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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작용과 시
- 의식의 한계 또는 말의 한계
-김석준(시인·문학 평론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만약에 이 세계가 말할 수 있는 사태들로만 짜여져 있다면, 생의 한계는 말의 한계와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를 간명하게 설명하거나 기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이 세계가 아포리아 그 자체라면, 인간은 불가지적 세계에 이몰되어 삶의 현실성을 상실하게 되고 만다. 논리성과 비(무)논리성, 초월과 현상, 정신과 물질, 충돌하는 양가적 가치, 상호 대립되는 이질적인 모순의 양립. 이 세계는 분명 말할 수 있는 의미 규정만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고민했던 명제적 진리나 말할 수 있는 언어/말놀이는 말할 수 없는 부분, 즉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에 내재된 보다 근원적인 세계/인간의 의식작용을 놓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진리성의 외연/내포적 한계가 명확하게 그어지기는 했지만, 인간/세계의 작용은 말의 작용만으로는 포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세계는 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그 무엇을 지향하며 세계는 세계 그 자체로만 기술될 수 있을 뿐이지, 일어날 수 있는 사태만으로 기술될 수 없다. 인식과 말의 한계 밖에 동일률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는 세계다.
이러한 한계적 인식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만약에 리처드 로티가 고민했던 테제가 성공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가치나 의미의 질량과 같은 인간학적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리처드 로티는『철학의 거울』에서 대척행성인對蹠行星人이라는 가공의 호모사피엔스와의 유비를 통해서 인간의 인식(마음)작용을 다양하게 논증해내고 있다. 그는 인간의 인식작용을 뉴런과 뉴런의 연결망을 통해 전달되는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으로 인간의 감각이나 의식작용을 환원시킬 수 있다고 증명하면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코라Cora개념과 데카르트 마음개념 이래로 지배하고 있던 인간의 인식작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인식의 한계는 뇌의 구조의 한계일 뿐, 인간이 부여한 인간학적 마음의 작용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은 뇌의 구조 속에서 정량적으로 분비되는 다양한 효소작용일 뿐이다. 하여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되어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효소가 지시하는 부호적 감각이나 의식에 따라 정량화 된 인식작용만을 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또는 과학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해결 불가능한 마음의 작용에 관하여 묻고 답한다. 한계의 한계 밖으로 탈주하는 의식, 이해의 이해 끝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인식. 그러나 도해되고 이해되는 의식의 지점은 해체와 건설의 변증법 위에서 탄주되는 동어반복의 지점으로 무한 회귀하게 된다.
세계-아포리아가 의식 자체의 한계이듯이 시는 말의 한계 내에서 이중의 의식작용으로 무장하게 된다. 사실 시가 표현해내는 말-아포리아적 사태는 세계-아포리아 속을 헤매는 의식의 한계를 체험한 후, 그 체험이 미적으로 승화되는 미궁의 지점을 통과하여야만 한다. 체험의 시적 언어로의 변이. 말의 한계는 세계-내-경험의 한계와 일치하지만, 말-아포리아(시적 언어)는 또 다른 차원으로 비약해 들어가 세계-아포리아를 의미의 사태로 치환시킨다. 이때 말은 단순한 지시적 도구가 아니라 시적 언어의 세계성이자 육체성이다. 시의 말은 말로써 말의 한계적 극한으로 치고 들어가 세계의 모습을 정확하게 정관해낸다. 그러나 말은 한계에 부딪힌다. 말은 말 자체가 지닌 지시적 기능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아포리아-말로 자신의 양태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한계, 절망, 죽음, 무한반복, 동일성으로의 비약. 시의 말은 의식의 한계 속에서 작동하는 말의 한계이지만, 그 말-아포리아는 아포리아-말로 형상화되어 세계-내-사태 속을 활보하게 된다. 비록 시적 언어가 의식의 한계 지점에서 말-아포리아를 사유하지만, 상징과 비유의 터널을 통과한 아포리아-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아포리아를 총체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하여 시의 말은 세계의 한계 내에서 기술되는 일면화 된 의식이 아니라, 세계의 밖으로 무한 질주해가는 절대의 언어로 질적 비약을 하게 된다.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흥미가 없다
내 한계에 내가 질렸다
어떤 생을 넘겨도 동어반복이다
언덕길 오르다 말끝을 흐린다
마음아 그만 내려가자
-천양희, 「한계」, 『작가세계』 가을호
시를 읽으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한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어떤 아픔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 왜 일까. 뉴런과 뉴런 사이에서 분비되는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내부에 말로는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인가. 그런데 읽을수록 더욱 아프고 쓰라리다. 생이란 그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태라고 천양희 시인이 규정적으로 말할 때, 이때 이 생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의 극한에 도달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생 자체의 한계를 목격했기 때문인가. 처절하다. 아프다. 가슴이 시리다. 비평의 말은 시인의 말이 전하는 저 처연한 가슴 속을 풀어헤쳐낼 수 없다. 시의 말이 생/세계-아포리아를 정언적으로 육화시킬 때, 비평은 말-아포리아에 빠져 단순한 말놀이적 유희로 전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양희의 「한계」는 한계의 밖을 분명히 응시하고 있다. 그가 ‘어떤 생을 넘겨도 동어반복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을 때, 시의 말은 말-아포리아를 휠씬 넘어선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생의 비의나 세계-아포리아를 소멸시킬 때라야만 가능하다. 깨달음, 달관, 니르바나, 체념. 혹은 소진되어가는 육체, 불가역적인 시간, 허무로 수렴하는 인생. 시인이 원경과 근경 사이에서 이 세계의 묘법을 니체의 원근법으로 사유할 때, 문득 멀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생에의 길이 너무 가볍고 가깝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전도되고 역전된다. 천양희는 적멸도 절대도 의식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의식의 한계지점에서 깨닫고 있다. 하여 시인은 의식의 힘으로 세계 이쪽에서 벌어지는 시간을 정지시킨다. 마음이 모든 인식작용을 정지시킨 후, 생에의 형식을 세계의 형식이 존재하는 한계 밖으로 내몰아간다.
마음의 올려놓음과 내려놓음 사이에서 생-아포리아를 소거시킬 때, 또는 장자철학적인 상승적 부정성과 하강적 긍정성 사이에서 시인이 생의 의미를 깨달아갈 때, 시의 말은 말 내부에 원근법적 사유를 넘어선 절대의 지점으로 비약해 들어간다. 그러한 까닭에 천양희 시인의 이 작품은 비평의 안쪽에서 논의될 아포리아-말의 세계를 육화시킨 것이 아니라, 생/세계-아포리아를 극한적으로 체험한 말-아포리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말을 비의 속으로 침범해 들어가게 만든다. 하여 비평은 시「한계」의 한계를 말할 수 없다.「한계」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말의 한계 밖인 생의 내밀한 법칙과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도대체 동어반복인 생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동어반복인 생의 형식을 무한반복적으로 살아야만 하는가. 천양희의 「한계」는 아포리아-말의 한계 지점이 말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생/세계-아포리아를 가슴 시리게 말하고 있다. 눈물이 난다.
손바닥으로 잔디를 쓸어보고 있는데
다람쥐의 잔등이 살짝 스쳐온다.
다람쥐의 살결이.
아, 오르가니즘.
나는 잔디밭에 덜렁 누워 잔디를 간질인다.
꼬신다.
쓰다듬는다.
잔디들이 한없이 나를 쓰다듬고 있다.
내가 젖다니.
물꼬가 터지다니.
뭉툭해져 버린
내 몸이 젖고 있다. 낳고 있다.
-조정권, 「잔디」, 『현대시』 10월호
천양희 시인의 「한계」가 마음의 흔들리는 지점을 경유하다가 절대화된 의식의 지점으로 이입해 들어간다면, 조정권 시인의 「잔디」는 아주 섬세한 손길로 감각화된 말과 세계를 이접시킨다. 무관심과 관심, 상상력과 비약. 조정권의 마음의 길은 표층적인 감각작용이 만들어 내는 오감의 층위를 존재적 층위로 비약시키면서 사물과 교감을 나누고 있다. 감각은 존재감을 인식하게 만드는 최초의 원인이자, 생의 지속성을 인식시키는 본질적인 기제이다. 헤겔이『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정신작용의 즉자상태를 감각적 확실성sinnliche Gewißheit이라고 확언하면서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을 전개시켜갈 때, 감각은 진리 인식의 초기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장 불완전한 인식상태만을 감지해낸다. 감각은 ‘현재 바로 지금 여기’만을 인식할 뿐이다. 따라서 감각은 정신의 가장 낮은 상태에 위치하게 된다.
물론 헤겔의 이러한 논리가 절대지(이성)로 고양되는 정신의 자기 인식과정이 펼쳐내는 관념성에서 비롯하기는 하지만, 어찌 이 세계의 실존적 사태를 이성의 논리로만 포괄할 수 있겠는가. 존재감은 이성이 만들어가는 절대법칙이 아니라 이성의 타자 편에서 생성되는 아슬아슬한 교감이다. 하여 존재는 타자다. 존재감은 타자가 촉발시키는 감흥인데, 그것은 시적 주체가 타자를 주체 내부로 이입시켜 타자와 정서적 합일을 이룩하는 순간에 느껴진다. 조정권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잔디’라는 물상적 대상을 살가웁게 쓰다듬으면서 감각의 전이를 촉발시킨다. 살아서 감각적 기호를 발산하는 잔디, 생에의 감각을 일깨우는 대상, 되살아나는 존재감. 생의 소멸은 감각의 소멸이다. 역으로 생의 지속은 감각의 신호가 뉴런의 연결망을 통해서 뇌의 한 지점에 도달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다. 조정권은 그러한 감각이 지닌 본질을 생의 의미론적 층위로 대입시키면서 손의 감각을 육체의 감각으로 전이시킨다. 오르가(니)즘, 살아있음, 나는 발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시인은 저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육체적 감각으로 전도시키면서 마음의 허구성을 실물의 감각으로 치환시킨다.
전율하는 몸, 젖어들어 생기하는 몸, 죽어있던 감각의 되살아남. 감각은 마음의 지향성이 도달하는 그 지점에서 비등하는 반향인데, 시인은 상상의 작용을 통해서 잔디를 다람쥐의 잔등으로 다람쥐 잔등을 다람쥐의 살결로 변용시키면서 육체적 희열에 빠져든다. 애무와 간질임과 존재감 사이를 성적 이미지가 횡단해갈 때, 타자에게서 촉발된 감각은 주체적 감각으로 변이된다.
사실 바그다드는 카페일 수 없다
한창 전투중인 그곳에서 어찌 그대를 만나고
행복한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바그다드 카페 바로 위, 그대를 만나는 찻집은
언제 불바다가 될지 모르는 위험지구다
그럴싸한 통나무집에 고향 도랑물을 끌어다 붕어를 기르는,
순이 닮은 편안한 아줌마가 식물성의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언제 포탄이 터지고 피가 튈지 모르는 바그다드
그 위층에서 열애 중이라니……
사실 바그다드는 지상의 안식처다
끝없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그녀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준 종착역
오늘도 나는 바그다드를 지나
그대를 만나러 간다
포연砲煙이 뽀얗게 머리를 덮고
젊은 병사의 혈액이 시퍼렇게 포복해 있다
- 윤준경, 「바그다드 카페」, 『우리시』, 10월호
뉴런과 뉴런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전달물질의 전기적 특징을 정확하게 기술할 때, 인간은 마음이 펼쳐내는 분노, 슬픔, 기쁨, 이성, 황홀, 오르가슴, 광기 등을 객관화할 수 있다. 만약 뇌신경학이 인간의 의식 작용과 정신의 구조를 정확한 수식으로 언표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적 상상력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최고의 찬사에 해당하는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인간. 그것은 뇌신경의 효소작용이 만들어내는 물질적 사태일 뿐이다. 만약에 지금까지 밝혀진 뇌신경학의 연구 성과가 불변의 진리로 확증된다면, 인간의 정신작용은 물질의 작용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인간이 믿어왔던 창조적 정신은 지고한 것도 아니고, 특출난 것도 아니다. 정신은 물질이다. 정신은 물질이 이동하는 경로를 통해서 생성되는 전기적 코드부호의 치환작용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뇌신경학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은 환원불가능한 미지의 사태이다. 마음은 비실재를 실재로, 현존을 부재로 현현시키는 마법의 작용을 일으키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객관화된 사태가 아니다. 마음은 상상력의 지점을 질주하면서 시적 언어는 예인하지만, 마음이 작용하는 그 오묘한 지점을 언어로 정확하게 언표할 수 없다. 마음은 공간의 이편과 저편을 마구 넘나들 수 있다. 바그다드 카페와 포연에 휩싸인 바그다드를 상면시키면서 마음은 전쟁과 사랑의 경계지점에서 배회하고 있다.
윤준경의 「바그다드 카페」는 혜화동의 바그다드 카페,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여주인공 쟈스민, 전쟁 중인 이라크의 바그다드라는 세 지점을 교묘히 교차시키면서 시적 상상력을 펼쳐내고 있다. 전쟁과 행복을 상면시키고, 사랑과 인식처를 대면시키면서 윤준경은 삶의 의미를 키질하고 있다. 작동하는 상상력, 공간이동, 환시, 환청. 시인이 혜화동 네거리를 활보하다가 바그다드 카페에 시선이 고정될 때, 그는 부지불식간에 영화와 전쟁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몽상한다. 세계의 한편엔 피를 흘리는 시체, 그 반대편엔 사랑과 갈등. 시인 윤준경은 그 사이에서 담담하게 세계를 응시하시만, 그의 심연 속에 파동치는 이미지들 다양한 빛깔로 채색되어 있다. 상호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대결,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의 비약. 윤준경의 「바그다드 카페」는 도드라져 보이는 이미지의 연쇄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 풍경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인간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서로 상이한 지점을 질주하는 이미지들의 교차지점은 시의 변곡점이면서 생/세계를 대면하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 추이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눈물만원이라 써 붙인
안경점 앞에서 절로 발걸음 멈춰진다
눈물에도 굳이 가격을 매긴다면 어떨까
하여, 지금까지 내가 흘린 하찮은
눈물의 가격은 얼마일까
나보다 더 많이 흘렸을 어머니의 눈물
아마 염전을 이루고 남았으리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의 눈물 값
어머니의 눈물 본 적 없는데
그나저나 눈물빚 갚을 길 막막하여라
- 김희업, 「눈물의 가격」, 『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
김희업의 시 「눈물의 가격」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를 마음의 한 지점에 응고시켜 펼쳐내고 있다. 지난한 사랑과 슬픔. 시인이 하나의 말과 사물에 의식을 집중시켜 전일한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 때, 그 상상력은 마음의 지향성이 펼쳐내는 숭고한 사랑의 깊이로 수렴하게 된다. 마음은 수렴이다. 마음은 가 닿는 지점에서 반향을 일으켜 의미와 가치, 사랑과 상처를 환기시킨다. 마음은 너무나 투명한 수용체이기 때문에, 외적 대상과의 의식적 작용을 통해서 시인 자신의 정신성을 고양시킨다.
눈물이라고 명명된 만 원짜리 렌즈, 길을 지나는 행인, 의식의 집중, 대상과의 조응, 피어오르는 상상력, 시적언어의 예인. 이러한 의식의 이동경로는 시 「눈물의 가격」이 하나의 시적 언어로 탄생하는 과정인데, 이 이동경로를 견인하는 내적 동인은 어머니의 눈물이다. 슬픔과 한을 지니신 어머니, 시인 김희업은 그 어머니의 생애를 추억하고 기억하면서 염전의 소금밭을 헤매고 있다. 아리고 쓰라리다. 의혹의 눈초리, 천대받는 천형의 삶. 시인의 내적 자아는 어머니의 삶 깊숙이 자리 잡은 한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교묘하게 희석시키지만, 어찌 시인의 눈물과 슬픔이 어머니의 그것만 못하겠는가.
걸머지고 가야만하는 운명, 그 운명의 감내. 시 「눈물의 가격」은 운명을 세운 자(어머니)와 운명을 걸머진 자(시인 자신)를 교묘히 대면시키면서 눈물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운명을 걸머진 자가 운명을 세운 자에게로 다가가 속울음 삼키며 살아온 삶을 위무하고 있다. 눈물빚 갚으려고 한다. 시인 김희업의 마음자리는 따스하고 살가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