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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주 첫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스가랴 1-8 | 시 53 |
제21주 둘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나귀 타고 오는 메시아 | 스가랴 9-14 | 시 91 |
내가 예언자로서 한 일은 절망과 좌절에 휩싸여 있던 유대 백성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심어주는 일이었지. 막 유다 나라로 귀국해서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망연자실해 있던 이들이게 말이야. 물론 나보다 앞서 학개가 선배 예언자로서 이 일을 시작했어. 새로운 마음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학개가 착안한대로 새 성전을 짓는 일이 제일 좋겠더라구. 성전 착공이야말로 사람들의 의식을 한데 묶어줄 최상책이니까. 그렇지만 성전을 짓는다 해도 그 일을 추진할 구심세력이 필요해. 그래서 나는 야훼 하나님께 ‘누구를 중심으로 성전건립에 나서야 합니까?’를 계속 물으며 기도 드렸지.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성전 짓는 일을 도울 것이다. 그 때에야 너희가,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면,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6:15). ‘먼데서 온 이들이 누굽니까?’라고 야훼 하나님께 나는 다시 물었지.
그런데 하루는 밤에 환상을 보았어. 화석류나무들 사이로 기마대들이 보이더군. 웬 기마대일까 싶었는데, 말 탄 이들이 한 천사에게 세상 동정을 보고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이 땅을 두루 다니면서 살펴보니, 온 땅이 조용하고 평안하였습니다”(1:11)라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대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터져 나오려고 하는데, 보고를 받던 천사가 하나님께 먼저 탄원을 드리는 거야. “만군의 주님,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신 지 벌써 칠십 년이나 되었습니다”(1:12). 그 천사는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의 수호천사이었나 봐. 그 천사가 나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이렇게 선포하라고 이르더군:
“나 주가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이 도성에 돌아왔다. 그 가운데 내 집을 다시 세우겠다. 예루살렘 위에 측량줄을 다시 긋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1:16).
그러더니만 하루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뿔이 환상으로 보이더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넷씩이나. 무얼 말씀하시려 하나 해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먼저 번에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와서 그 뿔들은 유다를 흩뜨리어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했던 나라들이지만 이제는 대장장이들이 와서 힘을 못 쓰게 꺾어버릴 거라며 앞일을 미리 알려주더군. 그래서 난 유대 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어.
그런 깨달음과 동시에 환상에서 장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어. 누가 측량줄을 잡고 있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폭과 길이를 알아보러 가는 길이라더군. 또다시 장면이 바뀌더니만 이번에는 성전에서 쓰이는 금 등잔대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모습이 잡히더군. 이런 환상을 통해 나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 건립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느꼈어.
여러 번의 환상을 보고 나서야 야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조금 알 것 같더구만. 성전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새기려 했던, 이방 문화권에 동화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던 이들이 지을 거라는 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는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난 이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의 싹이 움틀 것임을 예언자적인 직관으로 알아차렸던 거야. 그래서 특별히 바빌론에 관계된 모든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어느 날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내렸어. 그 날은 바빌론 포로민들이 본국 재건을 위해 보내온 예물사절단이 도착했을 즈음이야. 예물로 보내온 금과 은을 받아다가 면류관을 만들어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의 머리에 씌우라더군. 그제야 난 스룹바벨이 성전건립의 구심점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 어쨌거나 기쁜 마음으로 야훼께서 시키는 대로했어. 대관식 때 야훼께서 다시 말씀하시더군: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의 이름은 ‘새싹’이다. 그가 제자리에서 새싹처럼 돋아나서,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가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며,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한 제사장이 그 왕좌 곁에 설 것이며, 이 두 사람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할 것이다”(6:12-13).
스룹바벨로서는 대단한 용단을 내린 거야. 유대 나라로서의 주권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 성전 건립을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유대 민족과 어울릴 수 없었던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과 민족적인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주변민족들로부터는 미운 털이 박히게 마련이거든. 그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무기를 들고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으니, 인물은 인물이야.
어쨌거나 성전 신축을 해나감으로써 스룹바벨의 입장은 무척 난처해졌어. 유대인들의 중심조직체가 생겼으니 여러 모로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고위층에 모함하는 편지를 띄운 거야. 그러니 유다 근방에 부임하고 있는 페르시아 관리들의 사찰을 받게 되었지. 성전은 유대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는 크나큰 힘을 간직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던 거지. 덕분에 페르시아의 요주의 감시대상으로 주목되었고, 그 결과로 성전신축은 중단되기도 했어.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구심세력은 있어야 페르시아 변방으로 쳐들어오는 외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으리라는 속셈 또한 작용했어. 유대 민족의 자치성을 페르시아에 위협되지 않을 정도로 인정해 주면 득이 될지언정 화가 되지는 않는다는 치밀한 계산이 있고 나서야 성전건립은 다시 시작되어 완공될 수 있었어.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시 굳건하게 서게 된 성전은 그야말로 유대 민족의 대환영을 받았어. 메시아 시대가 다시 도래하였다는 부푼 마음이 흘러 넘쳤으니까. 이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환성이 크게 울려 퍼졌지: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9:9-10).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한 메시아 대망을 꺼리는 이들이 언제고 있게 마련이지. 현재 누리고 있는 권세가 클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 자기 소유로 되어 있는 그 무엇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니까. 내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대에도 그랬어. 유대 민족의 대망 사상이 고조된다는 것은 곧 페르시아에 대한 항거로 이어질 공산이 컸지. 그래서 그런지 아예 그 싹을 잘라 버리더라구. 성전건립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스룹바벨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켜버리더군. 그러니 정치적인 운동은 일어날 틈도 없이 사그라지고, 대사제 여호수아가 종교적인 예식의 중심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잘된 일이야. 뭐니 뭐니 해도 유대 민족의 가슴 안에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뜨겁게 살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거든. 새로 건립된 성전 또한 예식 중심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으니까. 예식 안에서 깨우친 하나님의 뜻이 일상생활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어. 그런 의식이 움터 나오기는 좀 이르지 않았나 하는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 그래서 잠자코 있으려니 스룹바벨 대신 부임한 베델사레셀이 부하를 시켜 예식 관계를 문의하더군. “우리가 지난 여러 해 동안에 해 온 그대로, 다섯째 달에 애곡하면서 금식해야 합니까?”(7:3)라며. 그래서 나는 유배 이전에 숱한 예언자들이 선포했듯이 예식에 앞서 신앙인의 삶이 중요함을 역설했지.
“너는 이 땅의 온 백성과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가 지난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며 애곡하기는 하였으나,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하여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생각을 하지 말아라”(7:5-6.9-10).▩
제21주 셋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에돔 파멸 예언 야훼의 날의 선포 | 오바댜 1 요엘 1-4 | 시 42 |
1. 미움도 이용하는 오바댜
사람은 누구나 제 시대를 타고 태어나는 법이야. 그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지. 싫건 좋건 그 시대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해. 그렇지만 내가 살던 시대의 아픔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어.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토록 호소하며 외쳤는데도 유다 왕국은 끝내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군의 침공을 받아 무너졌거든. 그러니 그 아픔을 어찌 견디겠나? 친지들이 죽어가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판국에. 이제는 모두가 끝장났다는 처절한 분위기만 감돌았지.
나라 없는 설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나라가 망하고 나니까 주변 국가들이 틈만 나면 치고 들어와서 털어 가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라구. 특히나 형제의 나라라 할 수 있는 에돔까지도 달려드는데 미치겠더라구. 기원전 597년에 바빌로니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만 해도 약소국들이 힘을 뭉쳐서 대항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서로의 운명을 같이 할 듯이 친근하게 다가오던 에돔인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었지. 예루살렘 성문을 부수고 바빌로니아 군이 밀려들어 약탈하여 서로 나누어 가지던 날, 유대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주지는 못할망정 같이 한 통속이 되어 도망치는 유대 백성들의 뒤를 쳤어. 몸을 뺄 수 없는 궁지에 몰린 야곱의 후손을 무참히 죽이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 넘겼지. 그러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 누가 그 소리를 대변해. 너도나도 살길 찾아 우왕좌왕하는 판에. 여기서 짧지만 예언자로서의 내 삶이 시작된 거야. 에돔을 향해 치밀어 오르는 민중들의 분노를 내 목소리에 담아 선포하는 예언자로서의 삶이.
“내가 모든 민족을 심판할 주의 날이 다가온다. 네가 한 대로 당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을 네가 도로 받을 것이다” (1:15).
내 짧은 예언은 아무 희망조차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큰 힘이 되었어.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지도자급의 인물들이 모두 다 유배되었는데, 어디에 희망을 두겠어. 그저 약탈자들을 두려워하면서 살아남는 데만 혈안이었을 뿐이지. 그런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던 ‘에돔에 대한 미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거야.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재건되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에돔을 미워하는 감정만으로도 그들은 한 민족임을, 공동운명체임을 다시 자각할 수 있었어. 한마디로 미움이라는 감정이 이스라엘을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지.
이로부터 나는 에돔에게 야훼의 처절한 심판이 내리리라는 예언만 선포하게 되었지. 사람들하고 주고받는 이야기도 대게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지. 누가 나에게 반론을 제기하더구만. 에돔은 사람들이 바위굴과 높은 곳에 터 잡고 사는 등 지형적인 조건이 좋아 유다 왕국보다는 한결 방어하기가 쉽지 않겠냐구. 그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어.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호되게 치시는 분인데.
“나는 여러 민족 가운데서 너를 가장 보잘것없이 만들겠다. 모든 사람이 너를 경멸할 것이다. 네가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높은 곳에 집을 지어 놓고는, ‘누가 나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으랴’ 하고 마음 속으로 말하지만,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이고 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하여도, 네가 별들 사이에 둥지를 튼다 하여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 나 주의 말이다”(1:2-4).
미움의 강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결속력을 다지려 했던 내 마음을 하나님만은 알고 계실 거야.▩
2. 야훼의 영이 내리리라는 요엘
예언자는 시대의 뜻을 예민하게 알아차려야 될 뿐 아니라, 그때그때 벌어지는 재난 역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을 내려야 해. 물론 이 일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지. 내가 살던 시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지 벌써 150년이나 지났을 때였지. 그 때 나는 뜻하지 않은 재앙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일깨울 사명을 부여받은 예언자로 등장하게 되었어.
사건의 발단은 메뚜기였어.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롯한 중근동 일대에서는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때때로 메뚜기 떼로 말미암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곤 해. 농경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메뚜기 떼의 침입만큼 끔찍한 재앙은 없어. 메뚜기 떼가 일단 내려앉으면 수습할 방안이 없어. 새까맣게 내려앉아서 풀이며, 곡식이며 온갖 푸성귀들을 뜯는데, 아무리 쫓으려 갖은 애를 써도 헛수고야. 비단 양식뿐만 아니라 가축들의 사료가 될 풀도 모조리 갉아먹어 버리니 이를 어째.
그런데 그 재앙이 나라 없는 땅에서 근근이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가는 이스라엘에게 닥쳤어. 가뜩이나 실의에 차 있는 농민들에게. 왜 그랬을까? 당신 백성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도록 짓누르실 하나님은 아니잖은가? 이럼 물음에 사로 잡혀 하나님께 달려들었어. 그러다가 어떤 깨달음이 스치더군. 모든 이들을 심판할 야훼의 날이다 싶은 거야. 아니 그 날을 대비하라는 가르침을 이번 재앙을 통해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 하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 그래서 외쳤어.
“거룩한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라. 장로들과 유다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을 불러 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모으고, 주님께 부르짖어라. 슬프다, 그 날이여! 주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다가왔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바로 그 파멸의 날이 다가왔다. 곡식이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는 기쁨도 즐거움도 없다. 씨앗이 흙덩이 속에서 모두 말라죽고, 광마다 텅텅 비고, 가물어, 거두어들일 곡식이 없어서, 창고는 폐허가 된다. 풀밭이 없어, 가축들이 울부짖고, 소 떼가 정신없이 헤매며, 양 떼도 괴로워한다” (1:14-18).
이럴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어. 사람들뿐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불러야 해. 단식하며 지난 잘못을 반성하며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하지. 우리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실 지도 모르니까.
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서나 하나님이 중심 위치에 굳건히 서 계시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예언자가 되어야 해. 나는 그런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언자다운 감수성으로 감지할 수 있었어. 하나님께서 먼 훗날 일어날 종말적인 사건을 내게 일러 주셨거든.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내릴 성령강림의 사건을….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그 날에 내가 하늘과 땅에 징조를 나타내겠다. 피와 불과 연기구름이 나타나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다. 끔찍스럽고 크나큰 주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2:28-32).
이때 내가 선포한 예언말씀이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14-36) 때 고스란히 인용될 줄은 미처 몰랐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간의 모습을 취해서 내려오실 줄은, 나아가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줄은,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성령을 협조자로 모든 이들 위에 부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지.
기원전 400년경에 선포한 내 예언말씀이 이런 식으로 결실을 맺을 줄은 정말 몰랐지. 누가 알았겠어. 예언 말씀을 받을 당시에는 의아하기만 했거든. 메뚜기떼에 의해 절단 난 농작물을 바라보며 통곡하는 이들에게 ‘영이 내리리라’는 얼빠진 소리를 외쳐야 하다니 하면서.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더군.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야. 내 입을 통해 나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지.
그러니 인간의 셈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일을 해나가야 돼. 설사 이해하기 힘든 재앙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나를 만드시고 이끄시고 쓰시는 분은 그분이니까. 그분께만 모든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신앙인들의 삶이 아니겠나 싶어.▩
제21주 넷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구원하시는 하나님 | 다니엘 1-6 | 시 1 |
제21주 다섯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기도 |
다니엘이 본 환시 | 다니엘 7-12 | 시 2 |
제21주 여섯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기도 |
찬미와 영광 | 다니엘 13-14 | 시 4 |
1.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저자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저자는 안티오쿠스 4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살았으리라 추정됩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상황은 다니엘서와 외경인 마카베오서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유다는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년)의 정복으로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군사적인 정복뿐 아니라 그리스 문화의 가장 좋은 결실을 전파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하나의 세계’-그리스 문화로 한데 결속된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리스 학문이 다른 모든 학문보다 우월하다고 믿은 그는 그리스의 학문, 예술, 교양으로 고대문화를 발효시키는 것이 자기의 신적인 사명-그는 신으로 공경되었습니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주전 323년, 그의 33회 생일에 이르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의 방대한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그 가운데 두 장군이 동부지역을 물려받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는 셀류코스에게 돌아갔고, 이집트는 프톨레매오 세력아래 들어갔습니다.
알렉산더 제국의 분할 이후 얼마 안 되어서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매오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습니다. 이 에집트의 지도자들은 공격적인 셀류코스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잘 지냈고, 유대인들에게 문화적인 융화를 강요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프톨레매오 3세(주전 246-221)는 예루살렘 방문 시에 유다의 풍속에 경의를 표하고 성전에서 감사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시리아의 셀류코스 가문이 의당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하며, 지중해 해안지방을 손에 넣으려고 계속 주장했지만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3세기 동안 이집트의 지배아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주전 223년에 안티오쿠스 3세가 안티오키아에서 시리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20년 이상 걸린 이집트와의 전쟁이후 주전 198년에 시리아 왕은 요르단 강의 원천 가까이 있는 바니아스(또는 파네아스)에서 프톨레매오 5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다음 팔레스타인을 정치적으로 자기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안티오쿠스 대왕은 강력한 헬레니즘의 기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중 한 사람인 안티오쿠스 4세(주전 175-163)는 스스로 신(제우스)이 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선왕의 정책을 광신적으로 추종했습니다. 그의 모상을 새긴 동전에는 테오스(신)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성을 자부하는 것은 알렉산더나 다른 왕들과 같은 노선이었지만 그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려 들었고 자신의 제국 안에서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는데 조금도 주저치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지방의 종교적 전통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충성을 시험하는 것이 바로 제우스 예배였고 이것은 발현한 신인 왕의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 이상으로 더 분명하게 계산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교의는 아주 일찍부터 야훼의 질투였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그 어떠한 다른 신들과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어떤 형태의 우상숭배든지 절대로 참지 못하는 신입니다.
그렇지만 헬레니즘에 대한 안티오쿠스의 열정이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일에 그를 개입하게 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톨레매오와 오래 끌어온 전쟁 때문에, 또 뒤흔들리는 셀류코스 왕국을 바로 잡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재정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돈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발심은 처음 경제적인 차원, 즉 과도한 세금 징수에서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거룩한 직책인 대제관직이 가장 많은 뇌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경매된 때에 일어난 반항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스캔들에는 둘 다 그리스 이름을 쓰는 야손과 메넬라오수라는 친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상당한 뇌물을 바쳐서 자기 형인 오니아스 3세를 파면시키고, 자기에게 대사제직을 주면 추가로 안티오쿠스왕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체육관을 건설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마카베오상 1:11-15). 그런데 야손이 헤라클레스를 기념하여 두로에서 개최된 그리스 경기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메날라오스가 더 많은 뇌물을 바치고 그 직책을 차지했습니다. 폭동은 잇따라 일어났고 야손이 돌아와 메넬라오스를 추방했으니, 자연히 메넬라오스는 안티오쿠스에게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메넬라오스를 복직시켰으며 성전을 약탈하고 유다인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백성들을 징계했습니다(마카베오하 4-5장).
그런데 이런 행위는 일을 더욱 그르치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의 뜻을 경멸하는데 화가 나고 또 이집트 원정에서 자기 군대가 패한 것에 마음이 상한 안티오쿠스는 반역자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종교가 불법이라고 하며 유대인의 생활을 완전히 헬레니즘식으로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칙령에 따라서 자기 자녀를 할례 시키는 어머니들이 사형 당하고 토라(율법)의 사본들이 불태워졌으며 안식일 준수와 토라 사본의 소유는 중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는 유다이즘을 박멸할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전 168년에 자기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군시켰습니다. 성전 마당에 있는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런 파멸의 우상’-제우스의 제단에 대한 유대인들의 표현-을 세움으로 성전이 훼손되었고, 또 그 제단 위에 돼지-유다의 율법에 의하면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부정한 동물-를 봉헌함으로 더욱 더럽혀졌습니다(1마카 1,54). 지방에도 이방인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제우스에게 제사를 바치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의 군대는 왕의 칙령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보기 위하여 전국을 감시했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은 순교를 감수하거나(마카베오하 6-7장) 사막으로 피신하였습니다(마카베오상 2:29-38). 이때 마따디아와 그의 아들들은 같은 뜻을 가진 유대인들을 이끌고 무력으로 항쟁하였습니다. 그들은 셀레우코스 군대를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여 재봉헌하였으며 야훼께 예배를 드렸습니다(마카 베오상 4:36-61; 마카베오하 10:1-8). 다니엘서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졌습니다.
2. 다니엘서의 종교적 가르침
다니엘서는 유다의 전통 사상 특히 예언 사상을 바탕으로 당시에 유대인들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 저술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유대인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어려움은 안티오쿠스 4세의 가혹한 종교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 때문에 야훼 신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욱더 확고히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서의 저자는 야훼야말로 진정한 하늘과 땅의 주인이요 참 하나님임을 역설합니다(2:18-19.47; 3:90; 4:34; 5:23; 11:36 참조).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정치 권력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맞서거나 도전할 수 없다는 것과 그분의 최상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4:31-32).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 분이 주신 윤리, 예배 등에 관한 율법을 지키고 축제일을 지내며(7:25 참조) 합당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충실히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방 백성들이나 왕들도 회개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면 이러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구원 보편 사상이 다니엘서 저자의 사상입니다.
다니엘 저자는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당시 유다를 지배했던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의 세력의 역사로 보고(7장; 8장 참조)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인간의 악을 징벌하신다. 인류 역사는 결국 하나님과 악과의 투쟁 과정이며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신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현실에서 악 때문에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지만 시련의 때가 지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을 확신하며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날이 오면 지상 왕국(2장에서는 신상으로 상징됨)은 모두 사라지고 영원히 계속될 하나님 나라가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 나라야말로 의인들의 왕국이며(7:18) 모든 권력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통치하는 나라이다(7:14). 신앙 때문에 죽은 이들은 부활하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심판하시어 의인들에게는 상을 주고 악인들은 벌하신다(12:1-2).
현실 속에 굳건히 서 있는 악의 세력을 쳐부술 하나님의 승리, 평화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올 것임을 선포한 다니엘서의 희망의 메시지는 그 후 유다 문학과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 예고와 종말 예고(마 24:15; 26:64 참조), 그리고 로마 박해 당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요한묵시록도 다니엘서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희망의 메시지는 비단 특정 시대의 유대인들만을 향하여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강대국들이 인류 역사를 좌우하고 있는 듯 보이는 상황 하에서 현실적으로 갖은 아픔을 당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다니엘서의 희망의 말씀은 여전히 생생한 생명과 희망의 능력을 부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