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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앰 댓 상권 38. 영적수행이란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의지이다.
문: 이따금 선생님을 뵈러 오는 서구인들은 특별한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해탈한 사람. 깨달은 사람. 본성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 세계의 너머에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문화 속에 사는 그들이 지닌 성자라는 개념은 계율을 준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동료들을 사랑하며 자주 기도하고 이따금 환희를 체험하고 기적을 통해 믿음을 굳히는 그런 경건한 사람에 대한 것 뿐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문화에 비추어 보면 뭔가 이국적이고 다소 믿기 어려운 그러한 것입니다. 깨달은 분들의 존재가 받아들여진 경우에도 이들은 마치 이상한 체조와 정신적인 태도에 의해 생겨난 자기 유발적인 환각 상태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고 바라봅니다.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들에게는 뭔가 어색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겁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깨달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체험을, 그 원인과 시작과 진행, 성취한 바, 또 그것의 일상 속에서의 실제적인 실행 등의 체험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 많은 것이 생소하고 심지어는 무의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일종의 현실감이랄까, 형언할 수는 없지만 실재하는 체험의 분위기 같은 것이 남게 됩니다. 모범적인 삶의 중심이 될 만한 그 어떤 것 말입니다.
M: 체험은 전달 불가능 할 수도 있어, 체험을 전달한다는 게 가능할까?
문: 예. 예술가라면 가능합니다. 예술의 핵심은 느낌이나 체험을 전하는 데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M: 전하는 바를 받아들이려면 수용자 자신이 수용적이어야 해.
문: 물론입니다. 수용자가 있어야지요. 그러나 전하는 쪽에서 송신해주지 않으면 수용자가 무슨 소용입니까?
M: 깨달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것이야. 그는 완전히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던져 준다네. 만약에 주는 자가 아니면 깨달은 사람이 아니지. 가진 건 뭐든지 준다구.
문: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줄 수가 있습니까?
M: 자네 말은 타인을 깨닫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인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깨달은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는 거야.
난 자네가 알기 이전에 자네를 미리 그러한 상태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어, 내가 말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지나온 길을 말해서 그걸 받으라고 자네에게 권유하는 것 뿐이야.
문: 아직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안 나왔습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고차원적 의식 상태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서구인입니다. 만약 최초의 마약이 그들의 불신을 헤집고 들어갔지만 그들의 물질적 외양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마약을 쓰든 안 쓰든 육체는 여전히 기본적 사실로 남고 마음은 이차적입니다. 마음을 넘어서면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붓다 이후로 계속 깨달음의 상태는 부정적인 용어로, 그러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정말 불가피한 것입니까? 묘사할 순 없더라도 예시할 순 있지 않겠습니까? 언어적인 기술 또한 적당치 않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 상태가 언어를 넘어선 것이었을 때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역시 언어 안에 속해 있습니다. 시詩라는 것이 바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화하는 기술이 아니겠습니까?
M: 종교적인 시인들이 없지 않아. 자네가 필요한 건 그 사람들에게서 구하면 돼. 내 입장에서 말하면 내가 가르치는 건 간단해. 한동안 나를 믿고 내가 말해주는 것을 실행해 봐. 만약 자네가 인내심을 지니고 실행해 보면 자신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라 이거지.
문: 그렇지만 관심은 있지만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M: 만약 그런 사람들이 내게 머무를 수 있으면 나를 믿게 될 거야. 일단 나를 믿으면 내 말을 들을 거고, 그리되면 스스로 발견하지.
문: 지금 제가 원하는 것은 수련이 아니라 그 결과를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수행도 하셨고 그 결과도 얻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걸 기꺼이 말해 주시지만 그 결과에 관해서는 나누어 주시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상태가 언어를 넘어선 상태라고 말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차이가 없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차이를 느끼는 곳에서 선생님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저희는 선생님의 상태를 전혀 들여다보지 못하는 상태로 남습니다.
M: 그거야 자네가 자네 자신의 상태를 들여다 볼 통찰력이 없는데 어떻게 나의 상태를 볼 수가 있겠나? 통찰력이라는 도구가 없을 때에는 우선 그걸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건 마치 장님이 시력을 회복하기 전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자넨 나의 상태를 알고 싶어하는데 그럼 아내나 하인의 상태는 알고 있나?
문: 제가 원하는 것은 조금의 힌트를 바랄 뿐입니다.
M: 글쎄 난 이미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어, 자네가 차이를 보는 곳은 나의 입처가 아니야. 내겐 그걸로 충분해. 만약 자네가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난 단지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야. 충분하다고 말이지. 깊이 생각해 보게. 그러면 내가 보는 걸 보게 될 걸세.
자네는 즉각적인 통찰을 원하는 것 같은데 그건 그 순간이 얼마나 긴 준비 과정을 거쳤는지 그걸 모르고 하는 말이야. 열매는 갑자기 떨어지지만 익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결국 내가 날 믿으라고 하는 것도 잠시를 위한 것 뿐이야. 자네가 움직이도록 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지.
자네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믿음은 적어도 되는 것이야. 왜냐하면 머지않아 자네는 나에 대한 자네의 믿음이 옳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자네는 내가 믿을 만하다는 걸 내 스스로 자네에게 증명하길 바라는 모양인데 내가 무슨 수를 써서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또 내가 그럴 필요가 뭐 있어?
결국 내가 자네에게 제공하는 것은 서구 과학에서 흔히 쓰는 실험적 접근법이야. 과학자가 하나의 실험과 그 결과를 묘사해 놓으면 보통 우리가 그의 진술을 믿고 기술해 놓은대로 그의 실험을 반복해보지 않아? 일단 같거나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면 더 이상 그를 믿을 필요가 없고 스스로의 체험을 믿으면 되지, 용기를 갖고 정진하면 실질적으로 동일한 결과에 이르게 돼.
문: 인도의 마음은 그 문화와 교육적인 측면에서 형이상학적 체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인도인들에게는 "궁극적 진리의 직접적 지각"이라는 말들이 의미 있게 들리고 그의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반응을 야기합니다만 서구인들에게는 그런 말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토록 다양한 기독교 문명 속에서 자라났어도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진리를 직접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대 밖의 일일 뿐 아니라 상상을 넘어선 것입니다. 몇몇 인도인들이 저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가망 없어, 서구인들은 되지 않아. 불가능하다니까. 서양 사람들에게 깨달음 같은 말은 하지도 말고 그냥 살만한 인생을 살다가 인도에서 환생하는 수 밖에 없어. 그래야만 기회가 있을 걸."
또 어떤 사람은 "진리는 만인에게 공평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진리를 파악할 능력을 부여받은 건 아니다. 그 능력은 욕망과 함께 생겨나는 것인데 욕망은 다시 헌신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전적으로 자기희생을 낳는다.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 그리고 모든 장애를 넘어서려는 무쇠 같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 서양 사람들도 동양인과 같은 기회를 지니고 있으니 흥미만 불러일으키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 흥미를, 깨달음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려면 그 이점에 대해 확신이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M: 자넨 개인적 체험을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문: 저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하나라고 말씀하시니 모든 것이 하나라면 의사소통은 가능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M: 한 나라에 관해서 직접 체험하려면 그 나라에 가서 살아봐야 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아. 한 사람의 영적인 승리가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다른 한 개인에게 혜택을 주려면 친밀한 개인적 관계가 필요해.
그러한 관계는 우연히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또 모두에게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어, 반면에 과학적 접근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지 "믿고 실험하고 맛보는 것"이야, 그 이상 뭐가 필요하나? 왜 진리를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넣는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어, 받는 사람이 없다면 주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가 있겠나?
문: 예술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을 이용해서 내적인 체험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것이 의미 있으려면 우선 내적인 면에 민감해야겠지요. 어떻게 하면 민감성이 커지겠습니까?
M: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도 결국은 마찬가지야. 주려는 사람은 많지만 받을 사람이 있나?
문: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민감성을 나눌 수 없으십니까?
M: 할 수 있어, 그러나 나누자는 건 쌍방 통행이야. 두 사람이 필요하다구. 내가 주려는 것을 나서서 받을 사람이 누군가?
문: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M: 난 자네와 하나야. 그러나 자네도 나와 하나인가? 만약 그러면 자네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즉 내가 보는 걸 자네가 보지 못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네 스스로 안목을 키우는 길을 제시해 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문: 줄 수 없는 건 자기 것이 아닙니다.
M: 난 내 거라고 주장하는 게 없어, "나"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겠나? 두 사람이 하나의 나무를 보고 있다고 하자구, 한 사람은 잎 속에 숨은 열매를 보는데 한 사람은 못 본단 말이야. 그런 차이밖에 없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걸 볼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나 나눈다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아. 나를 믿어.
내가 지금 손에 움켜쥐고 자네가 가져야 할 진리를 내가 안 내놓고 있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나의 전체가 모두 자네 거야. 날 먹고 마시게. 그러나 자넨 계속 말로만 달라고, 달라고 하면서 주어지고 있는 걸, 받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어,
내가 보는 걸 볼 수 있도록 짧고 쉬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네. 난 자네가 지니지 않은 걸 가진 게 없어. 자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이라 거기엔 주고받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
문: 적어도 저희에게 선생님께서 일상생활을 하시는 동안의 마음의 내용을 조금만 알도록 해주십시오. 먹고 마시고 말하고 자는 것이 선생님 쪽에서는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M: 그런 생활상의 공통적인 일을 나도 자네들처럼 겪어. 차이점은 내가 겪지 않는 것 쪽에 있지. 나는 두려움이나 탐욕, 혐오와 분노는 겪지 않아. 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거절하지도 소유하지도 않는다구.
이런 점에선 난 타협하지 않아. 아마 그것이 우리들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일 거야. 난 타협하려는 의사가 없으며 나에게 충실한데. 자네들은 그렇지 못하고 현실을 두려워하는 거야.
문: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의 행동 양식에는 뭔가 어지러운 점이 있습니다. 구석에 혼자 앉아서 계속 "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나이다"라고 암송하는 건 그저 미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수단이 궁극적인 정상 상태로 유도한다고 서구인에게 어떻게 확신시킬 수가 있습니까?
M: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둘 다 속고 있는 거야. 꿈속에 있는 셈이지.
문: 만약 모든 게 꿈이라면 깨어있는 건 뭡니까?
M: 깨어있는 상태를 꿈나라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겠어? 말은 사실을 드러낼 수 없어, 단지 상징일 뿐이야.
문: 또 말이 진리를 전하지 못한다는 똑같은 핑계를 대고 계십니다.
M: 만약 자네가 말을 원한다면 내가 힘을 지닌 오래된 말들을 몇 가지 줄게. 그러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
문: 진담이세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바른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서 생겨난 믿음과 확신이 완전히 결여된 서구인에게 "옴" 이나 "람", "하레 크리슈나"를 계속 외라고 하실 참인가요? 확신과 열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소리를 반복한다고 뭔가 얻어집니까?
M: 안될 이유가 뭐 있겠나? 중요한 건 숨겨진 동기일 뿐이지 그 동기가 취하는 모양이 아니야.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기 위해 하면 그건 반드시 목적을 이루어준다네.
문: 수단이 이러이러한 효력을 발생한다는 믿음도 필요합니까?
M: 어떠한 방법으로 기대되는 결과에 대한 생각 같은 믿음은 없어도 돼. 여기서는 오직 실제적인 행위만이 문제가 되지. 진리를 위해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진리로 이끌고 가. 그러니 오직 진지하고 정직하게만 하면 돼. 그 형식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아.
문: 그러면 자신의 갈망을 그러한 수단으로 표현할 필요는 어째서 있습니까?
M: 표현하지 않아도 돼. 아무 일 하지 않는 것도 똑같이 좋을 거야. 생각이나 행동에 의해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바램만으로도, 그것이 순수하고 집중된 바램이라면 빨리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진정한 동기일 뿐이야.
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좌절감으로 기울어가면서 지루하게 외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까?
M: 절망감에 빠져 확신이 완전히 결여 되어 있더라도 계속 반복하면서 애쓰고 인내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정말이지 중요한 거야. 형식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뒤에 숨은 진지함이 정말 중요한 거지. 안에서 미는 힘과 밖에서 끄는 힘이 동시에 있어야 해.
문: 저의 질문들은 서구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낱말과 절대 진리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보지 못합니다.
M: 그런 것은 없어, 하지만 낱말과 그 의미. 행위와 그 동기 사이에서 연관이 있지. 영적 수행은 해나가고 또 해 나아가는 의지야! . 과감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진리가 주어져도 받을 줄을 몰라. 두려움에서 생겨난 내키지 않는 마음이 유일한 장애물이라구.
문: 두려움이라니요?
M: 열려지지 않는 것, 비존재. 앎이 아님( not- knowing), 무( not-doing)가 두려운 거지. 초월의 상태 말이야.
문: 그러니까 성취의 방식은 나눌 수 있지만 그 열매는 나눌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M: 물론 난 열매도 나눌 수 있고 언제나 나누고 있는 게 사실이야. 그러나 나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야. 그러니 조용히 듣고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지.
문: 확신 없이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M: 한동안 나와 함께 생활해 보든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는 말에 관심을 쏟고 실행해 보도록 해. 그러면 믿음이 생길 거야.
문: 모든 사람이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얻진 못하진 않습니까?
M: 자신의 본성과 만나야지. 자신의 본성과 함께 있으며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따르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유지해야 해. 다른 안내자는 필요하지 않아. 진리에 대한 갈망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자넨 아무런 염려가 없어.
그리고 타인을 해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도록 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강력한 형태의 요가 중 하나인 셈이야. 아주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이르게 해주지.
이것이 바로 내가 자연 요가라고 부르는 것이야. 그것은 평화롭고 조화로우며 친밀함과 사랑 속에서 사는 방식이야. 원인도 끝도 없는 행복을 낳아주는 거지.
문: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느 정도의 믿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M: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게. 그러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돼. 다른 모든 일의 경우에도 믿음은 체험과 함께 생기는 거야. 그리되면 나눔이 쉬워지겠지. 사실이지 모든 깨달음은 나눔일 뿐이야. 자네가 더 넓은 의식속으로 들어가면 그 속에서 나누는 거야. 들어가지 않고서 나누려는 게 유일한 장애지.
난 결코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내겐 차이 같은 게 없어, 그렇지만 자네 입장에선 그렇지 않거든. 그러니 먼저 자네가 그 차이를 내게 보여줘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게 그 차이를 보아주게. 그러려면 자네가 나를 이해해야겠지.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차이를 말하지 않을 걸세.
하나를 잘 이해하면 이미 다다른 것이야. 자네가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다가 마음의 초점을 못 맞추는 데에 있는 것이야. 만약 자신이 아직은 뭘 모르는지만 마음에 그것을 새기고 있으면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
그러나 생각이 얕고 인내심도 없으며 꾸준하게 지켜보면서 기다릴 줄도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건 달을 따달라고 우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지.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