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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양반들의 모자인 갓.
조선후기 갓은 이 보다 훨씬 넓었다. 이덕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갓을 없애버려야한다고 주장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당대 세태를 엿볼 수도 있다.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식사를 할 때도 겉옷은 벗더라도 모자만은 반드시 썼다. 이덕무는 갓폐지론자였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장이가 갓쓴 것처럼 민망하다. ~ 지금의 갓은 허술하게 만들어져 갓모자(윗부분)와 갓양태(차양)의 사이에 아교가 풀어지면서 서로 빠져버린다. 역관들이 연경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 갓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모자만 쓰고 가니 중국 사람이야 보통으로 보나 같이 간 사람은 다 비웃는데 그렇다고 어디서 갓을 사겠는가. ~ 300냥, 400냥이 되므로 갓을 생명처럼 보호하여 그 군색하고 구차함이 한결같이 극에 달했다. ~ 나태한 풍습과 오만한 태도가 모두 갓에서 생기니 어찌 옛 습속이라 하여 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는 하루에 아침, 저녁 두끼만 먹었다. 이덕무는 한 사람이 하루에 먹는 식사량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이 아침과 저녁에 각 5홉을 먹는다면 합해서 1되(1.8ℓ)가 된다. 1개월이 30일이니 3말이 되고 1년 12개월이면 36말(649ℓ)이 되는데~" 여기엔 아침, 저녁만 언급돼 있다. 점심은 먹지 않았던 것이다.
▲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판.
왜는 수시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불경과 경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해인사 소장
불교국가인 일본은 우리나라 불경을 집요하게 탐냈다. 진귀한 특산물을 바치거나 포로가 된 우리 백성을 풀어주면서 불경을 달라고 간청했다. 심지어 정체불명의 국가를 사칭해 불경을 받아가려고 하기도 했다.
"국조보감에 성종 13년(1482년) 윤 8월에 구변국주(久邊國主) 이획(李獲)이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쳤다. 이들은 '이전에는 일본과 주로 외교를 했지만 이번에 향료, 후초, 납과 은, 비단, 염소 등을 바치고 대장불경을 얻어가고자 한다'고 하였다. 동남해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두루 살펴봐도 구변국이란 명칭은 없으니 이는 왜인이 교활한 수법으로 엉뚱한 나라의 이름과 왕의 성명, 산물의 명목을 만들고 사신을 가장시켜 감히 우리나라를 속이고 대장불경을 얻어가려는 시도였다. 그때의 당국자들이 왜인에게 속임을 당하고도 그것을 밝혀내어 단호한 조처를 가하지 못한 것이다."
글을 쓰거나 시를 짓는 사람은 수명이 짧다.
"생각이 많으면 마음속의 열이 위로 타오르고 신수(腎水·정액)가 고갈되어 심장과 신장의 교통이 안 되므로 사람의 생리가 끊어진다. 그러므로 문인의 대다수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하니 이는 그 하는 일이 이런 까닭이라고 하였다. 동기창(명나라 서예가·화가)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주가 손에 달려 있어 눈앞에 있는 것이 모두 생동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왕왕 오래 산다' 하였다. 이 두 말은 전혀 거짓은 아니다. 문학을 하더라도 만약 온화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며 그림을 그려도 너무 기교만을 추구하면 혹 단명하기도 한다."
눈동자가 2개인 사람도 있을까. 이덕무는 눈동자가 2개인 중동(重瞳)의 가진 사람은 비범한 인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이들은 크게 이름을 떨치거나 아니면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중동인 사람으로는 대순(순임금)과 안자(공자의 제자 안회)와 항우, 그리고 왕망(신나라 건국자), 여광(후량 건국자), 심약(남송시대 문인) 등이 있었다. 순과 안자는 대성이며 대현이었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는 남곤(1471~1527·기묘삼흉의 한 사람), 정명수(?∼1653·병자호란 때 매국노)와 정여립(1546∼1589)의 아들이 다 중동이었으나 모두 간흉이 되었다. ~ '금관지(金官志)'는 "수로왕(금관가야 시조)이 막 탄생했을 때 용모가 매우 잘생겼으며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용의 머리에 중동이었다"고 하였다."
사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잊힌 위인들도 소개한다.
"당나라에서 우무위위장군(右武威衛將軍) 사타충의를 성국공으로 봉할 때 조서에 '너는 삼한의 귀한 집안이요, 고구려의 명가에 나서 일찍이 군무를 맡아 드디어 장수가 되었다. 안새(雁塞·북쪽 변경의 요새)와 낭하(狼河)에서 요사스러운 도당들을 제거하여 공로가 현저하고 충성이 뚜렷하니 ~ 너를 성국공에 봉하고 식읍 3000호를 내리노라' 하였으니 이정기(평로치청절도사에 오른 고구려 유민)나 왕사례(사공벼슬에 오른 고구려 유민)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파계는 알기 힘들다."
곽진경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승장이었다. 법명은 의엄(義嚴)이었다. 인조는 일개 승려에게 시까지 지어주면서 곁에 두려고 했다.
"의병장 곽진경은 본시 중이었다가 환속한 사람이다. 인조대왕이 도총섭(북한산성을 지키는 승군 우두머리) 의엄에게 내린 시에 '제발 충의 다하여 임금을 돕고, 안개 낀 산 속에만 있지 마오' 하였다."
의엄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이르렀다.
▲ 임진왜란때 삼도체찰사를 지낸 윤두수 초상.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윤두수가 술이나 마시면서 선조를 기만했다고 모함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저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의 비석에 체찰사 유성룡과 윤두수가 전란 중에 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국왕을 기만했다고 언급돼 있고 소개한다.
"안방준(1573∼1654)의 '백사잡저'에 의하면 1600년(선조 33) 1월에 이여송 제독의 비문에 '1592년 1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유성룡, 윤두수 등은 와신상담에 유념하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할 일에 마음을 두기는 커녕 사가(私家)에 편히 앉아 마음 내키는 대로 술마시며 즐겼다. 중국 조정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국왕을 기만하는 등 예의에 어긋나고 교양에 벗어나는 행동이 자못 심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그의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슬프다. 당시의 여러 점잖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중국에게 이와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는가. 무고한 게 틀림없다."
▶이덕무(1741∼1793) = 박학다식하고 문장에 뛰어났지만 서자여서 차별을 받았다.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했다. 1778년(정조 2년)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 청나라 석학들과 사귀었다.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면서 규장각 도서 정리·편찬에 참여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목구심서, 영처시고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글씨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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