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을 모두 얼려버릴 것 같은 1950년 대한민국의 겨울, 美軍 해병 제1사단은 유엔군의 북진 때 元山항으로 상륙하여 서부전선에서 北上 중인 미 제8군과 合流를 하려고 장진호(長津湖) 계곡을 따라 江界 방면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진군 서하면 유담리와 신흥리 일대에서 중공군 7개 사단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지역은 높이 2천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남북으로 뻗어 낭림산맥을 이루고 있고 興南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깊은 협곡(峽谷)을 이루고 있어 철수작전이 매우 힘든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海兵은 추위를 무릅쓰고 40km 거리의 협곡지대를 돌파하여 철수에 성공했다.
그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장진호전투를 진주만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기도 할 정도 였다.
전투결과만을 본다면 장진호전투는 중공군의 승리이고 미군의 패배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占領을 승패의 기준으로 본 것이다.
피해상황을 보면 미군이 전사 3937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이지만 중공군은 5만 여명이 전사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진호전투의 처참했던 상황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 해병1사단은 부상자 대부분이 凍傷 환자였다.
당시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는 고도 천 미터 이상의 산악지형이어서 낮기온이 영하 20여도, 밤기온이 영하 30여도였다고 한다.
무기와 차량도 계속 가동(稼動)시키지 않으며 모두 얼어버렸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링거나 모르핀도 다 얼어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전투식량도 녹여 먹을 수가 없어서 얼음 상태로 먹었기 때문에 전투기간 내내 병사들은 심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다.
밤낮으로 계속 되는 전투 때문에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는데 적의 기습에 대비해 침낭의 지퍼를 잠그는 것도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 장진호전투는 영화 ‘혹한의 17일’로 제작될 정도로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투였다.
또 신념있는 지휘관의 용기와 이를 믿는 부대원들이 함께 이룩한 전투여서 미 해병1사단은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된다.
(출처) 작성자 : 독립영웅
현봉학(玄鳳學)
12월 19일 오후,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빌딩 광장에는 현봉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로베르트 헬문드 주한 美 해병대사령관,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老年의 어르신들까지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서로 다른 5백여 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현봉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故 현봉학 박사는 6.25전쟁이 勃發한지 1950년 12월,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밀려 퇴각하는 美軍을 설득해 興南港에서 민간인 14만여 명을 남한으로 피난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세계 전사(戰史)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구출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다. 그를 “대한민국의 쉰들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날은 故 현봉학 박사의 동상 除幕式이 열린 날이었다.
현 박사는 연세대 의대의 前身인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의대에서 유학한 엘리트 의사였다.
동상건립추진위원회는 현 박사의 母校인 세브란스 의전이 있던 자리에 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경남 거제 출신인 문재인 전 대표는 “부모님이 그날 흥남부두 철수선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현봉학 박사님으로 인해 수많은 피난민이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현봉학 박사가 많은 이들로부터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를 되돌아보려면 66년 전 이맘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날은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證言하듯 “기적의 날”이었다.
흥남철수작전은 왜 기적이라고 불리는가?
美軍이 중공군의 人海戰術에 밀려 흥남으로 이동하던 중 그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흥남부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美軍은 10만여 명에 달하는 군 병력과 50만 톤의 장비 및 물자를 실어나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고 거기에 피난민을 태우는 것은 無理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美軍의 이 결정을 바꾸도록 만든 사람이 현봉학 박사였다.
현 박사는 6·25전쟁 당시 민간인 身分이었지만 미국 유학파로 英語에 능통해 미군 통역장교로 參戰했다.
그는 피난민 구출을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인 포니 대령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포니 대령은 현 박사를 美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에게 소개했고 현 박사와 포니 대령은 알몬드 소장에게 피난민 구출을 호소했다.
알몬드 소장은 두 사람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렸고 배에 싣고 있던 군수품 대신 피난민 수송을 지시했다.
1950년 12월 12일,
세계 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흥남철수작전”의 序幕이 올랐다.
당시 피난민 구출을 위해 동원된 선박은 민간인 商船까지 합쳐 193척에 달했다.
어렵게 흥남항을 떠난 10만 명의 피난민은 현 박사를 은인(恩人)으로 불렀다.
현 박사가 살린 것은 피난민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빛을 기다리던 5명 태아(胎兒)의 목숨도 구했다.
1950년 12월25일, 거제도를 향해 항해 중이던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급)에서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출처) 뉴데일리
문재인의 祖國은 어디인가?
문재인의 부모는 흥남철수 때 미국의 商船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했다. 그리고 3년 후 문재인을 낳았다. 6.25가 끝난 후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장을 해 선진국 문턱에 와있다.
그리고 문재인은 그 나라의 대통령 후보감으로 올라 있다.
萬一을 가정해서 그 날, 美軍이 흥남철수를 하면서 피난민을 배에 태우지 않았다면 문재인의 조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곳에서 정치 지도자를 하고 대통령 출마를 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反美의 대상인가?
親美의 대상인가?
그래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그는 美國보다 北韓을 먼저 가겠다? 왜냐하면 북한은 그에게 原籍이니까…
그가 가는 것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딱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가거든 거기서 눌러 살아라!
제발!
너의 祖國은 그곳이니까… *
성령 / 최 성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