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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테레지아 는 결혼 전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어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 을 했는데, 아들 5명, 딸 11명을 낳습니다. 48세에 남편과 사별하면서 쓸쓸함을 음식으로 달래다가 풍만한 몸집이 됐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그런데 18세기 들어 문제가 터집니다.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사라진 겁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였던 #카를6세 (1685~1740년)는 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딸만 셋이 있었거든요. 게르만족의 전통법인 살리카 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 계승은 물론, 영토도 물려받지 못했어요. 땅을 넓혀나가는 데 도움을 줬던 정략결혼은 족쇄가 됩니다. 합스부르크와 결혼으로 얽힌 수많은 유럽 왕실도 합스부르크가(家) 영토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차지할 근거가 생긴 것이거든요.
카를 6세는 나라가 분할되는 것은 원치 않았어요. 딸도 왕위와 영토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국사조칙 (國事詔勅)을 1720년 발표합니다. 게르만족 전통이 남은 왕국에서는 여왕 탄생이 불가능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겁니다.
카를 6세는 큰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 등을 무사히 상속하도록 프랑스와 스페인 등 주변국의 동의를 받는 데 여생을 바칩니다.
◇ 9년 동안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장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왕위와 영토를 물려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카를 6세가 살아 있을 때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인정했던 이웃 나라들은 입장을 바꿔서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여자라서 인정하기 어렵다는 거죠. 이렇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1748)이 시작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프로이센 #프랑스 #바이에른 #스페인 #나폴리 등과 싸워야 했어요.
특히 프로이센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인정받으려면 #슐레지엔 을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슐레지엔은 전체 영토에서 큰 부분은 아니었지만 상공업이 발달한 요충지였어요. 이를 거부하자, 프로이센은 무력으로 슐레지엔을 빼앗으며 전쟁을 일으키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전세를 역전시켜요. 1748년 아헨조약을 맺고 슐레지엔 등 일부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왕위와 상속권을 모두 인정받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신 남편 #프란츠슈테판 ( #프란츠1세 ) 이 가져가게 됩니다. 카를 6세가 내놓은 국사조칙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왕위에 대한 상속법만 바꾸는 것이거든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 방식은 형식적으로 제후국의 투표에 의한 것인데 여성은 피선거권이 없었어요. 그리고 선거로 황제자리를 지켜오는 합스부르크가도 이것까지 바꿀 수는 없었거든요.
◇ 의무 교육·징병제 도입
남편을 황제로 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아들 요제프 2세와 권력을 나눠 가졌고요.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국에 초등학교를 만들고 의무 교육을 실시했어요. 또 징병제를 도입해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군사력을 강화했지요. 또한 조세제도를 개편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걷어 재정을 강화했어요.
다만 끝내 슐레지엔을 되찾는 데는 성공하지 못해요. 프로이센과 #7년전쟁 (1756∼1763)을 벌이지만 다시 패배하죠. 여성 통치자로 있으면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도 낳아요.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 #마리-앙투아네트 입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윤서원]서울 성남고 역사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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