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女人의 이야기
홍승주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은 비밀을 안고 산다고 한다.
그것이 추하거나 발설이 되어 곤혹을 겪는 일과는 관계가 없는 인간의 미덕과 연결이 되는 것일 때 그 비밀은 한층 돋보이게 마련이다.
마음속에 축축히 젖어들 수 있는 흐뭇한 이야기ㅡ.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 말하면 그 흐뭇한 이야기들의 흥취나 도수가 깨어지고 한결 감소될 것 같은 혼자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마음을 살찌게 하는 삶의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실로 긴 인생을 가는 동안 더러는 그런 한두 가지의 비밀을 마음속에 챙기고 있다는 것은 인생의 그 어떤 윤택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고, 그런 비밀의 한 두가지쯤 갖추지 못한대서야 인생이 너무 메마르지 않겠는가?
그런 속 깊이 사무친 이야기들을 아무런 부담이나 주저함이 없이 글로 써서 아름답게 작품화할 수 있다는 것은 문학인의 한 특권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미국서 편지가 왔다.
발신 스탬프가 시카고로만 찍혀 있을 뿐 주소도 없고 발신인의 이름도 물론 없다. 또박또박 박아 쓴 예쁘장한 글씨ㅡ.그녀로부터 온 것이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항상 염두에서 떠나지 않는 그였고, 안부가 무척이나 걱정이 되던 가운데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체념 상태에서 그녀가 도미한 지도 벌써 4년 되었다.
두 번째의 가을에는 귀국하겠노라고 장담을 하면서 김포 비행장을 떠났는데, 네 번이나 단풍이 홀로 물들도록 크리스마스 카드한장 없던 그녀였기 때문에 이 느닷없이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나는 어떻게 맞이하고 해석해야 옳을까?
물론 그녀와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다만 나이의 층하가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사제지간에서 퍽이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던 그저 그런 막연하면서도 가까운 지점에서 몇번이나 위험한 고비는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도무지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는 그러한 불안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좋은 신랑을 만나 식을 치르고 부랴부랴 함께 도미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사무실이 아닌 다른 조용한 휴게실에라도 가서 뜯어보고 싶었지만 웬지 자석에 얼어붙은 것 같이 자리를 뜰 수도 없고, 고쳐앉을 수도 없을 뿐더러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나의 일거일동을 넘겨다보는 것 같은 미묘한 긴박감ㅡ.
그녀는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아니면 무슨 불길한 소식이라도.....
제발 행복해 주었으면....
거의 기원에 가까운 착잡한 자세에서 가쁜 숨결을 가라앉히고 나는 천천히 편지 겉봉을 뜯기 시작하였다.
깨알 글씨가 눈앞에 쏟아져 들어온다. 그녀와 나만이 아는 <아아>라는 첫머리의 은어... 이 은어를 가로 쓰고 다시 세로 세워 읽으면 묘하게도 나의 성인 <홍>자가 되는 것으로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비밀 기호이기도 하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화끈 눈시울이 홍건히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앉아 얼마간 눈을 감고 그녀의 거닐던 명동의 거리거리를 생각하며 또 그녀가 걷고 있을 가보지 못한 시카고의 거리거리를 상상해 본다.
외로운 타국에서 물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그쪽, 바람부는 호숫가를 혼자 거닌다든지, 아기 엄마가 되기 위한 첫 산고에서 네 시간에 걸친 수술과 긴 병상 생활이라든지, 아직까지는 아기 엄마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등의 말들이 묘한 뉘앙스를 풍겨 온다.
거기서 나는 그녀의 짙은 고독과 허탈감 같은 것을 느꼈다면 잘못일까? 그녀는 무척 나의 시를 아껴 주었다.
나의 첫 시집을 출판하는 데도 도안이며 표지며 자질구레한 치닥꺼리를 혼자서 도맡아 해주었다.
나의 시집이 남의 손에 가는 것이 싫다면서 자기가 몽땅 사겠다는 오기까지 부렸다. 그리고 도미해서는 ㅎ일보의 애독자가 된다면서 나의 시의 게재를 갈망하면서 갔는데 4년간 아무리 찾아도 찾는 이의 시는 눈에 띄지 않아 이제 ㅎ 일보마저 끊어야겠다는 사연이었다.
나는 그날 "행복한 이별"이라는 시를 써서 ㅎ일보사를 찾았다.
발신주소가 없다는 것은 나의 직접적인 해답을 꺼리기 때문이요, 시로 ㅎ일보에다 해답을 대신해달라는 깊은 배려에서라고 생각한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밖으로 노출시키는 일이 없던 그녀였는데 무척 마음이 아프다.
열흘 안으로 실어주겠다는 ㅎ 기자의 말이긴 했지만 과연 나의 애절한 시가 그녀의 눈길을 언제 멈추게 할런지 조바심이 난다.
성급한 마음 같아서는 외신부의 친구를 찾으면 그녀의 정확한 주소를 어쩌면 알 것도 같지만, 그건 그녀의 바람이 아닐 듯싶어 그만두기로 하고 우선 그녀의 가정에 행복이 깃들기를 비는 경건한 마음을 갖는다. 끝