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에 자리한 장릉(長陵)이다.
장릉은 제16대 인조(1595~1649)와 인열왕후(1594~1635) 한 씨의 무덤으로
조선 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능원으로 평가받는다. 인조는 파란만장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기(氣)는 물을 만나면 꼼짝 못한다.그 기는 수영을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조선의 궁궐이나 왕릉 사찰 진입로에서 만나는 금천(禁川)이다.그 위에 놓인 금천교(禁川橋)다.
수영을 못하는 기(氣)가 신성한 공간을 침입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일종의 바리케이트 역할을 하는 금천이다.
속계와 성역의 경계역할도 하는 금천교다.
인조 장릉의 제향((祭享)공간이 시작하는 홍살문이다.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문(門)이다.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화살을 막아 놓았다. 홍문(紅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제향공간 정자각(丁子閣)이다. 정자각은 상례 기간에 빈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재궁을 현궁에 안장한 후에는 제향을 거행하는 곳이다. 빈소를 위해 '가정자각'을 별도로 만든다.
정자각은 왕릉 제향을 위한 주된 공간이다. '정자각'이란 '丁'자 모양으로 생긴 공간이란 뜻이다.
동쪽방향으로 두 개의 계단, 서쪽 방향으로 한 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동쪽 방향의 첫번째 계단이 신계(神階)라 하여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이고
두번 째의 계단이 동계(東階)라 하여 왕과 제관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다.
동계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어 올랐다고 한다.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듯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陽)을 뜻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 음(陰)을 뜻한다.
정자각의 기둥 아래쪽은 힌칠이 되어있고 푸른 선도 위와 아래부문에 그어져있다.
모든 기둥 밑부분이 흰색에 푸른색으로 띠를 두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근도배(柱根塗褙)를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색화지를 바르고 청색 화지로 띠를 둘렀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기둥이 공중에 떠 있어 정자각도 하늘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구름 위는 신들이 노니는 공간으로 정자각이 천국에 있슴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자각 왼쪽 서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하나 뿐이다.
임금이 제향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단으로 서계(西階)라고 한다.
서계는 제관이 예감으로 내려갈 때도 사용한다.사당이나 사묘에서도 동입서출(東入西出)의 법도를 따른다.
정자각에서 제향을 받은 조상은 능침공간으로 돌아간다.그때 밟고 건너는 돌다리 신교(神橋)다.
조선왕릉만이 자랑하는 자연스럽게 생긴 언덕(岡) 사초지(沙草地)이다.
조선왕릉은 생기(生氣)를 갈무리 조절하는 풍수시스템이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인조는 1595년 11월 7일 임진왜란 중 피란지인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원종으로 추존)이고, 어머니는 인헌왕후(추존) 구씨다.
제15대 왕 광해군의 서조카(庶姪)이고, 인목대비에게는 서손자가 된다. 인조의 휘는 종(倧), 자는 화백(和伯)이다.
어려서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인조는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많았다.
선조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것은 한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조는 1607년 능양도정(綾陽都正·도정은 조선시대 종실과 외척에 관한 일을 맡아 하던 정3품 벼슬을 가리킴)에
봉해졌다가 능양군으로 진봉(進封·봉작을 높여줌)됐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로 고민하던 선조는 인빈김씨 소생의 신성군을 세자 삼으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이어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려던 차에 급서했다.
결국 왕위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세자가 된 공빈김씨 소생의 광해군에게 돌아갔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 반대파를 철저히 제거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대비의 아버지를 반역죄로 몰아
사형에 처하는가 하면, 8세에 불과한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증살(蒸殺)케 했다(광해군 6년, 1611).
훗날 이러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왔다.
1615년 신성군의 양자로 간 능창군(인조의 막내동생)이 역모사건으로 투옥돼 자살하자, 능양군은 광해 15년(1623)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과 함께 반정을 일으켰다. 3월 12일 밤 대궐(창덕궁)을 장악한 반란군이 불을 질러 인정전만 남기고 모두 탔다. 광해군은 어의(御醫) 집에 숨어 있다 잡혔다. 잿더미가 된 침전에서 광해군이 숨겨놓은 은괘 4만 냥이 나왔고, 후원에서
어보(御寶·옥새)를 수습했다. 능양군은 곧장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어보를 바쳤다.
이에 기뻐한 인목대비가 그 자리에서 다시 옥새를 전하려 했으나 능양군이 환궁해 정전에서 받겠다며 사양했다.
정통성을 갖추고자 함이었다.그러나 환궁 후 능양군이 서둘러 어보를 받으려 하자 이번에는 대비가
“먼저 이혼(李琿·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라.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에 능양군 등이 “폐치(廢置·왕위를 폐하고 내버려둠)한 전례는 있으나 주륙(誅戮·죄를 물어 죽임)한 선례가 없다” 하며
어보를 받았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그동안 중립외교를 펴온 대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친명사대주의를 표명해 정국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으로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청나라와 군신관계가 됐다. 두 차례의 호란은 왜란에 비해 전쟁 기간이 짧았지만 피해는 엄청났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갔다. 조정은 청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 시기 명나라가 몰락하고 일본은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조는 대동법을 확대하는 등 정국을 주도하고자 했으나
정책 대부분이 이미 광해군 때 실시한 것이어서 새로운 발전은 없었다.
장릉은 봉분 앞에 혼유석 2좌(座)를 배치하였다. 2위(位)임을 나타냈다.
합장릉과 단릉(單陵)은 봉분이 하나라서구별이 쉽지 않다. 혼유석이 1좌(座)면 단릉이다.
장릉과 같이 혼유석이 두 좌(座)면 합장릉이다.
장릉의 석물구조는 봉분 아래로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바깥으로 돌로 난간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하여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봉분 주위로는 석마(石馬), 석양(石羊), 석호(石虎)를 각각 2필씩 배치하였다.
장명등 아래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1쌍씩 세웠다.
인석(왕릉의 호석이나 병풍석에 얹은 돌)에도 만개한 꽃무늬가 있다. 중심부에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용맥의 기(氣)가 흘러드는 맥세(脈勢)가 힘차게 꿈틀거린다.
능침으로 다가오면서 볼록하게 솟은 부문이 퍽 실하다. 이는 인공으로 볼록하게 쌓은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습이다.이렇게 자연스럽게 볼록 솟아난 곳을 풍수에서는 잉(孕)이라고 한다.
맥세를 타고 내려온 생기(生氣)는 이 잉(孕)을 거치면서 더욱 힘껏 능침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한다.
이 잉(孕)이 실하면 보통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장릉은 처음 조성될 당시에는 파주 소재지로부터 북쪽 20리 거리에 있었다[『인조실록』 인조대왕 묘지문].
1636년(인조 14) 2월 13일에 총호사(總護使)홍서봉(洪瑞鳳) 등이 파주의 산릉에 가서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혈을 정했다.
1649년 5월 8일, 인조가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하자, 생전의 뜻대로 장지는 인열왕후의 능이 있는 장릉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미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장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왔다(『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하지만 장릉은 인조가 생전에 미리 정해 둔 장지였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었다.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가정자각(假丁字閣)을 짓기 시작해, 그해 9월 20일에 묘좌유향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효종실록』 즉위년 9월 20일). 인조는 인열왕후의 국장 때 자신의 사후 능침 자리를 고려하여, 곡장(曲墻)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정자각도 중앙에 짓게 하였다. 이는 또한 능역을 새로 조성하느라 백성을 거듭 번거롭게 하는 일을
방지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한편 장릉이 길하지 않다는 주장과 천장에 관한 논의는 인조의 생전에도 있었는데, 이는 인조의 국장을 치른 뒤에도 여전하였다.
1687년(숙종 13) 10월에는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의 아들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상소를 올려, 장릉 풍수의 흠을
말하고 길한 자리를 다시 정하도록 청했다. 이듬해 9월 13일에 다시 장릉의 풍수에 결점이 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결국 천장을 주장하는 자들을 모두 벌하였다.
그에 따라 장릉의 천장 문제는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40여 년 뒤인 1731년에 다시 논의가 진행되었다. 장릉의 능침 사이에 뱀이
출몰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세간에서는 능을 처음 개광할 때 뱀이 출몰했으나 당시 총호사였던 김자점(金自點)이 이를 숨기고
그대로 능을 봉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아 그해 3월 16일에 천릉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실제로 신하들이 장릉을
시찰했을 때도 뱀이 출몰하고, 석물이 갈라지는 변고를 보게 됨에 따라 결국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28일에는 총호사홍치중(洪致中) 등이 새 능지를 살피고 돌아와, 능지 주변의 형세와 혈(穴) 자리가
매우 좋다고 아뢰었다(『영조실록』 7년 5월 28일).
새 장릉은 합장릉의 제도를 따랐는데, 치수가 맞지 않는 병풍석·난간석·혼유석·장명등 등만 새로 만들고
나머지 석물은 옛 능에서 옮겨 와 그대로 사용하였다. 원경 및 석물의 배설은 영릉(英陵)을 따르고,
방위는 이전과 같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30일에 마침내 천장을 거행하였다.
"인조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은 만력 을미년(1595. 선조 28) 11월 7일(을해)에 탄생하여 처음 능양군에 봉해졌고,
천계 계해년(1623, 인조 1)에 즉위하였다. 숭정 기축년(1649, 인조 27) 5월 8일(병일)에 승하하니 재위는 27년이고
나이는 55세이다.
왕비 명덕 정순 인열왕후 한씨는 만력 갑오년(1594, 선조 27) 7월 1일(정축)에 탄생하여 계해년(1623, 인조 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숭정 을해년(1635, 인조 13) 12월 9일(을유)에 승하하니 나이는 42세이다.
처음에는 파주읍 북운천리에 묘좌로 산등성이는 같으나 혈자리를 달리하여 장사되었다가,
숭정 기원 후 103년(1731, 영조 7 신해) 8월 30일(경신)에 교하 구읍 자좌 언덕에 이장하고 합장하였다.
겉(외형)은 임좌이다."라고 적혀있어요."-장릉 비문 역문에서
장릉(長陵) 재실(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