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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1)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1:1~44
I. 서론
요한복음에는 총 7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요한이 이 표적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이 두 번 더 있었습니다.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8장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 두 가지 표적과 오늘 표적이 다른 점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두 가지 표적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적은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면,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할 수 없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온 표적은 지금까지 나온 모든 표적보다 더 강력한 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 번 더 믿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나사로가 병들자,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오시도록 요청하는 장면입니다.(1~7절) 둘째,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셔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17~35절) 셋째,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입니다.(38~44절)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오시도록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1~3절,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베다니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매였고, 나사로는 그들의 오라버니였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이 두 자매가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빨리 오시도록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피해서 요단강 동편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나사로가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난 때였습니다. 1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늦게 도착한 예수님을 본 마르다와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 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조금만 빨리 오셨더라면,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와 마리아가 공통적으로 한 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21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의 첫 번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두 자매의 말에는 늦게 도착한 예수님에 대한 원망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조금만 도와 주시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끝내 도와주시지 않아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상황은 더 악화된 경험은 없으셨습니까? 아니면 혹시 지금이 그런 상황은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God’s delays are not God’s denials.” (하나님의 지연은 하나님의 거절이 아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크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계획은 오라버니가 죽지 않고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도록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나사로가 죽은 후,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계획보다 주님의 계획이 더 큰 것입니다.
2) 둘째,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3절과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5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사로가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우리의 사랑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인 것입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3) 셋째로, 예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4~15절,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여기서 “너희로 믿게 하려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2. 둘째,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1) 먼저,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21~27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와 예수님 사이에서 총 다섯 번의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1) 마르다 (21~22절) 마르다는 먼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원망을 함께 말했습니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에는 예수님께서는 오라버니의 병을 능히 고쳐주실 수 있는 분으로 마르다가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아서 오라버니가 죽게 되었다는 원망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마르다는 조금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22절,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모릅니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대화를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2) 예수님 (23절) 그 다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3절,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마르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3) 마르다 (24절)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24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해 주셨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마지막 날에 오라버니가 부활할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4) 예수님 (25~26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만약 제가 예수님이라면,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나사로를 지금 다시 살릴거야.”라고 분명히 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단어를 세 번 연속 사용하시면서 “자신을 믿을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자신을 믿을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5) 마르다 (27절) 27절,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런데 마르다의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라버니를 지금 당장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고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39~4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39~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마르다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말렸던 것입니다.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마르다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절,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4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한 고백은 모두가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한 가지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딱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능력과 함께 예수님의 의지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면, 우리의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다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도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32~35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도 마르다와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32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35절일 것입니다. “Jesus wept.”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불과 몇 분 후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아셨는데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가 두 가지 나옵니다. 첫째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울음에 공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잃고 울고 있는 마리아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함께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던 것입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그런데 예수님은 눈물만 흘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눈물의 성격을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절망의 눈물을 소망의 눈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내용이 그 다음 부분에 나옵니다.
3. 셋째,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41~44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겨 놓은 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시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시고 그에게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흔히 세상에 4대 성인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죽은 사람을 살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에 더 가까우니까 예외로 하고, 석가모니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잡비유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가 기원정사에 있을 때, 어떤 과부가 석가모니를 찾아 왔습니다.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자, 석가모니에게 아들을 살려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그 여인에게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예, 살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마을로 내려가서 조상 대대로 사람이 죽은 집이 없는 집을 찾아서 겨자씨 한 알만 얻어 오세요.” 여인이 마을로 달려가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런 집이 있는지 찾았습니다. 하지만 한 집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여인이 석가모니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어느 집을 가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여인이 떠나가고, 제자들이 석가모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느니라.” 석가모니도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석가모니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모든 자를 다시 살리실 일에 대한 전주곡입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일이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러서 무덤 속에서 나오게 했던 것같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 무덤 속에서 나오게 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무덤에 있는 모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떤 부활로 다시 살아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일은 무엇을 말할까요? 감사하게도 마태복음에 보면, 선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한 청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질문을 받으시고 선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16절,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에서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이 청년은 예수님을 선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출발이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 이 청년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의 질문을 받으시고, 주제를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선한 일”에서 “선한 분”으로 말입니다. 17절,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이는 당연히 성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을 선한 분으로 바꾸셨을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선한 일을 행한다고, 선한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뿐인 것입니다. 선행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선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입니다. 18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서 사람에 대한 처음 5계명을 말씀해 주셨고,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중에서 두 번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계명을 말씀해 주시자, 청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20절,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자신이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21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듣자 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이 청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영생에 대한 관심은 있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볼 줄 몰랐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0절에서 본인은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의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3가지 목적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둘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기 위해서. 셋째,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구원자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 청년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행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사람에 대한 계명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계명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그러므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첫 번째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예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고, 예수님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결국 무슨 의미입니까? 선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계명들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명들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로 나아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당연히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편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잘 정리한 바울의 글이 있습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약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선한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Hope, George Watts> 이 그림은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왓스의 작품입니다. 왓스는 자신의 딸이 죽은 후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 그림에 감명을 받아 “희망”을 주제로 연설을 했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26년간 옥살이 하면서 이 그림을 감방 벽에 걸어놓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 그림을 보고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한 여인이 행성 같아 보이는 공 위에 앉아서 리라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프를 연주하는 여인의 눈이 가려져 있고, 이 악기에는 줄이 한 가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절망적인 상황 같은데, 이 작품의 제목은 <Hope, 희망>입니다. 아직 한 가닥의 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자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한 가닥 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줄은 예수님께서 이 두 여인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죽은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났고, 절망에 빠진 자매들은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한 가닥 줄이 남아 있습니까? 그 줄은 누구입니까? 모든 상황이 다 끝난 것같이 보여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찾아와 주시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이유인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과 가정을 다시 살리시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