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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82권
대보적경 제82권
조위(曹魏) 삼장 법사 강승개(康僧鎧) 한역
송성수 번역
19. 욱가장자회(郁伽長者會)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타림(祇陀林) 안의 급고궁(給孤窮) 정사(情舍)에서 큰 비구승 1,250명과 함께 계셨다.
보살도 5천 명이 있었으니, 미륵(彌勒)보살․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단정도(斷正道)보살․관세음(觀世音)보살․득대세(得大勢)보살 등 이러한 이들이 상수(上首)였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백천의 대중들에게 공경히 둘러싸여 법을 연설하고 계셨다.
그때에 욱가장자(郁伽長者)는 5백 명의 권속들과 함께 사위성의 큰 성을 나와 기타림의 급고궁 정사로 나아가서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리고 세 바퀴를 돌고 나서 물러나 한쪽에 가 앉아 있었다.
그때에 다시 법시(法施)거란본에는 애경(愛敬)이라 한다.장자와 명칭(名稱) 장자와 야사달다(耶奢達多) 장자와 선재(善財) 장자와 애행(愛行) 장자와 급고궁(給孤窮) 장자와 용덕(龍德) 장자와 실희(實喜) 장자 등 이러한 이들도 저마다 5백의 권속들과 함께 사위성의 큰 성을 나와 기타림의 급고궁 정사로 나아가서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세 바퀴를 돌고 나서 물러나 한쪽에 가 앉아 있었다. 이들 모두와 그의 권속들은 모두가 대승(大乘)을 향하여 선근(善根)을 두텁게 심었으므로 결정코 위없는 바른 도[無上正道]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에 욱가 장자는 모든 장자들이 다 모인 것을 알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원컨대 허락하여 주소서.”
이렇게 말을 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여래는 언제나 허락하리니, 너의 마음대로 물어라. 너의 의심한 바에 따라 나는 네가 묻는 대로 연설하면서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하리라.”
그때에 욱가 장자는 이런 말씀을 듣자마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 대승을 이해한 뒤에 대승을 향하여 믿고 대승을 쌓으려 하고, 대승을 타려[乘] 하고, 대승을 알면서 모든 중생을 보호하고 온갖 중생을 위로하면서 어루만지며 온갖 중생을 안락하게 하려고 견고하게 장엄하는 것이니, 저는 반드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해야 하고,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시켜야 하며, 편안하게 위로함이 없는 이를 편안하게 위로해야 하고, 아직 열반하지 못한 이를 열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짐을 짊어지고 큰 교량과 배가 되어서 한량없는 부처님의 지혜를 듣고 부처님의 지혜를 닦고자 하여, 큰 장엄을 일으켜 생사(生死) 안의 한량없는 고통과 우환을 알기는 하더라도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마음에 근심하거나 괴로워함이 없겠으며 한량없는 겁 동안 생사에 유전하면서도 마음에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안에서는 보살승(菩薩乘)에 머무른 선남자와 선여인으로서 혹 어떤 이는 집을 떠나서[出家] 법과 행을 닦아 쌓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집에 있으면서[在家] 법과 행을 닦아 쌓기도 합니다.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사람과 하늘과 아수라 등을 가엾이 여기시고, 세존께서는 대승을 수호하여 3보(寶)가 끊어지지 않으면서 일체지(一切智)가 세간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세존이시여, 집에 있는 보살의 계덕(戒德)과 행할 곳을 연설하여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집에 있는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하면서도 보리를 돕는 법을 무너뜨리지 않게 되며 현재의 법 가운데서 번뇌[纏覆]의 업 없이 수승한 행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집을 떠난 보살이 재물과 애욕을 버리고 출가하도록 이들을 가르쳐야 합니까?
어떻게 법을 행하고 어떻게 선(善)을 닦습니까? 집을 떠난 보살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까?”
이와 같이 청하자, 그때에 세존께서 욱가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장자야, 네가 묻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너희들이 당연히 하여야 할 바니라. 장자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이제 너를 위하여 집에 있는 보살과 집을 떠난 보살이 머무를 바와 배워 얻는 수승한 행을 말하여 주리라.”
욱가가 아뢰었다.
“그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들면서 듣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마땅히 부처님[佛]께 귀의하고, 가르침[法]에 귀의하고, 스님[僧]에게 귀의하여야 하며, 이 3보의 공덕을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에 회향(廻向)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어떻게 집에 있는 보살이 부처님께 귀의하느냐 하면 ‘나는 반드시 부처님 몸의 32상(相)을 이루게 되어서 스스로 장엄해야 한다’고 하고, 이 선근을 가지고 32장부의 상[丈夫相]을 쌓으며 이를 쌓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행해야 하나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집에 있는 보살이 가르침에 귀의하느냐 하면, 장자야, 이 보살은 법과 설법하는 이를 공경하고 법을 위하며 법을 바라고 법의 지극한 즐거움을 좋아하며, 법을 돕고 법에 머무르며, 법을 지니고 법을 보호하며, 법을 더하고 법을 구하며, 법을 힘으로 삼고 법의 그릇과 무기를 베풀며, 오직 법에만 힘쓰면서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 뒤에 마땅히 바른 법으로써 온갖 사람과 하늘과 아수라에게 평등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가르침에 귀의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스님에게 귀의하느냐 하면, 장자야, 만일 이 보살이 수다원(須陀洹)과 사다함(斯陀含)과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阿羅漢)과 그리고 범부를 보거나, 또는 성문승(聲聞乘)을 보게 되면 모두
다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빨리 일어나 받들어 맞이하며 좋은 말을 하면서 오른쪽으로 그 사람을 돌고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증득했을 때에는 성문의 공덕과 이익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법을 연설하겠다’고 해야 하며, 비록 이렇게 공경하는 마음을 낸다 하더라도 그 안에 머물지는 말아야 하나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스님에게 귀의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의 법인가 하면,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요, 보리 마음을 내도록 권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며, 대비(大悲)를 버리지 않는 것이요, 그 밖의 법[乘] 안에는 끝내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의 법인가 하면, 법사를 가까이 하여 의지하고, 가르침을 듣고 나서 그것을 잘 생각하며, 들은 가르침대로 남에게 펼쳐서 말하고, 이 설법의 공덕을 위없는 바른 진리의 길에 회향하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의 법인가 하면, 어떤 이가 아직은 성문승에 결정적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권하여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요, 재물로써 거두어 주기도 하고 법으로써 거두어 주기도 하는 것이며, 물러나지 않는 보살의 스님에게 의지하는 것이요, 성문의 스님에게 의지하거나 성문의 덕을 구하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여래를 뵌 뒤에 염불(念佛)을 닦으면 이것을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고, 가르침을 들은 뒤에 염법(念法)을 닦으면 이것을 가르침에 귀의한다 하며, 여래의 성문 스님을 본 뒤에 보리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이것을 스님에게 귀의한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만일 보살이 항상 부처님과 함께하기를 원하면서 보시를 행하면 이것을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고, 바른 법을 수호하면서 보시를 행하면 이것을 가르침에 귀의한다 하며, 이 보시를 위없는 도에 회향하면 이것을 스님에게 귀의한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착한 장부의 업[善丈夫業]을 짓는 것이니, 착하지 않은 장부의 업은 짓지 않느니라.
장자야, 어떤 것을 착한 장부의 업이요 착하지 않은 장부의 업이 아니라 하는가 하면, 장자야, 이 집에 있는 보살이 법대로 쌓고 모은 돈과 재물과 봉읍(封邑)은 법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게 구하지 않음이 없어서 추악하게 구하지 않으며, 남을 핍박하지도 않고 법대로 얻은 봉읍에 대하여도 무상(無常)하다는 생각을 내면서 견고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기뻐하면서 버리되 인색함이 없고, 부모와 처자와 노비와 모든 심부름꾼에게는 법다운 재물로써 베풀어주며, 친한 벗과 권속과 잘 아는 이가 된 연후에는 법을 보시하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큰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온갖 모든 중생들의 무거운 짐과 성문․연각의 짐을 짊어지고 중생을 교화하되 고달파하거나 게으름이 없는 것이니라. 또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들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익되는 것이거나 손해되는 것이거나, 뒤에서 헐뜯거나 뒤에서 찬양하거나, 앞에서 칭찬하거나 앞에서 비방하거나, 괴로운 것이거나 즐거운 것이거나 간에 동요하지 않으면서 세간의 법을 초월하고, 재물이 풍부하여 한량없으면서도 교만하거나 방일함이 없으며, 이익과 명예를 잃는다 해도 근심함이 없고 업행(業行)을 잘 관찰하면서 바른 행을 수호하며 계율을 깨뜨린 이를 보아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
또 나아갈 바의 모든 것에서는 생각하는 바에 잘 머무르고 경솔한 행동을 없애면서 지혜를 만족시키며 다른 이의 일을 도와 이루게 하면서 자기의 할 일을 버리고 바라는 바가 없이 일을 해 주면서 그 중간에 그만두지도 않고 은혜를 알아 은혜를 기억하며, 그를 위하여 할 일을 잘하고 가난한 이에게는 봉록(封祿)을 베풀며, 세력이 있는 이에게는 큰 교만을 꺾어버리고, 세력이 없는 이에게는
달래면서 위로하여 주며 다른 이의 근심 화살을 없애주고 하열한 이가 하는 일은 참고 견디며 교만한 마음과 잘난 체함[憎上慢]을 버리는 것이니라.
또 법을 많이 들어 아는 이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친근하면서 밝은 지혜를 물으며, 보는 바는 올바르고 하는 행은 자연 그대로요 인위(人爲)를 보탬이 없으며, 현혹됨이 없고 모든 중생에게 탐애를 짓는 일이 없으며, 선행을 닦되 만족해 함이 없고 법을 많이 들어 앎에 싫증냄이 없으며, 짓는 일이 견고하여 성현(聖賢)과 같이 하고, 성인이 아닌 이에게는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며 친한 벗과는 사이가 견고하고 원수나 친한 이에게 똑같이 대하며,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고 온갖 법에 있어서 인색함이 없는 것이니라.
또 들은 대로 열어 보이고 들은 것의 이치를 생각하며 모든 욕락(欲樂)에 대하여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고 몸을 탐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목숨은 마치 이슬과 같다고 보며 재물에 대하여는 마치 변화하는 구름과 같다는 생각을 내고, 아들과 딸에 대하여는 감옥에 갇힌 것과 같다는 생각을 내며, 권속에 대하여는 괴롭다는 생각을 내고, 논밭과 집에 대하여는 죽은 시체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구하는 재물에 대하여는 선근(善根)을 무너뜨린다는 생각을 내고, 그 집 안에 있을 적에는 얽매여 갇혀 있다는 생각을 내며, 친족(親族)에 대하여는 옥졸(獄卒)이라는 생각을 내고, 밤이나 낮에 대하여는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내며, 견고하지 않은 몸[身]에 대하여는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堅施想]을 내고 견고하지 않은 목숨[命]에 대하여도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내며, 견고하지 않은 재물[財]에 대하여도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그 무엇을 견고하지 않은 몸에 대하여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낸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이가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모두 다 그를 위하여 일을 하면서 몸을 부리는 것이니 이것을 견고하지 않은 몸에 대하여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라 하고, 본래의 선행을 잃지 않고 선근을 더욱 드러나게 하는 이것을 견고하지 않은 목숨에 대하여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라 하며, 간탐과 인색함을 항복받으면서 보시를 행하는 이것을 견고하지 않은 재산에 대하여 견고하게 보시하겠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在家菩薩]이 이와 같이 착한 장부의 행[善丈夫行]을 닦고 쌓는다 하나니, 모든 여래에 대하여 온갖 허물이 없으므로 상응한 말[相應語]이라 하고, 법을 설하는 말[法語]이라 하며, 다른 생각 없이 위없는 도[無上道]에 향하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마땅히 착한 계율을 받아야 하나니 이른바 다섯 가지 계율[五戒]이 그것이니라.
그는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 일을 좋아하면서 칼과 몽둥이를 놓아 버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니면서 서원이 견고하며, 일체 중생들을 죽이지 않고 온갖 것을 괴롭히지 않으며,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면서 항상 인자한 마음을 행하는 것이니라.
그는 도둑질을 하지 않아야 하나니, 자신의 재물에만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이의 재물에 대하여는 바라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탐욕을 없애버리고,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다른 이의 봉록(封祿)에 대하여 탐착을 내지 않고, 풀잎에 이르기까지도 주지 않으면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라.
그는 삿된 음행[邪婬]을 여의어서 자기의 아내만을 만족하게 여기고 남의 아내를 바라지 않으며, 음흉한 마음으로써 다른 여인의 모습을 보지 않고, 그 마음은 싫증을 내며 한결같이 괴롭게 여기면서 마음에서 항상 저버릴 것이요, 또 자기의 아내에 대해서도 음행하고 싶은 생각이 나면 마땅히 깨끗하지 않고 놀라고 두렵다는 생각을 내면서 ‘이것은 번뇌[結使]의 힘이다. 그러므로 음행을 한다는 것은 내가 행할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하며, 항상 무상하다는 생각과 괴롭고 나가 없다는 생각과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을 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 사람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음욕의 생각까지도 내지 않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둘이 어울려서 몸을 서로 어루만지고 접촉하겠는가?’라고 해야 하느니라.
또 마땅히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진리의 말과 진실한 말만을 하고, 말한 그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이를 속이지 않아야 하며, 착한 마음을 성취하여 먼저 생각하고 나서 행하며 보고들은 바를 사실대로 말하고, 법을 수호하면서 차라리 몸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그는 술 먹는 일을 여의어서 취하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으며, 허망한 말을 하지도 않고 스스로 경솔하게 굴지도 않으며, 조롱하거나 떠들어대지도 않고 서로 강제로 끌어당기지도 않아야 하며, 마땅히 바른 생각에 머문 뒤에야 서로 사귀는 것이니라.
만일 마음에 온갖 재물을 버리고자 하면 밥을 구하는 이에게는 밥을 주고, 마실 것을 구하는 이에게는 마실 것을 주되, 다른 이에게 보시할 때에는 마땅히 생각하기를 ‘지금의 이것이 단바라밀(檀波羅蜜:布施波羅蜜)이다. 그가 바라는 바대로 나는 베풀어주어야 한다. 또 나는 마땅히 구하는 이로 하여금 만족하게 하여야 하므로 만일 그에게 술을 보시하여 그 사람을 포섭해야 한다면 바른 생각을 얻고 속이거나 미혹됨이 없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욕심을 모두 만족하게 함이 바로 단바라밀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장자야, 그러므로 보살은 술을 남에게 보시한다 하여도 부처님에 대하여는 허물이 없느니라.
장자야, 만일 집에 있는 보살이 이 다섯 가지 계율을 받아 지니는 공덕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니라.
또 다시 이간질하는 말을 여의어야 하고, 만일 서로 다투는 일이 있으면 화합시켜야 하며, 나쁜 말을 여의고 애정 어린 부드러운 말을 하면서 먼저 문안하고 남을 헐뜯거나 욕하지 않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말과 법다운 말과 때에 알맞은 말과 진실한 말과 평등하게 여기는 말과 조복하는 말과 실없이 웃는 일이 없는 말을 해야 하고, 말한 그대로 행동하면서 탐욕이나 어리석은 생각을 내지 않으며 항상 모두를 편안하게 하면서 마음으로 헐뜯지 않고, 언제나 인욕의 힘을 닦으면서 스스로 장엄하며, 항상 바른 소견으로 모든 삿된 소견을 여의면서 그 밖의 천신(天神)에게 예배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께만 공양해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촌락에 있거나 성읍이나 군현(郡縣)에 있거나 간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머무는 곳마다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믿지 않는 중생이면 권하고 인도하여 믿게 하고, 효도를 하지 않는 중생이나 부모와 사문과 바라문을 모르는 이나 어른과 어린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 두려워하여 피하는 일이 없는 이들이면 권하여 효도하고 순종하게 하느니라.
또 견문이 적은 이면 권하여 견문이 많게 하고 간탐을 부리는 이면 보시하기를 권하며, 계율을 깨뜨린 이면 지키도록 권하고 성을 내는 이면 인욕하기를 권하며, 게으른 이면 정진하기를 권하고, 생각이 산란한 이면 선정 닦기를 권하며, 지혜가 없는 이면 지혜 닦기를 권할 것이요, 가난한 이에게는 재물을 대주고 병든 이에게는 약을 베풀며, 보호할 이가 없는 이에게는 보호자가 되어 주고, 돌아갈 데가 없는 이에게는 돌아갈 데가 되어 주며, 의지처가 없는 이에게는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이나, 그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모든 처소에서마다 이런 법을 기억하고 행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장자야, 이와 같이 보살은 낱낱이 권하고 인도하여 일곱 번째에 이르기까지 중생으로 하여금 덕행(德行)에 머무르게 하려 하나 이러한 어느 곳에서도 머물게 할 수 없었다면 이 보살은 이 중생에 대하여 마땅히 대비(大悲)를 내면서 온갖 지혜의 장엄(莊嚴)을 굳게 일으켜야 하느니라.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만일 이 나쁜 중생을 조복하지 못하면 나는 끝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나는 이들을 위하여 서원의 장엄을 일으킨 것이요, 아첨함이 없고 거짓이 없고 계율과 덕행을 갖춘 그런 이들을 위하여 큰 장엄을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부지런히 이와 같은 정진을 일으켜 짓는 것이 헛되지 않아 중생들이 나를 보면 곧 믿음과 공경심을 얻게 하리라’고 할 것이니라.
장자야, 만일 보살이 이러한 성읍과 촌락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중생을 교화하지 않아 나쁜 길[惡道]에 떨어지게 한다면 이 보살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게 되느니라.
장자야,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장엄하고 크게 장엄하면서 ‘나는 이제 당연히 이러한 행을 수행하여 모든 성읍과 촌락과 군현에 머무르면서 한 사람도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장자야, 마치 성읍에 훌륭한 의사가 있어도 한 중생이라도 병이나 독으로 죽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는 것처럼, 장자야, 만일 이 보살이 어느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지 않아 나쁜 길에 떨어지게 한다면 이 보살은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게 되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학행(學行)을 잘 닦는다 해도 이른바 집[家]이란 선근을 죽인다 하고 선행을 돕는 일을 해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집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있다[在]고 하는가 하면 온갖 번뇌가 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하느니라.
또 착하지 않은 생각에 머무르기 때문이요, 조복하지 않은 데에 머무르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어리석은 범부에 머무르고, 착하지 않는 행인 모든 나쁜 허물에 머무르기 때문에 집이라 하느니라. 또 집에 있으면 온갖 괴로움이 모두 그 안에 있으면서 나타나고 먼저 지었던 선근을 해치기 때문에 집에 있다고 하느니라.
또 다시 집이란 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모든 나쁜 일을 짓지 않음이 없고 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부모와 사문과 바라문에 대하여
잘 공경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나니 이것을 집이라 하느니라. 또 다시 집이라 함은 자라나는 애욕의 가지와 줄기와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 등이 모두 이 안에 있으면서 생기고, 살육과 속박을 불러모으며, 꾸짖고 때리고 성을 내고 욕설을 퍼붓고 나쁜 말이 나오게 하기 때문에 집이라 하느니라.
아직 짓지 못한 선근은 흔들려서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선근은 모두 흩어져 없어지게 하므로 지혜 있는 이들의 꾸지람을 받게 되나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성문들이니라. 또 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나쁜 길에 떨어지고 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 때문에 집이라 하느니라. 또 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계율의 무더기[戒聚]와 선정의 무더기[定聚]와 지혜의 무더기[慧聚]와 해탈의 무더기[解脫聚]와 해탈지견의 무더기[解脫知見聚]를 방해하고 폐지시키기 때문에 집이라 하느니라.
또 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부모와 처자와 자매와 친우와 권속과 아는 이들에게 탐애로써 거두어 주게 되고 항상 재산을 생각하면서 탐욕에 만족할 줄 모름이 마치 바다가 많은 흐름을 다 삼키면서도 끝내 만족해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또 집에 머물러 있으면 마치 불이 땔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고, 생각하는 것이 정해짐이 없음은 마치 바람이 머무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집에 있으면서 몸을 녹게 함은 마치 독약을 먹은 것과 같아서 온갖 괴로움이 모두 다 따르나니, 이 때문에 원수를 여의듯이 버려야 하느니라.
또 집에 머물러 있으면 성인의 법에 장애가 되고 다투는 일이 많이 일어나면서 항상 서로가 거슬리게 되며, 또 집안에 머물러 있으면 좋고 나쁜 일들이 뒤섞여서 여러 가지 할 일들이 많아지고, 집에 있으면 덧없어서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되므로 이것이 정지하지 않는 법이며, 집에 있으면 몹시 애쓰면서 구하고 수호하게 되므로 여러 가지의 근심과 걱정을 하면서 원수와 친한 이에 관한 일들이 많아지느니라.
또 집에 있으면 나[我]가 없는데도 뒤바뀌어서 내 것이라고 헤아리게 되고, 집에 있으면 미혹되어서 진실한 일이 없는데도 진실인 것처럼 나타나며, 집에 있으면 많은 사람을 이별하고 전송하는 처소가 되느니라. 또 집에 있는 것은 마치 요술로써 많이 받아들이고 쌓는데도 실제의 중생이 없는 것과 같고, 집에 있는 것은 마치 꿈에 흥성함과 쇠망함이 번갈아 드는 것과 같으며, 집에 있는 것은 마치 이슬이 속히 부서지면서 떨어져버리는 것과 같으니라.
또 집은 마치 꿀물과 같아서 잠깐 동안 맛을 내기 때문이요, 집은 마치 가시로 된 그물과 같아서 빛깔[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에 탐착하기 때문이며, 집은 마치 침[針]과 같은 입을 가진 벌레와 같아서
음식 맛을 잘 모르기 때문이요, 집은 마치 독사와 같아서 서로서로 침범을 하기 때문이며, 집은 바라는 바가 많아서 마음이 망설여지기 때문이요, 집에 있으면 두려움이 많음은 왕과 도둑과 물과 불에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며, 집에서 논의(論議)가 많음은 허물과 근심이 많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지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을 집을 잘 안다[善知家]고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집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마음을 잘 조복하면서 보시하고, 분별하여 유연하게 이렇게 관찰하나니, ‘만일 그에게 보시하고 나면 그것은 나의 소유(所有)겠지만 그 외의 집 안의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미 보시한 것은 견고해지지만 그 밖의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미 보시한 것은 이후에 즐거움이 오겠지만 그 밖의 것은 현재만 즐거움을 받는다. 이미 보시한 것은 애욕의 속박을 받지 않지만 그 밖의 것은 애욕을 증가시킨다. 이미 보시한 것은 내 것이라는 마음이 없지만 그 밖의 것은 나의 소유이다. 이미 보시한 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지만 그 밖의 것은 두려움이 있다. 이미 보시한 것은 바로 도(道)의 기초요 기둥이지만 그 밖의 것은 바로 악마의 기둥이다.
이미 보시한 것은 다함이 없지만 그 밖의 것은 다함이 있다. 이미 보시한 것은 즐겁지만 그 밖의 것은 수호하면서 괴로울 뿐이다. 이미 보시한 것은 번뇌[結]을 여의었지만 그 밖의 것은 번뇌를 증가시킬 뿐이다. 이미 보시한 것은 크고 거대하지만 그 밖의 것은 거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보시한 것은 바로 장부의 일이지만 그 밖의 것은 장부의 일이 아니다. 이미 보시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칭찬을 받게 되지만 그 밖의 것은 범부의 칭찬을 받게 될 뿐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견고하게 보시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만일 구걸하는 이를 보면 세 가지 생각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잘 아는 이라는 생각이요, 다른 세상에 부자가 된다는 생각이며, 보리의 기초가 된다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나니, 여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생각이요, 과보를 바란다는 생각이며, 악마를 항복받는다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나니, 구하는 이에 대하여 친우요 권속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4섭법(攝法)으로 거두어 준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그지없는 생(生)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이 세 가지의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탐욕을 없앤다는 생각이요, 성냄을 없앤다는 생각이며, 어리석음을 없앤다는 생각이니, 이런 세 가지의 생각을 내느니라. 왜냐하면 장자야, 이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 같이 작아지고 엷어지게 되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어떻게 세 가지의 일이 모두가 작아지고 엷어지게 되느냐 하면, 만일 재물을 보시할 때에 마음에 탐착함이 없으면 이것을 탐욕이 얇아진다고 하고, 구걸하는 이에게 인자한 마음을 내면 이것을 성냄이 엷어진다고 하며 만일 보시하고 나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회향하면 이것을 어리석음이 엷어진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이것을 보시하는 이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진다고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구걸하는 이를 본 뒤에는 6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어떤 것을 6바라밀이라 하는가 하면, 만일 이 보살이 소유한 어느 물건에라도 보시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을 단나(檀那)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고 하고, 보리의 마음에 의거하여 보시하면 이것을 시라(尸羅)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고 하며, 구걸하는 이에게 성을 내거나 꾸짖지 않으면 이것을 인욕(忍辱)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고 하느니라.
만일 보시할 때에 자기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정진(精進)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 하고, 또 보시하고 나서 마음에 근심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갑절 더 기뻐하면 이것을 선정(禪定)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 하며, 또 보시한 뒤에 모든 법을 얻지 않고 과보를 바라지 않으면서 이 지혜가 밝은 이는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고 머무른 바가 없음에 따라 위없는 도에 향하면 이것을 반야(般若) 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 하느니라. 이것을 보살이 구걸하는 이를 보고 6바라밀을 닦아 나아가면서 만족시킨다고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세간의 여덟 가지의 법을 놓아 버리겠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그 사람은 집의 재산과 처자에 대하여 근심하거나 기뻐하지 않으면 가령 잃는다 하여도 근심하지 않으면서 관찰해야 하느니라.
‘유위(有爲)는 마치 환술과 같아서 이는 허망한 생각의 모양이다.
부모와 처자와 노비와 하인이며 친우와 권속 등은 모두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나는 이들을 위하여 착하지 않은 업을 짓지 않겠으며 이는 내가 마땅히 할 일이 아니다. 이들은 현재의 반려(伴侶)요, 다른 세상의 반려가 아니며, 이들은 즐거울 때의 반려요, 괴로울 때의 반려가 아니므로 나는 그들을 보호하거나 내가 보호할 일이 아니다. 보시로 사람을 조복하고 지혜로 정하면서 방일하지 않는 일과 보리를 돕는 법[助菩提法]과 모든 선근들의 이것이 바로 나의 소유이다.
내가 가는 곳을 따라 그들도 따라갈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와 처자와 남녀의 권속과 아는 이와 심부름꾼도 나를 구제하지 못하고, 내가 돌아가 의지할 곳도 아니요, 나의 집[舍宅]도 아니고 나의 섬[洲渚]도 아니며, 나를 가려 주는 그늘도 아니요 나와 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음(陰)․계(界)․입(入)은 나와 내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부모와 처자가 나의 소유가 되겠는가? 부모와 처자는 이 업으로 그렇게 된 바라 나의 착한 업과 나쁜 업으로 역시 따르면서 과보를 받는 것이요, 그들도 역시 업을 따르면서 선악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장자야, 이 보살은 가거나 오거나 앉거나 일어나거나 간에 항상 이런 일을 관찰하면서 부모와 처자 권속과 노비․하인들을 위하여 몸과 입과 뜻의 나쁘고 착하지 않은 업은 털끝만큼도 짓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자기의 아내에 대하여 세 가지의 생각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무상하다는 생각이요, 변하고 바뀐다는 생각이며, 무너지고 부서진다는 생각이니라.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자기의 아내에 대하여 세 가지의 생각을 낸다고 하느니라.
집에 있는 보살은 자기의 아내에 대하여 다시 세 가지의 생각을 내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이는 재미있게 즐기는 반려요 다른 세상에서의 반려가 아니며, 이는 음식을 먹을 때의 반려요 업보(業報)의 반려가 아니며, 이는 즐거울 때의 반려요 괴로울 때의 반려가 아니라는 생각이니,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자기의 아내에 대하여 내는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좋지 않다는 생각이요, 냄새나고 더럽다는 생각이며, 미워해야 한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원수라는 생각이요, 망나니라는 생각이며, 거짓 친한 이라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나찰(那刹)이라는 생각이요, 비사차(毘舍遮)라는 생각이며, 도깨비[鬼魅]라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이요, 받아들일 이가 아니라는 생각이며, 구걸하는 이라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몸의 악행을 지녔다는 생각이요, 입의 악행을 지녔다는 생각이요, 뜻의 악행을 지녔다는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욕각(欲覺)이라는 생각이요, 진각(瞋覺)이라는 생각이며, 해각(害覺)이라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캄캄하고 어둡다는 생각이요, 계율을 더럽힌다는 생각이며, 얽어맨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계율을 장애한다는 생각이요, 선정을 장애한다는 생각이며, 지혜를 장애한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아양을 부리면서 비위를 맞춘다는 생각이요, 덫이고 그물이라는 생각이며, 고양이처럼 틈을 노린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재앙과 우환이라는 생각이요, 뜨거운 번뇌라는 생각이며, 병들고 어지럽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귀여움을 받으려고 애교를 부린다는 생각이요, 쇠퇴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며, 서리와 우박과 같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병들었다는 생각이요, 늙었다는 생각이며, 죽는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악마라는 생각이요, 악마의 딸이라는 생각이며, 두려워할 만하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근심스럽다는 생각이요, 울고 싶다는 생각이며, 괴롭게 군다는 생각이니, 이것을 세 가지의 생각이라 하느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큰 암컷이라는 생각이요, 마갈어(摩竭魚)라는 생각이며, 큰 암고양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흑사(黑蛇)라는 생각이요, 시수어(尸守魚)라는 생각이며, 정기(精氣)를 빼앗는다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구제할 이가 없다는 생각이요, 돌아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며, 보호할 이가 없다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어머니라는 생각이요, 누님이라는 생각이며, 누이동생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도둑이라는 생각이요, 죽이는 이라는 생각이며, 옥졸(獄卒)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난폭하게 흐르는 물이라는 생각이요, 작고 큰 물결이라는 생각이며, 돌아 흘러 드는 물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흙탕이라는 생각이요,
진창에 빠졌다는 생각이며, 맑지 않고 흐리다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소경이라는 생각이요, 쇠고랑이라는 생각이며, 형틀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불구덩이라는 생각이요, 칼 구덩이라는 생각이며, 풀로 된 횃불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이익이 없다는 생각이요, 가시나무라는 생각이며, 독(毒)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감옥에 갇혔다는 생각이요, 귀양 가서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며, 작고 큰 칼이라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싸우고 다툰다는 생각이요, 말로써 송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며, 가두어 속박한다는 생각이니라.
또 세 가지의 생각이 있느니라. 원수끼리 만났다는 생각이요, 사랑하는 이와는 이별한다는 생각이며, 병이 들었다는 생각이니라.
요약하여 말하건대, 나아가 온갖 다투고 싸운다는 생각이요, 온갖 더럽고 혼탁하다는 생각이며, 온갖 착하지 않은 뿌리[不善根]라는 생각이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자기의 아내에 대하여 이와 같은 모습으로 관찰하고 생각해야 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자기의 자식에 대하여 극진하게 사랑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장자야, 만일 자식에 대하여 극진하게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헐뜯는 것이 되나니, 마땅히 세 가지의 법으로써 자신을 책망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보리의 도는 바로 평등한 마음이요 평등하지 않은 마음이 아니다. 보리의 도는 바른 행으로 얻게 되는 것이요 이는 삿된 행이 아니다. 보리의 도는 바로 다름이 없는 행으로 얻는 것이요 뒤섞인 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 자기의 마음을 꾸짖으면서 자기의 아들에 대하여는 원수라는 생각과 나쁜 벗이라는 생각과 잘 아는 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내며, 부처님의 지혜와 평등한 자비를 어기고 나의 선근을 해친다고 여겨야 하며, 그리고 그는 어느 곳에서라도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면서 마치 그의 아들을 사랑하듯 모두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고 마치 자기의 몸을 사랑하듯 모두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런 관(觀)을 닦아야 하느니라.
‘나는 다른 곳에서 왔고 아들도 다른 곳에서 왔다. 왜냐하면 온갖 중생은 일찍이 나의 아들이 된 일이 있었고 나 역시 그 모든 중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니, 끝내 나의 아들인 그는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죽고 나면 여섯 갈래[六趣]로 가서 다시 원수가 되기도 하고 혹은 또 아들이 되기도 하여 나와 그는 근친(近親)이나 근친이 아닌 이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그 근친에게는 갑절 더 사랑하고 주고 하면서 근친이 아닌 이에게는 모두 주지 않을 것인가? 내가 만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마음을 낸다면 근친이 아닌 이에게는 모두 주지 않게 될 것이요, 내가 만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낸다면 법에 나아갈 수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평등하지 않은 행은 평등하지 않은 곳에 이르고 평등한 행을 하면 평등한 곳에 이르기 때문이니, 나는 마땅히 평등하지 않은 행을 하지 않아야 하며 나는 온갖 중생에게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을 배우면서 빨리 일체지(一切智)에 이르리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모든 재물에 대하여 내 것이라는 생각과 거두어 수호한다는 생각을 내지도 않고 그것에 얽매이지도 않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며 번뇌[結使]를 내지도 않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만일 구걸하는 이가 그에게로 와서 구하는 바가 있으면 보시할 바의 어느 재물에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하느니라.
‘내가 그 재물을 보시하거나 보시하지 않거나 간에 그 모두는 흩어져 없어지고 소원을 만족시키지도 못하게 되며 반드시 장차 죽음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재물을 보시하지 않아도 재물이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니, 나는 이제 당연히 버려서 견고한 재물이 되게 한 연후에야 죽으리라.’
이렇게 하면서 재물을 보시하고 나면 죽을 때에도 한이 없고 기뻐하면서 후회함이 없느니라.
만일 보시할 수가 없으면 네 가지의 일로써 구걸하는 이에게 말해야 하느니라.
‘지금 나의 힘이 열악하여 아직 선근이 성숙되지 못하였고 대승 가운데서 나는 처음 수행하고 있으며, 그 마음이 아직 자유로이 보시할 만하지 못하고 나는 상(相)에 집착하여 나와 내 것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착한 장부여, 지금 당신을 향하여 후회하고 있으니 싫어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장차 이와 같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여 온갖 중생들의 원하는 바를 만족시키겠습니다.’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구걸하는 이에게 말해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과거의 부처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부처님과 성인 스님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는 마땅히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경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행(本行)과 부처님이 되기까지의 그 모든 것을 따라 기뻐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밤낮으로 각각 세 때에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청정하게 하고 청정하게 선행을 베풀면서 부끄러워함[慙愧]을 두루 갖춘 청정한 의복으로 쌓은 선근과 보리 마음으로써 따라 기뻐해야 하며, 부드럽고 착한 일로 공경하면서 교만을 끊고 3분(分)을 수행하며 3분의 법을 외우면서 전일한 마음으로 허물을 뉘우치고 모든 착하지 않은 업은 다시는 새로 짓지 않으면서 온갖 복된 일을 모두 다 따라 기뻐해야 하며, 원만한 상호(相好)를 쌓으면서 모든 부처님에게 법륜 굴리시기를 권하고 청하며, 말씀한 것은 모두 다 받아서 법을 지니며, 부처님께서 오래오래 사시면서 선근을 더욱 자라게 하고 우리의 국토도 역시 그와 같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여덟 가지 계율[八戒]을 받아 지니면서 사문(沙門)의 행을 수행하고 마땅히 계율과 덕행이 청정한 사문과 바라문을 친근하면서 의지하고 심부름을 하되 그의 허물을 보지 않아야 하며, 설령 사문이 계행을 어기는 것을 보았다 하여도 공경하지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또 여래는 바로 응공(應供)이요, 정변각(正遍覺)이며, 계행을 훈수(勳修)하셨고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훈수하셨기 때문에 가사(袈裟)에도 때가 끼지 않고 온갖 번뇌의 물듦도 모두 다 버리고 떠나셨나니, 선성(仙聖)의 당기에 갑절 더 공경하는 마음을 낼 것이며, 그 비구에 대하여는 대비의 마음을 내며, 그들은 이와 같은 나쁜 행을 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명호가 고요하고, 조복하여 모든 것을 다 아시나니, 거룩한 당기와 몸과 의복이 고요하지 않고 고르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알지 못하여 이런 그릇된 법을 짓는다 하여도, 마치 세존의 말씀과 같아서 아직 배우지 못한 이를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이니라. 이것은 그의 허물이 아니요 바로 번뇌[結使]의 허물이며, 번뇌 때문에 이런 악(惡)을 나타내고 짓는 것이니, 이 불법 안에는 벗어나는 법이 있으므로 이 사람이 잘 벗어나기만 하면 올바르게 되느니라. 만일 이 번뇌를 벗어나서 바른 관(觀)을 수행하여 첫 과위[初果]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나아가리니, 왜냐하면 지혜는 번뇌를 해(害)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세존께서 또 말씀하시되, ‘사람이란
망령되이 가볍게 굴어서는 안 되며, 남을 헤아리게 되면 자기 자신을 상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여래께서 아시는 바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그에게 성을 내거나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아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만일 승방(僧房)에 들어가다가 문에 이르게 되면 온몸을 던져 공손히 예배한 연후에야 들어갈 것이며, 그리고 다음과 같이 관찰해야 하느니라.
‘이곳은 바로 공(空)을 행하는 곳이요, 모양이 없음[無相]을 행하는 곳이며, 지음이 없음[無作]을 행하는 곳이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범행(梵行)을 행하는 곳이어서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머무르고 안락하게 하는 곳이다. 나는 언제 이 집의 때[家垢]를 버리게 될까? 나는 언제 이러한 행에 머무르게 될까?’
그리고 이와 같이 출가하려는 마음으로 집에 있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면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의 도를 닦고 쌓아야 하며, 모두가 다 출가하여 고요한 숲으로 나아가 닦고 쌓으면 위없는 바른 도를 이룰 수 있느니라.
집에 있으면[在家] 티끌의 더러움이 많지만 집을 떠나면[出家] 묘하고 좋으며, 집에 있으면 번뇌에 두루 속박되지만 집을 떠나면 거리낌이 없으며, 집에 있으면 더러운 때가 많지만 집을 떠나면 그것을 여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악(惡)이 끌어당기지만 집을 떠나면 선(善)이 끌어당기며, 집에 있으면 애욕의 진창에 빠지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애욕의 진창을 여의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범부와 함께 있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지혜 있는 이와 함께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삿된 생활을 하게 되지만 집을 청정한 생활을 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때[垢]가 많지만 집을 떠나면 때가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쇠퇴하고 손감되지만 집을 떠나면 쇠퇴하거나 손감됨이 없으며, 집에 있으면 근심에 싸여 있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기쁨이 있느니라.
집에 있으면 바로 많은 악의 비탈길이지만 집을 떠나면 비탈길을 여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얽매이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벗어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두려움이 있지만 집을 떠나면 두려움이 없으며, 집에 있으면 귀양살이로 벌을 받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벌이 없으며, 집에 있으면 우환이 많지만 집을 떠나면 우환이 없으며, 집에 있으면 번거롭고 답답하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답답함이 없느니라.
집에 있으면 구함이 많기 때문에 괴롭지만 집을 떠나면 구함이 없기 때문에 즐거우며, 집에 있으면 흔들리고 동요되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동요가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가난하여 고통을 받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고통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겁이 많이 나지만 집을 떠나면 겁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하천(下賤)하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존귀(尊貴)하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떠들썩하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고요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지만 집을 떠나면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며, 집에 있는 사람은 윤택한 정기(精氣)가 없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크게 윤택함이 있으며, 집에 있으면 맺어짐[結]의 즐거움이 있지만 집을 떠나면 사라짐[滅]의 즐거움이 있으며, 집에 있으면 어그러짐이 더하지만 집을 떠나면 어그러짐이 없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작은 법을 이루지만 집을 떠나면 큰 법을 이루게 되며, 집에 있으면 조복하지 못하지만 집을 떠나면 조복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계율을 여의지만 집을 떠나면 계율을 수호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눈물과 젖과 피의 바다를 더욱 자라게 하지만 집을 떠나면 눈물과 젖과 피의 바다를 바짝 마르게 하느니라.
집에 있는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성문과 연각의 꾸지람을 받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성문과 연각의 칭찬을 받게 되며, 집에 있는 사람은 만족함이 없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만족할 줄을 알며, 집에 있으면 악마가 기뻐하지만 집을 떠나면 악마가 근심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항복받지 못하지만 집을 떠나면 항복받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종이 되지만 집을 떠나면 상전이 되며, 집에 있으면 생사(生死)의 끝에 있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열반의 끝에 있게 되며, 집에 있으면 나쁜 구렁에 빠지지만 집을 떠나면 그 구렁에서 벗어나며, 집에 있으면 어둡고 캄캄하지만 집을 떠나면 환히 빛나게 되며, 집에 있는 사람은 감관이 자재(自在)하지 않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모든 감관이 자재하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미치고 방일해지지만 집을 떠나면 방일해지지 않게 되며, 집에 있으면 상응(相應)하지 않지만 집을 떠나면 상응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낮게 보지만 집을 떠나면 훌륭하게 보게 되며, 집에 있으면 경영하는 일이 많지만 집을 떠나면 경영하는 일이 적으며, 집에 있으면 세력이 적지만 집을 떠나면 세력이 크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아부하고 마음이 비굴해지지만 집을 떠나면 바르고 곧게 되며, 집에 있으면 근심이 많지만 집을 떠나면 근심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화살과 함께 있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화살을 제거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병이 들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병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노년(老年)이 되는 법이지만 집을 떠나면 장년(壯年)이 되는 법이니라.
집에 있으면 방일하는 생활을 하지만 집을 떠나면 지혜를 닦는 생활을 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속고 거짓되지만 집을 떠나면 거짓된 일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하는 일이 많지만 집을 떠나면 하는 일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독이 든 그릇일 뿐이지만 집을 떠나면 감로(甘露)가 든 그릇이 되며, 집에 있으면 재환(災患)이 있지만 집을 떠나면 재환이 없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놓아버리지 않지만 집을 떠나면 놓아 버리게 되며,
집에 있는 사람은 독이 있는 과일을 취하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독이 없는 과일을 취하게 되며, 집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은 것과 상응하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주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은 것과 상응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어리석음으로 무겁지만 집을 떠나면 지혜로 가볍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방편을 잃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방편이 청정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올바른 뜻을 잃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올바른 뜻이 청정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지극한 뜻을 잃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지극한 뜻이 청정하게 되며, 집에 있는 사람은 구제자가 되지 못하지만 집을 떠나면 구제자가 되어 주며, 집에 있으면 궁색한 일을 짓고 있지만 집을 떠나면 궁색한 일을 짓지 않느니라.
집에 있으면 방사(房舍)가 되어 주지 못하지만 집을 떠나면 방사가 되어 주며, 집에 있으면 돌아갈 곳이 되어 주지 못하지만 집을 떠나면 돌아갈 곳이 되어 주며, 집에 있으면 성을 많이 내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인자한 마음을 많이 내게 되며, 집에 있으면 짐을 지고 있지만 집을 떠나면 짐을 버리게 되며, 집에 있으면 온갖 다툼이 다하지 않지만 집을 떠나면 다툼이 다하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허물이 있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허물이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하는 일이 바쁘지만 집을 떠나면 하는 일이 한가롭게 되며, 집에 있으면 뜨거운 번뇌에 시달리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번뇌를 여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원수가 많지만 집을 떠나면 원수가 없게 되며, 집에 있으면 쌓고 모으지만 집을 떠나면 쌓는 일이 없느니라.
집에 있으면 재물이 견고하여지지만 집을 떠나면 덕(德)이 견고하여지며, 집에 있으면 근심과 함께하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근심이 고요하여지며, 집에 있으면 닳아 없어지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더욱 더 불어나게 되며, 집에 있는 것은 얻기가 쉽지만 집을 떠난 사람은 억 겁 동안이라도 얻기 어려우며, 집에 있다는 것은 업을 짓기가 쉽지만 집을 떠나면 업을 짓기 어려우니라.
집에 있는 것은 흐름을 따르는 것이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며, 집에 있는 것은 흐름을 따라 있는 것이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배와 뗏목이 되는 것이며, 집에 있는 것은 강물에 매어있는 것이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강물을 건너는 것이 되며, 집에 있는 것은 이 언덕이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 되는 것이며, 집에 있으면 얽매이고 속박되지만 집을 떠나면 그런 속박을 여의게 되느니라.
집에 있으면 혐오하고 원망하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원한이 고요해지며, 집에 있으면 나라의 법을 따라 살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부처님의 법에서 살게 되며, 집에 있으면 애욕에 물들고 더럽혀지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물듦을 여의게 되고, 집에 있으면 살아가느라 고생이 되지만 집을 떠나면 사는 데에 즐거움이 있느니라.
집에 있으면 얕고 가깝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깊고 멀게 되며, 집에 있으면 반려(伴侶)를 얻기가 쉽지만 집을 떠나면 반려를 얻기가 어려우며, 집에 있으면 아내가 반려가 되지만 집을 떠나면 마음이 반려가 되며, 집에 있으면 일들이 바쁘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일들을 여의게 되며, 집에 있으면 남을 핍박하고 괴롭게 굴지만 집을 떠나면 남을 즐겁게 하느니라.
집에 있으면 재물로 보시하지만 집을 떠나면 법으로 보시하게 되며, 집에 있으면 악마의 당기를 가지게 되지만 집을 떠나면 부처님의 당기를 가지게 되며, 집에 있는 것은 소굴(巢窟)이 되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소굴을 여의게 되며, 집에 있는 것은 그릇된 길이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그릇된 길을 여의게 되며, 집에 있는 것은 빽빽한 숲이지만 집을 떠나면 이런 숲을 여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점차로 생각하면서 나는 항하의 모래만큼 많이 큰 제사를 지내어 모든 중생을 위하여 하루 동안에 모두 다 보시하고는 잘 조복된 법 가운데서 출가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견실한 보시여서 이미 마치고 만족한 것이니, 나는 이제 마땅히 계율과 견문[聞]을 굳게 닦아야겠다고 하느니라.
그는 승방(僧房)에 들어가서 여래의 탑에 예배할 때는 세 가지 생각을 내느니라.
‘나도 역시 이와 같이 공양함을 얻으리라. 나도 역시 장차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겨 사리를 머물러 두게 하리라. 나는 이와 같이 배우고 이와 같이 행하고 이와 같이 정진하여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리라.’
설령 온갖 부처님의 모든 일을 지은 뒤에 여래같이 열반에 든다 하더라도 이 승방에 들어가면 온갖 모든 비구를 관찰하느니라.
‘누가 법을 많이 들어 아는 이이고, 누가 설법하는 이이며, 누가 계율을 지니는 이이고, 누가 아함(阿含)을 지니는 이이며, 어떠한 비구들이 보살장(菩薩藏)을 지니고 있고, 누가 아란야[阿練兒]에 있는 이이며, 어떠한 비구들이 욕심이 적고 걸식하고 있으며, 누더기를 이고 혼자 있으면서 욕심을 여의고 있는가? 누가 수행하는 이이고, 누가 좌선(坐禪)하는 이이며, 누가 일을 경영하는 이이고 누가 사주(寺主)인가?’
그리고 모두 그들의 행을 관찰하면서 어느 누가 욕심을 따르더라도 비방하거나 꾸짖지 않느니라.
또 절에 있거나 마을에 갔을 적에 할 말이 있으면 입의 업[口業]을 잘 수호할 것이요, 또 어떤 비구로서 옷과 발우와 병의 치료약이 모자라서 구하게 되면 그에게 알맞게 주면서 성을 내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하늘과 사람들은 질투하는 번뇌가 있으므로 갑절 더 그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니라. 범부의 마음은 아라한이 아니요,
범부는 허물을 일으키므로 아라한이 아니니라.
그가 법을 많이 들어 아는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견문을 닦기 위해서요, 설법하는 이를 가까이하는 것은 수행이 결정되게 하기 위해서이며, 계율을 지닌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번뇌[結使]를 조복하여 범하는 데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보살장(菩薩藏)을 지니고 배우는 이에게 가까이 하는 것은 6바라밀을 수행하고 방편을 닦기 위해서이며, 아란야를 가까이 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을 닦고 배우기 위해서요, 수행하는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닦고 배우기 위해서이니라.
만일 어떤 비구로서 아직 결정된 지위에 있지 못한 이가 옷을 구하면 옷을 베풀어주고 발우를 구하면 발우를 베풀어주면서 그 비구에게 위없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것은 수승한 곳[勝處]이 아닌 재물의 법으로써 그를 거두어 주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이와 같이 사문(沙門)의 행을 잘 알고서 만일 사문이 싸우거나 다투게 되면 그들을 화합시키며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바른 법을 수호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병든 비구를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의 살과 피를 버려서라도 그의 병을 낫게 해야 하느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아직 보시하는 마음이 열리지 못했으면 먼저 다른 이에게 청하여 보시하고 나서 마음에 후회함이 없으며, 온갖 선(善)의 근본은 보리의 마음으로써 우두머리를 삼느니라.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집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행하면서 보리를 돕는 법[助菩提法]을 잊지도 않고 잃지도 않으며, 현재의 법에서 물듦이 없이 더욱 수승한 법을 얻느니라.”
그때에 욱가 장자와 모든 장자들은 모두가 소리를 같이하여 기뻐하면서 찬탄하였다.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집에 있는 이의 허물을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집을 떠난 이의 계행(戒行)과 집을 떠난 이의 공덕을 알지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역시 집에 있는 이의 많은 허물과 집을 떠난 이의 덕(德)이 큼을 관찰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출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출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니, 한결같이 행을 청정하게 해야만 하느니라.”
그때에 모든 장자들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실로 거룩한 가르침 그대로이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출가(出家)를 허락해주십시오.
마땅히 가르침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곧 출가를 허락하시면서 미륵(彌勒) 보살과 온갖 청정한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장한 장부들은 그들로 하여금 출가하게 하라.”
그때에 미륵 등은 9천(千)의 장자로 하여금 모두 다 출가하게 하였으므로 이 장자들은 출가한 이의 계(戒)를 받았으며, 이때에 다시 천 명의 장자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그때에 욱가 장자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미 집에 있는 이의 허물과 공덕을 말씀하셨나이다.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출가한 보살의 계율과 견문으로 인한 공덕의 행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어떻게 보살은 착하고 묘한 법 가운데서 조복하여 출가하고는 예배하고 일어나고 머무르고 가고 오고 나아가고 그치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잘 생각해 보도록 하여라. 너를 위하여 말해 주리라. 출가한 보살은 이와 같이 배우고 이와 같이 머무르고 행해야 하느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들면서 듣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나는 무슨 인연으로 업(業)을 버리고 출가한 것인가? 지혜를 닦기 위하여 부지런히 더욱 정진하면서 마치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할 것이다.’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나는 이제 4성종(聖種)에 머물러서 즐겁게 두타(頭陀)를 행하여야 한다.’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4성종을 닦느냐 하면, 이 출가한 보살은 가지고 있는 옷 그대로 만족할 줄 알고 만족할 줄 앎을 찬미할 것이요, 옷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여서는 안 되느니라. 만일 옷을 얻지 못하면 생각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고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 것이요, 설령 옷을 얻게 된다 해도 마음에 집착을 내지 말며, 비록 그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얽매이거나 집착함이 없으면서 탐내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말아야 하며, 그의 허물을 알고 벗어날 줄 알면서 그것 그대로 만족할 줄 알며 자신을 칭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이는 걸식한 그대로 덮는 옷(敷具) 그대로 만족할 줄 알고 찬미할 것이요, 덮는 옷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여서는 안 되느니라.
만일 얻지 못하면 기억하지도 않고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 것이요, 얻게 된다 해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물듦이 없으며 아끼거나 얽매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의 허물을 알고 벗어날 줄 알면서 그것 그대로 만족할 줄 알며 끝내 자신을 칭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끊기를 좋아하고 여의기를 좋아하고 닦아 익히기를 좋아하며, 이 끊기를 좋아하고 여의기를 좋아하고 닦아 익히기를 좋아하면서 자기 자신을 칭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머무르는 4종성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열 가지 공덕으로 몸에 옷을 입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요, 몸의 형상을 가리기 위해서이며, 모기와 등에 때문이요, 바람의 사나움을 가리기 위해서이며, 부드러운 감촉을 위해서도 아니고 좋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니라. 그리고 사문에 대한 계상(戒相)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이요, 모든 사람․하늘․아수라 등으로 하여금 탑(塔)이라는 생각을 내게 하기 위하여 받아 지니는 것이며, 해탈에 물들면서 욕심에 물든 옷이 아니요 고요함에 마땅한 것이고 번뇌에 마땅한 바가 아니므로 이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이며, 모든 악(惡)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착한 업을 닦으면서 좋게 하기 위하여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이 아니며, 성인의 도(道)를 알고 나서 ‘나도 이와 같이 지으리라’고 하면서 한 생각 동안이라도 물들어 집착하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열 가지 일의 공덕으로 몸에 옷을 입는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열 가지 일을 보는 까닭에 그의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걸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나는 이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요, 다른 이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밥을 보시하면 반드시 3귀의처(歸依處)에 편히 머무르게 한 연후에야 밥을 받을 것이요, 만일 밥을 보시하지 않는다면 이 중생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서 그 중생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여 이 중생으로 하여금 할 일을 다 마치게 한 뒤에야 그 밥을 먹을 것이니라.
또 나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것은 만족한 근본의 인(因)을 심기 위해서이며, 교만을 항복받음으로써 정수리를 볼 수 없는 인연[無見頂因緣]을 쌓기 위해서이며,
여인이나 장부인 남녀를 위해서가 아니며, 함께 화합하려는 까닭에 평등하게 걸식하며,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내며, 온갖 지혜의 장엄한 도구를 쌓기 위한 까닭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이 열 가지 이익을 보고서 수명이 다하도록 걸식하는 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만일 어떤 이가 지극한 마음으로 공손히 믿고 와서 청하면 그 때에는 가야하며, 만일 청하는 이가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지 않으면 자기의 이익과 그에 대한 이익의 인연이 있음을 관찰한 뒤에야 곧 가야 할 것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열 가지의 이익을 보는 까닭에 끝내 아란야의 처소를 버리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자유자재로 제거하기 때문이요, 나의 지님이 없기 때문이며, 침구에 대한 욕망을 버리기 때문이요, 고요하여 애욕이 없기 때문이며, 처소에 이익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요, 아란야의 처소에서 몸과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며, 많은 시끄러움을 버리기 때문이요, 여래의 법 가운데에서 할 일을 하기 때문이며, 고요하게 안정되어 뜻에 맞기 때문이요, 생각을 오로지 하면서 장애가 없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열 가지 공덕의 이익을 보는 까닭에 목숨이 다하도록 아란야의 처소를 버리지 않는다 하느니라.
장자야, 만일 아란야의 처소에서 법을 듣기 위하여, 또는 화상(和上)과 아사리(阿闍梨)에게 볼일이 있기 때문에, 또는 병든 사람을 위문하기 위하여 마을 안에 이르게 되면 생각하기를, ‘오늘밤에는 돌아가리라’라고 해야 하며, 만일 독송하기 위하여 방사에 머물러 있게 되면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짐짓 아란야의 처소에 있는데 아란야의 처소에 머문 것이 법과 상응하고 온갖 물건에 대하여 다투는 생각이 없으며 온갖 법에서 장애되는 생각이 없으므로 법을 쌓되 싫증이 없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있을 때는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니, ‘나는 무슨 일로 아란야의 처소에 있는 것인가? 비단 한적한 곳이라 하여 사문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이 안에는 조복되지 않고 고요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또한 이 안에 머무르고 있는 이른바 사슴․원숭이․
새․짐승․사자 및 범과 이리며 도둑과 전다라(旃陀羅) 등의 이들에게 사문의 공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아란야의 행으로서 사문의 의(義) 있는 이익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이른바 생각을 매어 산란하지 않고 다라니를 얻으며, 대자대비를 닦고 다섯 가지 신통이 자재하며, 6바라밀을 만족시키고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버리지 않으며, 방편을 수행하고 항상 법의 보시로써 중생을 섭취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거두어 주는 법[攝法]을 버리지 않고 여섯 가지의 생각[六念]을 수행하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견문을 닦고, 생각을 붙들어 매어 바르게 상응하는 행을 닦아 쌓으며, 과위의 지혜[果智]를 증득하지 않고 바른 법을 수호하면서 업보(業報)를 믿는 것이니, 이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 하느니라.
온갖 허망한 생각과 분별을 끊는 것을 바로 바른 생각[正思惟]이라 하고, 이해한 바의 법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을 바로 바른 말[正語]이라 하며, 행동을 없애고 다하여 원만하게 하는 것을 바로 바른 행동[正業]이라 하고, 번뇌의 습기를 끊어 없애는 것을 바로 바른 생활[正命]이라 하며, 부지런히 선정에 나아가는 것을 바로 바른 정진[正進]이라 하고, 모든 법을 잊지 않는 것을 바로 바른 기억[正念]이라 하며, 온갖 지혜로 앎을 얻은 것을 바로 바른 선정[正定]이라 하느니라.
공을 이해하면서 놀라지 않고 모양 없음[無相]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소원이 없음[無願]에 겁내지 않고 마음이 존재[有]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치[義]에 의지하고 말[語]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智]에 의지하고 의식[識]에 의지하지 않으며,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느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머무는 사문의 법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대중을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며 ‘나는 저 나의 선근(善根)을 버릴지언정 끝내 일체 중생을 버리기 위하여 선근을 닦지 않으리라’고 하여야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에게는 네 가지의 친근하는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법을 듣는 것에 친근하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니라.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에 친근하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니라. 여래에게 공양을 하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니라. 일체지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에 친근하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의 네 가지의 친근하는 법이라 하며 여래께서 허락한 것이니라. 장자야, 이 네 가지의 것을 친근해야 하며, 그 밖의 것은 친근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나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 것인가? 내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은 무슨 일을 두려워해서이며, 누가 두려워서 짐짓 온 것인가? 뭇 시끄러움이 두렵기 때문이요 친근함이 두렵기 때문이며, 탐냄․성냄․어리석음이 두렵기 때문이요 미치광이의 교만이 두렵기 때문이며, 빛깔․소리․냄새․맛․감촉이 두렵기 때문이요 음마(陰魔)와 번뇌마(煩惱魔)와 사마(死魔)와 천마(天魔)가 두렵기 때문이다.
무상함과 항상함이 두렵고 나 없음[無我]과 나가 두려우며, 괴로움과 그 중간과 즐거움이 두렵고 청정하지 않음과 청정함이 두려우며, 마음과 의식이 두렵고 현재에 매로 때림이 두려우며, 나라는 소견이 두렵고 나와 내 것이 두려우며, 나쁜 벗이 두렵고 이익이 두려우며, 시기 부적절한 말[非時語]이 두렵고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두려우며,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두렵고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두려우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사문으로서의 때[垢]가 두렵고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가 두려우며, 모든 갈래의 나고 죽는 것이 두렵고 지옥이 두려우며, 축생이 두렵고 아귀가 두려워서이니, 나는 지금 이와 같은 것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아란야의 처소에 와 있는 것이요, 집에 있으면서 시끄러운 대중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만일 수행하지 않고 염처(念處)를 닦지 않는다면 상응하지도 않겠지만 이 두려움을 벗어나려고 일부러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과거의 한량없는 보살마하살도 모두 다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모든 두려움을 해탈하여 두려움이 없음[無畏]을 얻었고 두려움이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미래의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온갖 두려움을 해탈하고 두려움이 없는 위없는 바른 도를 얻을 것이며, 현재의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두려움이 없음을 수행하여 두려움이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온갖 두려움에서 해탈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이제 두려움이 없음을 얻고 온갖 두려움에서 해탈하려 하여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는 것이다.’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무서움도 없고 두려움도 없으므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만일 두려움이 있다면 모두가 나를 집착한 연유이니, 모두가 나를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우두머리로 삼게 되고, 모두가 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일으키고 나를 보며, 나를 생각하고 나를 지니며, 나를 허망하게 생각하고 나를 수호하게 되나니, 만일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바로 이익을 상실하게 되리라.’
장자야, 만일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이것이 아란야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소견과 집착이 없으면 이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나와 내 것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장자야, 알아야 하느니라. 열반이라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 바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거늘 하물며 번뇌라는 생각이겠느냐?
장자야, 아란야의 처소라 함은 온갖 법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모든 법에 장애가 없고 빛깔․소리․냄새․맛․감촉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으며, 모든 법의 평등함에 머물러 때[垢]가 없고 잘 조복된 마음에 머무르며, 온갖 두려움을 버리고 두려움 없음에 머무르며, 온갖 번뇌의 흐름에서 벗어난 큰 강물에 머무르고 성종(聖種)에 머무르며, 욕심이 적은 데에 머무르고 만족할 줄 아는 데에 머물러서, 만족하기도 쉽고 기르기도 쉬우며, 충만한 지혜에 머무르고 들은 그대로 수행하는 데에 머무르며 해탈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또 공과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는 문(門)을 관찰하기 때문이요, 해탈의 지견[解脫知見]에 머물러서 얽매임을 끊기 때문이며, 맨 끝[邊際]에 머물러서 인연(因緣)을 순종하기 때문이요, 할 일을 다 마친 데에 머물러서 구경청정(究竟淸淨)하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마치 아무도 없는 빈곳의 약나무[藥木]와 우거진 숲은 두렵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은 것처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마치 초목과 벽과 같다는 생각을 내야 하고, 또 마치 환술과 같다는 생각을 내야 하리니, 이 안에서는 무엇이 두렵고 그 누가 무섭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두려움이 없으므로 몸을 관찰하되 ‘이 몸은 나[我]가 아니고 내 것[我所]도 아니며 중생(衆生)도 없고 수명(壽命)도 없으며 사람[人]도 없고 장부(丈夫)도 없으며 소년(少年)도 없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말한 바의 두려움[畏]이라 함은 공하여 진실이 없다는 것이니, ‘나는 이제 진실이 없는 것에서 두려움을 내서는 안 된다. 마치 아무도 없는 빈곳의 약나무와 우거진 숲에는 주인도 없고 보호하는 이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온갖 법을 안 뒤에는 아란야의 처소에 잘 머물러야 하나니, 왜냐하면 근심과 다툼을 끊기 때문에 아란야라 하고 생기는 것도 없고 보호하는 이도 없는 데를 아란야라 하기 때문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점차 계율[戒聚]에 순종하고 다음에는 선정[定聚]을 닦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지혜[慧聚]를 쌓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해탈[解脫聚]을 익히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해탈의 지견[解脫知見聚]을 내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보리의 법을 펴며 돕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12두타(頭陀)의 공덕을 쌓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진실한 방편이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5음(陰)을 잘 알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법계(法界)와 평등하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모든 입(入)을 깎아 없애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보리의 마음을 잊지 않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공을 관찰하면서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모든 선근을 잃지 않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부처님께서 찬탄하셨으므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보살들이 칭찬하였기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모든 성인들이 칭찬하였기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해탈하려는 이의 의지할 곳이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 일체지(一切智)를 바라는 이는 마땅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조그마한 일로써도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게 되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보시[檀]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두타계와 신구의계에 머무르면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있으면서 지계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인욕[忍]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모든 중생들에게 성내는 마음 없이 참는 온갖 지혜이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있으면서 인욕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정진[進]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이 보살은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으며 반드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리라’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정진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선(禪)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선정을 버리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모든 선근을 닦나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선정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반야(般若) 바라밀다를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장자야, 이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나의 이 몸과 같아서 공한 것도 그러하고 나의 이 몸과 같아서 보리 또한 그러하며, 진여[如]와 같아서
허망한 생각도 없고 공과 같아서 허망한 생각도 없다’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6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아란야의 처소를 아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청정한 계율[淨戒]과 법을 많이 들어 앎[多聞]과 생각함[思惟]이 상응하면서 법대로 수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를 알고 머무른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설령 번뇌가 왕성하여도 그것에 친근하지 않아야 하며 아란야에 머무르면서 그 번뇌를 꺾고 조복해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마땅히 다섯 가지의 신통을 닦아야 하나니, 그것은 하늘․용․야차․건달바 등을 교화하기 위해서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물러야 하나니, ‘이 안에서 나는 온갖 청정한 선(善)을 원만하게 하여 그 선법(善法)에 훈습되었으니 이후에 성읍(城邑)이나 마을로 가서 설법을 해야겠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법으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른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로부터 일어나 가서 법을 받고 독송하려고 화상이나 아사리에게로 나아가게 되면 ‘상․중․하에 앉아 있는 이들은 바로 나의 복밭[福田]이니 게을러서는 안 되며 이것은 나 스스로의 업(業)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시샘하지 말고 그들의 심부름을 해야 되느니라.
또 관찰하기를 ‘여래․응공․정변각께서는 온갖 하늘과 세간 사람과 악마와 범천과 사문과 바라문이 공양하는 복밭이며, 부처님께서는 온갖 중생의 아버지이시나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남이 봉사하여 주기를 바라지 않나니, 나는 지금 그것을 배우려 한다. 나 또한 일체 중생을 위하여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나 나는 다른 이들에게 나를 위해 심부름꾼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 않으리라’고 해야 하나니, 왜냐하면 장자야, 만일 어떤
비구에게 남의 거들어 줌이 많으면 법의 공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니라.
만일 재물로써 그를 거두어 줄 때에는 어떤가 하면 나의 도움을 이용하기 위해 재물로써 나는 거두어 준 것이요 법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믿음을 잃게 된 것이니, 만일 재물로 거두어 주면서 부리게 된다면 큰 과보의 이익이 없게 되느니라.
만일 화상이나 아사리의 처소에 가게 되면 그 마음과 뜻을 알아차린 뒤에 할 바 그대로를 하여야 하며, 화상이나 아사리로 하여금 나를 믿지도 않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게 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니라. 그들은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법을 찬탄하고 독송하여 주기 때문이며, 그들의 뜻을 만족시키고 공덕과 이익을 위하여 이익을 버리면서 법을 찬탄하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만일 이 보살이 다른 사람에게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상응하게 되어 보리의 도를 쌓는 것이므로 이런 스승에 대하여는 법을 위하여 공경해야 할 것이니라. 위와 같은 모든 스승에게서 문자와 장구(章句)와 게송을 받아 지니게 되면 한량없는 겁 동안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되고 아첨이나 거짓된 마음을 내지 않으면서 온갖 것으로 공양해야 되느니라.
장자야, 알아야 하느니라. 그의 은혜조차 갚지 못하거늘 하물며 법까지 공경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장자야, 혹시 믿음으로 착한 생각을 일으켜 불․법․승을 생각하고 무루(無漏)를 생각하고 고요한 조복을 생각하면서 한량없는 겁 동안 모시며 화상에게 공양하게 해도 오히려 화상의 은혜는 만족하게 갚지 못하리니, 장자야, 이러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장자야, 만일 법을 듣고 나면 한량없는 과보가 있어서 한량없는 지혜를 얻게 되는 줄 알아야 하나니, ‘나는 한량없이 화상께 공양해야 한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출가한 이의 법대로 머물러야 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어떤 것을 출가한 이의 법대로 머무른다 하느냐 하면, 이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淨戒]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성종(聖種)에 머물러서 두타(頭陀)를 즐기는 것이요, 집에 있는 이나 출가한 이를 친근하지 않는 것이며, 아첨이나 비굴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요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 다시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몸의 청정한 계율로도 역시 몸을 얻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요, 입의 청정한 계율로도 역시 입을 얻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며, 모든 소견을 여의는 것이요, 온갖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나라는 생각을 여의는 것이요, 내 것을 버리는 것이며, 단견(斷見)․상견(常見)을 멀리하는 것이요, 인연의 법을 이해하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음(陰)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요, 계(界)는 법계(法界)와 같다는 것이며, 입(入)은 허공의 무더기와 같다는 것이요,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나는 나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요, 다른 데서 듣고 깨달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며, 마음이 온갖 세간법 등에 즐겁게 머무르지 않는 것이요, 동요함이 없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이른바 공을 아는 것이요, 모양이 없는 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온갖 중생에게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이요, 나 없음[無我]에 들어가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의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삼매(三昧)를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들이 청정한 삼매인가 하면, 온갖 법은 있지 않다는 것과 두 개의 마음이 없다는 것과 바른 행동의 마음[正業心]과 한 곳의 마음[一處心]과 동요함이 없는 마음과 쓸모 없는 이론이 없는 마음과 어지럽고 시끄러움이 없는 마음과 의지함이 없는 마음과 마음이 자재하여 달아나거나 흩어짐이 없는 때와 마음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은 마치 요술과 같다고 보는 때와
온갖 법은 평등하여 마치 법계와 같아서 가는 것도 없고 머무르는 것도 없고 또한 일어나는 것도 없다고 관찰하면서 안팎을 얻지 못하여 삼매와 동등하게 머무르는 것 등이니 이와 같은 법을 삼매라고 말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청정한 선정[定聚]을 관찰한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지혜[慧聚]를 듣고 들은 뒤에는 마땅히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청정한 지혜라 하는가 하면, 이 보살은 이와 같이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인연의 법에서 분별하는 지혜[分別智]․말 잘하는 지혜[辯智]․재빠른 지혜[疾智]․중생의 지혜[衆生智]․바깥 것을 포섭하는 중생의 지혜[攝外衆生智]를 아는 것이니라. 장자야, 이와 같이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지혜를 관찰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이른바 지혜라 함은 얽매임이 없다[無擊縛]는 것이니, 몸이 없기 때문이요 거두어 지닐 것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생김도 없고 행함도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만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보살이 출가에 머무른다 하느니라.”
이 법을 말씀하실 때에 8천 명의 중생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이 모든 장자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으며, 3만 2천 명의 중생들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안(法眼)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욱가 장자는 기뻐 펄쩍펄쩍 뛰면서 백천의 값어치가 되는 옷을 부처님께 받들어 올리며 아뢰었다.
“이 선근을 두루 모든 중생들에게 베푸오니, 모든 집에 있는 보살마하살들로 하여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계법(戒法) 그대로를 성취하게 하시고, 모든 출가한 보살도 서원이 만족되게 하시며, 온갖 법도 역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만족되게 하옵소서.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집에 있는 보살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출가의 계[出家戒]를 배우겠습니까?”
이렇게 묻자마자 부처님께서는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집에 있는 보살이 다섯 가지의 법을 두루 갖추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출가의 계율을 배운 것이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하면, 장자야, 보살이 집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온갖 가진 재물들에 인색하지 않고, 일체지(一切智)의 마음과 상응하면서 과보를 바라지 않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청정한 범행(梵行)을 갖추고서 음욕의 생각조차 익히지 않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두 몸이 어울리는 것이겠느냐?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아무도 없는 빈 데로 가서 4선(禪)을 닦아 익히면서도 방편의 힘으로써 정위(正位)에 들지 않아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지극히 정진하면서 지혜를 배우고 일체 중생에게는 자비와 상응해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집에 있는 보살은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법을 수호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권해야 하느니라.
장자야, 이것을 집에 있는 보살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다섯 가지의 법을 두루 갖추면 출가의 계를 배우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때에 욱가 장자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집 안에 있으면서 세존께서 가르치신 그대로를 그와 같이 머무르면서 더욱 더 부처님 도를 넓히겠으며, 모든 출가의 계를 저도 역시 배우겠습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이내 빙그레 미소지으셨다. 모든 부처님의 평상법에서는 만일 웃으실 경우 갖가지 빛으로 된 청․황․적․백의 광명이 입으로부터 나와서 한량없고 끝없는 세계와 위로 범천세계[梵世]까지 두루 비추면서 해와 달의 빛을 가린 뒤에 도로 돌아와 몸을 세 바퀴 돈 뒤에 여래의 정수리로 들어가는 법이었다.
그때에 아난(阿難)은 부처님께서 빙그레 미소지으시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정돈하고 오른쪽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덕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미소지으셨습니까?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미소지으신 것에 까닭이 없지 않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 욱가 장자가 여래에게 공양하는 것을 보았느냐? 법을 수행하려 하면서 사자후(師子喉)를 지었느니라.”
아난이 아뢰었다.
“이미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미 보았습니다. 선서시여.”
“아난아, 이 욱가
장자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이 현겁(賢劫) 동안에 여래․응공․정변각께서 세간에 출현하시면 항상 집에 있으면서 이 모든 여래께 공양하고 공경하면서 바른 법을 보호하고 지닐 것이며, 항상 집 안에 있으면서도 출가의 계에 머물러 여래의 위없는 보리를 널리 들을 것이니라.”
그때에 대덕 아난이 욱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어떤 이익을 보았기에 집 안에 즐거이 있으면서도 성스런 지혜가 있는 것입니까?”
욱가 장자가 대답하였다.
“대덕이시여, 대비(大悲)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스스로 ‘나는 안락하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덕 아난이시여, 보살마하살이면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중생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자마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욱가 장자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이 현겁 동안에 중생을 많이 교화할 것이니, 출가한 보살이 백 겁․백천 겁에도 그렇게 못할 것이니라. 왜냐하면 아난아, 백천의 출가한 보살이 지닌 모든 공덕도 이 욱가 장자가 지닌 모든 공덕보다 못하기 때문이니라.”
대덕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며,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욱가장자소문경(郁伽長者所問經)』이라 하고, 또한 『재가출가보살계경(在家出家菩薩戒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은중급사사장품(殷重給事師長品)』이라고도 하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 경을 얻어들으면 바로 큰 정진이리니, 하열한 정진으로서 범행(梵行)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이의 백천만 배라 하여도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자기 자신이 정진에 머무르려 하거나, 남에게 권하여 정진에 머무르게 하려 하거나, 자기 자신이 온갖 공덕에 머무르려 하거나, 남에게 권하여 머무르게 하려 한다면 마땅히 이 경을 듣고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며 널리 사람들에게 해설하고 말한 대로 수행해야 하느니라.
아난아, 나는 이 법을 너에게 부촉(付囑)하나니,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아난아, 이 법은 온갖 공덕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과
상응하면 곧 여래와 상응함을 여의지 않으리라.
아난아,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을 여의면 부처님을 여의는 것이 될 것이고,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을 여의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말한 대로 수행하는 것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 뵙기를 여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아난아,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는 일을 모두 이 경에서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가령 삼천대천세계 안에 큰불이 가득 찼을 때에 그 속을 통과해야만 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게 된다면, 기꺼이 이 경이 있는 데로 가서 듣고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며 말한 대로 수행해야 되느니라.
아난아, 이 법을 듣고는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서 말한 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삼천대천세계의 그 안에 7보를 가득히 채워서 공손히 받들어 보시하게 되거나, 아난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을 위하여 7보의 탑을 일으켜 온갖 공양거리로써 공양하거나, 아난아, 현재 계신 부처님과 성문의 스님들에게 모든 쾌락의 기구로써 목숨이 다하도록 공양하거나, 아난아, 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에게 모두가 여종․남종이 되고 제자가 되어서 공양한다 하여도, 이 경을 듣지 않고 받지도 않고 지니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옮겨가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서 이러한 등의 법을 여읜다면 모든 부처님․여래께 공양한 것이라고 하지 못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보살이 이 경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이들에게 널리 해설하고 말한 대로 수행한다면 이 보살은 벌써 3세(世)의 부처님께 공양하여 마친 것이니라. 왜냐하면 아난아, 말한 대로 수행하면 곧 그것이 여래의 조복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말씀을 마치시니 대덕 아난과 욱가 장자와 건달바와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들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모두가 다 크게 기뻐하였다.
[적어보자] #3619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82권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