睟)를 형조 판서로, 이용순(李用淳)을 지중추부사로, 정인홍(鄭仁弘)을 대사헌으로, 이광정(李光庭)을 첨지중추부사로, 김우옹(金宇顒)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이유중(李有中)을 공조 참판으로, 우복룡(禹伏龍)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14]선조실록 152권, 선조 35년 7월 30일 기축 2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간원에서 황정욱의 일, 이시언과 우복룡의 관직임명 등에 대해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계는 황정욱의 일이다. 】
"곤수(閫帥)의 임무는 양계(兩界)가 더욱 중한데,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국가의 상법(常法)이 있습니다. 평안 병사 이시언(李時言)은 명색이 무부(武夫)라고는 하나 경재(卿宰)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감히 백주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빼어 사람을 죽였으니, 형벌을 면한 것만도 이미 법에 어긋났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1년도 되지 않아 갑자기 곤수의 중한 직임을 맡기니 여론이 괴이하게 여깁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감사의 직임은 옛날부터 방백(方伯)이라 일컬었으니 실로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호서(湖西)는 본디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유명한데, 여러 차례 역변을 거치면서 인심이 흉흉해지고 많은 주민들이 궤산(潰散)되었으니, 안집(安集)하여 진정시킬 책임이 다른 도에 비해 더욱 무겁습니다. 신임 감사 우복룡(禹伏龍)은 문음(門蔭)으로 발신하여 비록 재능이 있다는 명성은 얻었으나 혼란한 지역을 바로잡는 중한 임무를 결코 이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으니, 체직을 명하소서.
담양 부사(潭陽府使) 오정방(吳定邦)은 사람됨이 범람하여 부임한 이후 자기의 가노(家奴)를 풀어 본읍의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했으며, 또 자제를 시켜 사사로이 관둔전(官屯田)을 경작하게 하고 백성을 징발하여 경작하게 하고서 자기의 사용(私用)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루라도 관직에 두어 백성들에게 거듭 해를 끼치게 할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정욱의 일은 헌부에 답한 내용과 동일하다. 이시언의 일은 살인죄와 같이 논할 수 없다. 관서(關西)의 곤수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 어떻게 파면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어찌 출신(出身) 여부를 물을 것인가. 사람의 재주와 기국은 이와 관계가 없는 것이니, 우복룡은 체직시킬 수 없다. 오정방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욱의 죄가 천지간에 가득하고 대간의 논박이 공론에서 나왔는데도 오히려 흔쾌히 따르지 않고 훈구이면서 인척이 된다는 이유로 놓아 주려 하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죄악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15]선조실록 153권, 선조 35년 8월 1일 경인 3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간원에서 황정욱·우복룡·이시언의 일과 장경세의 무능을 논핵하다
간원이 전계한 황정욱의 일 및 우복룡(禹伏龍)을 체직시킬 일과 이시언(李時言)을 파직시킬 일을 아뢰고, 신계(新啓)하기를,
"금구 현령(金溝縣令) 장경세(張經世)는 사람됨이 혼암하여 정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맡기므로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게 되어 원망하는 소리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본현은 연로(沿路)의 잔폐된 고을로서 더할 수 없이 피폐되었으니, 소생시킬 책임을 결코 이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시고 그 대임을 십분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정욱에게 내린 명을 어떻게 다시 거둘 수 있겠는가. 그로 하여금 옛집으로 돌아가 명을 마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다. 이시언과 우복룡은 파직하거나 체직할 수 없다. 장경세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6]선조실록 153권, 선조 35년 8월 2일 신묘 5번째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성영·신설·노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성영(成泳)을 충청 감사로, 신설(申渫)을 【세밀하나 국량이 없다. 】 황해 감사로, 노직(盧稷)을 【재능과 국량은 있으나 재물을 탐내었다. 】 동지충추부사로, 정협(鄭恊)을 【재능과 국량이 모자랐다. 】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 권용중(權用中)을 【위인이 범람하다.】 내자시 정으로, 박진원(朴震元)을 직강으로, 유간(柳澗)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조중립(趙中立)을 예조 좌랑으로, 우복룡(禹伏龍)을 나주 목사로, 이세온(李世溫)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
[17]선조실록 160권, 선조 36년 3월 15일 신미 2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이 나주·장성 등의 여역에 대해 보고하다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이 아뢰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우복룡(禹伏龍)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요사이 병이 난 사람이 처음에는 얼굴에 종기가 나는 것 같다가 인하여 목 안이 붓고 통증이 있어 방약(方藥)이 효과가 없다 합니다. 장성 현감(長城縣監) 권경호(權景虎)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경내(境內) 각 마을의 대소인 사망자가 20명이고 앓고 있는 자가 20여명이라 합니다. 금구 현령(金溝縣令) 김자(金滋)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경내 서도(西道)에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한 가족 가운데 5∼6명까지 서로 전염되어 누워 앓다가 5일이 지나지 않아 문득 죽는다 하니 지극히 참혹하고 측은합니다. 요사이 듣건대 열읍(列邑)에 치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 합니다. 매번 주사(舟師)의 사군(射軍)·격군(格軍)을 조발해 보낼 때마다 죽거나 누워 앓는 수가 거의 반이나 되므로 방비와 농사 두 가지 일이 모두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18]선조실록 160권, 선조 36년 3월 23일 기묘 3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전라도 암행 어사 목장흠이 서계하다
전라도 암행 어사 목장흠(睦長欽)이 서계하니, 정원에 전교하였다.
"윤탁(尹晫)은 승직(陞職)하고, 우복룡(禹伏龍)·홍우(洪遇)·윤선(尹銑)·김계현(金繼賢)에게는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이춘기(李春祺)·이경립(李景立)·전희광(田希光)·이지강(李之綱)·박사제(朴思齊)·김창일(金昌一)은 모두 파직하고, 이간(李侃)·김요(金璙)는 추고하라.“
[19]선조실록 174권, 선조 37년 5월 20일 경오 4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전라도 관찰사가 지난 4월 30일 나주에 햇빛에 이상이 있었음을 보고하다
전라도 관찰사 장만(張晩)【사람됨이 근간(勤幹)하고 정사에 치적이 있었다.】 이 장계 하였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우복룡(禹伏龍)의 첩정(牒呈)에 ‘지난 4월 30일 별로 구름도 끼지 않았는데 마치 연하(烟霞) 기운과 같은 것이 끼어 평상시와는 달리 햇빛이 매우 누렇게 변하였다. 신시(申時)에 보니 오른쪽에 마치 동자(童子)의 모습과 같은 검은 흔적이 있었는데, 해가 질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변(異變)이 비상하다.’고 하였습니다."
[20]선조실록 197권, 선조 39년 3월 10일 무인 4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우복룡·홍유의·유순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우복룡(禹伏龍)을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홍유의(洪有義)를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유순익(柳舜翼)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유희발(柳希發)을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강극유(姜克裕)를 【사람됨이 범람하였다.】 맹산 현감(孟山縣監)으로 삼았다.
[21]선조실록 204권, 선조 39년 10월 4일 기해 3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왕이 의주 부사로 허상을 추천하였으나 이조에서는 네 명을 천거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의주(義州)는 중요한 곳이니,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얻어 임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선치(善治)할 자를 임명해야 하고 선치할 만한 자도 없다면 차라리 법을 지키며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하는 사람을 얻어 임명해야 할 것이다. 대개 본주(本州)는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 재화가 집중되는 곳으로서 간사한 사람이 모이고 외람된 향설인(鄕舌人)095) 들이 오가는 지역이어서 적격자가 아니면 그 직임을 맡기가 어렵다. 내 생각에는 허상(許鏛)이 마땅할 듯하다. 듣건대 허상은 집요하여 고집불통의 병통이 있고 지혜가 본디 넉넉하지 못하므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는 하나, 이런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다. 이 사람이 그 직임을 맡으면 간사한 자가 멀리 피하고 강역이 깨끗이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불가하다고 한다면, 벼슬살이를 잘하는 자를 다시 택해야 할 것이니, 가려서 천거하여 대신과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허상은 장점이 없지 않으나 지나치게 강직한 병통이 있습니다. 의주부는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위제(威制)하는 것이 본디 급한 일이나, 중국과의 교제에 있어 주선하고 책응(策應)할 즈음에 긴절한 사기(事機)가 허다하므로 방편에 의거 행하지 않으면 혹 일을 저지를 걱정이 있으니, 이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벼슬살이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안(官案)을 두루 보고 반복하여 헤아려 보아도 충분히 합당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므로, 우선 이 네 사람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아룁니다. 그러나 죽산(竹山)도 국가가 바야흐로 힘쓰는 곳이므로 바꾸는 것은 온편하지 않을 듯하고, 우복룡(禹伏龍)은 몸에 중병이 있고, 권반(權盼)은 조금 합당하나 직질(職秩)이 상당하지 않고, 강복성(康復誠)은 백성을 잘 다스리기는 하나 과연 여기에 합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널리 선택하라는 분부를 받고 또 인재가 모자라므로 어쩔 수 없이 연유를 갖추어 아룁니다. 위에서 재결하시기를 기다립니다. 대신의 뜻도 이러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의주는 본디 우리 나라의 중요한 곳이므로 임금이 적격자를 얻어 그 책무를 맡기려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허상은 강포한 사람이어서 전에 목민관(牧民官)으로 있었을 때에 인심을 크게 잃었었다. 이는 강포함으로 아래를 통솔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22]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년 4월 1일 무자 4번째기사 1582년 명 만력(萬曆) 10년
우복룡을 내섬시 직장으로 삼다
우복룡(禹伏龍)을 내섬시 직장으로 삼았다. 복룡은 추천을 받아 참봉에 보임되었는데 이이가 그의 품행이 독실하고 학행이 드러난 것으로 천거하여 정구(鄭逑)의 전례에 따라 6품직에 승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올려 서용할 것만을 허락하였으므로 이 제수가 있었다.
[23]선조수정실록 20권, 선조 19년 7월 1일 갑오 4번째기사 1586년 명 만력(萬曆) 14년
김포 현령 우복룡을 지평으로 삼다
김포 현령(金浦縣令) 우복룡(禹伏龍)을 지평으로 삼았으나 복룡이 모친의 병을 이유로 사양하자 전임에 그대로 있도록 명하였다. 【복룡은 학행으로 벼슬길에 나왔는데 관리의 재능이 있어 발탁되었다.】
[24]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20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용궁 현감 우복룡을 안동 부사로 삼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을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삼았다. 우복룡은 유학(儒學)으로 벼슬길에 올라 용궁 현감이 되었다. 용궁은 조령(鳥嶺)과 가깝고 문경현(聞慶縣)에 접하여 있었다. 변란 초기에 수령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우복룡은 홀로 관할 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사 1천여 명을 모집하였다가 적을 만나 패하여 흩어졌다. 그러나 다시 수백 명을 모아 밤에 예천(醴泉)의 소둔(小屯)을 습격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체찰사가 계문하여 자계(資階)를 올려 안동 부사로 삼으니, 이로써 명성이 드러났다.
[25]광해군일기[중초본] 49권, 광해 4년 1월 26일 신유 2번째기사 1612년 명 만력(萬曆) 40년
이이첨·이후·오익·정문룡·우복룡·신율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이첨(李爾瞻)을 대사헌으로, 이후(李厚)를 교리로, 오익(吳翊)을 수찬으로, 〈정문룡(鄭文龍)을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우복룡(禹伏龍)을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삼고,〉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을 통정 대부로 삼았다. 【도적을 잡은 공로이다. 〈그러나 신율은 양민(良民)을 강제로 겁주어 자복받고, 잔혹하게 형벌을 사용해 온 경내에 그 독(毒)이 퍼졌다.〉】
*****[26]광해군일기[중초본] 50권, 광해 4년 2월 12일 정축 1번째기사 1612년 명 만력(萬曆) 40년
사간원에서 임진년에 죄없는 인명을 많이 해친 성천 부사 우복룡의 치죄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우복룡(禹伏龍)은 전일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있으면서 임진년 변란 때에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죄악이 가득 차고 원망이 쌓였는데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작을 보존하고 있어서 남방 사람들이 통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심지어 전기를 지어 그 죄악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다시 목민관으로 삼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체직시키라고 답하였다.
00000다음 기사는 위 [26]과 같은 기사임. 중초본과 정초본의 차이
[27]광해군일기[정초본] 50권, 광해 4년 2월 12일 정축 1번째기사 1612년 명 만력(萬曆) 40년
사간원에서 임진년에 죄없는 인명을 많이 해친 성천 부사 우복룡의 치죄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우복룡(禹伏龍)은 전일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있으면서 임진년 변란 때에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죄악이 가득 차고 원망이 쌓였는데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작을 보존하고 있어서 남방 사람들이 통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심지어 전기를 지어 그 죄악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다시 목민관으로 삼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체직시키라고 답하였다.
[28]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12월 3일 정사 1번째기사 1644년 명 숭정(崇禎) 17년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시사와 인재 등용 등에 관해 논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요즘 조정 사이에 기색들이 좋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하니, 우의정 서경우(徐景雨)가 아뢰기를,
"유백증(兪伯曾)이 애당초 확실하게 듣고 본 것도 없이 전하를 가까이 모신 자리에서 중신(重臣)을 면대하여 책망했으니,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들었을 때 누군들 놀라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미관 말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진실로 그런 탐욕스럽고 비루한 일이 있으면, 밝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자신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벼슬을 제수했다면, 어찌 그 사실을 유백증 한 사람만 듣고 다른 사람은 모두가 듣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유백증이 비록 남을 해칠 마음은 없었을지라도 경솔한 실수는 없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운 것은 공정한 도리가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는 것과 시비가 밝거나 밝지 않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 두 사람의 시비가 판정됨에 따라 국가가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를 점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지금 이 두 사람의 일을 가지고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엎치락뒤치락 서로 부딪쳐서, 소요스럽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자못 탄식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111) 이 일찍이 난리가 나기 이전에는 떠도는 논의에 동요되어 일을 그르친 곳이 많았으나, 지금 재차 영상 자리에 들어와서는 조금도 실수한 것이 없다. 그런데 논핵하는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녹훈을 깎아버리자는 논의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더욱 부당한 논의이다. 일찍이 들으니, 조종조 때에는 추관(推官)도 모두 녹훈에 참여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영상이 녹훈된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와 같이 너무 박절해서는 안 된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원로가 인피하여 들어가버림으로써 묘당이 거의 텅 비게 되었으니, 이것이 과연 나라를 걱정하는 도리인가?"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김류가 일을 그르치고 죄를 받은 지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김류처럼 재주와 식견과 지위와 명망이 높은 사람을 어찌 영원히 폐해서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원로 대신으로서 사직(社稷)에 공이 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인재가 아예 없고, 인망을 지닌 자가 비록 한두 사람이 있기는 하나, 또한 모두 청나라에 구류되어 있어서 그들을 거두어 쓰지 못하니, 조정이 텅 비었다고 이를 만하다. 저들의 탄핵하는 논의도 비록 자신들은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또한 매우 생각이 없는 행위라 하겠다. 그렇지마는 저들의 헐뜯는 것도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유백증은 훈신(勳臣)으로서 전하의 좌우에 출입한 지가 지금 벌써 오래 되었으니, 전하께서 반드시 그의 인품을 자세히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민응형(閔應亨)은 성품이 강직하기는 하나, 식견과 도량에 대해서는, 비록 본래부터 민응형을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이것으로는 허여하지 않는 처지이니, 이것 또한 과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가 상소에서 말한 것은 어떠한가?"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선조(先朝) 계미년112) 사이에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많이 등용했다고 하는데, 신은 그때에 나이가 어려서 그 시말을 자세히 몰랐습니다. 지금 이식은 전고(典故)에 관한 식견이 조정에서 으뜸이니, 반드시 들어 아는 것이 있어서 한 말일 것입니다. 거기에 이른바 ‘초년에는 노성(老成)한 사람을 썼고 말년에는 연소한 사람을 썼다.’고 한 것은 신이 실로 듣지 못한 말인데, 말년이란 곧 임진년 이후를 가리킵니다. 그때에 왜인은 남방을 점거하여 있고, 조정에는 인재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비록 조그만 재주라도 있으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썼는데, 특히 노성한 사람은 분주히 노력할 수 없기 때문에 연소한 사람을 많이 쓴 것이니, 이는 일의 형편상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의 아비도 임진 왜란 당시 나이 30이 넘었는데, 병조 정랑의 천거로 경상 감사에 제수되자, 너무 급작스럽게 뛰어올랐다는 이유로 대간이 개정하였습니다. 그후 얼마 안 가서 영남 지방을 좌·우도로 나눔에 따라 신의 아비가 다시 우도 감사에 제수되었고, 그 후로 한준겸(韓浚謙)·장만(張晩)·이시발(李時發)이 서로 이어 승진 발탁되었으며, 이정귀(李廷龜) 역시 신의 아비와 함께 승진되었는데, 이정귀는 문필(文筆)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서 신임을 받았습니다. 연로한 사람은 정력이 이미 다하였으니, 진실로 조정과 외방을 분주히 다니기 어렵겠지만, 지금 조정 안에서 이른바 연소하다는 사람도 50∼60세가 넘었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식이 아뢰기를,
"신이 맨 처음 이 말을 꺼낸 것은 실로 참의 이상은 의망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당하(堂下)와 참하(參下)가 모두 쓸 만한 인재가 없으니, 만일 사람 천거하는 길을 열어놓는다면, 비록 적합한 인재를 다 얻지는 못할지라도 사람을 뽑아 쓰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에 연소한 조정 선비들을 보니, 선조(先朝) 때의 풍습과 같지 않다. 대체로 선조 때는 의기가 날카로운 연소한 사람들이 모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몸 바칠 뜻을 품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들을 발탁하여 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연소한 무리들이 국사에는 마음을 다하려 하지 않고, 다만 진(晋)나라 시대 선비들이 남긴 술마시고 청담(淸談)이나 좋아하던 풍습을 일삼으니, 이런 무리들을 비록 높은 작질로 올려주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노성한 사람은 자신의 근력이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래도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니, 내가 이 때문에 노성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아무리 자기들 가운데서 중한 인망을 얻은 사람일지라도 나라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자는 꼭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하므로, 이식이 아뢰기를,
"지금 신이 쓰고자 하는 사람은 나이 젊은 방자한 무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선조 때는 평소에 늘 신료들과 서로 접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적임자를 잃지 않았는데, 모두 40대 사람들을 발탁 임용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낭천(郞薦)에 대해서는 지난번 최명길(崔鳴吉)이 아뢴 말로 인하여 그것을 혁파하도록 했었는데, 어느 때부터 다시 이 관습을 따르게 되었는가?"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낭천을 혁파한 데 대해서는, 대신도 그것을 그르게 여기기 때문에, 관례대로 두고는 시행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세상에는 어찌 이 지경에 이르도록 인재가 없단 말인가. 혹 있는데도 내가 알지 못하는가. 장상(將相)의 뛰어난 재주는 본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보통 재상의 재주쯤이야 어찌 한둘이나마 쓸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듣건대, 선조 때의 이덕형(李德馨)은 30세 이전에 재상이 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렇게 조달했단 말인가."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이덕형은 신유년113) 에 출생하여 임진년에 판서가 되고, 37세 때 재상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李元翼)은 본디 현능한 사람이고, 이항복(李恒福)도 호협한 선비였으니, 그 당시 사람을 쓰는 데 있어 각기 그 재주에 적당하게 임용했던 것을 알겠다."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이항복이 비록 호기가 있기는 했으나 큰일을 당해서는 분명하게 잘라 끊는 절조가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혹 그를 동진(東晋) 때의 명신인 사안(謝安)에 비유하기도 했었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사안은 행검이 없는 사람인데, 이항복이 어찌 그런 무리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백성을 잘 다스린 수령은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하는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뻐하여 고무되었는데, 지금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선조 때에는 서인원(徐仁元)·우복룡(禹伏龍)을 모두 잘 다스린 공으로 뛰어넘어 발탁하였었는데, 지금은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가려 뽑은 유장(儒將) 무리들은 그 재주가 어떠하던가?"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이는 신이 재상에 임명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가 그들을 천거하였는가?"
하니, 호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성구(李聖求)가 재상이 되었을 때에 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천거했었는데, 권억(權澺)의 이름도 그 천거된 사람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하였다. 서경우가 아뢰기를,
"권억이 비록 역모는 하지 않았으나, 원래 재주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억은 본디 어리석은 무리였다."
하였다. 이식이 아뢰기를,
"청렴하고 신중하여 직사에 근면한 사람이 있다면 수령직에 천거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청렴하고 신중하여 직사에 근면할 수 있다면 어찌 수령직에만 임용할 만하겠는가. 육경의 직이라도 할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암행 어사가 가장 중요한 직임이거늘, 내가 병이 있어 오랫동안 경연을 폐함으로 인하여 연소한 사람 중에는 안면도 모르는 자가 많은데, 그들을 정밀히 가려 보내지 못했으니, 묘당은 모름지기 사명을 잘 봉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듣고 보아서 논의해야 할 것이고, 대간도 들은 대로 논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