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커cracker
이민하
식후에 우린 가볍게 봉지를 뜯고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사람이 많구나. 손끝으로 벤치를 쓸어대면서
이야기에 침을 바르고 겹치지 않는 순서를 기다렸다. 어제가 나왔고 지난겨울이 나왔고 옛날이 쏟아졌다.
어릴 적 맛보았던 건 지금도 눈물 나는데
산불이 나오고 특검이 나오고 폐업들이 쏟아졌다.
어디선가 위암이 나오고 빙의가 지나가고 변사체들이 축구공처럼 굴러왔다. 화들짝 졸린 눈을 부릅뜨면서
지문을 없앴다잖아.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은 거래. 손가락을 자르는 살인마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캑캑거리면 나도 숨이 막히고
날씨가 좋구나. 건강에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입에 잔뜩 품고서
마지막은 누구의 몫일까. 입을 쓱 닦으며 서로에게 미루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옆에서 떠나갔다.
부서지는 것들은 흘려도 티가 안 나고
살찐 비둘기들이 먼지처럼 날아가고
이를 쑤시던 다음 사람들이 빈 의자 위에 앉았다.
빈 봉지가 쌓여 가는 무더기 속에서
토막 난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팔 하나가 나오고 저기서 불쑥 머리가 나오고
목이 점점 늘어져 삼켜도 삼켜도 우물 속인데
어디서 끊어야 하나.
밤은 오는데 삼삼오오 기린처럼 앉아서
저건 내 이야긴데 앞사람의 입에서 씹혔다. 내가 입을 열었는데 옆 사람이 흐느꼈다. 이야기마다 손가락이 잘려 있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질 수 없다. 내 몸을 만지면 죄 짓는 것 같았다.
📖계간 《포지션》 2024년 봄호
#모과의시건축학 #이민하시인 #크래커
🖋이민하 / 1967년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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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커cracker / 이민하
김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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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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