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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위윤기(35世, 장흥위씨 대종회 운영지원단 기획팀장)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딸에 대한 애도, 제망여문(祭亡女文)
3. 배필론
1) 음양원리
2) 별(別)의 의미
3) 아내의 도리
4. 열녀 신드롬
1) 존재집에 나타난 6명의 열녀
2) 열녀의 특징
(1) 가문의 영광
(2) 남녀차별법의 희생양
(3) 다산 정약용의 열부론
(4) 존재 위백규의 질서론
5. 나가는 말
<<위백규 선생의 여성관>>
1. 들어가는 말
존재집 여러 부분에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과 위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는 양난으로 가중된 사회적 혼란과 불안으로 초기, 중기에 비해 여성에 대한 권리의식은 현저히 저하되고 남성에 대한 굴종은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충효열(忠孝烈)을 핵심가치로 숭상하는 유교의 대표적인 폐습 중 하나였고, 전반적으로 저변에 깔린 남존여비사상이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생활 속 깊숙이 파고들어 사회를 지배한 열녀신드롬과 더불어 위백규 선생의 유교적 여성관을 살펴보자.
조선후기 들어 갑자기 폭증한 열녀를 일컬어 열녀신드롬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공주병에 걸린 것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국가와 가문 및 개인이 반인륜적 행태인 자살을 은근히 강요하고 법제화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자리를 빌려 명복을 빌어 본다. 또한 명쾌하게 배필론을 제시한 위백규 선생의 글은 우리가 늘 가슴에 새겨야 할 계명(戒命)이다. 시대는 변하고 사람은 오고 갈지라도 변치 않는 도리는 늘 제자리를 지키는 법이다.
2. 딸에 대한 애도, 제망여문(祭亡女文)
제망여문이란 죽은 딸을 애도하여 지은 글이다. 망자에 대한 애도와 남은 자의 슬픔은 이승과 저승의 간극을 말해준다. 또한 추억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와 현재의 괴리감을 세세히 담고 있다. 존재 선생의 제망여문에는 부성애를 표현하고자 애쓴 흔적이 작품을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존재 선생에게는 1751년 태어난 외동딸이 있었다. 1772년 영암 조광근(曺光根)에게 시집을 가서 1788년에 타계하자 둘째 아들인 도급(道及)을 보내 조문했다.
여기에 대해 ‘장흥위씨 요람’의 기록을 살펴보자. ‘그래서 딸의 제문에 불교의 윤회설을 끄집어들인 것이다. 철저한 유학자가 불씨설로 망자를 위로한 것은 그만큼 회한과 상심이 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했으면 쌀밥에 고기반찬, 솜을 두둑히 넣은 옷과 이불을 해주고 싶다고 했을까. 봄이면 쑥떡해주고, 가을에는 청울치로 만든 신을 사주겠다고 했을까. 생일날엔 생선을 굽고 국을 끓여 주겠다고 했을까. 하여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사족의 바람인 경상(卿相)도 바라지 않겠노라고 소박한 소원을 나타내고 있다. 이쯤이면 평생을 공부해온 사족이나 선비의 체면 따위는 관심 밖인 것이다’라고 조명하고 있다.
간암 위세옥(1689~1766년) 선생이 1766년 타계했을 때 행와 위사급(1717~1776년) 선생을 비롯해 무려 27명이 간암 선생의 영전에 제문을 올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출가 후 타계한 딸에 대한 제문을 쓴 경우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드문 경우이다. 그만큼 딸에 대한 상심이 컸다는 방증이요, 얼마나 사무침이 가슴을 짓눌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존재집에는 여성에 대한 글이 별로 없다. 그래서 몇몇 여성 관련 글 중에 제망여문(祭亡女文)은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제망여문을 자세히 정독하면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서로 모순된다. 바로 ‘불씨의 윤회설이 만약 허탄한 것이 아니라면, 원컨대 다시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자식이 되고 너의 아비로 되어서’라는 대목이다. 유학자로서 내세를 믿지 않지만 딸의 죽음 앞에서는 유독 불교의 내세를 자신과 죽은 딸에게 애써 적용하고 있다. 바로 불교의 윤회설을 거론한 것이다. 결국 존재 선생도 원시 유학자지만 죽음 앞에선 유불선(儒佛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 집은 본디 가난하여 거친 밭 한 섬지기에 거둬들이는 것이 황량했고, 나 또한 계책이 졸하여 힘써 일하지 않으면서도 위로는 사당을 지키고 다음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밖으로는 손님과 친구를 접하랴 출입왕환에 대응하랴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기에 천신만고하니 쌀농사 보리농사에도 양식을 이어대지 못했다. 너는 여자의 몸으로 내게 태어나 그 고달픔과 주림 번뇌가 말하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을지니라, 친정에서 21년간 한 번도 세끼 밥을 먹어본 적이 없고, 한 젓가락의 생선 고기를 집어 본적이 없이 절구질에 물 긷기, 불 때기, 빨래와 온갖 노고에 밤낮이 없었구나…(중략)… 불씨의 윤회설이 만약 허탄한 것이 아니라면, 원컨대 다시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자식이 되고 너의 아비로 되어서, 이 회한의 심정으로 힘을 다해 밭을 갈아 쌀밥에 고기반찬, 솜 두둑한 옷과 이불로써 내 아버지 어머니를 봉양하고, 나로 하여금 겨울에도 죽을 먹지 않고 여름날도 세끼를 거르지 않게 하고, 봄이면 쑥떡을 해주고 가을에는 청울치신을 사 주고, 생일날은 생선 굽고 국을 끓여 먹고 더불어 문란(門欄)에서 즐거이 놀 수 있기를…실로 그럴 수만 있다면 세간의 경상과도 바꾸지 않으리니 오직 내 소원이로다. (출처 : 존재전서 하 413-444)
3. 배필론(配匹論)
존재 선생의 여성관은 대체적으로 유교의 근본원리에 입각해 이해되고 정립된다. 바로 천지만물의 조화와 운영이 음양의 원리로 해석된다는 관점이다. 여기서는 여성의 기본원리보다 아내로서 유교에서 교훈하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존재집의 여러 곳을 할애해 밝힌 원인신(原人身), 인설(人說) 및 집안의 사철 모여 술 마시는 규약(家中四時會飮規)의 경계하는 말(戒辭)을 중심으로 아내의 도리에 대한 배필론을 단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음양원리
존재 선생은 남녀원리를 주역의 괘를 사용해 설명했다. 주역(周易)의 기본 괘는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 네 모서리에 있는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건(乾), 곤(坤), 감(坎), 이(離)다. 남자 괘인 이(離)는 불(火)로 눈(目)을 의미하며, 동물로는 꿩(雉), 성질로는 달라붙음(麗)을, 방향은 남(南)을 뜻한다. 여성의 괘인 감(坎)은 물로 비유했는데 인체로는 귀(耳)를, 동물로는 돼지(豚)를, 성질로는 위험(險)을, 방향으로는 북(北)을 의미한다.
‘사물을 체와 용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의미와 연관성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체는 사물의 본성, 근본을 뜻하고, 용이란 사물의 현상이나 작용, 또는 부수적인 개념이다. 체용론은 조선시대 유학이론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이황선생에 의해 중국과 달리 독자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결국 위백규 선생의 원인신론은 음양원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보았다. 결국 남녀의 신체는 구조상 본질을 밝히는 핵심이론이라 원인신이라 불렀다.
「남음(男陰 남성의 생식기)은 이(離)이니, 체(體)는 양(陽)이고 용(用)은 음(陰)이다. 여음(女陰 여성의 생식기)은 감(坎)이니, 체는 음이고 용은 양이다. 출처 : 존재집 원인신(原人身)」
2) 별(別)의 의미
별(別)은 구별한다는 뜻이다. 존재 선생은 부부의 별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로, 한 남편은 한 아내를 두되 서로 짝을 혼동하지 않고 구별하라는 뜻이다. 부부의 정욕은 사람의 여러 욕구 중 하나이다. 부부는 일신이라 만약 예의로 절제하지 않는다면 방탕해지고 음란해져 짐승과 차이가 없다. 육체적인 결합만은 분별이 없고 강제적 결합은 구차하다고 평했다. 부부의 도리를 결혼부터 예의를 엄격히 지킴으로써 다른 부부와 문란하게 되지 않도록 했다.
둘째로, 부부에게는 각자 다른 본분(本分)으로 영역을 정해 구별하라는 뜻이다. 직업의 영역으로 보면 된다. 흔히들 남편을 바깥사람, 아내를 안사람이라고 부르곤 한다. 아내는 집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살림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남편은 논밭을 갈고 밖에 나가 일을 하는 직무이다. 결국 부부간에 유별이란 바로 하는 일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이는 서로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어느 곳에도 없다. 특히 한자의 男과 女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세째로, 중용의 도를 지켜 다른 사람과의 구별됨을 제시했다. 부부간 너무 친해도 않되고 너무 소원해도 않된다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일방으로 치우치지 말고 정도를 걸으라는 뜻이다. 단순한 중간이 아닌 적중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용의 도는 동양에서 군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를 부부간에 적용해서 부부간에는 서로 존경하여 예를 지키고, 나쁜 일을 꾸미지 말고, 부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남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서로 본보기가 되어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다. 존재 선생은 부부가 서로 본보기가 되는 것이 덕이요, 도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덕은 부부유별의 덕이요, 도는 삼강오륜 중 한 축이다. 부부로서 맺어진 관계가 인륜의 근본이요, 천륜의 시작이라는 관점이다. 결국 위백규 선생이 주장하는 부부의 별은 성(性), 본분, 중용, 본(本)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부부는 일방을 지양하고 쌍방향의 질서를 인정하고 서로를 수용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부부(夫婦)의 분별은 긴밀한 인륜이다. 이성(異姓)이 살을 합하고 정과 뜻에 틈이 없이 천지와 덕을 함께하고 만물을 변화시켜 이루는 관계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단지 암수의 정만 있어서 친숙해져 분별이 없고 친압하고 구차하게 합친다. 지나치게 친하면 큰 화를 만들어 내고, 심하게 소원해지면 가는 길이 어긋난다. 그래서 옛 군자들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고 사사로운 모의도 없었고 이유 없이 남의 말을 듣는 일이 없었다. 서로 본보기가 되고 올바른 본분이 있어서 백 년 동안 같은 덕을 가지고 큰 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이 오륜(五倫)의 근본과 시작이 되는 이유이다. 출처 : 존재집 인설(人說)」
3) 아내의 도리
성서에서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남자를 위해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상하관계도 아니요, 지배자나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 속에 숨겨진 참 뜻은 남녀 간 질서를 적절히 표현하고자 했다. 위백규 선생은 남편은 「하늘, 임금, 편안, 강하고, 부르고」, 아내는 「땅, 신하, 수고, 약하고, 듣고」란 표현을 서로 대조적으로 나열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또한 질서의 원리로서의 부부관계를 잘 설명한 글이라 평가된다.
먼저 악처(惡妻)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아내의 그릇된 행동으로 일어난 결과를 설명한다. 삼종지도를 버리고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여겨 남편의 통제를 따르지 않아 남편을 몹시 책망하며 업신여기고 억눌러서 꾸짖어 욕한다. 편벽되이 시기하고 사나워서, 서서히 젖어 드는 하소연과 의심하는 그럴싸한 말들을 날마다 남편에게 일러바친다. 결국 아내로 인해 부자간, 형제간 골이 깊어져 남편을 망치고 집안까지 망친다고 한탄한다. 인간의 근본도리와 가법이 무너지는 이치이다.
그리고 양처(良妻)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내의 도리는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가치가 있다, 스스로 겸손하게 절제하여 근면하다면 반드시 집안이 중흥할 것이라는 권면이다. 남편을 보좌하는 요인은 뛰어난 명예와 출중한 지식을 꼽았다. 남편의 심지(心志)가 아내로 인해 바뀌는 일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또한 남편이 의를 행하는데 아내로 인해 부족함이 있는지 걱정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참으로 지혜로운 아내의 도리요, 질서 속에서 아내의 도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남편은 하늘과 같고 아내는 땅과 같다. 남편은 임금이고 아내는 신하이다. 아내는 수고롭고 남편은 편안하며, 남편은 강하고 아내는 순하며, 남편은 부르고 아내는 듣는 것이 천리(天理)의 떳떳함이다. 이 때문에 부인이 아무리 남보다 훨씬 현명하더라도 일처리를 제 마음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람의 도리가 이치에 맞고 가법(家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온 세상이 이기심에 빠지고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졌다.
남의 아내가 되었으면서도 홀로 수고로운 것을 꺼려 남편을 몹시 책망하며 업신여기고 억눌러서 꾸짖어 욕한다. 그 남편이 비록 몸소 노복(奴僕)처럼 천한 일을 하고 금수처럼 어리석고 무지하더라도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도리어 기뻐할 것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위치를 바꾸고 임금과 신하가 차례를 잃은 것이니, 그 집안에 어찌 훗날의 복록이 자손에게 넉넉하게 미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가산(家産)에 온통 마음이 쏠려 의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편벽되이 시기하고 사나워서, 서서히 젖어드는 하소연과 의심하는 그럴싸한 말들을 날마다 남편에게 일러바친다. 결국 부자간과 형제간에 난(亂)을 얽어 자신의 남편이 오랑캐나 금수와 같은 지경으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게 하니, 이성(異姓)의 사람이 집안에 들어와 이미 그 남편을 망치고 마침내 그 집안까지 망친다. 어찌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고, 하늘의 해에 두렵지 않겠는가.
부인의 도리는 오로지 남편을 잘 보좌하여 반드시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고 지식이 출중하게 해야 한다. 매사에 남편의 심지(心志)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바뀌는 일이 있는지, 남편이 의를 행하는데 나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있는지 걱정해야 한다. 공경히 삼가서 스스로 단속하고 일의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는다면, 집이 비록 가난하더라도 덕이 날로 부유해질 것이다. 상천(上天)이 다 내려다보고 있어서 자손에게 경사가 있으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출처 : 존재집 집안의 사철 모여 술 마시는 규약(家中四時會飮規), 경계하는 말(戒辭)」
4. 열녀신드롬
열녀(烈女)는 열부(烈婦)와 같은 뜻이다. 열녀를 여성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것은 신하를 충신으로, 남자를 효자로 형상화시킨 맥락과 동일한데 그 배경에는 유교가 자리 잡고 있다. 열녀호칭이 하사된 박씨, 이씨, 오씨, 최씨, 김씨, 임씨 여섯 열녀에 대한 기록이 존재집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열녀에다 신드롬(syndrome)을 붙여「열녀신드롬」으로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유독 조선후기에 이르러 열녀의 수가 충신과 효자에 비교해 급증해 병적인 사회현상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1) 존재집에 나타난 6명의 열녀
▪ 해남의 열녀박씨
○출생 : 1730년 4월 5일
○고향 : 해남 장촌
○남편 : 여흥 민정수(閔廷洙), 해남 장촌출신
○결혼 : 1747년
○남편사망 : 1753년 질병으로 사망(홍역)
○박씨사망 : 1753년 목매어 自盡
○결과 : 《국역 여지도서》 제47권 〈해남편〉에 따르면, 1737년(영조13)에 열녀 박씨에 관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를 세워 표창했다. 《해남군읍지(海南郡邑誌)》에도 1757년에 정려를 내려 주었다고 나온다.
○위백규 선생 의견 : 한 번의 행동으로 효도와 자애, 그리고 의로운 절개를 모두 이루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예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정에서 특별히 명해 정려문을 내려 준 것은 당연하다.
▪ 해남의 열녀이씨/열녀 이씨 정려비명 병서〔烈女李氏旌閭碑銘 幷序〕
○출생 : ?
○고향 : 해남
○남편 : 최필곤(崔必崑)
○결혼 : ?
○남편사망 : 계묘년 질병으로 사망(위장병)
○이씨사망 : 계묘년 약을 먹고 自盡
○결과 : 관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문이 내려졌다.
○위백규 선생 의견 : 당연히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야 한다. 내게 이 일을 부탁하니 사양할 수 없어 드디어 명을 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빛나도다 훌륭한 여인이여 / 顯顯碩媛
효성이 대대로 이어 온 법도라는데 / 孝有世則
대대로 이어 온 법도란 무엇인가 / 世則維何
어린 나이에 부모상을 슬퍼했고 / 孺喪孔慽
이 효성을 시부모에게 옮겨 섬겼으니 / 移事舅姑
참으로 부인의 덕이로다 / 允也婦德
이 마음을 옮겨 지아비를 따랐으니 / 移以從夫
바로 열녀다운 죽음일세 / 其死卽烈
누가 말하는가 효성이 / 孰謂式糓
친족과 관련이 없다고 / 不係其族
임금님께서 마을에 정려하여 / 肆王表里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기에 / 俾民知格
비석에 새겨 세우니 / 立此刻石
그 내용에 부끄러움 없으리 / 其辭無怍
▪ 강진의 열부오씨
○출생 : ?
○고향 : 강진(康津)
○남편 : 장지한(張之翰)
○결혼 : 1789년
○남편사망 : 1790년 질병으로 사망(병명은 모름)
○이씨사망 : 1791년 열 달을 굶어 自盡
○결과 : 일성록(日省錄)》 1794년 12월 25일 〈비국이호남위유사서영보서계제조회계(備局以湖南慰諭使徐榮輔書啓諸條回啓)〉에 “첫째, 강진 학생 장지한의 처 오씨에게 정려를 포상하는 일입니다. 절행이 이처럼 탁월하니 곧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야 합니다.〔其一 康津學生張之翰妻吳氏旌褒事也 節行若是卓異 卽令該曹稟處〕”라고 나온다. 비변사에서 오씨에 대한 정려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이 글은 그전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위백규 선생 의견 : 열부를 정표(旌表)하는 조치는 밝은 시대를 맞아 두 번째 일로 미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까닭에 감히 이렇게 그 사안의 만분의 일이나마 거론하여 아룁니다. 숭청(崇聽)을 우러러 번거롭게 하니, 삼가 청하건대 특별히 굽어보고 채택해 주십시오. 청원서를 감영에 보고하여 예조를 거쳐 주상께 아뢰도록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영암의 열녀최씨/열부 최씨의 표창을 요청하는 글〔請褒烈女崔氏狀〕대신 씀
○출생 : ?
○고향 : 영암
○남편 : 조영팔(曺榮八)
○결혼 : 19세
○남편사망 : 급성질환으로 사망
○이씨사망 : 20세 때 새끼줄로 목매어 自盡
○결과 : ?
○위백규 선생 의견 : 최씨는 참으로 한 시대의 표상이자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고서를 읽고 인륜을 돈독하게 하는 선비나 군자들도 흥기하는 바가 다만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와같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 사실이 인멸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감히 이렇게 풍속을 살피고 도탑게 하시는 사또께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굽어 살피시고 예조를 거쳐 주상께 전달해 주시어 거룩한 성대(聖代)에 집집마다 정려할 만한 일이 있도록 아름다운 풍속을 진작시키게 해주십시오.
▪ 열녀 김씨 정려문 옥과 기〔烈女金氏旌門 玉果 記〕
○출생 : 1774년
○고향 : 옥과
○남편 : 김언신(金彦臣)
○결혼 : 1789년
○남편사망 : 1792년 질병으로 사망
○이씨사망 : 1792년 독약으로 自盡
○결과 : 병진년(1796, 정조20) 겨울에 감사에게 이 일을 보고하였는데, 감사가 거둔 보고가 수백 가지이지만 특별히 김씨의 일을 장계(狀啓)로 보고하였다. 예조에서 거두는 팔도의 장계가 수백 수천 건이지만 특별히 김씨의 일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다음 해 봄에 정려(旌閭)하라는 특지(特旨)가 내려졌다.
○위백규 선생 의견 : 그녀는 효성스러우면서 절개까지 지녔으니 진실로 효성과 절개를 모두 온전히 갖추었고, 두 가지 모두 아름답고 흠결이 없어 천고토록 죽지 않고 향기로운 이름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이야말로 진정 이른바 ‘쌍향당(雙香堂)의 후손’이라 하지 않겠는가.
▪ 열녀 임씨 정려기〔烈女任氏旌閭記〕
○출생 : ?
○고향 : ?
○남편 : 역리(驛吏) 이양중
○결혼 : ?
○남편사망 : 1772년 질병으로 사망
○이씨사망 : 1772년 독약으로 自盡
○결과 : 조정에서 표창 대상자를 찾아 올리라는 명이 내려질 때마다 고을 의론은 반드시 임씨의 일이 우선시되어야 함을 알렸으나 오래도록 정려의 은전을 입지 못했다. 임씨 정려에 대한 의론을 오랫동안 그치지 않더니 마침내 임금에게 이 사실이 전해져 정려를 세우라는 명이 내려졌다.
○위백규 선생 의견 : 임씨의 우뚝한 절개는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 끝내 아름다운 절개가 초목처럼 시들어 죽어 사라지지 않고 한 칸의 정려문이 세워져 백세토록 향기가 전해지게 되었다.
2) 열녀신드롬의 특징
존재집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열녀는 전남의 해남과 강진, 영암 등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섯 사건의 공통점은 혼사를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남편이 사망한 점이다. 이에 여섯 여성의 결단은 동일하다. 바로 남편을 따라 죽은 것이다. 자녀가 있어도, 복중에 태아가 있어도, 봉양할 시부모가 있어도 오로지 외길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죽음만이 국가도, 가문도, 자신도 영광이요, 명예라 여긴 탓이다. 조선후기 열녀신드롬의 광풍이 휘몰아치게 된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1) 가문의 영광
정절은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였다. 해남의 열녀박씨는 1753년 질병으로 사망(홍역)한 남편 민정수를 따라 1753년 목매어 自盡했고, 국가에서는 1757년에 정려를 내려 주었다. 해남의 열녀이씨는 계묘년 질병으로 사망(위장병)한 사망한 남편 최필곤을 따라 계묘년 약을 먹고 自盡했다. 관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문이 내려졌고, 위백규 선생은 비문에 들어갈 명을 썼다. 강진의 열부오씨는 1790년 질병으로 사망(병명은 모름)한 남편 장지한을 따라 1791년 열 달간을 굶어 自盡했다. 비변사에서 오씨에 대한 정려를 청원했다.
영암의 열녀최씨는 급성질환으로 사망한 남편 조영팔(曺榮八)을 따라 20세 때 새끼줄로 목매어 自盡했다. 위에서 언급한 열녀신드롬으로 불리는 여섯 건의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18세기 후반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나타난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라남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전국에서 일어났고 열녀신드롬은 점차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공간을 넓혀 갔다는데 있다. 법, 국가, 가문, 본인 모두 열녀란 공동목표를 정하고 열녀생산에 주력했다.
첫째로, 국법이 열녀신드롬에 불을 지폈다. 경국대전의 장권조(奬勸條)는 ‘절의와 선행이 있는 자는 장권한다. 효자와 조부모의 봉양에 성심을 다한 손순(遜順), 절부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우애와 화목을 지켜 칭송을 받는 목족, 가뭄, 기근, 천재지변으로 기아에 처한 백성을 구환한 백성 등은 매년 연초에 기록하여 계주한다. 賞職을 주거나 혹은 賞物을 주며 더욱 특이한 자는 旌門을 세워주고 復戶를 해 주고, 守信한 妻에게도 또한 복호를 해준다’이다.
둘째로, 정부는 열녀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정문(旌門), 정려(旌閭)와 다른 당근책이다. 정문과 정려는 예조와 의정부를 거쳐 국왕이 직접 재가하여 시행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표창이었다. 열녀들의 집이나 마을 앞에 문을 세워 선행을 표창하여 사람에게 널리 알렸다. 그 외에 당근책인 복호로 울력의 부담을 면제하거나 감면하여 주었고, 상물로 의식주 등을 내려 주었다. 또한 천민은 신분상승의 기회였다. 열녀정책은 곧 사회유지책으로 변질되었다.
셋째로, 칭호 열녀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유교는 여성의 수절(守節)과 절개가 핵심 덕목이라 재혼은 집안의 망신으로 간주되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열녀의 선택만이 탈출구였다. 국가에서 내리는‘열녀’라는 칭호와 다양한 당근책은 매력적인 제도로 둔갑해 열녀 양산책으로 주효했다. 친정과 시댁 모두 열녀가문이라는 칭호를 받으려고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몰리게 하는 비도덕성에 빠져들었다. 표창이라는 명목아래 수많은 여성을 죽음으로 내몬 반인륜적 행태였다.
넷째로, 열녀는 본인에게 최고의 명예로 인식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수절하는 여성이 주로 열녀의 포상 대상자였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남편이 죽은 후 따라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인 행위를 한 여성이 대부분 열녀로 등장한다. 결국 남편사망 후 정절을 지키며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양란이후 국가적인 혼란으로 질서유지를 위해 여성의 정절은 더욱 강화되는 모습의 일환으로 나타난 병적현상으로 주목된다.
(2) 남녀차별법의 희생양
1486년 경국대전 금고법(禁錮法)에서 재가부녀(再嫁婦女)의 자손은 벼슬길을 막는 조항을 신설했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자손 금고뿐만 아니라 재혼하는 그 자체를 범죄로 단정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개가 굳은 여자는 다시 시집가지 아니한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라는 유교의 충효열에 입각한 오륜 중 여성에 관한 열(烈)을 법으로 제정한 것이다. 유교적 여성관은 여성의 재혼금지와 더불어 수절을 제도적으로 강요했고 법으로도 정착시켰다.
금고법은 남녀차별법이다. 물론 왕조시대이고 계급사회였지만, 법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데 열녀라는 모델을 제시하고, 이 기준에 적합한 열녀를 무수히 양산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전국적으로 충효열을 반영하는 충신, 효자, 열녀수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충신과 효자에 비해 열녀로 선정된 수가 세 네 배를 넘었다니 가히 충격적이다. 수절도 아닌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요, 본인의 명예라 여겨 사회가 하나 되어 대대적으로 권장한 결과이다.
금고법은 사별 이후 더 가혹했다. 남자는 여자가 죽은 뒤 1년가량 상복을 입고 나면 바로 재혼할 수 있었으나 양반집 아내는 평생 상복을 입어야 했다. 열녀의 대부분은 남편이 죽은 후 3년 동안 무덤 인근에 움막을 짓고 묘를 떠나지 않았다. 많은 여성들은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자진해 열녀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다. 법과 정책, 그리고 은근한 자살압박에 동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했다. 또한 금고법은 가혹할 정도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무자비했다.
(3) 정약용의 열부론
정약용 선생은 열부론에서 무조건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은 죄악이요, 불법이며 성정이 좁은 사람의 일이라고 작심하고 비판하고 있다. 유사(有司)는 열부를 판정하는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유형만을 열녀로 승인할 것을 주문했다. ‘나는 진실로 말한다. 제 몸을 죽이는 것은 천하에 흉한 짓이다. 그 집 문설주를 빛나게 하고 패목을 붉게 하며 호세를 면제하고 그 자손의 부역을 경감시켜주니 이것은 그 백성에게 서로 본받아서 천하의 흉한 짓을 하도록 권하는 것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남편이 맹수나 도적에 핍박당하여 죽었을 때 아내도 호위하다가 따라서 죽었다.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에게 핍박당하여 강제로 욕보이려 할 때 이에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 ▷일찍 과부가 되었을 적에 부모나 형제들이 자신의 뜻을 꺾고 남에게 재가시키려 할 경우, 이에 항거하다가 역부족일 때 죽음으로 맞섰다. ▷남편이 원통한 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울부짖으면서 정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게 되어 함께 형벌에 빠져 죽었다. 출처: 다산의 열부론 」
(4) 위백규의 질서론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선진국에서조차도 19세기 후반에서야 겨우 차별금지법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조선시대에 정조관념을 실제 법으로 제도화시킨 것은 특이한 현상 중 하나이다. 생물학적인 선천적 차이를 국가지도이념인 유교를 내세워 금고법을 제정한 것은 남성우위적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에 가깝다. 유교가 통치이념을 넘어 종교화되었다는 결정적 증거물이다. 결국 금고법은 남녀의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위백규 선생은 인설(人說)에서 남녀차이를 질서의 개념으로 해석했다. 차이(差異)와 차별(差別)은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으로 보았다. 남녀에게 있어 인격은 동일하지만 신체구조나 힘의 강약, 이성과 감성 등 생물학적으로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선후(先後)나 위계(位階), 능력 차이보다는 질서로 생각했다. 이는 평등하다는 개념보다는 건전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큰 틀의 상호관계를 설정했다. 원시 유학이론에서 가르치는 근본이념을 남녀 사이에도 적용했다.
조선후기는 열녀에 관한한 이성적 판단이 실종된 시대였다. 위백규 선생은 다산만큼 진보적이지 못했고 정교하지도 못했다. 단지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간 전후 행적을 면밀히 살펴 유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열녀를 평가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인용해 가치를 부여했다. 위의 여섯 편의 글은 가족이나 유림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지방관청에 제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남편과 열녀의 가문, 표창을 상신하게 된 배경과 과정, 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열녀상(像)을 담고 있다.
그러면 왜 위백규 선생과 정약용 선생은 열녀에 대해 현격한 차이를 보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바로 천주교에 있다. 위백규 선생은 유학자였고,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 교리는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금기시한다. 물론 순교를 당하거나 불가항력적인 죽음은 예외로 규정하고 있다. 다산은 성경의 교리를 적용하여 열부론을 비판했다. 즉 무조건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을 범죄로 규정해 열녀신드롬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5. 나가는 말
존재 선생의 여성관에 대한 후손들의 글은 전혀 없다. 원산(정철) 전기편찬회장은 ‘존재 선생은 원시유학자라 전근대적 여성관에 머물렀다’고 했다. 이에 반해 박형상 변호사는 ‘제망여문을 기록할 정도로 여성관은 다소 진보적이다’고 평가했다. 서로 상반된 평가이다. 이 글을 통해 존재 선생의 여성관을 조명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24.02.16
벽천 위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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