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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觀察使) 운암(雲巖) 휘(諱) 연(緣) 실록(實錄) 기록(記錄)-2
【원전】 17 집 9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중종 24년 1월 13일 경술
정원에 전교하기를,
“남세웅과 정희홍은 이미 파직을 명하였다. 이미 전교가 아니고 또 대간이 아뢴 것이 아닌데 ‘때려죽여도 무방하다.’고 써서 아뢰었으므로 그 때 곧 정원에 물었더니 이것은 대간이 아뢴 말이라 하였다. 그 때 동료인 승지(承旨)가 반드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어서 아뢰라. 또 그 때 사관(史官)도 참석하여 들었을 것인데, 사초(史草)에 어떻게 썼는지도 상고하여 아뢰라.”
하매, 도승지(都承旨) 윤인경(尹仁鏡)과 우부승지(右副承旨) 송숙근(宋叔瑾)이 아뢰기를,
“대저 대간의 논사(論事)는 주서(注書)가 비망기(備忘記)에 쓰고 색승지(色承旨)가 나앉아서 승전색(承傳色)에게 말하는 법이므로, 신은 자리에 있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대개 어느 사람이 논박 받았다는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 밖에 아뢸 것을 상세히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그 때 색승지 남세웅의 어세(語勢)가 낮고 작아서 더욱 분명히 듣지 못하였는데, 하문하셨을 때에 신이 비로소 이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사관 최연(崔演)이 아뢰었다.
“전에 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윤규(尹奎)는 그 고을의 수령(守令)이고, 경저(京邸)의 주인은 그 고을의 아전[吏]이니, 그 고을의 수령으로서 경저를 맡는 자에게 꾸짖을 것이 있으면 집에서 매 때리더라도 다른 사람과 같지는 않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지평(持平) 김연(金緣)이 논계(論啓)할 때에 말소리가 분명하지 않아서 말꼬리에 잘못 들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신이 듣기로는 지평이 ‘윤규가 경주인(京主人)을 매 때려 죽인 일은 상께서 물단(勿但)【무방하다는 것과 같은 뜻의 속어(俗語)이다.】하다 하셨다.’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대개 인물이 광패(狂悖)하고 임소(任所)에 가서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니 파직하기를 청한다는 것을 아뢰었는데, 신이 그 물단이라는 말을 듣고 쓰기가 어려우므로 무방이라고 사초에 썼습니다. 신이 들은 것은 이러합니다.”
【원전】 17 집 96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중종 24년 2월 2일 무진
대사헌(大司憲) 김극성(金克成), 집의(執義) 박명손(朴命孫), 장령(掌令) 양연(梁淵), 지평(持平) 김연(金緣) 등이 아뢰기를,
“사노(私奴) 석련(石連)과 생원(生員) 권상(權常)이 본부(本府)에 소송(訴訟)하였는데, 오늘 석련이 정장(呈狀)하여 본부의 관원을 책망하였습니다. 권상의 어미 신씨(申氏)가 정말로 그의 종 유지(有智)【석련의 누이인 석금(石今)의 아들이다.】를 팔고도 신공(身貢)을 추징(追徵)하고 그 어미 석금을 때려 죽였다면 이 죄에 해당되는 율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아넘기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팔려 넘어갔다고 거짓으로 문기(文記)를 만들어 주인을 속이고 사출(斜出)하였다면, 이 죄도 작지 않은 것입니다.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은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그 실정을 알아 내지 않을 수 없어서 진위(眞僞)를 심사하느라고 결단하지 못하였으며, 권상의 죄도 장 일백(杖一百)이나 되는데도 가두지 않았습니다. 신(臣)들은 법관(法官)으로서 송자(訟者)에게 책망받았으므로 직(職)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직무를 잘못 수행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지평(持平) 김익수(金益壽)는 아뢰기를.
“권상은 신과는 본디 인척 관계가 없고, 단지 같은 마을에 살 뿐입니다. 이제 석련의 책망을 받았으니,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법사를 책망한 사람은 추신(推訊)하여 죄주어야 하겠으나, 이 사람은 늙었으므로 추신할 수 없다. 사헌부(司憲府)는 이미 피소(被訴)당하였으므로 다시 논단(論斷)할 수 없다. 피혐(避嫌)하지는 말고 다른 관사(官司)로 넘기라. 하였다. 김극성 등이 다시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17 집 9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공물(貢物) / *신분-천인(賤人)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윤리-강상(綱常)
중종 24년 5월 25일 기미 - 휘 연(緣)께서 경연(經筵)에 참여하시어 진언(進言)하신 내용-편집자주>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어득강(魚得江)이 아뢰기를,
“진강(進講)할 때에 경연관(經筵官)들은 비록 아뢰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전일에 이미 죄다 강론(講論)했으리라 여겨 번독(煩瀆)스러울까 우려하여 아뢰지 않습니다. 대저 학문은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리기 마련이므로, 모든 성현(聖賢)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항시 토론하여, 옛일을 인용하여 지금의 일을 증거할 수 있어야 유익한 것입니다. 한갓 구두와 글자풀이만을 진강해서는 안 됩니다. 또 상께서 비록 알고 계시는 것일지라도 수시로 하문하고 논란한다면 반드시 다스리는 데에 도움되는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중국에서는 모든 경전(經傳)이나 서사(書史)에 전부 구결(口訣)이 없고, 어구(語句)를 끊어야 할 곳에 점권(點圈)만 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방언(方言)으로 구결을 붙이니, 지극히 외쇄(猥첩)합니다. 지금 경연에서 진강할 때에도 구절이나 글자마다 모두 구결을 붙여,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듯 하니, 이는 안 될 일입니다. 바라건대 구결은 붙이지 말고 모름지기 해박하게 통하도록 정확한 강론을 하고, 혹 훈고(訓고)로 해석하게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 과거(科擧)의 강경(講經) 때에 시관(試官)이 구결 하나만 틀려도 불통(不通)을 주니, 이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하고, 영사(領事) 장순손(張順孫)은 아뢰기를,
“만일 구결을 붙이지 않는다면 문리가 통해지지 않고, 배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또 경연에서 구결을 붙이는 것은, 상께서 모르신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곧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습은 오래된 것으로 지금은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득강이 아뢴 말과 같으니, 성상께서 수시로 하문하시는 것이 매우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조계상(曹繼商)은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은 언어(言語)가 모두 문자(文字)이기 때문에 구결을 붙이지 않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부득이 구결이 있은 다음에야 문리가 통하게 됩니다. 이는 이미 습관이 되었으므로 지금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어득강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모든 일에 방언(方言)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각사(各司)에서 쓰는 횡간(橫看)에도 방언이 많습니다. 또 전에 횡간이 없을 때에는 용도(用度)의 다소를 한꺼번에 짐작하여 마련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극증(李克增)이 횡간을 만든 뒤부터는 각사의 진상(進上) 및 공궤(供饋)가 지극히 외쇄(猥쇄)하고 비루하게 되었습니다. 이극증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일 때에 신이 본 일인데, 쌀 1되로 수반(水飯)을 만들어 유생(懦生) 세 사람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수반이 너무 적자, 솥을 창문 북쪽에 걸어놓게 하고 직접 보이는 데서 밥을 지어 공궤(供饋)케 했었습니다. 그 때 논자(論者)들이 모두 ‘국가 일에는 곡진하다 하겠으나, 사체에 있어서는 재상답지 않은 듯하다.’ 했습니다. 그가 만든 횡간도 이처럼 외쇄한 것이니, 불행히 중국에서 알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를 비루하게 여길 것입니다.
지난 신유년에 삼공(三公)이 각사의 공물(貢物)을 의정(議定)할 때에, 더러는 남아도는 것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때 정승 및 사지조관(事知朝官)들이 태평관(太平館)에다 국(局)을 설치하고, 모든 경비(經費)와 공안(貢案)을 일체 상정(詳定)하여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잘못된 일이 많았었습니다. 또 신이 주서(注書)로 있을 때에 보니, 일기(日記)와 공사(公事) 마련에 쓰이는 종이는 비록 상품(上品)이 아니더라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승정원 및 이조와 병조의 정사(政事) 때 쓰는 종이를 녹사(錄事) 및 서리(書吏)들이 관원의 명령을 들어 보지도 않고서, 품질이 좋아 쓸 만한 종이인데도 퇴짜를 놓고 받지 않습니다.
신이 참지(參知)로 있을 때에 엄중하게 금방(禁防)한 다음에는 받아서 쓰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런 폐단 때문에 외방(外方)에서 공상(貢上)하는 종이를, 풍저창(豊儲倉)과 장흥고(長興庫)가 번번이 점검할 적에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외방 사람들이 체류하게 되는 폐단이 작지 않았고, 종이 값도 매우 비싸게 되었습니다. 각 고을에서 받아들인 풍저창의 도련지(도鍊紙)는 1권의 값이 상면포(常綿布) 18필에 해당됩니다. 외방의 공물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즉시 받아들이지 않고 번거롭게 퇴짜를 놓고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감찰(監察)이 미욱하고 기강(紀綱)이 없어서 각사의 관원 및 아전들에게 농락당하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방에서 공물(貢物)을 상납(上納)할 때의 폐단도 많습니다. 봉상시(奉常寺)가 받는 청밀(淸蜜) 같은 것은, 각 고을에서 많이 실어온 것을 감찰 및 담당 관원이 즉시 받지 않고 있습니다. 똑같은 청밀을 어느 것은 받고 어느 것은 퇴짜를 놓습니다. 오늘 퇴짜맞은 물건도 다음날 감찰 및 본사(本司)의 관원에게 달려가 청탁하면 받아들입니다. 세력이 없는 사람은 청밀이 아무리 좋아도 으레 퇴짜를 놓아 다시 마련하게 하니, 폐단이 매우 큽니다.”
하였다. 어득강이 또 아뢰기를,
“악포(惡布) 금단하는 일을 전번에도 아뢰었습니다. 그 때에 여론(輿論)이 거친 배를 일체 금단한다면 곤궁한 민중들이 생활해 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쓰게 해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통렬하게 금단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고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해져 서울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방(外方)의 면포(綿布)가 전에는 새[升]가 가늘고 빛깔이 희었는데, 지금은 모두 거칠고 짧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조(廢朝) 때에 생긴 것인데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신이 전일에, 만일 금단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척수(尺數)에 맞게 만들어 사용할 것을 아뢰었었습니다. 그 때 상께서 과연 척수에 맞게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분부하셨는데, 승전(承傳)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대로 시행하여 쓰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좋고 나쁘고 간에 척수에 맞게 만들어 사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늘 개탄해오다가 직접 척수를 헤아려보니, 1필(疋)이란 것이 겨우 20여 자였습니다. 이 고질적(痼疾的)인 폐단을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으로는 금단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한 다음에야 두려워하여 그치리라 여겨집니다. 성상께서 ‘법 밖의 일로 전가 사변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신 분부가 지당한 말씀이긴 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정상인 것도 있고 임시 변통의 것도 있는 것으로, 이는 역시 임시 변통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이 폐단을 즉시 고치려면 전가 사변이라도 해야 하겠다. 지난날 민간에 잡미(雜米)가 나돌 적에도 그런 법을 써서 금단했더니, 거의 없어졌었다. 악포(惡布)는 먹을 수 없는 잡미와는 다른 것이므로 전부 없앨 수는 없다. 만약 일체 금단시키려고 전가 사변한다면 인심이 흉흉해질 것이니, 전가 사변하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다. 만약 엄중하게 금단한다면 자연히 더 심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매, 어득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장구하고 원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세우고 있을 시행함에 있어 으레 모두 목전의 일에만 착안하기 일쑤입니다. 대저 예악(禮樂)은 반드시 백년을 적덕(積德)해야 흥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령도 아침에 명령하여 저녁에 시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인심은 오늘 법을 세워 내일 시행하려하기 때문에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이 앞서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서점(書店) 설치할 것을 아뢰자, 모두들 아뢰어야 할 일도 아닌 것을 아뢴다고 했었습니다. 이런 일은 한두 달 동안만 시행할 것이 아니라, 10년 혹은 백년토록 시행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세가(世家)나 대족(大族)들 중에는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서책이 있기도 하고 하사(下賜)받은 서책이 있기도 하지만, 도리어 쓸데없는 것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서점을 세운다면 팔고 싶은 사람은 팔고, 사고 싶은 사람은 살 것이므로, 유생들이 한 가지 서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 책을 팔아 다른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고 팔고 하면서 유구히 돌려가며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책을 빌려주는 것도 어리석고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다.’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서책 파는 것을 그르게 여겨 팔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묶어서 높이 쌓아두기만 하고 한 번도 펼쳐서 읽지 않아 좀만 먹는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외방(外方)의 유생 중에는 비록 학문에 뜻이 있지만 서책이 없기 때문에 독서(讀書)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궁색한 사람은 값을 마련하지 못해 책을 못하고, 더러 값을 마련하려는 사람이 있어도,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상면포(常綿布) 3∼4필을 주어야 사므로, 값이 비싸서 못사게 됩니다. 가령 서점의 책에 값을 정해놓고 감장(監掌)하는 관원을 두어 사고 팔기를 원활하게 하여 영구히 전해가게 한다면, 폐단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집이 가난하여 책이 없는 사람이 저자의 서점에서 책을 열람하여 성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 서점을 설치하고 서책을 내놓는다면, 뜻 있는 사람은 비록 사다 읽지 않고라도 온 종일 보고 나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니, 지극히 편리하고 유익할 것입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계획을 세워 설립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전에도 의논했었는데, 모두들 안 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저자의 다른 가게로 미루어 본다면, 이는 과연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향학(向學)에 뜻을 둔 사람들 중에 책이 없어 독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서점을 설립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진다. 다만 전에 없던 일이라서 실행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동지사 조계상이 아뢰기를,
“가뭄의 재변은 없는 해가 없는데, 무슨 일 때문에 발생한다고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아마도 인사(人事)에 잘못된 것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를 입은 사람들 중에 정범(正犯)은 말할 것이 없지만, 연좌(連坐)된 사람으로서 여러 해 동안 유배(流配)된 사람도 많습니다. 안처겸(安處謙)과 유세창(柳世昌)은 문건(文件)에 이름이 기재된 사람들이지만, 더러는 애매한 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원통한 마음을 품고 억울한 생각을 가졌으므로, 화기(和氣)를 간범(干犯)한 것인가 싶습니다. 바라건대 경중을 분간(分揀)하여 조처하소서.
또 반사(頒赦)할 때 보면 배소(配所)에 도착하지 않은 자는 비록 중한 죄라도 모두 용서를 받는데, 배소에 도착한 자는 성상의 은덕을 받지 못합니다. 신이 보건대 조종조(祖宗朝)에도 역시 그러했으니, 당초에 법을 세운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여러 해를 신고(辛苦)하며 마음을 경동(警動)하고 성질을 참으며 과오를 고치는 사람은 죄를 면하여 놓여나지 못하고, 죄지은 지 오래지 않은 사람은 갑자기 용서받아 놓여나게 되니, 이는 진실로 온당치 못한 법이라 여겨집니다.”
하고, 장순손은 아뢰기를,
“신이 세 차례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보건대, 국가의 경비(經費)가 모두 하삼도(下三道)에서 나왔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전라도는 실농(失農)할 상황에 있고 경상좌도(慶尙左道)는 가뭄으로 인해 모내기를 못했다 하니, 경비와 민중을 구제하는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한재(旱災)가 이러하니 바로 성상께서 특별한 은덕을 쓰셔야 할 때입니다. 듣건대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사면하여 놓아준다고 하는데, 이는 지당합니다. 이 사람은 당초에 자복도 받지 않고 정죄(定罪)했습니다. 비록 일개 백성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일찍이 육경(六卿)의 장(長)으로 있었던 사람이겠습니까? 지금에서야 천은(天恩)을 입었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이 매양 이 일을 아뢰고 싶었지만 아뢰지 못했었습니다.”
하고, 지평 김연(金緣)은 아뢰기를,
“비록 재변이 있다지만, 자주 반사(頒赦)함은 안 될 일입니다. 반사는 양민(良民)에게 그 해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국가에 관계되지 않는 것은 말할 것이 없겠지만, 국가를 그르칠 소인(小人)으로 지칭(指稱)되어 국가에 관계가 있는 자는 경솔히 놓아줘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가벼운 죄로 귀양간 사람은 마땅히 분간해야 한다. 그러나 난역(亂逆)에 연좌된 사람은 비록 자신이 범한 죄는 아니더라도, 이미 율문(律文)에 의해 정죄(定罪)하였으니, 경솔히 놓아줄 수 없다. 대저 가뭄은 대부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많은 데서 생기는 것이니, 지체된 옥사(獄事)가 있다면 마땅히 급히 처결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펴줘야 한다.”
【사신은 논한다. 장순손은 본디 김안로와 긴밀하게 지내면서 아비처럼 섬겼고, 또 그의 아들 김희(金禧)와는 바둑 두자는 핑계로 날마다 그의 집으로 맞이하였으니, 비밀한 계책과 음모(陰謀)는 모두 장순손이 꾸며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경연(經筵)에서 이런 의논이 있은 것이다. 또 장순손은 머리가 허연 노재상으로서 젊은 부마(駙馬)들과 교분을 맺어 간사하게 극력 아첨하면서 입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치사한 짓을 다하였다. 그래서 식자(識者)들은 침뱉으며 비루하게 여겼다.】
【원전】 17 집 123 면
【분류】 *재정-공물(貢物)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금융-화폐(貨幣)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상업-시장(市場) / *농업-농작(農作) / *역사-편사(編史) / *과학-천기(天氣) / *어문학-어학(語學) / *출판-서책(書冊)
중종 24년 6월 23일 병술 - 휘 연(緣)께서 어떤 간통 사건의 판결과 관련하여 사직(辭職)을 청한 내용-편집자주>
대사헌 김극성(金克成), 장령 양연(梁淵), 조종경(趙宗敬), 지평 김연(金緣)【집의(執義) 심언광(沈彦光)과 지평 송인수(宋麟壽)는 이 일에 간여되지 않았으므로 오지 않았다.】 등이 아뢰기를,
“당초 오윤산(吳潤山)이 그의 딸 금이(今伊)와 간통해서 잉태한 사건은, 대중(臺中)에서 풍문(風聞)을 듣고 절린(切隣)을 추고하였더니, 모두가 윤산의 화처(花妻) 관남(觀南)과 관남의 전(前) 남편의 딸인 정금(貞今)한테서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관남과 정금을 형신(刑訊)하였더니 처음에는 승복하였으나, 다시 신문하니 도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형을 가했으나 승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금이(今伊)를 추문하니 집안 머슴 차막송(車莫松)과 통간해서 잉태하였다고 했습니다. 차막송의 초사(招辭)도 금이와 같았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세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처음의 초사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친딸과 간통한다는 것은 천지 사이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윤산은 늙어 머리도 백발인데 나이 어린 딸과 간통할 리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간통하였다는 일로 비난이 시끄럽게 일고 있습니다. 신들은 막송이 무지한 사람이어서 남의 꾐에 넘어가, 문안(文案)에 기록되지 않은 머슴은 가장(家長)의 딸은 간통했더라도 머슴으로 논죄(論罪)하지는 않으리라고 여기고서, 장형(杖刑)을 참으면서 무복(誣服)하다가 끝내는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머슴이 비록 문안에 실리지 않았더라도 대죄(大罪)를 면치는 못한다는 뜻을 분명히 말하여 주었더니, 막송이 신들의 말을 듣고는 금이와 간통한 일은 남의 꾐에 넘어가 무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다시 생각하건대 이는 큰 옥사(獄事)인데 양쪽에 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법관은 공초(供招)에 따라 귀일시켜야 되는데 막송이 신들의 말에 의해 먼저 진술한 말을 바꾸었습니다. 막송이 죄에서 벗어나면 죄가 윤산에게도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윤산의 일도 애매한 듯합니다. 신들이 일을 잘못 처리해서 큰 옥사를 잘못 결정하게 된다면, 원왕(원枉)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들이 경솔하게 이러한 질문을 해서 법관의 체모를 크게 잃었으니,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유식한 사람이라면 죄의 대소(大小)를 말해서는 안 되지만, 차막송은 바로 무식한 사람이어서 죄의 경중을 모른다. 그러니, 힐문(詰問)하기 위해 말 한다고 안 될 게 뭐 있겠는가? 나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김극성이 다시 아뢰자, 공사를 금부(禁府)로 이송시키라고 하였다.
【원전】 17 집 132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윤리-강상(綱常) / *인사-임면(任免) / *물가-임금(賃金) / *풍속-풍속(風俗)
중종 24년 12월 16일 무인
헌부가 아뢰기를,
“전 대관(臺官) 윤은보(尹殷輔), 오준(吳準), 이억손(李億孫), 김연(金緣), 송인수(宋麟壽) 등은 한 때는 상진(尙震)과 동료였습니다. 그런데 상진이 잘못한 일에 대한 함답(緘答)에서 ‘미처 몰랐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상진이 인혐(引嫌)한 뒤에 정상(情狀)이 드러났는데도, 동료를 비호하기 위해 시비를 분변하지 않은 채 애매하게 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뒷날 애매하게 아뢰는 조짐을 열어놓은 것으로, 지극히 잘못한 처사입니다. 모두 다 파직시키소서. 당초에는 파직으로 논계하였었으나 지금 추고하고 있기에 정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불문에 붙이라고 명하였으니, 지극히 온편치 못한 조처입니다. 때문에 감히 다시 아룁니다.”
하고, 간원은 아뢰기를,
“전 우봉 현령(牛峯縣令) 오황(吳滉)이 파직되어 올라올 적에 매[鷹]를 가지고 적성(積城)에서 묵었었습니다. 그 때 적성 현감 최환(崔환)이 밤중에 사람을 시켜 이를 빼앗았습니다. 이것은 동료간에 흔히 있는 희사(戱事)인데도 오황은 분심을 품고 포도부장(捕盜部將) 나만세(羅萬世)에게 ‘명화적(明火賤)이 내 행장(行裝)의 복물(卜物)과 매를 빼앗았다.’고 선동하여 무계(誣啓)하게 하고 말을 내어 추포(追捕)하였으므로, 온 고을에 소동이 일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가 없어 도산(逃散)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마당에 오황은 대단찮은 일로 분을 품고 은밀히 사주하여 이런 소요를 유발시켰으니, 통렬히 치죄하소서. 최환의 일은 비록 희롱에서 빚어진 것이긴 하지만 역시 관인(官人)의 체통을 잃은 처사입니다. 아울러 추문하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윤은보(尹殷輔)와 이억손(李億孫)은 대관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범연히 모두 파직시킨다면 소요가 일겠기에, 상진(尙震)과 양연(梁淵)만 파직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제 또 대관을 전부 파직시키는 것은, 내 생각에는 지나친 것 같다. 오황의 일은 한 고을뿐만 아니라 조정도 소요되었으니, 이는 기망(欺罔)에 관계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전지(傳旨)를 받들라. 별도로 금부(禁府)를 시켜 추문하도록 하겠다. 최환의 일은, 매[鷹]는 재화(財貨)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러나 동료간에 대면해서 부탁해도 주지 않을 적에는 이렇게 탈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밤중에 사람을 보내어 겁탈하였으니, 이는 조관(朝官)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파직한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 그리고 도둑을 체포하는 것은 평상시에도 반드시 그 기미를 상세히 살피고서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명화적을 수포(搜捕)하는 일을 범연히 해서는 안되는 것은 서로 살상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지극히 부당한 처사였다. 이것이 오황에게 속아서 중외(中外)에 소요가 일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포도장(捕盜將)과 부장(部將)도 아울러 추문함으로써 뒷 폐단을 막도록 하라.”
【원전】 17 집 176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군정(軍政)
중종 32년 5월 11일 기축
성윤(成倫)을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하고,【특가(特加).】 윤풍형(尹豊亨)을 사간원 대사간에, 신거관(愼居寬)을 집의에, 김연(金緣)을 사간에, 조사수(趙士秀), 한숙(韓淑)을 장령에, 임억령(林億齡), 이원손(李元孫)을 지평에, 이몽필(李夢弼)을 헌납에, 이세장(李世璋), 정응두(丁應斗)를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8 집 7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중종 32년 6월 25일 임신 - <김안로가 사감(私感)으로 휘 연(緣)의 사간(司諫) 제수를 반대한 내용-편집자주>
대간이 아뢰기를,
“이미 정해진 죄는 더 증가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처음 조율한 죄명은 결코 고쳐서는 안 되니, 지체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홍문관의 상소에 이른바 ‘적격자가 아니면서 대간의 직을 함부로 제수받았다.’는 것은 전 사간(司諫) 김연(金緣)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하문(下問)에 따라 아뢴 것이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어제 양사(兩司)가 합의(合議)할 때 풍수(風水)의 잘못까지 논하게 되었는데, 대사간 윤풍형은 ‘전에 대사간으로 있을 때 여러 번 산형수세(山形水勢)가 중첩으로 극흉에 범한 것을 가지고 아뢰었으니, 오늘의 의논에는 동참할 수 없다.’라 하고 지레 나가 버렸습니다. 지금 사피한 말을 본즉 구차히 처해 있기가 어려운 입장이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 대간이 전의 율로 고쳐 조율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나는 ‘만일 전의 율을 쓴다면 죄도 율법대로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아뢴 바를 보면 ‘비록 전의 율을 쓰더라도 죄는 보태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 이미 잘 알았다. 그러나 여러 번 고치는 일은 대신과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윤풍형은 체직시키는 것이 옳고, 김연의 일은 알았다.”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였다.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대간이 전후 아뢴 뜻을 가지고 대신들의 의논을 모으게 하고 대간이 아뢴 ‘동참한 사람은 동일하게 죄주어야 한다.’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울러 의논하라.”
【원전】 18 집 8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인사-임면(任免)
중종 32년 11월 3일 무인 - 휘 연(緣)께서 김안로에게 미움을 싸 경성판관으로 좌천된 내용-편집자주>
석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신거관(愼居寬)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태자(太子) 영(榮)은 율희(栗姬)의 참소로 폐출(廢黜)되었습니다. 부자(父子)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도 참소와 이간이 행해지는데, 더구나 군신(君臣)이나 내외(內外)의 사이이겠습니까. 옛말에, 아주 절실하게 느껴지는 참소와 물처럼 조금씩 조금씩 젖어드는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면 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진실로 한 소제(漢昭帝)가 상관걸(上官桀)의 간사함을 알았던 것처럼 된다면 참소와 이간이 자연 행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상께서는 살펴 유념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요즈음 김안로, 허항, 채무택의 흉악하고 불측스런 정상을 상께서 환히 아시어 그 죄로 죄줄 수가 있었으니, 위아래 사람이 그 누가 통쾌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유생의 상소에 ‘나라 사람들이 김안로가 있음만 알 뿐, 전하가 계심을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을 들을 적에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김안로는 흉사(凶邪)의 괴수였습니다. 조금만 눈에 거슬리는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품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한 마디의 말이 조금만 거슬려도 반드시 품고 있으면서, 날마다 모함하는 것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눈치를 보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의 대의는 모두가 그로부터 나왔으며, 육조(六曹)의 공사(公事)도 모두 김안로에게 보고된 뒤에 시행되었습니다. 육경(六卿) 이상으로서 비록 재상(宰相)의 반열(班列)에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모두 김안로에게 보고하여 물은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의 위엄과 화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김안로가 사람들을 등용하거나 내보냄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아무리 용렬한 자라도 발탁하여 올려 주고,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자는 아무리 명사(名士)라도 반드시 깎아 내려 쫓아냈습니다. 그러므로 인물(人物)이 줄어들어 백사(百司)에 빈 자리가 매우 많았고 심지어 정사(政事)할 때가 되어서 미리 충당하지 못하여 조정이 거의 텅 비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허항과 채무택 등은 김안로와 어울려 결탁해서 권세를 휘두르며 마음내키는 대로 방자하게 굴었는데, 기세가 아주 치성하여 그 흉악한 독해(毒害)가 김안로만 못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두려워하여 한 집안에서도 서로 그 일을 말하지 못하고 마치 그들의 무리들이 창문이나 벽 틈에서 엿보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부자(父子)·형제(兄弟) 사이에도 모두 말을 조심하라고 서로 경계하여 입을 다물고 혀를 매어 놓기를 마치 귀신을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고 평소에도 늘 겁을 먹고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이 같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다행히 국가에 복이 많아 삼흉의 무리들이 죄악이 극도에 이르러 나쁜 행적이 드러나 저절로 전복(顚覆)되어 하루아침에 제거되고 조정이 청명해지고 위아래가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할 일은 오직 상께서 깊이 살피고 유념하시어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하고, 특진관 김희열(金希說)이 아뢰기를,
“삼흉의 정상은 근간에 이미 다 아뢰어 상께서도 환히 알고 계신 것이니, 우선 그 당시에 독해를 입힌 일을 아뢰겠습니다. 눈을 흘긴 미세(微細)한 일까지도 모두 해를 입혔으니, 예로부터 소인(小人)치고 삼흉처럼 심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체로 대간이 논하는 모든 일이 어찌 사사로운 원한으로 말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공론(公論)일 뿐입니다. 앞서 김안로가 다시 서용(서用)되었을 적에 김연(金綠)이 지평으로 있으면서 동료들과 의논하기를 ‘김안로의 사람됨이 서둘러 서용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동료들은 더러는 따르지 않는 자도 있었으나 김연은 끝까지 다시 쓸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김안로가 그 말을 듣고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가 현달(顯達)하여 바야흐로 중상(中傷)하려 할 때에 김연이 마침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독수(毒手)를 뻗칠 수가 없었는데 김연이 상을 마친 뒤에 조정에 들어와 사간이 되자 김안로가 몰래 그 족인(族人)을 사주하여 언관(言官)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논박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있는데, 조정에 있는 선비들은 모두 김연이 외직에 보임된 것이 김안로의 짓임을 알고 통분(痛憤)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김안로의 독해는 고금(古今)에 없는 것으로서 눈을 흘기는 조그마한 혐의라도 반드시 독해를 입혔으니, 조정의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이 누가 겁내지 않았겠습니까. 허항, 채무택은 김안로와 서로 결탁하여 함께 그 악행을 도와가면서, 자기에게 따르는 자는 진출(進出)시키고 따르지 않는 자는 배척하면서 온 나라의 입을 막아 놓고서 흉악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허항은 한 집안 안에 크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도 세력이 바야흐로 치솟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임금이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간(諫)해서 멈추게 해야 하는 것인데 김안로 등이 사람의 입을 막아 말을 할 수 없도록 해놓고 조금만 자기에게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사림(士林)을 모함시킨다고 구실을 삼아 반드시 엄중하게 다스렸으므로 한 사람도 그 화망(禍網)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김안로 등이 아무리 나쁜 짓을 마음대로 행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권(大權)이 모두 그의 손 안에 있게 되어 종사(宗社)가 거의 기울어질 뻔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나라에 복이 있어서 하루아침에 제거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게 되었으니, 조야(朝野)에서 누가 서로 경하(慶賀)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참찬관 이억손(李億孫)이 아뢰기를,
“삼흉의 무도했던 실상은 대간이 다 아뢰었고, 상께서 환하게 알고 계실 것이니, 지금 굳이 다시 아뢸 필요가 없겠으나 신이 평소에 품었던 생각을 아뢰겠습니다. 사람의 인품에는 크게 차이가 있어서, 작위(爵位)가 차츰 높아질수록 그 마음가짐을 더욱 삼가고 조심하는 자도 있고, 그 직위가 날로 높아짐을 다행으로 여기고 세력을 삼아 위권을 과시하며 기탄없이 방자하게 구는 자도 있습니다. 요즈음 허항과 채무택 등이 세력이 있는 자들에게 의탁하여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올라 기세가 차츰 성하게 되고 위엄이 크게 행해지게 되었었는데 세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겁을 먹고 복종하게 되어 간당(奸黨)이 차츰 많아짐에 따라 나라가 날로 위태롭게 되었었습니다. 만약 공론이 며칠만 더 늦게 발생하였다면 국가의 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英靈)이 국가를 보호해 주시어 공론이 일어났고 상께서 쾌히 따라 주시어 삼흉의 악당들이 하루아침에 제거되었으니, 어찌 종사의 무궁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당초에 황사우(黃士祐)와 이임(李任)이 그 심복(心腹)이었는데, 연달아 모두 일찍 죽었고, 허항과 채무택도 한때에 초상을 당하여 김안로로 하여금 고립되어서 그의 술책을 행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공론이 쉽사리 행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도와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 가득찬 사람이 다 김안로의 당류는 아니었을 것이며 또한 충성스럽고 정직한 선비가 없지도 않았을 것이나, 다만 위세에 겁을 먹고 몸소 나서서 그 예봉(銳鋒)에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니, 국가의 일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왔다가 다시 편안해졌고 인심이 흔들렸다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이제는 오직 상께서 신중하게 성찰(省察)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삼흉의 정상에 대해서는 위아래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지금 허경의 초사(招辭)를 보니, 사림에게 불측스러운 화를 덮어씌우려고 하였고 왕실의 지친(至親)까지 모함하고자 하였다. 또 근거 없는 말까지 만들어 내고 심지어는 소굴이라는 말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한 두 사람에게 그치는 것이겠는가. 그 가리킨 바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이는 사림을 일망타진하여 불측스러운 화를 만들어 내려고 한 것이니, 악이 이미 지극하였는데, 어찌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원전】 18 집 127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중종 37년 3월 19일 기해
김연(金緣)을 승정원 우부승지에, 송기수(宋麒壽)를 홍문관 응교에 제수하였다.
【원전】 18 집 56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중종 37년 9월 19일 병인 - 휘 연(緣)께서 경연(經筵)에 참여하시어 진언(進言)하신 내용-편집자주>
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김연(金緣)이 아뢰기를,
“신이 외방을 왕래할 적에 보니 일로(一路)의 농사지은 곡식이 모두 여물지를 못했었습니다. 경상하도(慶尙下道)는 좀 여물었지만 상도(上道)는 더욱 흉년이 들었는데, 한재(旱災) 때문에 곡식의 이삭이 패지 못하였고 묵혀진 곳도 많았었습니다. 민간에게 물어 보니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먹을 식량이 부족하였으므로 죽음에서 헤어나기에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김매기를 할 수가 없었던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각 고을에서 공채(公債)를 받아들일 적에 금년의 종자(種子)를 마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부실한 곡식까지도 받아들여 숫자만을 채운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금년 봄에 이 곡식 씨앗을 파종(播種)했더니 종자만 허비했을 뿐 싹이 반도 나지 않았고 간혹 싹이 난 것이 있었어도 그대로 시들어 결실하지 못하였답니다. 이래서 앉은 채로 추수할 기대를 잃어 기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는 이를 타농(惰農)으로 논할 뿐이고 재상전(災傷田)으로 쳐서 면세(免稅)시켜 주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원통해 하고 있습니다. 금년의 농사가 이미 이러하니, 조금 여문 곳에는 공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가운데 묵혀져서 실농(失農)한 곳의 공채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내년의 백성들이 삶이 매우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실농한 곳의 지난해 공채에 관한 일은 이미 호조로 하여금 공사(公事)로 만들게 하였다.”
【원전】 18 집 621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농업-농작(農作) / *금융-식리(殖利)
중종 37년 10월 15일 신묘
정순붕(鄭順朋)을 호조 판서에, 황헌(黃憲)을 형조 판서에, 송인수(宋麟壽)를 이조 참판에, 신영(申瑛)을 예조 참판에, 김연(金緣)을 강원도 관찰사에, 이준경(李浚慶)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구수담(具壽聃)을 부제학에 제수하였다.
【원전】 18 집 62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중종 37년 11월 8일 갑인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강원도 관찰사 김연(金緣)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수령들이 휼민(恤民)을 힘쓰지 않으니, 감사는 출척(黜陟)을 엄히 밝히고 형벌을 경감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에 경은 힘쓰라.” 하니, 김연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들으니, 강릉(江陵), 양양(襄陽), 삼척(三陟), 간성(杆城), 울진(蔚珍) 등처는 올해 또 실농하여 민생이 매우 어려우며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구곡(舊穀)은 이미 떨어지고 신세(新稅)는 아직 거두지 못하여 구황(求荒)이 매우 어렵다 하니, 이 일이 몹시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해마다 이와 같으니, 백성의 살길이 막연하구나. 황정(荒政)이 과연 어렵겠다. 경은 노력하라.”
【원전】 18 집 63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