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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라노와 오비히로 사이 세 철로가 만나는 지점에 신도쿠 역이다>
♠제4일 (2015.7.21.화) 삿포로_아사히가와_비에이_후라노_신도쿠_오비히로
오늘 여행은 호텔 조식 후 Check-out 하게 되면 계속 캐리어를 끌고 이동해야 하는 힘든 일정이었다. 여정도 빡빡하고 이동 거리도 길어 힘든 하루가 될 듯한데 날씨는 흐려 비가 올 듯도 해 우산까지 챙겨야 했다. 오늘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비에이에서 트윙클 버스를 타고 넓은 구릉 지대를 관람하는 것과 Lavender Farm 역에 내려 Farm Tomita를 관람하는 두 가지이다. 오늘 일정이 일정인지라 5시 30분 기상해 6시 30분에 호텔 식당 입구에 기다렸다가 아침을 먹었다. 이 호텔은 제법 격조가 있는 듯 호텔 제공 슬리퍼를 끌고 입장하려던 안, 황 두 사람은 입구에서 지키는 못생긴 아가씨의 제지를 받아 제대로 된 신발을 신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음식은 뷔페식이었는데 제법 다양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반찬도 있었다. 나는 얌(yam _ 마 비슷한 덩이 식물)죽과 과일을 넣은 요구르트, 양파를 많이 넣은 채소샐러드, 베이컨, 달걀부침, 달걀찜, 낫토, 커피, 그리고 신 선생에게도 하나 챙기라고 하면서 삶은 달걀을 하나 챙겼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 아침을 될 수 있으면 80% 정도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게 다니기도 편하고, 아무래도 어젯밤 술을 퍼마신 후인지라 위장에 부담도 적게 주는 것 같아서이다.
<황 선생 이야기로는 이 호텔 음식이 대체적으로 잘 나오는 것이라 한다. 중식 때, 외부인에게 1,400엔이니까 우리 돈으로 13,000원 정돈데 우리 관점에서 보면 별로라 하겠다. 귀국 후 인천에 있는 새로 생긴 ‘풀잎채’라는 한식뷔페에 갔더니 12,000원에 각종 고기는 물론이고 초계탕, 쭈꾸미 무침, 냉면, 곤드레 밥, 빙설, 제대로 된 커피 등등 1시간 30분 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개업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4명에 1명은 무료여서 9,000원이었다.>
대강 먹은 후, 이 호텔은 귀국 전 이틀을 더 자야 하므로 background information을 위해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웨이트리스들이 이리저리 오가며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일본 여자 아니랄까봐 대부분이 주먹을 부르는 얼굴들이다. 일본 여자의 얼굴은 두 가지이다. 못생긴 얼굴과 더 못생긴 얼굴. 명색이 고급 호텔인데 저런 월급 주기 억울한 얼굴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 고용주의 현실인 모양이다. 하긴 저런 얼굴로 결혼하게 되면 정조관념이 없을 수가 없겠다. 파리나 저 얼굴에 달려들지 정상적 시각과 미의식의 소유자라면 만취하지 않은 이상 정조를 깨주기 힘들겠다. 갑자기 일본에서 술을 적게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술에 취해 일본 여자의 굳은 정조관념을 깨는 자선 행위를 해선 안 된다.
7시 반에 check out 후 삿포로 역으로 가서 8시 정각에 아사히카와로 가는 기차를 탔다. 아사히카와(9시 25분)에 도착하자마자 9분 후 출발하는 9시 34분 발 비에이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는데 이걸 놓치면 전체 계획이 delay 되어 오늘의 숙소인 오비히로에 밤 12시경이나 되어 들어가게 된다고 안 선생이 걱정하는 것을 들었기에 상당히 긴장했다. 다행히 기차가 제 시간에 도착했고 똑똑한 황 선생이 인솔을 잘해 문제없이 비에이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계획에서 어긋나지 않는 것만도 여행에서는 행운이라 느껴야 한다. (적고 보니 상당히 좋은 말 같다)
이번에도 자유석이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시끄러워 열차 안인지 시장 한복판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예의 없는 중국인이 탄 것이다. 옛날 상해 황포 공원을 개원할 때 지켜야 할 수칙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제4조가 자전거와 개는 출입금지, 제5조가 서양인의 하인을 제외한 중국인 출입금지이고 이게 나중에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을 금지한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흔히 인종 차별로 생각하고 중국인들은 분하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서양인들이 중국인들을 출입하지 못하게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조용하게 앉아 생각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산책이나 하며 벗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거나 애인에게 작업을 거는 장소에 갑자기 악을 쓰며 떠들고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고 침을 내키는 대로 찍찍 뱉는 중국인이 나타난다면, 그곳은 더 이상의 공원이 아닌 것이다. 서양인들은 중국인을 차별한 것이 아니라 공원을 공원답게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국, 참다못한 황 선생이 제일 시끄러운 중국인 여자에게 주의를 시키자 조금 나아졌다.
대만 야류 해양관광공원에 여행 갔을 때 식당에서 본토 중국인들이 대거 들어와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이 앉은 한 좌석에서 목소릴 크게 하면 그 옆의 좌석의 중국인들은 더 크게, 그 옆의 좌석의 중국인은 고함을 치며, 그 옆 좌석의 중국인들은 목에 핏대가 드러날 만큼 악을 쓰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온 식당 안은 더는 음식 먹는 장소가 아니라 극심한 소음이 발생하는 공장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를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다음에 올 때는 휴대용 스피커를 하나씩 들고 와 볼륨을 최대한 높여 우리끼리 이야기하자고 한 게 기억이 났다. 일본 여행이라 방심했다가 중국인들에게 허(虛)를 찔린 기분이었다. 삿포로 100엔 상점에 들러 스피커를 6개 사야겠다.
내가 만약 이백과 두보가 그들의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 동석했다면, 그들 이야기의 내용은 차치하고 아마 흥에 겨운 둘의 엄청난 굉음에 나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볼때기를 쥐어박을 것이다. 구타를 유발하는, 못생긴 일본인과 시끄러운 중국인들을 때려주려면 아마 두 팔로는 부족할 것 같고, 옛날 중국 무협영화에 왕유가 주연한 ‘외팔이’라면 한쪽 팔마저 잃을 것이 분명한 고로, 이를 해결하려면, 팔이 네 개인 인도의 시바신보다는 불교의 천수(千手)관음 보살이 적임자란 생각이 들었다.
< 천수는 아닐 지언정 이 정도는 되어야 감당이 될 듯하다 예천 용문사 불상 >
<비에이 역(美瑛驛)은 일본의 작은 역치고는 외관이 그럴 듯하다 >
10시 09분에 비에이 역에 도착했더니 왁자지껄하는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중국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비에이 트윙클 버스는 하루 2회 운행되는데 우린 오전 10시 45분에 출발해서 12시 05분에 도착해 1시간 20분간 탑승, 구경하는 첫차였다. 차가 도착해 황 선생이 앞좌석 6개에 우리 명패를 두어 우리 자리라는 것을 표시해 두고 내려와 캐리어를 버스 짐칸에 넣고 올라가니 다른 사람은 다 뒤로 갔는데 삼십 대 중반의 중국인 남자가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황 선생이 일본말로 ‘여긴 우리가 미리 맡아 둔 자리니 뒤로 가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식으로 게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황 선생을 일본인으로 보고 영어로 지껄이자 안 선생이 너 잘 만났다는 식으로 "You are very impolite. (불손한 놈 - 무례한 새끼)"라는 고급진 영어를 구사했는데 이 자식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했다. 실제 우린 너무 고급 영어만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고급 영어만 구사하니 이 boat(ship 새끼)같은 놈이 계속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자리가 왜 당신네 자리냐.’고 영어로 지껄이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 미국에서는 아주 간단히 총을 꺼내거나, Fuck you, chinese freaks,(이런, 중국인 변태새끼!) 정도가 적합한데 이런 생활 영어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게 우리 영어교육의 현실이다. 그래서 영어 선생인 이 선생이 본격 출격하여 영어로 긴 문장을 녀석에게 융단폭격식으로 투하하자, 그제야 ‘아, 영어의 고수가 나타났구나. 게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비켜줄 테니 당신들이 앉아라.’고 하며 뒷자리로 갔다. 물론 안 선생은 계속 씩씩거리며 고함과 무력시위를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팀 대장으로서 권위에 손상을 받은 듯했다. 결국, 안 선생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를 향해 ‘호로(胡虜) 새끼’라는 말을 날림으로써 그의 본적(本籍)과 족보와 나이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일타 삼피의 공격을 선보였다.
안 그래도 열차 안에서 있었던 불쾌한 경험에다가 이번에는 직접 예의 없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중국인들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여행팀의 국제관계 전략 기조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친중친일(親中親日)”이라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의 포용적 기조에서 “반중친일(反中親日)”의 선택적 기조로 변화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후 우리는 중국인들의 여러 가지 무지하고 무례하고 교양 없는 행동들을 비웃기 시작했다. 이런 소동 중에 나는 무얼 했느냐고? 난 진한 선글라스를 쓰고 무섭게 노려보았지. < 무섭게 노려보는 중인 필자 >
이런 소동이 끝나고 승리한 우리는 당당하게 앞좌석에 앉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안내하는 못생긴 일본 아가씨의 설명을 - 노트에 빡빡하게 적어서 계속 읽다보니 침이 말라 조금 쉬고 또 읽고 하는 것이 애처로이 보였다- 열심히 들었고 그 노고에 보답하는 방법은 역시 방아깨비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 노트가 보이고 지금은 목이 말라 쉬는 중, 일본 여자 대부분은 아래턱뼈가 좁아 덧니가 많고 그래서 입이 튀어나온 애들이 많다 >
비에이에는 ‘켄과 메리의 나무’니, ‘세븐 스타 나무’, ‘마일드 세븐 언덕’ 등 CF와 관련된 명소가 있고 ‘오야코 나무’, ‘크리스마스 나무’, ‘철학의 나무’ 등과 같이 드넓은 구릉 지대에 서 있는 나무에 조금이라도 특이한 점이 있으면 이를 스토리텔링 식으로 꿰맞춘 명소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어딜 가나 이름 없이 서 있는 거목들도 여기 오면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에서처럼 이름을 지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듯하다. 이 말을 되새기면 여긴 워낙 구릉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정도로 완만하게 펼쳐져 조금이라도 높은 것은 눈에 드러나니 그 나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에이에서 가장 멋진 풍경은 드넓게 펼쳐진 구릉에 밀밭, 보리밭, 감자밭, 옥수수밭, 비트(붉은 무)밭이 연출하는 풍경 그 자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은 자연스레 다음 방문할 Farm Tomita 역시 구릉 지대에 한없이 넓게 펼쳐진 각종 꽃밭이리라 연상하게 하였으니......
< 감자밭이 펼쳐져 있다. 저 너머 누른 것은 보리나 밀밭이고 그 옆 색깔이 다른 것은 다른 작물이란 의미이다. 알록달록한 꽃밭이 아니더라도 자연은 정말 자연스럽게 자신의 색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
<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풍경이 북해도에서 본 경치 중 제일이 아닐까 한다. 마에다 신조라는 풍경 사진작가가 만든 ‘다쿠 신칸’이란 사진 갤러리에 걸린, 기묘한 찰나를 잡아 자연의 속살을 드러낸 사진들도 이 ‘평범한 사진’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
1시간 20분간의 풍경화 속 같은 비에이 관광을 마치고 다시 역 앞 식당에서 700엔짜리 우동과 소바로 점심은 먹은 후 13시 04분에 비에이를 출발해 임시역인 Lavender Farm 역에 13시 30분에 도착하는 노롯코 열차를 기다리기 위해 탑승구로 갔다. 그리고 일찍 타기 위해 자유석 열차의 예상 정지 지점을 수학적으로 계산한 안 선생이 한 지점을 정해주어 우린 모두 한 줄로 서서 기다렸다. 물론 우리로부터 5m 옆에는 시끄러운 중국인들이 왁자지껄하고 있어 천수관음을 소환해야 할 지경이었다. 정말 시끄럽다.
기차가 들어오고 딱 계산대로 우리 앞에 자유석 열차가 정지하자, 질서니 줄이니를 무시한 중국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승차문의 손잡이를 굳게 잡아 새치기를 방지했건만 상대는 중국인에다가 아줌마였다. 나의 강건한 팔뚝의 제지를 피해 몸을 구부려 내 팔 사이로 빠져 올라가는데, 아직 내리지도 못한 중년의 일본인 남자가 그 중국인 아줌마를 밀어 열차 아래로 다시 내려가게 한 후 무어라 소리쳤다. 황 선생의 말로는, "내리는 게 먼저야!"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인 아줌마였다. 다시 내리는 사람 틈을 비집고 올라가 일행에게 손가락으로 자유석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고함을 지르는데 아마도 자유석에 먼저 가 자리를 잡아 놓겠다는 뜻인 듯했다. 그러자 또 한 여자가 내 팔 아래로 새치기를 감행했지만 두 번 당하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이제 다리로 했더니 어쩔 도리가 없는지 내 뒤로 사라졌다. 줄서기를 안 가르치는지 차례도 모르는 징그러운 중국인들.
공자나 맹자가 일찍이 중국인에게 교육 불가능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덕목을 가르치기 전에 줄서기부터, 양보까지는 안 바라니까 제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것부터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입 닫고 10분을 견디기 같이 쉬운 것부터 가르쳐야 했다. 쓰레기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침을 함부로 뱉지 마라 등을 가르쳐야 했다. 중국인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반드시 빈 캔, 과자봉지, 담배꽁초, 누런 가래침 등이 남아 있었다. 하긴 공자가 공산주의 치하에서 지내다가 코카콜라의 맛을 보았다면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려고 새치기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옛 어른들 말씀에 피는 못 속인다고 하지 않는가? 하긴 옛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더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니 누구는 정씨와 박양의 정분관계를 보고 피보다 진한 물도 있다고 하니까. 그러나 이런 소란과 새치기와 막무가내와 무례함과 육체적 제지와 꾸지람이 끝나고 모두 열차에 탔을 때 자유석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흔히 말하는 ‘헛짓했다.’
< 노롯코 열차 내부의 모습, 천장에 포도 덩굴 같은 거로 장식을 했고 창문도 옆으로 여는 방식이다. 고정된 좌석에 탁자까지 있어 이 열차가 언제 때 열차인지 궁금하게 한다. 물론 복고풍의 컨셉이겠지>
아침 일찍 일어나 계속 캐리어와 중국인에게 신경을 쓰며 돌아다녔더니 모두 피곤한 모양인지 한두 명씩 자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열차가 서기에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유난히 색채감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Farm Tomita의 굽이지고 완만한 곡선과 거리가 멀어 좀 더 가야하는가하고 생각하다가, 혹시나 해서 다시 사람들을 깨우니 설왕설래하다가 이곳이 Lavender Farm 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급히 내렸다.
포장된 듯 포장되지 않은 듯한 길을 걸어 Farm Tomita로 갔다. 비도 조금씩 내리는데 캐리어를 끌고 가려니 관광객이 아니라 피난민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여길 연간 90만 명이나 온다는데 길 해둔 꼬락서니와 생각했던 것의 1/20도 되지 않는 Farm Tomita의 규모에 실망이 컸다. 결국, 사진발에 속고 만 것 같은데 제일 아래 사진이 아마 Farm Tomita의 규모를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사진을 아래처럼 찍으면 대단한 장소 같다. 이런 걸 사진발이라 하지. 이런 풍경이야 사진발에 속으면 어떻겠느냐만 여자 사진발에 속으면 인생 결딴난다. 왜냐하면, 여자는 사진발에 화장발과 성형발까지 더하니 원판 자체 훼손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이를 여자의 삼발이라 하고, 모든 남자가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나의 이러한 경고를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음 신문 기사를 한번 보기 바란다. “결혼식 다음 날 신부 고소한 신랑, 왜?”
【서울=뉴시스】 김혜경 기자 = 최근 알제리의 한 남성이 결혼식을 치른 바로 다음 날 신부를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유는 메이크업이 지워진 신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6일(현지시간) 데일리메일 보도에 따르면, 그 남성은 신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부를 집안에 무단 침입한 강도로 오인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강도가 아니라 자신의 신부임을 겨우 알아본 그 남성은, 신부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화장에 "속았다"며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현재 법원에 2만 달러(약 2300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는 "신부가 결혼 전 화장으로 얼굴을 가려서 속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녀는 결혼 전에 무척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다음 날 아침 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는 무서울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도둑으로 오인했다"고 말했다고 데일리메일은 보도했다. 등록 일시 [2015-08-08 04:00:00]
결국,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보다 아름다운 쪽으로 왜곡하여 실상보다 더 좋게 보이도록 속이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작게 보이면서 엄청 넓어 보인다>
<완만한 구릉에 사람이 없어 아주 조용하고 끝없이 펼쳐진 느낌을 준다>
<위 사진을 다른 각도에서 찍어 또 다른 장소인 듯 속인다>
<실제로는 이게 Farm Tomita의 모두다. 열차역에서 비닐하우스 너머 자그마하게 보이는 것을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디카 연수의 결과로 이처럼 확대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연수 만세!>
조금은 속은 기분으로 비 내리는 Farm Tomita를 떠나 후라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Lavender Farm 임시 역으로 왔더니 허걱! 우리가 계획했던 16시 30분에 후라노로 가는 열차가 없단다. 이런, 박근혜! 마침 말린 라벤더 꽃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어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았는데 후라노로 가는 기차 정말 없단다. 아마 이 역이 노롯코 열차만 정차하는 임시역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캐리어를 잘 정돈해 술상을 만들고 일단 소주를 한잔 하며 여유를 가지고 평상심을 회복한 후, 모두가 이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 생각했는데 이리저리 생각하던 안 선생이 거꾸로 한 정거장 가서 후라노로 가면 된다고 했다. ― 다른 사람은 생각할 background information이 전혀 없기에 사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만 생각하는 척해야 동류의식을 가질 수 있으므로 생각해본 것이다 ― 그래서 다시 15시 22분에 가미(上)후라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안 선생이 Farm Tomita의 사기적 규모와 열차 문제로 미안해하는 것 같아 만약 내가 Lavender Farm 역에서 깨우지 않고 지났다면, 우린 분명 택시를 타고 이곳에 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 후회했을 것이고, 어쨌든 와본 것이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최초로, 계획에서 어긋난 일이 발생했지만 바로 수정이 되어 다행이었다.
Kami Frano 역에 15시 31분에 도착해 Frano로 가는 열차 시간을 보니 16시 24분이었다. 남은 시간 무료도 달랠 겸, 화장실 앞 계단에서 남은 소주와 호텔에서 아침에 가져온, 그야말로 비장의 삶은 달걀 2개와 고국에서부터 나와 함께해준 통닭집 소금을 내어 한잔 했는데 안 선생은 반성하는 기색으로 마시지 않았다.
<카미 후라노 역 앞 기차, 사진을 찍음> < 계단 뒷건물이 화장실, 여기 앉아 한잔 마심>
16시 24분에 기차를 타고 후라노에 도착하니 16시 42분에 도착해야 할 기차가 중국인들이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약 5분 정도 연착하고 말았다. 우리는 16시 45분에 신도쿠행 기차를 타야 했는데 이미 연착해 버렸으니 어쩌나 할 즈음, 다행히 신도쿠행 기차가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연착한 기차에 갈아 타야할 승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기다려 준 것이다. 민박집 아주머니의 친절과 이 일로 더욱 친일파(親日派)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신도쿠에 18시 12분에 도착해 19시 45분 오비히로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했기에 저녁을 여기서 해결하기로 하고 역무원에게 이 근처 가까운 맛집이 어디 있느냐고 문의했더니, 바로 역 앞 음식점을 소개해 주었다. 식사로는 ‘부타동’을, 안주로는 ‘덴뿌라’를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침 뒤에 꽂힌 잡지를 보았는데, 음모를 드러낸 모델 사진과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그린 만화 등이 일본판 ‘선데이 서울’ 같았다. 그런 잡지를 공공연하게 진열하는 자체가 성에 대해서는 개방적이란 뜻이 아닐까? 성에 대해 별 흥미가 없는 필자로서는 더는 추론이 불가능했다. 음식이 나와 맥주를 몇 병 시키고 가지고 간 소주를 간해서 푸짐하게 먹었는데 ‘부타’는 돼지고기를 뜻하고 ‘동’은 덮밥이라 한다. 그렇다면 소(牛)는 '규'니까 '규동'.
<시골 역 앞 식당치고는 상당히 맛이 있었다. 돼지고기도 두툼하고 양도 많을 뿐 아니라 부위도 앞다랏살인지 쫄깃쫄깃했다>
그런데 손 선생이 주인에게 덴뿌라를 먹기 좋게 잘라 달라고 하자, 황 선생이 요리사에게 그건 자기 작품을 난도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며 무례한 요구라고 만류했다. 요구가 좌절당한 손 선생은 갑자기 직접 가위로 모든 덴뿌라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는데 그 솜씨가 상당히 쾌속하였다. 가끔 손 선생은 의외의 행동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는데, 큰 키에 걸음이 빨라 인솔자보다 앞서 가 인솔자인 황선생이 계속 신경을 쓰게 만들기도 하고, 출근이나 하는 것처럼 익숙하게 역에서 계단을 내려와 갑자기 다른 엉뚱한 계단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평소 느끼고 있던 것보다 직접 겪으니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면이 '꽃보다 할배'에 나오는 직진 이순재와 비슷했다.
신도쿠에서 19시 45분 열차를 타고 오비히로에 20시 18분에 도착했다. 숙소는 역 앞에 있는 Hotel Grand Terrace Obihiro였다. check in 후, 모두 각자 방으로 갔으나 안 선생과 나는 술을 거부하는 신 선생을 방치한 채 520호에서 한잔 후 11시경에 취침했다. 오늘이 비에이와 후라노 일정 등으로 여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하루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일단은 하루를 마무리 짓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내일 아침 일정은 의논 결과, Obihiro에서 유명한 모르 온천에 아침 5시 50분에 프런트에서 만나 택시로 가기로 했는데 오늘 일정이 너무 피곤한 탓에 탈락자가 속출하여, 일단 아침에 나오는 사람만 가고 입욕비와 왕복 택시비는 차후 계산하기로 했다. 이 온천은 일본에서도 희귀한 식물성 온천으로 식물성 부식질과 유기물을 풍부하게 함유하는 토탄층과 이탄층을 통과한 온천수가 여성들의 피부 미용에 큰 효험이 있다고 하여 미인 온천으로 대접받는다고 한다. 문득, 이 호텔 입구에서 15시부터 입욕해 25시까지 한다고 적힌 안내판 생각이 나서 안 선생에게 이야기했더니 하코다테에서 6시에 목욕을 가지 않았느냐고 했다. 아마 이 호텔은 나름의 사정으로 15시부터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피곤도 하고 잠도 푹 자고 싶어 가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들으니 황 선생은 이 호텔 목욕탕에서 밤에 목욕을 하고 잤다고 한다.
21일 결산
지하철 스스키노 → 삿포로 : 1,200엔
비에이 역 앞 점심 : 소바 +우동 700×6 = 4,200엔
라벤다 건조꽃향 : 6개 1,000엔
신도쿠역 앞 저녁(부타동, 덴뿌라, 맥주) : 11,130엔
계 17,530엔
♠제5일(2015.7.22.수) : 오비히로-쿠시로-아바시리
아침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더니 신 선생이 온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 같이 갈까 하다가 어제 너무 많이 걸어 다리도 아프고 밖을 보니 날씨마저 흐렸다가 비 오기를 되풀이하는 듯했다. 게다가 이 선생은 안 간다고 했으니 내가 가면 5명이 되어 택시 2대를 운행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신 선생에게 계산 관계는 다녀와서 하자고 하고, 가서 사진 많이 찍어라는 것과 돌아와서 식사할 때 깨워 달라는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하다가 잠도 오지 않아 일단 씻고 나서 휴대전화로 카톡도 하고, 주식 시세도 살펴 손익 계산도 하고, 각종 공시 등을 살피는 등의 경제활동을 하였다. 이번 여행에 대비하여 G마켓에서 휴대용 공유기를 15,000원에 사온 것이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 방에 공유기를 켜면 좌우 방에서도 휴대전화 사용이 가능했고, 우리 방에서는 화상 통화도 가능하였다. 설치도 간단하여 호텔 방에 있는 인터넷 선에 연결하고 전원만 연결하면 되었다. 부피도 작고 사용 중 휴대전화 충전도 동시에 가능하여 쓸모가 많았다.
6시 50분이나 되었을까? 문이 열리면서 신 선생이 들어 왔다. 09시 27분에 출발하는 기차였기에 아직 시간이 많은데 이르게도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산이 얼마 나왔더냐 하고 물으니 나중에 계산하잖다. 그리고는 옷을 훌훌 벗더니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미인 온천으로 이름난 곳에 다녀와 몸에 유익한 성분을 또 씻어 내다니, 참 이상한 사람이다. 혹시 식물성 부식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니, 씻어도 몸에 썩은 냄새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또는 식물성 부식질이 나중에는 이탄, 갈탄, 석탄이 되니 몸에 검은 게 묻어 잘 지워지지 않는 게 아닐까? 어쨌든, 아침을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데 오늘 아침에 있었던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았으니.
그 사연인즉슨, 신, 안, 황 선생 세 명이 모여 택시를 타고 ‘수광원’이란 모르 온천으로 가자고 했더니 일본인 택시 기사가 온천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저리 들어가면 입구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택시비 870엔을 챙기고 부리나케 차를 돌려 가버렸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오늘 아침 아무도 다닌 적 없어 이슬 맺힌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1분을 걸어 드디어 온천 입구에 도달했으니, 그 앞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딱 한 대만 있었다고 한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수광원‘이라 적힌 온천 입구에 가니 허걱! 『11시 오픈』. 내가 아침에 신 선생에게 사진 좀 찍어오라는 부탁을 했기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 아아! ♬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택시기사에 대한 증오가 폭발 직전에 있었을 것이니, 모든 온천은 6시에 영업을 한다는 귀납적 오류로 동료들을 낭패에 빠뜨린 안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온천 입구는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 충분히 택시 진입이 가능하다 >
전화도 어딜 걸어야 할지 모르고 택시도 안 다니는 외진 곳에서 일단 큰 도로로 나가면 택시가 다니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들은 걷기 시작했다. 오비히로는 워싱턴을 모델로 건설된 계획도시라서 삿포로처럼 바둑판 구조로 되어 있다. 다행히 신 선생이 호텔 주소를 알고 있어 호텔을 찾아오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 6시에 한가하게 다니는 택시는 없었고, 이들은 호텔 프런트에 자신들이 온천에 간다고 이야기했음에도, 온천이 11시에 문을 연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택시 기사는 11시에 오픈하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하지 않았고, 게다가 내려준 곳이 입구가 아닌 입구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는 점, 내리자마자 홱 차를 돌려 가버렸다는 점 등을 들어 자신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철저히 속았음을 분개했다. 이런 분노의 외침은 그 후 오비히로 거리 3km에 50분간 울려 퍼졌으니, 우리는 이를 『7·22 반일사태』라 명명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의 국제관계 전략 기조였던 “반중친일(反中親日)”의 선택적 기조는 “반중반일(反中反日)”의 민족적 기조로 변하였다. 그러나 총무 입장에서 볼 때, 3명의 입욕비와 올 때 택시비(870엔)가 굳었으므로 그리 불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텔의 아침은 대략 먹을만한 정도는 되었다>
아침 식사 후 짐을 챙겨 역으로 갔다. 9시 27분에 출발해 11시 01분에 쿠시로에 도착하는 열차는 앞의 열차 이야기에서 보여 주었던 지정석이었다. 열차에서 황 선생이 모자를 분실했는데 마침 이 역이 종착역인지라 바로 역무원이 모자를 가지고 왔다. 이를 본 손 선생은 우리 모두 열차 안에 짐을 두고 내리고 볼일을 다 보고 오면 역에서 분실물 처리가 되어 있을 것이니 그때 짐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기상천외의 아이디어를 내었는데 황 선생은 또 굿 아이디어라 맞장구를 쳤다.
이들이 의식은 안드로메다로 갔는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이성과 규범에 얽매여 사는가? “한국에서 관광 온 교사 여섯 명이 일시에 짐을 잊어버리고 열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일본 철도청에서 그것을 찾아 주었다.” 신문에 날 미담이 아니라 우리가 치매 교사 취급당할 일이다. 그 기억력으로 어떻게 교사 노릇을 하는지 인터뷰 들어올까 겁난다.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사람들이 단순해지기도 하고 엉뚱해지기도 하는데 그때부터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피로가 쌓여 신경이 갑자기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괜히 시비를 걸기도 하는 등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여행에서도 익히 보지 않았는가. 오늘이 여행의 반을 넘어서는 고비인지라 그런 증상이 나타날 때도 된 것이다.
쿠시로 역에서 화장실을 가던 도중 나는 그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으니, 미나미오타루 열차에서의 일본 계집애 쩍벌 사건이나 이번 일이나 눈이 밝은 것이 나의 가장 큰 흠임을 알겠다. 그것은 황 선생이 일본에 가서 헌 책을 사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일본 헌책방이 사라지고 있어 헌책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마침 쿠시로 역에서 헌책방을 보고 만 것이다. 모두 나의 잘못이었는데 이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 책방을 잠시 다녀온 황 선생이 자기가 원하던 책방이라며 희색이 만연한 것을 보고 뭔가 잘한 듯하여 오히려 뿌듯함을 느꼈다. 황 선생은 우리가 와쇼이치바에 가 있으면 책을 사서 그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잠시 후 책을 서점에 맡겨두고 왔다면서 황 선생이 나타났는데 문제는 황 선생의 캐리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기쁜 나머지 캐리어도 책방에 두고 온 것이었다. 물론 그냥 두어도 별일이야 생기겠느냐만 ‘만사불여튼튼’이라고 다시 가서 캐리어를 맡기고 왔다.
쿠시로에서의 할 일은 와쇼이치바에서 점심을 먹고 13시 28분에 고시미즈 원생(原生)화원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와쇼이치바의 명물은 한 그릇에 1,500엔에서 2,000엔 정도 하는 “갓테돈‘이라는 생선 덮밥이다. 가게 주인이 만들어 주는 대로 먹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간 밥 위에 원하는 생선 부위를 골라서 얹어 먹는 덮밥으로 시장 복판에 따로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을 가리키면 주인이 올려준다. 가격은 한 점씩의 가격이 적혀 있고 나중에 계산하면 된다. 밥과 회로 처음에 6,168엔을 지불하였다>
<시장 안에서 이렇게 먹는 것> <옥수수 소주 - 990엔>
< 밥 위에 노란 색이 성게 알, 그 위에 좀 크고 붉은 색이 연어알, 새우 2마리, 그리고 회 한 점, 위의 연한 것이 연어 붉은 것이 참치. 맨 오른 쪽은 맥주에 들인 25도 옥수수 소주 >
그래서 밥 위에 성게 알, 연어 알, 참치 회, 연어 회 등을 올려 비벼 먹고, 슈퍼에서 옥수수 소주 1병과 캔맥주까지 사서 간을 해서 배불리 먹었는데 내가 좀 어리한 걸로 짐작건대 대부분이 술에 취한 듯했다. 우리가 좀 많이 먹었는지 주위의 일본 상인들이 쳐다보기도 했다. 아마 중국인으로 알겠지. 그러나 중국인은 회(膾)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은 알까?
고시미즈 원생화원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쿠시로 역으로 갔을 때,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는데 그건 참으로 우리의 앞길을 암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황 선생이 가져온 헌 책은 한두 권이 아니라 큰 짐 뭉치였고, 삿포로에서 다시 몇 권을 더 보태어 나중에 공항에서 무게를 측정하니 19.5kg이었다. 나무로 만든 펄프에 인쇄용 잉크까지 보태진 것이 책이니 그 부피의 나무보다 더 무거운 법이다. 택배로 부칠 것을 이야기했으나 비용이 많이 든다고 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되, 육체의 짐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 19.5kg의 책을 일본에서 구포역까지 운반한 황 선생은 아마 온몸 마다마디에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슴 가죽을 16,000엔에 사서 캐리어까지 가방이 3개가 되어 버리니 짐에 사람이 치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쿠시로 역을 13시 28분에 출발한 한 량짜리 열차는 원생화원 역에 16시 55분에 도착할 예정이었기에 3시간 30분 정도 쿠시로 습원을 달렸다. 와쇼이치바에서 이미 반 술 이상이 되어 버린 우리는 열차가 마슈 간이역에 서자 녹차, 과자를 사와 안주 겸해 마셨다. 가와유 온천 역에서는 좀 오래 쉬어서 소주, 맥주, 안주포 등을 더 사와 계속 마심으로써 점차 우리 스스로를 중국인화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린 한 네댓 시간 술을 마신 것이었다. 그것도 맥주에 25도 소주를 간해서, 미쳤어. 황 선생이 원생화원 역 쇼핑몰에서 안 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슴 가죽을 구매한 것은 여행의 피로도가 심해진 상태에서 인솔자가 지녀야 할 책임감, 게다가 정량 이상의 알코올 섭취가 빚어낸 비이성적 결과였다. 마시다가 지친 일부 회원은 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쿠시로 습원과 아칸 국립공원이 끝없이 이어지고 처음 보는 원시 그대로의 자연은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 보였다.
<원시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쿠시로 습원을 달리는 한 량짜리 열차>
<습원 중간마다 있는 간이역>
<사람이 경작하는 밭이 눈에 띈다. 그런데 흙이 얼마나 검은지 그 비옥함에 식물 재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탐을 낼만했다>
<쿠시로 습원은 일본에서 가장 넓은 습원이라 한다. 이런 식으로 물도 풍부하고 숲도 우거져 동식물들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살 수 있겠다>
<원생 화원 역에 도착하니 늦어서인지 지키는 사람도 없고 문은 열려 있다>
<해발 6m. 쓰나미가 오면 바로 덮칠 듯하다. 아바시리에서는 도심지에서 해발 2m라고 적힌 것을 보았고 해일이 닥치면 대피하라는 경고 표지도 보았다>
<이때 철로 근처에 나타난 여우. 가까이 가도 별로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신 선생이 찍은 다른 여우 사진. 이로 보아 여우 한 가족이 이 숲을 근거로 사는 모양이다. 이 사진이 이번 여행에 가장 잘 찍은 사진이라 생각한다>
<사람도 별로 없고 여름인데도 황량하기만 하다. 원투 낚싯대를 가져와 저 멀리 던지면 무어라도 잡힐 것만 같다>
<사람 다니는 길만 경계를 표시하고 있어 넓게 펼쳐진 모습이 바다와 잘 어울린다>
원생 화원 역에서 18시 59분 출발하여 아바시리 역에 도착하니 19시 21분이다. Toyoko Inn Hotel에 check in하고 호텔 맞은편 식당에서 냄비 비빔밥과 장어 덮밥을 주문했는데 냄비 비빔밥이 김치도 있었고 고추장도 별도로 나왔다. 냄비 아래 불을 피워 냄비에 누룽지가 눌어 오랜만에 한국식 음식을 먹는 것 같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콩나물도 보이고 김치도 보인다. 달걀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 걸 주어 분리해 보았지만, 분리의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아래 불이 있어 누룽지가 만들어졌다. 고추장도 있었다>
<장어 덮밥. 먹을 만했지만 냄비 비빔밥이 나았다>
편의점에 들러 안주와 술을 사서 1104호에서 신, 안, 한 황 네 명이 한잔 더한 후 내일은 무주일(無酒日)로 하자고 안 선생이 제안했다. 나는 더 마셔도 되지만 그러자고 결의했다. 과연 지켜질지는 의문이지만 최소한 저녁 식사 때까지는 마시지 않기로 했다. 12시경 취침했다. 온종일 마셨더니 상당히 피곤하였다.
7월 22일 결산
오비히로 호텔→모르온천 : 택시비 870엔 (올 땐 걸어옴)
와쇼 이치바 시장 : 맥주 3캔 960엔
회 및 해산물 5,508엔
밥 6그릇 660엔
모듬 회 2팩 1,720엔
맥주 3캔 : 960엔
소라 비슷한 회 1,252엔
옥수수 소주 990엔
마슈 간이역 : 녹차, 과자 640엔
가와유 온천역 : 소주, 맥주, 안주포 2,823엔
아바시리역 앞 식당 : 저녁식사 6,910엔
편의점 : 소주, 맥주, 안주 등 2,895엔
계 26,188엔
<북해도 여행 제 3편 여행의 끝자락(엿새째부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