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소막 성당 강원도에서 세 번째 설립된 성당 주소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 용소막 성당은 1904년 강원도에서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무렵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다가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한두 집씩 이사 오고, 당시 전교회장으로 활발한 전교활동을 하던 최도철 바르나바까지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교세가 커지자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에 나서 착공 3년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일제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성당 또한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원형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에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체조배실입니다. 위의 동그린 창으로부터 조배실에 빛이 들어오네요. '피정의 집'과 '두루의 집'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 이 성당은 풍수원 성당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훌륭한 신부님과 신심 깊은 교우들이 계셨고, 지금도 그러하며, 건물 외형이나 내부는 물론 성당을 가릴 듯 큰 느티나무가 있는 것도 비슷하네요. 특히 이곳의 느티나무는 2010년 보호수로 지정되으니, 저 나무의 나이는 167살 정도로 용소막 성당과 희노애락을 함께한 나무지요. 다른 점은 용소막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돌에 새긴 아름다운 다짐이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함께 읽어 보시겠어요? ============================================================================================================= 배론성지 배론성지는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던 곳이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해 세워진 성 요셉신학교가 1866까지 신학교육을 했던 곳입니다. 장주기 성인을 포함한 여러 순교자가 사셨던 거룩한 땅입니다.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박해가 끝나자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느라,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 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에 의한 장티부스 발병으로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사망하였다. 최 신부의 임종은 배론의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가 지켜보았으며 ‘나는 간신히 최 신부가 숨을 거두기 8~9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고 서한에서 적고 있다. 위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인다는데, 저는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심이 좋은 분만 볼수 있나 봅니다. 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Alexius)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다.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소일한다. <다음백과사전 제공 >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백서를 쓰기 시작한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로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라고 한다.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이며, 입구와 달리 안쪽은 토벽으로 된 토굴 이었고, 천정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습으로 만들은 것으로 추정된다. 황사영이 1801년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 배론 신학교 배론 신학교(1855-1866년, 주보성인 성요셉) 설립자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 직무대행 메스트로 신부는 1855년에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마카오에 가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10년간의 모험 끝에 1852년 8월17일 중국 배를 타고 서해안 고군산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1853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사하자 1856년 3월27일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도착 할 때까지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57년 12월30일 과로로 쓰러져 선종 할때까지 배론 신학교 설립 외에도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는 등 착하고 순한 성격으로 최양업 신부와 많은 조선의 신자들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신학교를 성요셉 신학교라고 하였다. 물속에도 예수님이 보입니다. 세 대의 버스로 성지순례를 이끄는 회장님은 긴장을 놓지 못하십니다. |
첫댓글 권헬레라 선생님 작품을 보면서 성지순례길 다시 생각하며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해봅니다.백서 122행으로 적은 13,384자 달하는 장문에 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어떻케 쓸수있을까?
황사영순교자는 하느님에 받은 재능을 천주교 발전에
전부 받쳤습니다.
백서에내용은 첫 부분 신유박해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
둘 째부분은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셋째부분으로 나누어볼수있다.
이 서한을 북경에 구베아 주교님께 전달할 목적으로 쓰여졌다
안탑갑게 이편지 동지사편에 옥천희 전달하려다 발각되고 맙니다
정말 그 백서는 사람의 힘으로 쓴 것이 아닌 듯합니다.
어두운 토굴에서 그렇게 작은 글자를 쓴다는 것은 ...
신앙의 힘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창립초기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은 시복 시성을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광암 이벽성조 를 비롯한 132위 시복 시성 을
추진하고있습니다.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133위 시복추진명단 18번째로
올라가있습니다.오늘날 우리들이 이분들이 빨리 시복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네, 회장님.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후기를 쓰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급하게 다녀오면 저처럼 나이든 사람은 바로 잊혀지므로,
사진을 편집하면서 순례길을 되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박해를 피해서 모여서 만들어진 성당이 저희 후손들에게 자연과 더불어 너무 아름다운 성당을 물려주셨네요^^
날씨도 마음도 은총가득 넘치는 순례길이 였어요^^
늘 훌륨한후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 더 무슨 말을.
이끌고 정리하시고 댓글까지 참 대단하신 카페지기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