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2018-12-02 이태원성당. 예비자교리시간.
1. 오늘은 여러분의 교리서, 26과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을 말하는 날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 놓고, 다르게 말할 때는, ‘사회교리’라는 말로도 설명합니다. 글자를 표현된 것을 설명하는 시간은 아니기에, 그 표현을 통해서 뭔가를 듣는 우리는 삶에서 어떤 태도를 드러내야 하겠습니까? 어떤 것이 그리스도교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옳게 사는 것이냐는 질문이고, 대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2. 사람의 삶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이론을 대하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말합니다. 기준은 있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지고, 행동도 거부하거나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3. 세상의 논리는 돈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권력과 명예를 중심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니, 내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산다고 해서, 특별히 비난을 당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스도교신앙인이라면, 내가 드러내는 모습이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실천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뜻을 얼마나 가까이하는 것인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실천하려고 했던 일과 얼마나 일치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 모양을로 삶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드러내는 보통의 삶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드러내야 하는 올바른 삶의 기준을 배우고 익히자는 것입니다.
4. 사회교리는 사회에서 우리가 느끼고 발견하고 만날 수 있는 문제나 현상과 일들에 관하여 신앙인으로서 드러내야하는 원칙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내 맘에는 들지 않을 수 있어도, 드러내야 하는 삶의 자세가 무엇이냐고 묻고 올바른 삶의 기준을 세우는 일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드러내야 할 모양은 세상이 발전하면서, 세상이 달라지면서 그 모양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생각하라면, 그 일에 하느님은 과연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설명을 담은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회교리는 ‘사회ㆍ경제생활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달라지면, 그 표현도 달라질 것입니다.
5. 신앙이 적용되는 분야는 세상에서 사람이 만나는 모든 분야와 같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나라에 함께하거나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윤리적인 가르침만을 말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삶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모든 행동과 그 결과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해야 한다면, 그 범위를 넓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능력이 뛰어나고 무궁무진(!)할 수도 있기에, 그가 대하는 세상의 크기를 줄이면 안 됩니다. 줄이면 잘못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이익이 되거나 도움이 되는 일만 하겠다고 잘못 생각하고,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드러내면서, 그것이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6. 세상이 발전하고 다양해질수록, 같은 일도 설명하는 표현이 많아집니다. 배우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누구나 다 똑똑해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전문가(專門家)집단(集團)의 도움이 없으면, 모든 방면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도 힘들고, 드러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회교리, 다른 말로 내가 사는 사회에 신앙인으로서 배우고 익힌 진리를 드러내어 산다는 것은 세상현실의 변화와 발전을 향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고, 내 생각이 옳다고 말할 수도 있는 세상에서 교회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론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내 삶의 지침으로 삼겠습니까?
7. 교회공동체를 담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말하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전부 옳은 일이라고 누가 확신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들의 이론이나 가르침을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올바른 것을 찾고 또 찾아서 바른 길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적용될 하느님의 뜻을 대하는 교회공동체의 기준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때 말하는 기준이나 원칙은 말하는 사람이나, 말을 해야 하는 환경이나 대상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현실에 비춰 원칙을 적용하는 표현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그 정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인간존엄성의 원리/원칙
8. 진화를 얘기하는 세상의 논리는 다릅니다만,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가장 존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되었다고 신앙에서 말한다고 해서,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과 원칙의 문제이지, 과학의 증명을 기대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사람은 80년이나 100년을 세상에서 삽니다. 옛날에는 60살인 환갑까지 살면 많이 살았다고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시간을 넘겼으니, 큰일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더 길어져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9.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도 경험으로 확인한 일은 없지만,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이 대하는 동물과는 다르게, 귀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태도가 옳은 일은 아니지만, 소나 돼지, 혹은 말이나 다른 어떤 동물에 비교해서 사라의 가치를 계산하지는 않습니다.
10. 신앙에서 사람을 귀중한 존재로 보는 것은, 사람이 현세상의 존재로 산 것으로 그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理論)은 이렇게 말합니다만, 사실은 이렇게만 대하지는 않습니다. 난민을 대하는 문제도 그렇고, 나보다 경제력이 약하거나 힘이 약한 사람을 우리는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러한 사람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렇게 주장하겠지만, 나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 나를 무시하거나 멸시하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겠습니까? 자신이 귀중한 존재로 대우받으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중요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2.공동선의 원리>
11. 교회공동체가 신앙인들에게 말하는 사회교리의 두 번째원칙은, <공동선>에 대한 것입니다. 공동선이라는 표현은,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이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 낱말은 개인의 선뿐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공동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교회의 의도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람은 혼자살 수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함께 또 다른 사람을 기억하며 내 삶을 드러낼 때에 의미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개개인의 선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에 대한 것을 생각하면, 사람은 자신만을 위한 행동으로 잘못되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을 위한 선의 합이 공동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공동선을 실행하면, 개인에게도 선을 행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시대에 민감한, <소득주도성장>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더 잘 살겠다고 하는 돈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는 의도는 없다고 해야 합니다.
<3.보조성의 원리>
12. 세 번째 원칙으로 말하는, 보조성의 원리라는 말은, 상위질서의 사회는 하위질성의 사회를 돕는 차원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일에 개입해서, 간섭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방정부가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실천하도록, 보조하고 지원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할 수 있는 것을 부모가 나서서 다 해주거나 부모에게 다 미루는 것도 어떻게 보면 보조성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13. 보조성의 원리가 잘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는 사회중간단체들은 결국 상위단체들에 흡수되거나 대치되어 고유의 품위와 본연의 위치를 잃게 됩니다. 능력이 있는 한 대상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능력의 개인 차이는 있기에, 효율적인 것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연대성의 원리>
14. 개인이 사회에 대해, 사회는 개인에 대해 서로 의존하며 서로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연대성의 원리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하는 표현입니다. 이 연대성의 원리가 제대로 실천될 때, 인간은 다른 사람이 또는 다른 집단이 겪는 곤궁과 비참과 불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노동조합이나, 자본가들을 상대로 하여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일도 연대성의 원리를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 그리고 연대성의 원리는 사회생활의 모든 국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15. 신앙공동체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여 드러낸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하고, 사람의 존엄성이 무시되던 때부터 시작합니다. 흔히 <노동헌장>이라고 알려진, 1891년의 교황님의 회칙(=레룸 노바룸/새로운 사태)이 그 시작입니다.
16. 교회공동체는 왜 자본가의 반대편에 서서 한쪽을 옹호하느냐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신은 약자이고, 교회공동체가 자신의 편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에서 우리가 활동해야 하고 그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중요한 논리를 바탕으로 합니다.
17.힘이 센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거나 다른 사람이 돕지 않아도 사는 일에 문제가 크게 생기지는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돕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심각한 삶의 위협이 생긴다는 뜻이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처지에서 교회공동체는 사회교리를 말합니다.
18.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힘겨운 사람과 나누어야 할까요? 돈의 논리가 있고, 자본의 논리가 있는 세상에서 그 이론을 적용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옳거나 옳지 않은 일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활동을 왜곡된 시각으로 봐서, <사회주의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한 일입니다.
19.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이루어지겠습니까? 날짜일까요? 상황일까요? 나만 실현할 일일까요, 서로 돕고 자신의 역할을 잘 생각하는데서 이루어지는 일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