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네 번째-2)
(어라연-각동리, 2019년 5월 25일∼26일)
瓦也 정유순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시작되는 영월읍은 영월군청이 있는 소재지다. 600∼700m 높이의 고산준령이 산맥을 이루며 봉래산이 솟아 한강과 조화를 이룬다. 덕포리·방절리·연하리·삼옥리·거운리 등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1698년에 영월부 소재지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부내면(府內面)이라 불렀다. 1859년 영월부가 군으로 격하되면서 군내면(郡內面)이라 부르다가, 1937년에 천상면(삼옥리·거운리·문산리)을 흡수하여 영월면이 되었고, 1960년에 상동면 연하리를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영월읍 지도>
<동강과 서강 합류지점>
두 강이 합류하여 남한강이 시작되는 둔치에는 호밀밭이 넓게 펼쳐진다. 유럽 남부와 아시아 서남부가 원산지인 호밀은 식용 및 사료작물이다. 월동성이 강해 북부지방에서 많이 재배하며, 중남부지방에서는 야산을 개간하여 농지로 활용하기 전에 땅심[지력(地力)]을 키우기 위해 많이 심는다. 옛날에는 밀밭과 보리밭이 연인들의 데이트장소로 은밀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하천부지의 밀밭>
남한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면 영월복합화력발전소가 있는 영월읍 정양리다. 총시설용량은 30만kW로 무연탄연소방식 발전설비 2기와 복합발전설비 1기를 보유하고 있다. 1965년 서구식 저질탄화력발전소로 재건설하여 운영해 오다가 홍수로 인해 1973년 발전소를 잠시 폐지하였다. 2001년부터 가동이 중단된 무연탄 연소 방식의 구 1,2호기를 2006년부터 철거한 뒤, 해당 부지에 LNG를 연료원으로 사용하는 복합화력 방식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영월복합화력발전소>
발전소 옆 언덕에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태실비(胎室碑)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이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鷄足山)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에 조성되었고, 1801년(순조 원년) 가봉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정조대왕태실에서도 태항아리를 꺼내갔다. 현재 이곳에는 태실석함 등 태실조성에 사용된 석재와 태실비가 있고, 본래 태실이 있던 정양리에도 일부 석재들이 남아 있다.
<정조대왕 태실>
태실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는 귀갑문(龜甲紋)과 하엽문(荷葉紋)으로 장식하였다. 비신은 이수와 동일한 석재로 만들었는데,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육년십월이십칠일건(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이라고 새겨져 있다. ‘가경(嘉慶)’은 청나라 5대 황제의 연호다. 비의 총 높이는 232㎝, 비신은 높이 108㎝, 폭 52㎝, 두께 30㎝다. 현재 영월군에서는 본래 태실이 있던 곳에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정조대왕 태실비>
태실비 안내문에 ‘이왕직(李王職)’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 영 마음에 거슬린다. 이왕직이란 일제가 대한제국황실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왕실의 궁내부 하부조직으로 만든 관리기구이다.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식민잔재가 발가락에 박혀 있는 가시처럼 움직일 때마다 콕콕 찌른다. 태실비 입구에서 정양교까지 이어졌던 구도로에는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보행에는 편하지만 낙석(落石)들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꼭 일제잔재를 보는 것 같다.
<태실비 안내문의 "이왕직"표시>
<폐쇄된 도로의 낙석>
영월읍 정양리를 벗어나면 바로 김삿갓면이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진 김삿갓면은 고려시대에는 밀주(密州)라 불렀으며 1698년(숙종24)에 하동면(下東面)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의 거주지와 묘, 문학관 등이 있어 김삿갓마을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영월군은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9년 10월 면의 명칭을 김삿갓면으로 변경하였다. 조선 후기 방랑시인인 김삿갓[김립(金笠)]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난고(蘭皐)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김삿갓면 표지>
<김삿갓 시화>
김삿갓면의 첫 동네 진별리에 접아들자 ‘고씨굴’로 건너가는 도보다리가 보인다. 천연기념물 제219호인 ‘고씨굴’은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의 태화산(太華山) 끝자락인 해발 215m 지점 하식단애(河蝕斷崖)에 있다. 남한강상류 건너편 암벽 중간에 동굴 입구가 있어 예전엔 나룻배를 타고 가야 했으나, 지금은 남한강을 건너는 250여m의 다리가 놓여 져 쉽게 다닐 수 있다. 먼발치로 눈인사만 나눈 고씨굴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던 고종원이란 선비의 일가가 이 굴에 은거한 데서 유래했다.
<고씨동굴 표지석>
<고씨동굴과 도보다리>
아스팔트 복사열이 한 여름을 방불케 하지만 물소리와 함께 물여울에 맞춰지는 발걸음은 가볍다. 영월에서 태백으로 가는 지방도로 88호를 따라 하류로 가다가 ‘각동교차로’에서 각동교를 건너 충북 단양으로 방향을 튼다. 각동리(角東里)는 남한강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위치한 농촌마을이다. 산수가 어우러져 풍광이 빼어난 곳이라 펜션과 민박집이 있고 카페도 눈에 띤다. 마을 뒷산으로는 소위 명당이 많아 묘(墓) 자리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마을에서는 묘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경고판을 부착해 놓았다.
<각동교>
<남한강>
<각동마을>
오후에는 서강 쪽의 청령포와 한반도지형을 둘러본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는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유배지를 옮기기 전까지 두 달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청령포 지도>
<청령포>
청령포에는 그가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있고, 단종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천연기념물 349호)과 울창한 소나무 숲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어가를 향해 누워 있는 소나무 한그루는 지금도 그때의 한을 생생하게 듣고만 있는 것 같다.
<단종어가>
<금표비>
<어가를 향해 누운 소나무>
강 건너 청령포를 조망하는 소나무 숲 언덕에는 단종의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이미 죽어 시신이 강물에 버려진 사실을 알고 지은 “천만리 머나먼 길”로 시작하는 시조비가 가슴을 더 시리게 한다.
“千萬里 머나먼 길의 고은님 여희옵고
(천만리 먼 길에 고운님 보내옵고)
내마음 둘듸업셔 냇가의 안쟈시니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뎌물도 내안갓도다 우러밤길 예놋다
(저 물도 내 마음 같이 울며 밤길 가누나)”
<* 밑줄 친 곳은 ‘아래아 、’로 표시된 곳임.
( )은 필자가 임의 해석>
<왕방연 시조비>
단종의 유배는 청령포에서 홍수로 두어 달 만에 어가를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긴다. 관풍헌은 1392년(태조 1)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지방 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건물이었으나 단종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단종은 관풍헌에 머물며 인근의 ‘자규루’에 올라 “한번 울면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을 빗대어 지은 ‘자규사(子規詞)¹’와 ‘자규시(子規時)²’를 읊어가며 괴로움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17세의 일기로 관풍헌에서 사약이 당도하기 전에 화살 줄로 목 졸려 돌아가셨다.
<관음송>
한반도 지형은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에는 영월군 ‘서면’이었던 것을 2009년 10월 ‘한반도면’으로 행정구역 이름도 바꾸었다. 오간재 전망대에서 남산재 쪽을 바라보면, 한반도를 빼닮은 절벽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오간재는 이 절벽지역을 처음 발견하고 외부에 알린 이종만의 이름을 따서 ‘종만봉’이라고도 부른다.
<한반도지형 전망대로 가는 길>
한반도지형의 절벽지역은 동쪽으로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고 서쪽에는 서해처럼 넓은 모래사장도 있으며, 동쪽으로는 울릉도와 독도를 닮은 듯한 작은 바위도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땅, 한반도를 꼭 빼닮아 명소가 되었다. 평창강(平昌江)이 주천강(酒泉江)과 합쳐지기 전에 크게 휘돌아 치면서 동고서저(東高西低) 경사까지 더해 한반도를 닮은 특이한 구조의 지형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한반도 지형>
한 가지 흠이라면 ‘한반도지형’ 너머에 거대한 시멘트공장의 고로(高爐)가 보이고,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니 ‘석회석’을 채취하고 난 산의 상처가 내 살가죽을 벗겨낸 것처럼 가슴을 쥐어뜯는다.
<시멘트공장>
<피복이 벗겨지는 석회석광산>
단종의 자규사(子規詞)¹
달 밝은 밤 두견이 우는데
(月白夜蜀魂湫 월백야촉혼추)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含愁情依樓頭 함수정의루두)
네가 슬피 우니 나는 듣기가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이제비아문고)
네 울음소리 없다면 나도 근심이 없으련만
(無爾聲無我愁 무이성무아수))
세상의 근심 많은 사람들이여
(寄語世苦榮人 기어세상고로인)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 말게나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등춘삼월자규루)
단종의 자규시(子規時)²
원한 맺힌 새가 한번 제궁을 나온 후
(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외로운 몸의 한 그림자가 푸른 산중에 있네
(孤身雙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잠깐의 잠조차 밤마다 이룰 수 없고
(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깊은 한은 해마다 다하지 않네
(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소리 그친 새벽 봉우리엔 남은 달빛 밝은데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피 뿌린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이 붉네
(血淚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하늘은 귀먹어 오히려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어찌하여 근심어린 내 귀만 유독 밝은가
(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